https://www.youtube.com/live/H5FftPIE2gs?si=3JgVpe6SdkqNsh8c
옛 언약에 속한 장막 9:1~7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개혁의 때를 기다림 9:8~10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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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첫 언약에도 예법과 성소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고, 둘째 장막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들어가 피로 속죄제를 드립니다. 장막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개혁할 때까지 잠시 맡겨 둔 육체의 예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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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에 속한 장막 9:1~7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출현될 때까지만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 아래 세워진 장막(성막)의 구조와 예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장막은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배치되어 있는 ‘성소’와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를 호위하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습니다. 성소에서는 매일 희생 제사와 두 번에 걸친 분향이 이루어졌지만,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만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옛 언약 아래 세워진 성소와 제사는 비유이자 예표로, 새 언약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그 역할이 유효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의 지성소를 상세히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에는 유용했으나 새것이 생겼기에 더는 쓰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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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때를 기다림 9:8~10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 아래 세워진 성소와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완전한 길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성령의 말씀을 전합니다.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허락된 ‘그 길’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새 언약’의 예표일 뿐입니다. 옛 제사는 대제사장과 백성에게 완전한 속죄를 주지 못하기에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데 불충분했습니다. 율법 제도는 단지 먹고 마심과 육신의 정결을 위한 법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 제사법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취하신 새 언약으로 개혁될 때까지 잠시 맡겨 둔 것입니다. 성도는 옛 언약의 불완전한 성소와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섬겨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구약 시대 불완전한 성소와 제사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이었나요?
구약 시대 제사 제도를 통해 내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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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로 가는 길
30년 전, 텍사스에 와서 처음 부닥친 문제는 길 찾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GPS가 있던 시대도 아니어서 지도로 길을 찾으며 심방했다. 운전하면서 지도를 보는 것이 참 불편했다. 그런데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심방받을 집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당황하거나 헤맬 일 전혀 없이 가장 확실하게 그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때 ‘길은 곧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하늘나라를 가 본 사람이 없는데 누가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만이 그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공자의 한 제자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은 후의 일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분명한 답이 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다. 하늘의 존재가 이 땅의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죄와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모든 고통을 자청해서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나라로 가는 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부른다.
믿음의 본질 / 이연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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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히브리서9장 9~10절
'개혁'이라는 말은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개혁된 예법입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죗값을 온전히 치르신 예수님을 통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제사와 율법은 인간의 명백한 한계를 깨닫게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한한 은혜의 대로를 열어 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죽음을 박차고 생명으로 나오는 인생 최대 사건이다. - 하용조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무리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한다 해도 그것이 제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제 삶 전체가 하나님께 향기롭게 드려지는 산제사가 되어 하나님만을 높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92 주 없이 살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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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소지:
1. 먼저, 하나님을 만날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a.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자기 백성들과 만나서 교제하시며, 그들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셨음
b.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해주셨음
2. 둘째,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a. 첫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들은 날마다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지송소에는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음
b.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음
3. 마지막으로, 예배자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a. 인간 제사장들이 드리는 예물과 제사로는 예배하는 자를 변화시킬 수 없음
b.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하는 자를 변화의 길로 인도하셨음
예수님은 옛 언약의 한계를 폐하시고, 우리에게 속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교제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건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지성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고, 주님과 풍성한 나눔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을 맘껏 누리도록 하자
음식규례나 정결규례를 잘 지킨다고 해도 그 자체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면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변화되고, 더욱 더 성장해 나가도록 하자
청라호수공원과 / 퇴근후 부천상동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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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종교성을 가진 웅장하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외형적 유혹이 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빠져 버린 형식적인 예배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아무 의미도 모른채 예배를 드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헌금을 해야 하는지, 봉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고 단지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거짓된 종교의식과 행위를 하러 교회에 나오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없기를 소원합니다. 오직 참 성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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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에도 성소가 있어서 첫 성소와 둘째 성소 곧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증거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이며,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16:2)
모세는 거기서 나는 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민7:89)
그러므로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받고 그 목소리를 듣고자 하면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첫 성소와 둘째 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어 결코 들어갈 수 없었고,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출26:33)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오직 한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향연으로 인해 속죄소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레16:13)
결국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들어가도 속죄소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예법과 모형의 제사로는 섬기는 자를 온전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그러나 주께서 개혁하신 새 언약의 성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로 휘장을 찢으셔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8)
우리가 십자가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담대히 지성소에 들어가 은혜를 구하고 그 목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그리하면 주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므로 어떤 대적도 우리와 맞서지 못할 줄 믿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사50:7~9)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순결할 때까지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불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계명을 주셨고
영원히 그 심판으로부터 면제받는 특별한 초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매일 먹는 음식과 물은 우리를 다시 배고프게 하고 갈증 나게 만듭니다.
충분히 먹을 때는 다시 먹지 않아도 되고 더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새 우리는 다시 부족한 상태로 놓입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예물과 제물로는 우리의 반복되고 뿌리 깊은 죄악을 파내어 태워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완전히 죽으시고 영원히 사셔서 새롭고 산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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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어떠한 은혜를 주셨습니까?
➲ 새 언약의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1~5절).
첫 언약에도 예배의 규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1절).
‘세상에’라는 수식어를 ‘성소’에 붙인 것은 지상의 성소는 신령한 하늘의 성소에 비하여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것
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에 속한 성소의 한계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속죄를 위한 첫 언약으로 주어진 장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가 이루어지는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인 속죄일에만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첫 정막은 제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받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사용되던 장막의 구조와 예법에 대해서는 낱낱이 말할 때가 아니라고(5절)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새 언약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옛 언약에 속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그것들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유보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때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막 27:51).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 공로를 힘입기만 하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그동안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새 언약의 시대를 맞이했고, 새 언약의 은혜를 약속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옛 언약에서 보여 준 제한적 속죄의 한계가 극복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속죄를 받는 새 언약의 시대에 구원의 은총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 죄 용서를 받은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죄 용서의 은혜를 열어 주셨습니다(6~8절).
첫 장막의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언제나 들어가서 제사의식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6절).
그러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둘째 장막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제사장조차도 속죄물의 피 흘림 없이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하여, 또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 바칠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7절).
이는 첫째 칸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아직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8절,새번역)입니다. 즉 지상에 있는 성소를 붙들고 있는 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희생제물이 되어 주셔서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이상 이제 하나님은 내 자신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날마다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주시는 모든 평강과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 용서의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죄 용서로 자유를 열어 주셨습니다(9~10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하는데, 이는 ‘이 때를 위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전개된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구약 제사는 사람들의 양심에 온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였습니다(9절). 그러므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사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전인적 관계를 회복시켜 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단지 먹고 마시고 여러 가지 몸을 씻는 등의 예식으로서, 하나님의 개혁의 때까지만 적용되는 규칙들이었습니다(10절).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속죄를 이루시며 죄 아래 놓인 죄인의 신분과 상태를 개혁하셨습니다. 반복해 죄를 범하던 죄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의인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는 죄인으로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과 내적 변화를 통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 죄의 유혹에 대해 승리하고,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지지 말고,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로써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온전한 속죄를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안에서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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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옛언약 아래에 있던 땅의 성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땅의 성소 예법
옛언약에서 사람들은 땅에 있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브리서 9:1, NKRV) 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 많은 사람이 만나는 곳입니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9:2–3, NKRV) 사람이 죄가 많았기 때문에 성소는 성소와 지성소로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히브리서 9:4, NKRV) 지성소는 휘장으로 더욱더 구별되었습니다. 지성소 입구에는 금 향로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향로의 연기로 안의 것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들어가는 순간조차도 그렇게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만나을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과 안에 십계명 돌판이 담긴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땅의 성소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솔로몬 성전 때 이미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2성전 때는 언약궤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2성전 때부터는 언약궤도 없는 빈 공간이었습니다.
땅의 성소는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지성소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한 사람의 죄 때문에 철저히 더렵혀지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속에서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성막이 무시되고 언약궤를 뺏기기도 하고 예루살렘 파괴 때는 아예 모든 것을 분실하였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갔던 곳을 이방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힌 성소는 성소의 더럽힘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의 성소는 하늘의 성소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께 가까이
땅의 성소는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히브리서 9:7, NKRV) 사람들의 죄 때문에 지성소는 대제사장일지라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인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신의 원형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속죄를 위해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브리서 9:8, NKRV) 땅의 성소가 있을 때는 이렇게 아주 제한적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모형이 그림자로서만 어렴풋이 드러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하여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모두가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대속함을 입어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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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전에 사람들이 동물의 피 제사로 의롭게 될 때 그것은 사실 가불에 해당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대속을 모형으로 경험하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를 가불하여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한 의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을 통해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당당한 의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았던 죄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모두 당당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늘의 성소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로 직접 나갑니다. 땅의 성소는 물리적 제한과 죄라는 제한이 산처럼 높이 가로막고 있었으나 하늘의 성소는 물리적 제한을 없애고 죄라는 커다란 제한을 없앴습니다. 그래서 새언약 가운데 있는 우리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날마다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 영화로운 일을 게을리 합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참으로 큰 영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던 그 영광스러운 순간이 오늘날에는 매일매일 우리가 직접 그렇게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영광을 버린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땅에 성소가 있었습니다. 땅의 성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겉모습이 성막이든 성전이든 상관없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성소는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성소는 더욱더 영광스러워 오직 대제사장만 오직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사함을 입은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소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광 위의 영광입니다.
영광을 버리고 여전히 땅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은혜의 시대 사람답게 하늘의 하나님께 직접 매일 나가는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가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것이 영광 위의 영광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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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미완성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 구원을 맛보며 완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자 새 언약의 보증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이었으나,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기 전까지는 땅의 성소와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소, 거기에 있던 기물들, 제사장들이 매일 하는 봉사와 매년 거행되는 속죄일 의식 등은 모두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보여 주는 장치였습니다. 만약 '세상에 속한 성소'와 '섬기는 예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내 애굽으로 돌아갔거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금세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과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알지만, 여전히 완성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과 '성경'과 '공동체'를 선물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며 다가올 완성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8절 :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성령님은 성경 자체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3:7; 벧후 1:21)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의를 갖는지 밝혀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경을 오해하고 왜곡하지 않도록 조명해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지혜와 계시'(엡 1:17)를 주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다.
질서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 제도가 있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질서가 있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하셨다.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씻을 수가 없었다.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이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함으로 오늘의 우리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말씀은 더욱 중요하다.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다.
오늘도 어려운 말씀이지만 깨닫는 은혜를 간구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8-10절 :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땅의 성소와 첫 언약의 예법에는 은혜가 있었지만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땅의 성소에서 이뤄지는 의식은 육체에 의식상의 정결을 가져다줄 뿐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고, 그때는 참장막인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길도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땅의 성소와 제사 제도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세우실 때까지 마련된 임시 제도였습니다. 우리는 옛 언약의 한계를 통해 새 언약의 뛰어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완전하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모든 것은 예수님이 중심이시다.
구약의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예수님을 배제한 구약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구약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된다.
나의 남은 모든 삶도 예수님이 중심이 되길 원한다.
이전의 잘못된 삶도 다 주님 앞에 내어놓기 원한다.
새 언약을 이루신 주님께 다 맡기길 원한다.
주님 말씀을 더 알아야 한다.
더 배워야 한다.
히브리서의 말씀이 어렵지만 저자가 얼마나 예수님을 나타내기에 노력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더 알고 가까이 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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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늘 장막의 모형인 땅의 장막을 기술하는 내용으로, 그것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있고, 제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개선되고 양심이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땅의 장막은 진단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땅의 장막의 한계, 장막의 기물들, 첫 장막과 둘째 장막의 비교, 땅의 장막의 유효기간 등입니다.
‘금 향로’란 금으로 만든 향로를 말합니다. 향로란 향을 피우기 위해 제작된 작은 화로를 말합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금 향로에 번제단의 불을 담아, 향로 위에 하나님이 지정한 향 재료를 채워, 지성소로 들어가 불을 피웠습니다. 원래 금 향로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이 하나님과 만나는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향로와 지성소와의 관계에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무 때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 차례 곧 속죄일(7월 10일)에만 들어갑니다. 그는 제사를 드리기 전에 우선 향료를 불에 태워(분향하여) 그 연기로 속죄소를 가립니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인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거룩한 향을 피워 그곳을 가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향로는 항상 지성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소의 기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항로를 피워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지 않으면 제사도 드리기 전에 대제사장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물의 피는 속죄소에 위에 뿌려집니다.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으로 그 곳에는 한 쌍의 그룹(케루빔)이 있습니다. 그룹은 속죄소 위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는 모습으로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수호하는 천사들입니다. 본문은 영광의 그룹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은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한 용어로, 그룹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더 이상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자가 의도하는 바는 성막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옛 언약과의 대조를 통해 새 언약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동식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곳이라고 해서 회막이라고도 하는데,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막에서의 제사장들은 크게 3가지 일을 합니다. 그것은 아침마다 금 향단에 분향하는 것이고, 저녁마다 등대에 불을 밝히고, 매 안식일마다 떡 상에 열 두 개의 진설병을 교체하는 일입니다. 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없고, 일년에 딱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먼저 자신을 위해, 다음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지냅니다. 이 제사는 반드시 피를 드리는 제사여야 합니다.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 ‘부지 중 저지른 죄’, ‘무 의식 중에 행한 잘못’ 등입니다. 이러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피'를 드려야만 합니다. 즉, 죄에 대한 대가인 죽음이지요. 히브리 저자는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로서 '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피는 죄인의 피여서는 안 됩니다. 대속의 피는 죄가 없는 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대속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문제는 제사로 속할 수 있는 죄는 ‘부지중에 범한 죄’라는 사실입니다. 즉, 모르고 지은 죄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이 말은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받아 들인 후에 일부러 죄를 지으면, 그것의 속죄를 위한 남아 있는 제사는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즉, 고 범죄를 위한 제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어야 할 말입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구약시대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드려지는 예물과 제사로는 제사하는 사람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양심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양심의 기능 때문으로, 마치 양심코드에 기록되는 것과 같지요. 동시에 그것은 하늘에도 기록됩니다. 양심은 영혼의 창문이고, 영혼은 하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근원은 하늘이고 그 죄는 하늘장막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로마서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속죄제사들 드려도 양심은 깨끗해 질 수 없기에, 지상에서 제하여진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 원본이 없어지지 않는 한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합니다. 하늘 장막에 있는 죄의 원본을 삭제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피 없이는 안 됩니다. 거룩한 피!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결국 하늘 장막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늘의 장막에서 온전케 된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양심에 고발되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참소할 원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양심이 자유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몸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깨끗해 졌습니다. 주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그 피로 우리 죄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믿으면 좋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방식을 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완전하게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적하는 양심으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을 통해 열린 귀한 길! 우리가 결단코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여시고
지혜를 부어주시고 담력까지 주시는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직 살아있고 새로운 소망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날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고 낙
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서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지진과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더 아는 지혜로 넘치고
놀라운 그 섭리 안에 참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