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여행] 완산사(전주에 ..김유신 사당??)..........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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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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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완산사(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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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국궁장인 천양정을 나와 곧장 완산동 완산사로 발길을 돌렸다. 완산칠봉(完山七峰),의 정기
가 서린 완산동, 본시 완산동은 완산칠봉 자락에 형성된 마을로 전주천을 경계로 전주 도심과 연결어
있다. 완산교, 서천교, 매곡교를 통해 전주 부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마을 앞 천변은 서문밖장 과
남문밖장 이 열리는 유서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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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옛 지명은 완산(完山)으로 완산칠봉에서 유래하였다. 완산칠봉은 전주의 정신적 뿌리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전주를 황실의 고향으로 성역화 하면서 오목대ㆍ이목대와 함께 완산에 비
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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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사중건기실비(完山祠重建紀實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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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은 신령스런 정기가 서린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완산칠봉에 용머리고개가 있다. 용머리 고개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혈맥이다. 완산자락에 여러 종교와 신앙이 자리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재미
있는 이야기 지만 일제강점기 때 완산동은 일본인들이 살지 못한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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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있다, 신령이 왜적을 물리친다는 설과 또한 완산자락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며, 호남 최초의 교회 은송리교회가 있던 곳이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원로들의 경
로당 기령당과, 전주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완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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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外三門), 일원문(一元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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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완산동은 조선시대 부남면(府南面)의 은송리(隱松里)ㆍ곤지리(坤止里)와 부서면(府西面)의 빙고
리(氷庫里)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 일원을 병합하여, 완산칠봉에서 이름을 따
완산정(完山町)이라 하고 전주면(全州面)에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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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면은 1935년 전주와 완주가 분리되면서 전주부(시)로 승격되었다. 광복후 1946년 완산정을 완산
동으로 고치고 동완산동, 서완산동, 중완산동 3개동으로 나누었다가, 1957년 동완산동과 서완산동으
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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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修齋(강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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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문(崇慕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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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충장열흥무대왕비(純忠壯烈興武大王碑)와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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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따지고 보면 “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의 이름으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이규보,의「남행월일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완산칠봉은
전주의 옛 지명 완산의 유래가 되는 산이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완산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고을 이름
을 삼은 것이 묘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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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은 풍수상 전주의 안산에 해당되고, 남복산(南福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기러기 형국의 산형
이다. 외칠봉, 내칠봉, 좌우칠봉으로 구분되어 삼면칠봉이라고 한다. 당시 완산은 조선왕실의 뿌리로
인식되어 땔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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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왕묘(興武王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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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影幀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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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은 영기가 어린 산으로 시신을 거꾸로 묻어도 해가 없을 정도로 명당이라 한다. 그래서 평장(平
葬)의 형태로 몰래 묘를 쓴 경우가 많았다. 완산에 소나무가 많았으나,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어 일제
강점기 때 삼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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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완산사가 자리잡고 있는 용머리고개는 산세가 용의 머리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전주고지도에 용두치[龍頭峙]라고 표기되어 있다. 전주의 비상을 의미하는 형세인데, 일본이 들어와
용의혈을 자르기 위해 용머리를 절단하고 길을 내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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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역토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하며, 지금도 일제에 의헤 끊어진 전주의 혈맥을 이어야 한다
는 목청이 높은 고갯길이다. 역사 만큼이나 당시 완산동에는 상인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다. 이는
전주천 건너 남문시장이 있고, 전북도청과 시청이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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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심에 인접해 있어서 하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산자락 위쪽으로 풍광을 즐기는 문
화와 인사들도 자리했다. 백운정, 청학루, 백학루, 기령당 등이 그런 것들이다. 지금은 기령당 외에는
모두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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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후백제의 왕도이며 백제문화권 이었던 구 완산주인 전주시의 한 복판에 야합의 달인인 김유신
(흥무대왕)을 모신 완산사라는 사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왜 나당연합군
의 주역인 신라의 김유신의 사당이 백제의땅인 완산에 있는 것일까. 유랑자는 매우 궁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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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후손들에겐 죄송하고 미안한 일야기 이지만 개인 적으로는 김유신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
하는 사람중 한사람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당 연합군의 야합으로 비열하게 통일을 쟁취한
주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힘이 안되니까 조폭을 끌여 드려서 조폭과 손을 잡고 남을 때린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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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위화도를 비롯해 그 넓은 우리의 옛 고구려땅을
당나라에 넘겨 주는 우리 민족앞에 너무나도 큰 과오를 저질은 역사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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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사중건 헌성록(獻誠錄), 김용태(金容兌)·김영배(金永培)기념비, 김모범(金冒範)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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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땅을 그냥무상으로 넘겨준 군주는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배신자요, 패배자 이기에 오늘
날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람중 한사람 이다. 다시말해서 김유신이 아니고
고구려의 장수왕이 삼국을 통일 했더라면 지금쯤 국경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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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중국 동북 3성 아니 만리장성 이북땅은 우리의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우리대한민국이 오늘날 미,중,일 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나약한
국가로는 남지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 같은게 넘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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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김유신 장군은 사후 182년 만인 835년(흥덕왕 10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
유신이 황산벌 전투 후 주류성으로 가는 길에 전주에서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가락전
라북도 종친회가 주축이 되어 1934년에 완산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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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내에는 전주 완산사 외에도 부안 보령원(開岩祠)에 흥무대왕을 모시고 있다. 1934년 완산사
건립이후 매년 봄(4월 10일)과 가을(10월 10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2003년 준공된 제각은 전체 16
평 규모로 흥무대왕을 모시는 중심 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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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3억)와 지방비(1억)를 보조받아 2002년부터 중건 공사를 진행해 왔었다. 현재 완산사는 흥무왕
묘(사당)를 비롯하여 내·외삼문, 강수재, 순충장열흥무왕비, 영정각, 홍살문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부
지 면적은 900여평 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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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산사를 둘러보고 나온 유랑자의 마음과 발길이 왼지 개운하지만은 않은 것은 왜
일까?. 역사는 승자의 것으로 덧칠해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무언가가 답답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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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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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빙고리1길 5-2
(지번)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2가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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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봅니다
편한밤되셔여~^^
감사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본 완산사,
나당 야합으로 백제를 멸망의 시킨 주범의 사당이
전주에 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