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넌 말갈족이다.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은 저녁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데엥] 머리 위에 보신각 종을 뒤집어쓰고 타종을 맞은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말갈족이라니. 그것보다, 말갈족이 뭐였더라. 무리한 낮잠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밥상 앞에서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꽤나 한심해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고 잠도 깰 겸 가볍게 볼따귀를 두드렸다.
넌 말갈족이라고. 어머니가 재차 강조해 말했다.
그게 뭔데요. 얼굴을 문지르며 무심하게 되묻자, 어머니가 달려와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이 녀석아, 넌 학교에서 국사도 안 배웠니.
그러더니 어머니는 어디선가 낡은 책을 하나 들고 왔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쓰던 국사책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버린 교과서를 어머니가 왜 지니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넌 그냥 한국 사람으로 키울라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미역국에 밥을 마는 동안 어머니는 다라락, 경쾌한 소리로 책장을 넘기며 열심히 말갈의 출현 장면을 짚어 주었다. 출생의 비밀이라면 차라리 외계인 쪽이 낫지. 뒷산 어딘가 고장 난 비행선이 숨겨져 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수리를 하고 다가올 우주 여행의 환희에 젖어 보련만... 말갈족은 도무지, 도무지였다. 솔직히 말갈족은 외계인만큼의 친근함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세계를 제패한 칭기스칸의 후예라면 모를까, 말갈족은 모양새가 빠져도 한참 빠진다.
나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어머니는 말갈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말갈의 역사는 한국만큼이나 깊어 고조선땐 숙신, 부여시절엔 읍루, 그리고 고구려 시절엔 말갈이라 불렸고 고려 때부터는 여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박동진 명창의 적벽가 완창만큼이나 길고 구성졌으며 간혹 손에 땀을 쥐게 하기도 하고 살짝 울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시대를 모조리 겪은 사람처럼 어머니는 유장하고 애절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말갈이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은 네가 말갈족이란 얘기지. 어머니가 흐린 숨을 토해냈다.
우리 가문은 말이다. 말갈의 대추장 게쉰야크 칸의 후예란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그 흔해 빠진 김해 김씨가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는 그림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여느 책에서 오려진 풍속화로 보였다. 유목민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말을 몰고 신나게 초원을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그네들 특유의 머리였다.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사오정이나 혹은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이 하고 다니는 테두리만 남은, 주변머리만 덩그란 머리. 원형탈모 말기 즈음에나 나올 법한 그 머리.
이게 바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란다. 어머니의 쐐기에 숟가락을 쥔 손의 맥이 탁 풀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난, 방으로 숨어들어 문을 잠그고 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딱 하나 든 생각. 그런 머리로 살 바에 차라리 헤드스킨이 낫지.
2
나는 중국집 배달원이다. 오전 열한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꼬박 열 두 시간을 배달한다. 다행히 적성이 맞은지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하루 삼백 그릇을 나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국요리의 생명은 면이 불지 않고 도착하는데 있다. 서너 군데를 한 번에 배달하려면 동선이 중요하다.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움직이다간 어떤 이는 불어 터진 면을 먹게 되고, 어떤 이는 눅진한 탕수육을 맛보게 된다. 한 번 그런 음식을 먹게 되면 다시는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각고의 주의를 부린 덕에 매상은 그럭저럭 잘 나왔다. 사장 또한 나의 근면과 성실에 흡족한 눈치다. 때문인지 가끔 한가한 때를 골라 사장은 내게 요리를 내어준다. 그 날도 그랬다.
주방장은 나를 귀여워 하는 사장이 어지간히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요릿집의 중추인 주방보다 배달 쪽을 챙기는 사장의 모습에 어쩌면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주방장은 악의적인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너 혹시 사장 친척이냐. 라고 하거나, 너 사장한테 후장 따먹혔냐. 늘 이런 식이었다.
딱 봐도 대충 만든 요리가 나올때면 난 어김없이 짜장면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러면 주방장은 한껏 더 역정을 내며 쏘아붙였다. 새끼야, 침 안 뱉었어.
난 짜장면을 먹지 못한다. 이상하게 짜장의 달달한 향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구석 탁자에서 라조기만을 집요하게 먹는 동안, 그 옆에선 환자복을 입은 필리핀 사람이 짜장면을 먹는 중이었다. 인근 병원에서 내려온 모양이었다. 어설픈 젓가락질이 수상해 유심히 보았더니 오른쪽 손엔 엄지뿐이다.
육중한 프레스가 떠오르고 그 앞에 내 손이 들어가는 장면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왼손으로 힘겹게 먹어야 할 정도로 짜장면이 대단한 음식이었던가. 그것도 벽안의 외국인이.
필리피노는 바닥까지 싹싹 비우고는 남은 단무지로 입가심을 했다. 여느 한국인처럼 크게 트림도 했다. 계산대 앞에서는 남방인 특유의 활달한 미소를 보이고는 훌쩍 사라졌다.
나는 나와 필리피노가 먹은 그릇들을 주방으로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폈다. 거리는 촛불집회 참여자로 보이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근래 들어 부쩍 집회가 많았다. 확성기의 사이렌과 구호가 적힌 피켓과 현수막이 어지럽게 출렁였다. 옆 가게 샤브샤브집 사장은 길가에 침을 탁, 뱉고는 누굴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느냐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내가 배달 일을 좋아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비록 정해진 구역을 쏘다녀 답답한 감도 있지만 스쿠터를 밟고 바람을 맞을 때는 뭐랄까, 혈류가 온몸을 빠르게 휘돌아 깨끗해지는 느낌이랄까. 콧구멍으로 바람이 들어가면 담배에 찌들었던 폐도 상쾌해진다. 하지만 스쿠터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없는 힘을 쥐어짜 달리게 하는 노새와도 같아서 배달을 위해 잠시 멈춰 설 때면 어김없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에 비하면 나의 애마 125CC 출력의 대림 오토바이는 야생마와도 같다. 특히 퇴근 후에 맛보는 쾌속의 질주는 덕지덕지 달라붙은 고약한 짜장 냄새와 하루의 묵은 먼지를 도로위로 떨궈준다.
하지만 그 날은 조금 김이 샜다. 등 떠밀려 나가야 할 소개팅 때문이다. 어머니와 그 친구의 주선이니 맞선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어감상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맞선'이란 단어는 왠지 '돼지 접붙이기'라는 단어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갈족' 만큼이나 정말 제대로 모양 빠진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사가 불어 하늘이 온통 뿌옇게 탈색됐다. 목이 간지럽고 마른 기침이 났다. 왜 남의 나라 먼지에 내가 고생하는가.
3
짜장이나 먹죠.
처음 만난 그녀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왜 하필이면... 하필... 하필인가.
아, 중국집에서 일한다는 얘긴 들었어요. 하지만 짜장면처럼 빨리 나오고 빨리 먹고 빨리 치워 버릴 수 있는 음식은 흔치 않잖아요. 전 오늘 할 말이 많다구요.
참으로 거침없는 여자였다. 그런 점에선 내 애마와도 닮았다. 꽤 미인일리는 없잖아, 하는 외모였지만 그래도 스물 중반까지의 생애에 걸쳐 예쁘단 소리는 세 번 정도 들었음직한 수준은 되었다.
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녀는 제 멋대로 짜장 두 그릇을 주문하려고 했다. 그녀가 짜장 두울...까지 말했을 때 나는 재빠르게 끼어들어, 한 그릇 주시고 저는 울면으로 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턱을 쓰윽 문지르며, 자네 한 고집 하는군,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그녀는 말그대로 후루룩 마셔버렸다. 와이퍼처럼 길죽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정돈하고선 물도 마시지 않았다. 입술옆에 짜장 찌꺼기가 점처럼 남았는데 그 모습이 왠지 요염했다.
그녀는 채근하듯 손목시계와 나를 번갈아 살폈다. 덕분에 난, 씹고 삼키고 맛보고 즐기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식사를 마무리 했다.
빈 그릇이 나가자 그녀는 조심스레 밖의 동정을 살피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실눈을 뜨고 나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멋쩍고 어색해지는 바람에 나는 뭔가 화제를 꺼내야했다. 그녀의 요염한 짜장 점을 보니 덜컥...
짜장면이 어떻게 유래됐는지 아세요?
웃기는 짜장 같은 이야기가 결국 내 입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짜장 혐오자의 짜장론이라니.
짜장면의 원조는 중국의 자장면이예요. 중국 거냐 우리 거냐를 놓고 말들이 많은데 짜장의 주재료인 춘장은 분명히 중국에서 왔죠.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제조되는 춘장은 중국 것과는 또 많이 달라요. 콩의 배합이랄까 발효하는 방식이랄까, 거기 한국꺼엔 캬라멜 색소가 들어가서 묽은 빛깔이 나구요, 새콤달콤한 향까지 어우러지죠. 그래서 맛도 원조와는 완전히 달라지고 그래서 짜장이 자장이 아닌 고로 결국 짜장이라 말하는 게 오히려 맞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말해서...
핵심만 말할게요. 그녀가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짜장도 못 먹는 자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여겼던 걸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린 결혼하게 될 거예요.
이 여자가 아무리 한눈에 반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만나자마자 짜장을 먹고, 그러고 한다는 소리가 결혼이란 말인가.
어쩌겠어요. 쓸 만한 말갈족 남자들은 다 결혼했으니... 서두르지 못한 내가 바보죠.
그녀는 종일 살생부를 살피다 기운이 빠진 저승사자처럼 말했다.
왜, 하필 또, 더욱이, 말갈족 여자인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맞선이란 말이 나왔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말갈족 여자를 만나려고, 이러려고 사장한테 통사정을 해 시간을 뺀 건 아녔는데.
하지만 알고 싶어요. 당신이 정말 혁명 업무를 완수할 의지가 있는 사람인지 말이죠.
혁명. 그녀는 말갈족이면서도 공산당인가. 아니면 말갈족인 주제에 비밀 남파 공작원인가.
뭔 남자가 이래요. 지금 말갈족엔 당신처럼 밍숭맹숭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 남자들이 넘치니까 말갈이 망하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고 티벳이 나라를 잃었던 거라구요.
아니 난 그게 아니라... 말갈은 사라졌잖아요.
사라지다뇨. 뮬란처럼 째진 그녀의 눈이 어느새 완벽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망했다고 했지 사라졌다고 하진 않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버젓이 남아있는데...민족혼을 더럽히는 그런 불쾌한 발언은 삼가해 주세요.
아니...그보다 나는 한국인으로 여지껏 살아왔는데...
그건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린 이미 과거 정부에 숙청당했을 걸요. 우리 사정은 공산당보다도 오히려 불리한 쪽에 들어가요. 우린 남쪽 심장부에 버젓이 박혀 살잖아요.
그녀는 물 한 컵을 들이켜고 잠시 흥분을 다스렸다.
여태껏 이 사회에서 받은 탄압이 분하지도 않아요?
대체 어떤 탄압을 받았기에 그녀가 이 지경이 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누구든 살면서 불평 불만 없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를 왜 정부에서 민감하게 반응 했는지 알아요?
그거야 광우병에 때문에...
실은 우리 말갈족이 주동자였거든요.
왜 하필 거기에 또 말갈족이...
당연한 거잖아요. 수입 쇠고기가 우리 입은 피해서 들어오나요?
그녀는 점차 내게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내가 짜장면을 빨리 먹었으니 망정이지.
그녀는 시간을 들여 주구장창 말갈의 유구한 역사를 공중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냈다. 그것은 어머니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했다.
그녀의 시조 할아버지는 고조선 시절에 야장을 지내며 화살을 조공으로 바쳤다. 하지만 중간 벼슬아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할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화살이 불량하다며 면박을 줬다. 할아버지는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해 화로로 투신하였다. 그 후손이 되는 또 다른 할아버지는 고구려 광개토왕 시절에 용병이 되었다. 배를 타고 백제를 치러갔는데 웅진 앞바다에 도착하자 정박지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자 백부장 정도 되는 장수가 할아버지를 바다로 떠밀고는 헤엄쳐 상륙하라고 명했다. 물이 귀한 곳에서 자라 헤엄에 익숙지 않다고 그리 항변했건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웅진의 바다위에서 요절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후엔 또 그의 후손이 되는 할아버지가 말갈족들을 규합해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구려 유민들이 찾아와 연맹체 국가를 세우자고 제의했다. 그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발해였다. 하지만 조정에선 그들을 하나같이 국경지대로 내몰아 당나라군과 싸우게 했다. 할아버지는 그러다 또 장렬히 전사했다. 그 당시 당나라군은 우리가 지금도 흔히 말하는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문이 몰락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그녀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세종대왕, 그 썩을 인간.
대체 무슨 말이에요.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고마운 분에게.
난 그녀의 입을 막으려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는지 나의 팔을 낚아 바닥으로 패대기쳐 버렸다. 너무도 놀란 나는 바닥에 엎어져 한참동안 그녀를 올려다봤다.
사군육진을 세우는 바람에 우리가 이 땅으로 끌려왔단 말예요.
생각해보니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김종서 장군이 책임자였던가. 가수 김종서 때문에 기억이 뚜렷했다.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줄게요. 당신이 중국요리집 배달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거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왜 이리 궁상으로 사는지 당신은 아직 몰라요. 우린 결코 이 땅에서 잘 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우린 늘 정부 기관의 감시를 받고 세력을 확장할 수 없게끔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죠.
무슨 말인지 통...
당신에겐 유산이 없어요.
......
쉽게 말해 밑천이죠. 유형으로 말하자면 재산이고, 무형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노하우에요.
무슨 말인지 통...
그녀는 답답했는지 어금니를 물고 앞니 사이로 날숨을 뽑아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학교 다닐 때 과외 받아 본 적 있어요?
전혀요. 내가 대답했다.
거봐요. 벌써 정부에서 손을 써놨구만.
그게 아니라 난 공부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 보라구요. 공부도 못하는데 잘 될 리가 없죠. 만약 당신이 공부에 흥미가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선 공부를 잘 하려면 사교육은 필수예요. 하지만 돈이 없으면 택도 없는 일이죠. 돈이 있다면? 그럼 마땅히 좋은 정보를 가진 선생을 만나야지. 좋은 선생은 다 서울에 있어요. 하지만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서울 집값을 엄청 올려놨어. 왜냐, 말갈족이 대한민국의 중심부에서 설치면 곤란해지거든. 그것도 합법적으로. 얼레, 돈이 없으니 서울 진입 물 건너갔네. 그럼 뭐, 지방 살아야지. 그런데 지방엔 좋은 과외 선생이 없어. 왜요? 좋은 과외 선생은 모두 서울에 사니까. 왜? 돈을 많이 주니까. 그럼 좋다 이거야. 억지로 서울에 일단 들어온다 쳐요. 그럼, 좋은 선생 만나나? 아니. 왜? 전세 장만하느라 과외 받을 돈이 없네. 그럼 어떡해요?
그럼 어떡해야죠? 난 엉겁결에 반문했다.
과외도 못 받고 당신처럼 지내는 거죠 뭐.
그녀의 말이 억지라고 여기면서도 난 뭔가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은 아니었지만 돈이 없어 한이 생기긴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열등감을 종류별로 살짝씩 은근한 불에 익혀 맛깔스럽게 버무려놓으면 왠지 그녀가 될 것 같았다. 난 지칠대로 지쳤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뭘 해도 안 돼요. 말갈족이라서.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구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녀는 또다시 날 한심하다는 투로 쳐다보았다.
독립 운동을 해야죠. 우리에겐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어요.
윤봉길, 안중근 의사가 알면 지하에서 관 뚜껑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말갈족의 후예는 참으로 많은 사연과 당위성을 달고 다녀야 할 운명인가.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말갈의 후예들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고 한다. 조선에 살던 말갈족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서 지내왔다. 양반 평민은 물론이고 천민까지도 말갈인을 우습게 봤다. 땅을 잃고 자존감마저 잃은 말갈족들은 수많은 환란과 설움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의 밑에 들어가 의병으로 공을 세웠지만 말갈인이란 이유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정체가 드러나는 통에 감시 대상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동족이 세운 후금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조정에선 말갈족 색출령이 떨어졌다. 후금의 내통자로 여긴 탓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정작 후금이 조선을 평정했을 때도 문제였다. 조선옷을 입고 말도 탈 줄 모르며 언어도 어눌해진 말갈족들은 동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까진 좋다 이거예요. 하지만 조선이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우리들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활약했는지 알아요?
말갈족들이 한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왜요?
왜긴요. 한국이 독립해야 말갈도 독립하죠.
말갈족들은 후금과 청을 일으킨 동족들처럼 타고난 전사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육탄돌격을 마다않았으며 죽을 각오로 권총과 도시락 폭탄을 몰래 제조했다. 기어코 광복을 지켜본 말갈족들은 정말 자신이 독립한 것처럼 뿌듯해 했다. 한 여름에 답답한 외투를 벗었으니 다음은 속옷만 벗으면 되는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말갈족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일조했으니 나름대로의 권리와 지분이 있다고 여겼다. 그들의 권리는 당연히 말갈의 독립이었다. 조그만 섬 하나를 주어도 좋다. 전국 삼 만여 명의 말갈족들이 모여 살 땅 덩어리면 되었다. 그들은 거기서 홍길동처럼 율도국을 세우고 마음껏 말갈족의 요리를 해먹고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언어로 부르고자 했다. 하지만 약속은 깨졌다. 북쪽에선 김일성이, 남쪽에선 이승만이 그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들 남북의 말갈족들은 백마고지에서 만났다. 모두 선봉대로 마주친 그들은 육탄 돌격을 하며 서로를 죽였다. 그들은 상대가 말갈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죽어갔다. 말갈의 인구는 확연히 줄어 오천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진요.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정말 말도 못해요. 그때 기회가 아니면 가문을 일으킬 수 없다고 했대요. 참전 지급금에 욕심이 나셨던 거죠. 가족들이 다 말렸지만 소용없었대요. 자칫 말갈족이란 게 들통 나면 총알받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살아계시나요?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다행이네요.
다행은요, 전쟁이 끝나고 어느 순간 쓰러져서 아직까지 누워 계신걸요.
왜요?
세포가 괴사되는 병이래요. 고엽제란 게 좀 독하다고 하네요.
울창한 정글에 숨은 베트콩을 잡기 위해 살포됐다는 고엽제, 독성은 공평하게도 식물과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마도 앙상하게 말라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졌다. 그녀도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말갈족이 아닌 마당에 더 이상의 감정이입은 낭비 아니겠는가. 만남이 끝나면 난 여느 때처럼 일상으로 돌아가고 힘겨워 탈탈거리는 스쿠터를 몰게 될 것이다. 그녀는 텅빈 짜장 그릇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창문을 열고 느긋하게 고향음식을 먹고 싶네요. 당신도
첫댓글 허풍이 재미있네요. 제목만 보고는 마자르 이야기인가 싶었는데요. ㅎㅎ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18,19세기 세력의 확장을 주모하던 유럽의 국가가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겁니다. 이전까지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예 성립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사는 집단,일 뿐이었고, 말갈 뿐 아니라 조선 역시 조선 민족은 없고 그저 '백성' 이었을 뿐입니다. 근대에 와서 민족을 내세우게 된 이유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득 때문입니다. 유럽의 특성상 국가보다 민족이 더 큰 개념이었고 따라서 내부 불만을 외부로 전향시키고 세력확장을 도모하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한 민족주의의 끝은 1,2차세계대전이라는 잔혹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민족사회주의(National은 국가라는 의미보다는 민족으로 쓰이지요)를 내세우면서 우상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 민족이 위대하면 다른 민족은 저열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일본 민족이 우월하니, 조선민족은 식민지배를 받는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가 적용될 수도 있는 거구요. 전쟁이 끝나고 냉전시기에는 민족과 유사한 제품도 나왔었지요. 이데올로기라고... 덕분에 이 나라의 정치는 민족이나 이데올로기라는 장치로 존재하지도 않는 편을 나누어 선동질을 해대는 기형적인 형태로 치달리게 되었지요. 이거 정말 잘 먹힙니다.
실제로도 민족을 내세우는 나라 치고, 정치가 개막장이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선진국이라 하는 일본마저도 권력 유지 수단으로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동원하는 한심한 짓꺼리를 종종 벌이지요. 어찌되었든 국가는 안보를 책임지고 세금을 걷고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질기능의 필요성으로 인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겠습니다만 글로벌 시대에 들어와선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관념은 이제 마땅히 탈피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낡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치워야 마땅하지요..
이렇게 긴글도 달아주시고 매우 고맙습니다. 민족주의를 위한 글은 아녔는데 의도완 달리 그렇게 비쳐졌나 봅니다. 신경써서 다듬어 보겠습니다. 다음에도 지적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강하십쇼~^^
아..그렇구나..결국 민족이라는 것도 하나의 조작된 개념이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소재가 참신하구 문장과 문맥의 흐름이 유수처럼 부드럽네요 스토리의 인과관계도 위트가 가득 담긴채 자연스럽구요 멋진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글 전체의 분위기가 일관되지 못하네요 의도하신건지 아니면 장면묘사와 마무리에 쫒기신건지 궁금합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관성부족한 분위기는 매일 나눠서 쓰다보니 기복이 생겼네요. 숙지하여 다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화자의 태도 전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맞선녀가, 화자를 설득할 때(사실 설득보다 그냥 설명을 했죠)그 설득이 너무 가벼웠어요.그래서 몰입도가 많이 떨어졌네요.물론! 이 글 자체가 농담스럽고 철저히 그점에 기초한 글이지만 분명히 전개구조상 글의 결말(절정)을 위해선 다소 진지한 몰입도 끝까지 유지시켜줘야 했거든요.때문에 농담스러운만큼 그 만큼의 납득할만한 설득력도 필요했다고 생각해요.다시 말해 자신이 말갈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려야하는 장면에는 다소 진지한 접근이 필요했는데도 너무 쉽게 넘긴 감이 있어요.화자가 너무 가볍게 받아들인 듯한 인상이..물론 그런 가벼움이 이 글의 성격이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화자가 더 물었어야할 의문이 저(독자)에게 그대로 넘겨져서 거기서부터 화자와 저(독자)와의 치명적인 간극이 발생했어요.때문에 마지막 하이라이트, 절정부분에서 충분히 긴장하며 보지 못했네요.이 점이 독자로서 참으로 아쉬웠답니다ㅠ이 아쉬움은 지성이 형이 슛했는데 공이 골대맞고 튀어나온 걸 볼 때에 그 아쉬움..만약 말갈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갈등의 분량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전개하셨다면...슛~ 골인!!와와와아아아 말갈 오오오오오 말갈 오오오오오 이랬을텐데염.
늘 잊지 않고 평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그냥 애독자로서 감상을 썼을 뿐인데염ㅜ언제부턴가 한낮님 소설에 기대치가 생겨버려서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습니다.
소재가 독특하네요. 꽁트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긴 글을 쉽게 읽게 만드는건 분명히 재주 입니다. 비슷한 위트가 너무 난무하면 그것도 진부해 질수 있으니 경계가 필요해 보이는군요. 아쉬운건 후반부에 아이디어가 부족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움되는 말씀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말갈족이라고 하던 누가 생각나더군요 .......제길
흐, 이거 참 재미있어요.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아이템이었지요. ㅎㅎ;; 수고하세요.
정말 잘봤습니다. 문체는 작가 박민규나 이만교가 생각나고 위트는 성석제나 김영하를 닮았네요. 우리나라의 소외계층 뭐 이런 얘기지 않았을까 싶네요. 우리는 대를 위해 소를 말살하고 있는게 사실이니까요. 다만 특이한 소재로 무거운 주제를 다룬 님의 위트가 감명깊었네요. 다만 너무 가볍게는 말고 주인공의 진지한 정체성이나 사유같은 것들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단편말고 중편정도 되게 쓰셔도 좋은 소재같고요. 하지만 소재는 특이하고 좋으나 이야기가 이뤄지는 방식은 기존작가들을 답습한거 같아 아쉽습니다. 요원이랄지... 뭐 이런거 말이죠. 건필하세요. 정말 유쾌했네요.
이한낮님 좀더 심한 뻥을 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신거 같은데 읽다가 웃었더랍니다. 거짓을 진짜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거 같네요.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부담이긴 하죠. 천명관의 <고래>, 김언수의 <캐비닛>추천해드립니다. 이야기가 난무하는 소설이거든요. 뻥인데 뻥같지 않은 글재주를 지니신 작가이지요. 도움되셨으면 좋겠네요. 님의 글력이 부럽습니다.
겐지님 조언 고맙습니다. 말씀대로 고래읽고 있습니다. 이 소설 놀랍네요. 제가 고민하던 부분에 대한 답이 여기서 발견되다니.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건필하세요. 꼭 등단하실겁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 특히 중간에 말갈어, 웃겼어요ㅋㅋ 진짜 말갈어는 아닐 거라 생각해요. 근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잘 한다고 할까? ㅎㅎ 좀더 촘촘하게 이야기를 엮으신다면 더 좋은 소설이 나올 듯합니다. 잘 봤습니다.
14.10.20 추천작입니다. 어쩌다보니 <인간의 무게>를 쓰신 이한낮 님의 소설을 또 뽑게 되었는데, 전작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은 이한낮 님의 스타일을 알아가는 과정도 좋지 않을까합니다.
이거 연속 두작품이라니 이분 작품은 묘한 기대감이 있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중간에 나온 말갈어는 진짜로 존재하는 말인가요? 아무튼 소재가 독특하고 재밌네요. 기왕이면 주인공의 조상들의 말갈족의 역사도 같이 들려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특히나 국정원 같은데서 비밀리에 말갈족을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