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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현내리 고욤나무 천연기념물553호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445
‘강릉 현내리 고욤나무’는 현내리 옥계로 인근 도로변에 가까이 자리하고 있으며
나무 근처에는 성황당이 있다.
수고(樹高, 나무의 높이) 19m, 가슴높이 둘레 2.86m, 근원둘레(나무의 지표경계부 둘레) 5.60m,
수령(樹齡, 나무의 나이) 250년(추정)으로 규격적인 측면에서 희귀성이 높으며,
고유의 수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자연 학술 가치가 높다.
또한, 옛 성황당의 신목(神木)으로서 정월대보름과 음력 동지에 마을의 안녕을 위해
성황제(城隍祭)를 지내고 있는 등 민속적인 가치와 지역 문화재로서의 역사성이 큰 나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를 포함해
전국의 고욤나무 중에서도 크기나 둘레, 수령 등에서 우위에 있으며,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조형물이 없어 멀리서도 눈에 뜨이는 등 경관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고욤나무는 예로부터 감나무를 접붙일 때 필요한 대목(臺木)으로 활용됐고,
감(곶감)은 제례용으로 사용된 전통적인 과실 중 하나로
우리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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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551호 : 진안 도통리 청자요지
소 재 지;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산 39-1, 40-1 일원
「진안 도통리 청자요지(靑瓷窯址)」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백운면에 자리한
내동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 중평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중평마을 전역에는 청자와 갑발(匣鉢, 도자기를 구울 때 청자를 덮는 큰 그릇) 조각 등이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마을 일부에는 대규모의 요도구(窯道具,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되는 도구)
퇴적층이 아직 남아있다.
요지의 존재는 지표조사 등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2013년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2017년까지 총 5차례의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진안 도통리 청자요지」는 10~11세기에 걸쳐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가마터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청자를 제작하던 시기에 청자를 생산했던
벽돌가마(전축요, 塼築窯)와 진흙가마(토축요, 土築窯)가 둘 다 확인되었다.
이러한 가마 축조 양식의 변화는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천하는
한반도 초기청자 가마의 전환기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벽돌·진흙가마는 총 길이 43m로, 호남지역 최대 규모의 초기 청자가마이며,
최초 가마의 벽체를 벽돌로 축조하였다가 내벽을 진흙·갑발을 활용하여
개보수하는 방식으로 요업을 이어갔음을 확인하였다.
또 다른 가마인 진흙가마는 총 길이 13.4m로, 벽돌 없이 진흙과 갑발로 구축되어 있다.
가마 내부와 대규모 폐기장에서는 해무리굽완, 잔, 잔받침, 주전자, 꽃무늬 접시 등
다양한 초기청자와 다량의 벽돌, 갑발 등 요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대(大)’자명 등의 명문이 새겨진 청자를 비롯하여 고누놀이(땅이나 종이 위에
말밭을 그려 놓고 두 편으로 나누어 말을 많이 따거나 말 길을 막는 것을 다투는 놀이)가 새겨진
갑발, 청자가마의 배연공(排煙孔, 가마 내부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추정되는 벽체 조각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진안 도통리 청자요지」는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가마의 변화양상 등을 통해 우
리나라 초기청자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초기청자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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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분 출토 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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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분 출토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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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분 출토 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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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분 출토 둥근고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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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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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통 상부가 노출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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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분에서 나온 은제귀걸이
장수 동촌리 고분군 사적552호
소 재 지; 전북 장수군 장수읍 동촌리 산26-1 일원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군 장수읍 마봉산(해발 723.9m) 산줄기에 지름 20~30m 내외의 중대형 고총을 포함한 83기가 분포한 고분군이다. 다양한 유구와 유물의 특성을 근거로 5세기 초엽부터 6세기 초엽에 걸쳐 형성된 가야세력의 수장층(윗자리에 위치해 집단이나 단체를 통솔하는 사람들) 고분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2015년 발굴조사에서는 가야계 고분 최초로 징(釘)이 박힌 ‘편자(蹄鐵, 말발굽을 보호하기 위해 덧대어 붙이는 쇳조각)’가 말뼈와 함께 출토되었고, 2017년 조사에서는 고령, 합천, 함안 등의 지역 수장층 무덤에서만 출토된 것과 같은 재갈이 출토된 바 있다. 그 밖에 고분들에서 둥근고리자루칼, 은제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그동안 대가야와 소가야계 수장층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확인되어 동촌리 고분군이 수장층의 무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1호분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주변에 호석(護石,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돌을 이용하여 만든 시설물)을 두르지 않아 그동안 확인된 영남지방의 가야고분과는 차별된다. 무덤 축조기법은 지표면과 생토면을 반반하게 고른 후 1m 내외의 높이로 흙을 쌓고 다시 되파기를 하여 묘광(墓壙,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 놓은 자리)을 마련하였는데, 마한의 분묘 축조기법에 영향을 받은 묘제양식으로 보인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그동안 백제권으로 인식되었던 장수 지역에 가야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어 의미가 크다. 정부혁신 역점과제인 가야사 연구는 물론, 가야와 백제의 역학관계와 교류사를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고대 사회상을 밝혀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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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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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上城) 천제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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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한계산성 사적553호
소 재 지;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리 산 1-1임 일원
「인제 한계산성(寒溪山城)」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설악산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내에 자리한 유적으로, 한계산(寒溪山, 해발고도 1,430.4m)을 중심으로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자연적인 암벽지대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성벽을 구축하였다. 산성의 둘레는 약 7㎞에 달하며, 상성(약 1.7~1.9㎞)과 하성(약 5~6㎞)으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서도 이미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제 한계산성(寒溪山城)은 13세기경 축조된 산성으로, 그 입지와 축조양상을 볼 때 시대변화에 따른 성곽 확장과 성벽이 연장된 구조가 잘 나타나고, 성벽과 별도로 축조된 돈후(墩堠, 토축 또는 석축벽을 쌓아서 만든 파수보는 망대)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고려 시대 몽골과의 항전에서 사용된 입보산성(入保山城, 들어가서 지키는 산성)으로서의 평면구조와 축성방식, 부속시설물이 변화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중세산성이다. 특히, 상성(上城)은 남한 내에서 가장 험준한 곳에 축조된 산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등 13세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한 상성과 하성 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 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하였다. 상성과 하성별로 시대적으로 비교되는 건물지 중심의 유구와 유물이 나와 한계산성(寒溪山城) 활용시기 등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확인하였다. 하성에서는 총 18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 중「지정십팔년(至正十八年)」1358년, 공민왕 7년)이라고 쓰인 기와 조각과 백자 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와 한계산성(寒溪山城)이 13세기 축조된 이래 고려 말에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 또는 증축(혹은 개축)된 후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상성에서는 총 15개소의 구들 건물지, 부분적으로 잔존 성벽 기저부(基底部)를 확인하였고, 청자와 도기 조각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제 한계산성(寒溪山城)」은 고려 시대 몽골과의 항전지이자 승전지로서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259년(고려 고종 46년) 몽고에 투항한 조휘(趙暉)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을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인제 한계산성(寒溪山城)」은 30년 여몽전쟁의 최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몽골 영향 아래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세력 확장을 저지한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또한, 대몽항쟁(1231년부터 1259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몽골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항쟁)기 5차와 6차 침입 당시 만든 입보산성(入保山城)으로서 성곽 변화과정과 고려말 조선초 공민왕의 반원정책, 동해안 일대의 왜구 침략 대비 등을 목적으로 축조한 성곽 양식 등을 비교‧연구할 수 있는 점에서도 학술적·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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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 중심토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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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부 목탄층
함안 가야리 유적 사적554호
소 재 지;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 일원
「함안 가야리 유적」은 해발 45~54m의 구릉부에 사면을 활용해 토성(土城)을 축조하고, 내부에는 고상건물(高床建物,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 바닥을 만든 건물)과 망루(望樓, 높은 장소에서 사방을 살펴볼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 등을 축조한 유적으로 조선 시대 사찬읍지(私撰邑誌)인 『함주지(咸州誌)』와 17세기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등 고문헌과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보고에서 ‘아라가야(阿羅加耶) 중심지’로 추정되어 왔다. 2013년 5차례의 지표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유적의 범위를 확인했고, 2018년 4월에 토성벽의 일부가 확인되면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인 시굴과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조사 결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된 토성과 목책(木柵, 울타리) 시설, 대규모의 고상건물지 등 14동의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건물지 내에서는 쇠화살촉과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찰갑, 札甲) 등이 나와 이곳이 군사적 성격을 가진 대규모 토성임을 알 수 있었으며 출토유물로 보아 유적의 시기는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전성기인 5세기부터 6세기에 해당되는 걸로 추정하고 있다. 2019년 3월부터 시작한 성벽부에 대한 정밀조사에서는 가야문화권에서 처음으로 판축토성(板築土城, 흙을 떡시루처럼 얇은 판 모양으로 켜켜이 다져 쌓는 방법으로 쌓은 성)을 축조하기 위한 구조물들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우수한 축성기술을 보여주는 이러한 구조들은 이전에 확인된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아라가야는 물론, 우리나라 고대토성의 축조수법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함안군 가야읍을 가로질러 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신음천(新音川)과 광정천(廣井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독립구릉 상에 자리한 유적이다. ‘남문외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226호)’, ‘선왕고분군’, ‘필동고분군’ 등 중대형 고분군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에는 ‘당산유적(길이 39m, 폭 15.9m 가야 최대 굴립주 건물지)’, 남쪽으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이 있어 이곳이 아라가야의 중심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유사한 성격의 유적인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 합천 성산토성(경상남도 기념물 제293호) 등과 비교할 때 상태가 매우 온전하고 주변 유적과 연계된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대 가야 중심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연차적인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금관가야, 대가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던 아라가야의 실체와 위상을 재조명하여 정부혁신 역점과제인 가야사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