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삶과 사랑의 무게에 대한 영화이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휘청대기도 하고, 너무 가벼워 어리둥절하기도 하는 남녀 이야기. 혹은 웨이트리스 테레사와 의사 토마스가 열정과 권태로 범벅된 사랑 끝에 가녀린 흔적만 남기고 휘발된 도시 프라하 이야기.
1.가벼움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헤매다 갑자기 탁 트인 구시가지 광장을 만났다. 드넓은 공간 사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황망해하다 80 짜리 탑 두개를 갖춘 틴 교회를 발견했다. ‘프라하의 봄’ 곳곳에서 배경이 된 고딕 양식의 웅장한 이 교회는 거무튀튀한 색깔로 바로 앞 킨스키 궁전의 밝은 색상과 대조를 이뤘다. 한 여자와 관계를 가진 뒤 토마스가 창밖으로 틴 교회를 바라볼 때 종소리가 들려왔지. 그때 그는 “세상 여자가 다 신대륙 같다”며 여성편력을 과시했던가. 틴교회 문 앞 계단에 앉아 생각해보니 그는 진지한 사랑을 삶에서 분리해 가벼워지려 했던 남자였다. 여자들 집에서 욕망을 발산한 뒤 그는 항상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지. 나란히 누워 각각 잠에 빠져들 순 있어도 ‘함께’ 잠들 수는 없다는 데서 그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보았던 걸까. 그러나 예수의 의심많은 제자 도마에서 연유한 이름에서 짐작되듯, 토마스는 사랑의 진정성을 회의했지만 결국 테레사를 만나고 만다. 가벼움을 찾아나섰다가, 가볍지만 중첩된 우연의 사슬 끝에서 사랑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그가 행복할 수 있을까.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현란하게 갈마드는 이 세상에서.
2.무거움
최고 번화가인 바츨라프 광장과 나프지코페 거리엔 고단한 체코 역사가 배있다. 격변기마다 집회가 열렸던 바츨라프 동상 밑엔 68년 자유화운동을 진압한 소련군에 항의해 분신했던 대학생 얀 팔라크 기념 화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테레사는 자유화운동이 벌어지자 여기서 용감히 시위장면을 찍어 외국으로 보낸다. 새털처럼 가볍고 반복된 일상 속 지쳐있던 시골마을 웨이트리스 테레사는 토마스를 만난 뒤 프라하로 와서 필연적이어서 무거운 사랑을 꿈꾸었지. 그러니 토마스의 바람기에 다시금 지친 뒤 무겁기 그지 없는 정치적 격랑 속으로 달려갈 수 밖에. 사랑이 턱없이 가벼울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을테니까. 그러나 살던 곳을 떠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묵직하고 진지하게 살려던 소망과 높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곳곳에서 충돌한 후 그녀의 삶을 이지러뜨린다. 토마스의 날렵한 삶 역시 신문 투고 하나 때문에 억압적 현실 한가운데로 가라앉는다. 한없이 가벼워지려는 욕망과 미친 역사 때문에 번번이 비상을 제지당하는 굼뜬 발 역시 다른 방향을 향하기는 마찬가지니까. 블타바 강변을 거닐다 ‘고문기구 박물관’을 발견했다. 허리를 조여 죽이는 쇠벨트에서 거꾸로 매달아 다리 사이를 켜대는 톱까지, 중세 전시품들을 둘러보다보니 인간 마성에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쪽 구석 글귀는 불에 달군 바늘이 되어 방문객을 고문해댔다. “과거엔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고문을 막을 길이 없었다... 고문당하는 자들은 고통 속에 남의 이름을 불러 배반한 뒤 가까스로 풀려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이 무거운 역사도 계속되겠지.
3.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1406년 건설된 프라하의 명물 칼레르 다리는 무명 화가들과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다리 옆 공원 벤치엔 혼자 책읽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리 양쪽에 늘어선 저 유명한 30개 성인상 주위론 새들이 낮게 비행했다. 토마스처럼 삶의 가벼움을 맛보기 위해 엔지니어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 테레사는 이 다리 밑에서 잿빛 강물을 보며 “프라하를 떠나고 싶다”고 통곡한다. 환멸과 질투, 무책임과 욕망이 상처를 남긴 둘의 삶과 사랑의 비극은 결국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증거한다. 거기에 담긴 진정한 비극은, 삶이든 사랑이든, 가벼워지고 싶어도 가벼울 수 없고 무거워지려 해도 무거워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무게’란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를 지칭하는 용어라 그랬지. 그건 질량과 달리 물체의 고유한 크기를 가지는 양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미친 역사와 타인의 삶이 지닌 중력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 뜻대로 온전히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없는 삶의 ‘참을 수 없이 애매한’ 무게를 생각하자 울먹이던 테레사가 가라앉기와 뜨기를 반복하며 강을 떠내려오던 나무벤치를 바라볼 때 심정처럼 처연해졌다. ‘프라하의 봄’은 곧 사고로 즉사할 운명임을 알지 못하고 시골길을 달리던 트럭 안 둘 대화로 끝난다. 지금 무슨 생각하냐고 테레사가 묻자 토마스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 이라 대답하지. 그러나 ‘함께’ 잠들 수 없다면, ‘함께’ 죽을 수는 있는 걸까. ‘동시에’ 끝맺는 것으로 삶은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거나 더할 수 있는 걸까.
<에필로그>
비행기를 타기 전 프라하성 안 황금소로(Golden Lane)에 들렀다. 색색의 작은 전통 집들이 모여있는 거리. 22번지 파란 집은 ‘성’ ‘변신’의 작가 카프카가 1916년에서 1917년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곳으로, 지금은 카프카 전문 서점이 돼있다. 이야기를 나누다 금방 친해진 점원 아가씨 항카는 카프카 책 중 뭘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소설들을 제쳐두고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란 서한집을 꼽았다. 아버지와의 애증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애증을 배운 카프카처럼 그녀는 무엇과의 애증을 갖고 있는 걸까. 대학시절 카프카를 무척 좋아했다는 말에 항카는 “왜 좋아하느냐”고 되물었지만, 쑥스런 웃음으로 때우다 그냥 문을 나섰다. 동전을 던져넣어 관광객을 되돌아오게 한다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가 프라하엔 없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와 항카에게 답하고 싶다. 내 젊은날 과거가 지녔던 만큼만 무게를 실어서. 그러면 항카는 그 사이 지나간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 내 말을 이해하겠지.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