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851 최무선 황준량 금계집 유두류산기행편 독후감.hwp
지리산 기행 속에 녹아든 선조의 삶
-금계집의 유두류산기행편(遊頭流山紀行篇)을 중심으로-
20133851 최무선
사람들은 살면서 하나의 동경을 가지고 산다.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변화를 기대하는 것처럼 옛 선인들도 그러했다. 조선시대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꿈 중 하나는 바로 명산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출세를 바라면서도 지겨운 관직 생활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살아나고자 하는 것이 그 때 관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로망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유람을 떠난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쓴 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현실을 벗어난 와중에도 현실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의 주제는 금계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으로 삼았다. 「유두류산기행편」는 하나의 시이지만 총 글자수는 2500자이며 사실상 산문이라 할 정도로 긴 길이의 작품이다. 그만큼 그의 생각도 많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유람기를 쓴 다른 선현의 것과도 비교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택했다. 또한 황준량은 조선사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은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행적이 과소평가될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황준량의 저서를 독후감 주제로 택한 바도 있다.
1. 저자 소개 및 금계집의 편수과정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손녀 사위이면서 이황(李滉, 1501~1570)의 애제자이다. 그의 생애를 이황이 쓴 행장을 참조해서 보자면 먼저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고려 때 시중을 했던 유중(裕中)이 그의 조상이다. 그는 1517(중종 12)년에 풍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기동(奇童)이라 불리었고 1540(중종 35)년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 1543년에 학록 겸 양현고 봉사로 승진하였고, 1544년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여 1545(인종 1)년에 승문원 전고(承文院殿考)로 나가서 상주 교수(尙州敎授)가 되었다. 이 해 여름 파직되어 가족을 이끌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 1550년 삼년상을 마치고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겨울에 병조 좌랑으로 전직되어 불교를 비판하는 벽불소(闢佛疏)를 올렸다.
1556년 겨울에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으며 1557년 가을에 단양(丹陽) 군수가 되었다. 그는 부임하여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를 올려 당시 단양의 피폐한 상황을 호소하였다.1) 그는 10가지 폐단을 재목에 대한 폐단, 종이의 공납에 대한 폐단, 산행에 대한 폐단, 이장에 대한 폐단, 악공에 대한 폐단, 보병에 대한 폐단, 기인의 폐단, 피물에 대한 폐단, 이정한 것에 대한 폐단, 약재에 대한 폐단이라 했다.2) 임기를 마친 후 귀향하고 벼슬을 사양하다가 1560년 가을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561년 이황이 공을 들여 완성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성주에서 간행했다. 그 뒤 1563년(명종 18) 병이 나서 사직하고 질병이 더욱 악화되어 4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1) 황준량, 강성위 역, 『금계집 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7쪽
2) 『명종실록』, 권22, 명종 12년 5월 7일 기미
이황은 그의 죽음에 대해 “돈독히 좋아하는 뜻으로 조용히 수양했더라면 마땅히 더 나아갈 것이고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뜻을 이르지 못하고 병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애석함을 어찌 견딜 수 있으리라.”3) 라 하며 애도를 표했다. 또한 그는 행장 외에 제문과 만사에서도 이러한 슬픔을 표현했다.4) 그 외에 그가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말을 할 정도로 황준량은 이황이 정말 아껴했던 제자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황이 『금계집』의 초판본은 그가 죽은 후 3년이 지난 1566년 경에 나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5)
『금계집』은 부록을 제외하면 내집(內集) 4권, 외집 9권으로 도합 13권 5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또한 이번 독후감에 쓰인 번역본 『금계집』의 텍스트는 1755년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마찬가지로 13권 5책으로 된 목판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晚松文庫)에 소장 되어있다.6)
이광정(李光庭, 1552~1629)의 외집 발문에 의하면 내집 4권은 이황이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쓴 내집 발문에 좀 더 자세한 경위가 드러나 있는데 황준량의 동생이 이황의 부탁을 전하게 되어 이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젊은 나이(28세)였던 이산해에게 부탁을 한 것이 보면 황준량과 그의 사이는 상당히 돈독했다고 볼 수 있겠다. 부탁 받을 때 “금계를 아는 자가 그대만 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 그의 한 마디로 끝을 맺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7)
외집의 경우는 내집과 달리 여러 단계와 긴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정구(鄭逑, 1543~1620)가 1607년(선조 40),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단양의 초간본을 바탕으로 외집 8권을 간행하려 했다. 그런데 11월 사직하고 귀향하게 되자 정리된 유고를 저자의 후손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고 형편이 여의치 못해 간행하는 일이 지연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단양의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상당수 타버리자 다시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후 1738년(영조 14) 풍기의 욱양 서원에서 경비를 마련하고 다시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풍기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마무리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안동을 대표하는 문인 이광정(李光庭, 1674~1756)에게 교정과 앞서 언급했던 발문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755년 이광정은 정구와 이황이 정한 편차를 따라서 내집과 외집을 따로 두어서 간행했다.
금계집의 구성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내집은 1권에서 3권은 모두 시(詩)이다. 4권은 잡저(雜著)이며 총 17편이 들어 있다. 외집은 1권에서 6권은 모두 시이다. 이렇게 금계집에는 한시가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천 수에 가깝다고 한다. 그 외에 내집과 외집 합 13권에 수록된 작품의 수효를 헤아려 보면, 대략 시가 830제 984수, 산문이 85편에 달한다. 마지막 외집의 9권은 부록으로, 앞서 언급한 이황이 찬술한 행장(行狀) 1편, 이황, 정구등이 쓴 제문(祭文) 5편, 이황의 만사(挽詞) 2수, 이황이 지은 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 1편과 이에 대한 발문 1편이 있다. 권말에는 1755년 중간본의 간행 과정을 쓴 이광정의 외집 발문이 기록되어있다.8)
3) 황준량, 『금계집』, 권9, 부록, 이황 찬 「행장」, “夫荑好之志 加靜養之功 其見當有進 其得當不止此 此志未遂.疾病遽爾乘之 可勝惜哉”
4) 총 2개의 제문과 1개의 만사를 지었는데 그 속에서도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끝났구나, 끝나버렸구나! 슬프구나, 슬프도다!”(一去難回 已矣已矣 哀哉哀哉)와 같이 이황의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5) 앞의 책, 2014, 22쪽
6) 앞의 책, 2014, 29쪽
7) 황준량, 『금계집』, 권4, 내집, 이산해 찬 「금계집 내집 발문」 , “知錦溪者 莫如某 盍索某一語”
8) 앞의 책, 2014, 32쪽
2. 「유두류산기행편(遊頭流山紀行篇)」을 통해 황준량의 정신
지리산은 금강산과 함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유람하던 산이었다. 조선시대 관인들은 경세가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탈속 의지를 자주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산수를 유람하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9) 하지만 관직에 있으면서 장기간 유람을 하는 것은 생애 동안 몇 번 할 수 없는 기회이다. 그렇기에 일종의 사대부들 사이에 낭만으로서 유람벽이 있었으며 이곳을 유람하고 남긴 글들은 아주 많다.
지리산 기행시 중에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遊頭流山紀行篇)」은 가장 긴 장편이며 이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10) 황준량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시는 총 13제 16수이며 이 시는 금계집 외집 제 1편에 있다. 을사년 4월에 산천을 유람한다는 구절11) 과 함께 시는 시작되는데 이 당시 을사사화가 발생하기 직전이라는 점을 보아 정치적 풍파 속에서 낙향한 시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12)
이런 풍파를 벗어남에 대해서 그는 시의 첫 구절부터 굴레를 풀어버린 말, 조롱에서 벗어 나온 학과 같은 용어를 통한 해방감으로 표현하였다.13) 정치적 불화 속에서 자의적이지는 않았으나 벗어남으로서 그 감정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하여 속학에 빠졌다고 탄식하며 무능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에서 현실 정치에서의 실패에 대한 좌절감이라는 이중적인 감정 또한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14) 여기서 헛됨 꿈을 꾼 뒤에 장자를 깨달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15)
유가 사상이 아닌 도가 사상의 책인 『장자(莊子)』는 사상적으로는 배척되어왔지만 문학사적으로는 자주 활용되어온 이중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6) 『장자』의 우언은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인식 전환으로도 조선 문학에도 쓰인 점을 보아17) 황준량의 장자를 깨달았다는 구절도 호접지몽의 고사를 통해 유람 전후의 인식의 변화를 암시한다. 또한 그가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도학적 경향을 강화해나갔다는 점 역시 이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두류산기행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편의 시이기 때문에 이를 장소, 내용, 소재를 중심으로 28단락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18) 풍파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 1부분, 시의 창작 동기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시의 내용을 토대로 하면 황준량은 함양에서 출발하여 천왕봉, 낙성대, 영신사 등을 지났다. 전체적으로 시는 유람의 동기를 이야기하는 서문에서 시작해 유람 과정에서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에는 유람을 총평하는 전개 방식을 취했다.
9) 이상균, 「조선시대 관인들의 탈속인식과 지리산 유람벽」, 『남명학연구』 제46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203쪽, 199-234쪽
10) 최석기,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기에 대하여」, 『동방한문학』 제47집, 동방한문학회, 2011, 15쪽
11) 황준량, 『금계집』, 권1, 외집, 「유두류산기행편」, “乙巳夏四月 遊山川”
12) 최석기, 앞의 책, 10쪽
13) 「유두류산기행편」, “風馬春脫羈 野鶴秋開籠.”
14) 「유두류산기행편」, “堪嗟俗學晩回首 管豹一斑慙悾悾.”
15) 「유두류산기행편」, “一場槐夢覺莊生.”
16) 안세현, 「조선중기 한문산문에서 장자 『수용』의 양상과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 제45집, 한국한문학회, 2010, 442쪽, 437-471쪽
17) 이국진, 「『장자』의 우언을 제재로 한 조선시대 현실 풍유 운문문학과 현대적 시사」, 『동방한문학』 제68호, 동방한문학회, 2016, 203쪽
18) 최석기, 앞의 책, 16쪽, 이 구분은 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해당 필자의 자의적인 구분에 따른 것이다.
시를 주된 내용은 유람하면서 본 경치에 대한 소회라 할 수 있으나 곳곳에 그의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새에 어두워 백성들을 괴롭히는 저(관리)들도 어질지 못하지만 하늘을 넘어 날아다니는 새가 어찌 그물에 걸리겠는가?”가 그 사례이다.19) 우선 이 구절을 전반과 후반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자면 전자에서는 관리들의 학정을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바로 앞에도 "시골 백성들이 굶주려서 열매들을 모두 먹어버려서"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유람 하던 시기가 춘궁기여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영해준다.20) 그런데 그 와중에 관리들은 사냥을 시키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질지 못하다고 질책한 것이다. 이는 그가 실제로 단양진폐소를 올리는 등 지방관으로서 민생에 힘을 썼다는 점에서도 그는 목민관으로서 투철한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산 위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할 수 있겠다. 조선 선비의 명산 유람은 “공자가 태산을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21) 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고양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존재보다도 위에 있는 새를 자신에게 투영하여서 자신의 기개를 드러내는 것, 즉 호연지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 여겨 보고 싶은 점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다.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역사적 장소를 회고하는 것은 사대부들이 기행문에 자주 남기었다. 황준량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과거 가섭대에서 왜적들의 침입을 받아서 백성들 뿐만 아니라 산천까지 다치게 된 것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22) 이와 동시에 왜적들을 토벌하여 시대를 구한 성군, 즉 태조 이성계에 대한 예찬을 더하고 있다.23) 정치적인 혼란에 의해서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나라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충성심은 시의 후반부에서 나라를 위하여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구절에서도 등장한다.24)
이 외에도 「유두류산기행편」에는 황준량의 수많은 생각들이 녹아들어있다. 예를 들어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 석가모니를 낳게 해서 먼 서역에 이 땅에 이르게 하여 근거 없는 말을 퍼트렸냐는 구절이 있다.25) 벽불소를 올릴 만큼 투철한 유자로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렇게 지리산 유람록은 단순히 산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 자신의 소회를 푸는 하나의 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다른 지리산 유람록과의 비교
황준량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사람들도 지리산에 올라서 그들의 회포를 남겼다. 그렇다면 황준량의 기행기와 다른 이들의 유람록은 어떻게 달랐을까? 우선 최치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시에는 “고운(孤雲)을 불러서 그 소식을 묻고 신령한 자취는 어찌 노닐고 있는지”는 구절이 있다.26) . 이는 황준량이 최치원의 신선과 같은 면모를 부러워한다는 점에서 탈속 의지가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의 그물에서 몸을 빼내어 시문을 펼쳐 죽은 후 세상이 맑은 풍모를 흠모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최치원 신라 말의 어지러운 상황을 벗어나서 그의 문재를 보전하여 후세에 떨쳤다는 점에 대한 찬미했다.
19) 「유두류산기행편」, “禽荒毒民彼不仁 凌霄逸翮胡罹罿.”, 다만 이 문장에서 뒷부분에 대한 해석이 번역본에서는 본문과 같이 되어있으나 참고한 최석기의 글에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매는 왜 그물에 걸려드는지”라고 되어있다. 이 경우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보다.”의 공자 고사가 아닌 사욕을 경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20) 「유두류산기행편」, “離離佳實滿林垂 鳴鳥未聞疑我聾 丘民濟飢食之旣.”
21) 강정화, 「지리산유람록 연구의 현황과 과제」, 『남명학연구』,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365쪽
22) 「유두류산기행편」, “千尋迦葉日邊影 刃斫亦被島夷兇 民生血肉不堪說 石木胡然逢鞠訩.”
23) 「유두류산기행편」, “天生聖祖爲濟時 一揮蕩滌如決癰.”
24) 「유두류산기행편」, “山乎有靈獨拔萃 要爲王國勤輸忠.”
25) 「유두류산기행편」, “誰敎左脇産凶雛 呑卵開商慙有娀 西域妖神豈遠到 無稽怪語還朦朧.”
26) 「유두류산기행편」, “ 欲喚孤雲訪消息 仙遊何許飛靈踪 抽身禍網振華藻 風聲沒世欽淸丰.”
최치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조선 초기 임진왜란 전까지 보이던 양상이었다. 특히 김일손(金馹孫)의 경우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서 그의 스승과 달리 최치원에 대해 호의적이었는데 문장으로서 재능을 펼치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한 자신에 투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27) 이를 통해 그 역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위로받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임진왜란 이후에 급변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필체는 인정하면서도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이념체계가 혼란을 일으키면서 조선 문단에서도 영향을 끼쳐서 였던 것이다.28)
이러한 변화는 지리산 인식에 대한 변화로도 이어진다. 특히 조선 말기에 이르면 지리산은 신성함을 가진 경외의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느낌을 소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관념의 지배가 아닌 우러나오는 현실적 감각에 충실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29) 또한 18세기 유람 환경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중앙 정치와 지방 사족 층에 큰 변화를 가져와서 향촌에서 누려왔던 재지사족들의 영향력이 약해졌으며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관 주도 향촌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중앙 진출의 가능성은 멀어졌으며 유람 주체들이 이전에는 은일의 생활을 누리려는 중앙 관원들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지방의 처사들로 확대된 것이다.30)
조선 말 사족들에게 산수는 더 이상 도학적 대상도 아니며 사대부의 포부를 품는 공간이 아니었다.말 그대로 유람하면서 그 자체에 솔직해지고 즐기는 감흥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준구(李準九, 1851∼1924)의 『신암집』에서 “사람들은 힘들게 오른 줄 모르고 신선되어 세상 밖에 노닌다고 떠드네”, “봄이 오면 복사꽃 떠 오는 물을 따라 옛날처럼 노니는 것 안 될 것도 없으리.”와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다.31)
기행록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주막의 출현이다. 18세기 삼남지방부터 장문(場門)이라 하는 교역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개의 장이 분포하였다. 이러한 시장 대부분에 주막 촌이 발달하여 상업적 숙박시설이 조선 후기 여객의 팽창에 따라 급속히 증가하였다.32) 일례로 박래오(朴來吾, 1713 숙종 39∼1785 정조 9)의 기행록에서 비가 자욱하게 와서 옷이 젖어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가서 시장 주변의 주점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33) 이 외에도 이 시기의 기행 중에 이러한 기록이 많았으나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주막은 미약한 수준이었기에 이는 황준량의 기행록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27) 강정화, 「지리산유람록으로 본 최치원」, 『한문학보』 제25집, 우리한문학회, 2011,185-186쪽
28) 강정화, 위의 책, 192쪽
29) 황의열, 「조선조 문인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남명학연구』 제29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0, 425쪽
30) 이경순, 「18세기 후반 지리산 유람의 추이와 성격」, 『남명학연구』 제46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239-240쪽
31) 황의열, 앞의 책, 427쪽
32) 이경순, 앞의 책, 254쪽
33) 박래오, 『이계집』 , 권10, 「遊頭流錄」, “雨下濛濛 衣袂不免沾濕之患 余與瞻友促步而行 訪問前行所住 果在市邊酒店.”
이렇게 기행록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좀 더 일상과 개인의 현실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감각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20세기 지리산 유람록은 이전에 비해 급격히 수가 증가했다. 이 이유는 한말의 난세를 극복하고자 무너져 가는 도를 부지하기 위해 큰 도를 염원하여 대원사를 찾는 유람이 유행처럼 행해졌기 때문이다.34) 이러한 차원에서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을 염원하였는데 이단에 대한 혹평 또한 강해졌다. 그에 따라 지리산 유람록에서도 황준량의 기행기에서 나온 최치원에 대한 동경과는 달리 그에 대한 비판, 특히 불교와의 관련된 측면에서의 비평이 많이 드러나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 헌종 2∼1905) 의 유람기를 보면 최치원에 대해 문묘에 배향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육조사정상탑이 있었는데 승도들이 공재하고 불법을 설파하고 있었는데 보는 자들이 담장을 두르는 것 같았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어 꾀어내는 것이 언제 끝나겠느냐 슬프도다.”라 하면서 불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35)
이렇게 황준량의 것을 중심으로 여러 유람록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들의 글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였으며 동시에 그 당시를 담아낼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다. 정치 풍파에서 물러나 유유자적을 꿈꾸기도 하고 등산 자체의 노고를 표하기도 하며 현실에 대한 자의식을 표출하기도 했다. 각각 이들의 살던 시대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매개로서 기행기가 이들의 삶을 잘 녹아내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옛 선인들이 남긴 행간에 담겨져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비록 지면을 빌려서 나름대로 황준량의 유람록에 대한 감상을 쓰려 했으나 양이 방대하여 전체를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서 말한 28단락 중에서 인상 깊은 것을 위주로 독후감에 옮겨 적었다는 한계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 더 기회가 된다면 보다 더 심층적인 접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4. 참고문헌
박래오, 『이계집』
송병선, 『연재집』
황준량, 『금계집』
황준량, 강성위 역, 『금계집 1~4』, 한국국학진흥원, 2014
『명종실록』
강정화, 「지리산유람록으로 본 최치원」, 『한문학보』 제25집, 우리한문학회, 2011, 173-209쪽
강정화, 「지리산유람록 연구의 현황과 과제」, 『남명학연구』 제25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345-375쪽
안세현, 「조선중기 한문산문에서 『장자』 수용의 양상과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 제45집, 한국한문학회, 2010, 437-471쪽
이경순, 「18세기 후반 지리산 유람의 추이와 성격」, 『남명학연구』 제46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235-260쪽
이국진, 「『장자』의 우언을 제재로 한 조선시대 현실 풍유 운문문학과 현대적 시사」, 『동방한문학』 제68집, 동방한문학회, 2016, 183-214쪽
이상균, 「조선시대 관인들의 탈속인식과 지리산 유람벽」, 『남명학연구』 제46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199-234쪽
최석기,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기에 대하여」, 『동방한문학』 제47집, 동방한문학회, 2011, 7-42쪽
황의열, 「조선조 문인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남명학연구』 제29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0, 411-434쪽
5. 추가사항
독후감을 쓸 때 읽은 번역서는 황준량, 강성위 역, 『금계집 1』, 한국국학진흥원, 2014이다. 역자인 강성위는 중국문학 연구자이며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연구박사, 서울대학교 중국어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해동문집연구소 부소장을 겸하고 있다.
자는 백안(伯安)이며 호는 홍산(鴻山) 또는 다천(茶泉)인데 홍산이라는 호는 시인의 은사이신 차주환(車柱環) 교수로부터 받은 것이다. 저서로 '한문사서(漢文辭書) 한글 음순색인(音順索引)' '중국시와 시인'(공저) '산성마을 농사꾼 이야기'(공저) '고적·잠참시선(高適·岑參詩選)' '사조시선(謝?詩選)' '강서시파(江西詩派)' 등이 있다.
역서로 '두보 지덕연간시 역해'(공역) '난세'(전3권, 原題: 官場現形記)(공역) '두보율시(杜甫律詩)'(공역) '유원총보역주·1'(공역)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국역본) '내산유고(內山遺稿)'(국역본) 등이 있다. 창작 한시집으로 '하늘에 두 바퀴의 달이 있다면' '감비약(減肥藥) 처방전'이 있다.
첫댓글 잘 정리했음. 주관적 견해가 돗보임.
잘 모르는 인물과 책이인데 덕분에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