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유월)에 관한 시모음 45)
6월에 띄우는 엽서 /오선 이민숙
한 생 중턱쯤 걸터앉은 당신
그대 중년이여 절반의 책임으로
앞도 보고 뒤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누가 그랬나요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은 당신입니다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던가요
너무 일찍 축배의 잔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대 실망하지 말아요
그대 샴페인을 터뜨리지 말아요
그저 절반의 책임과 임무를
완성했을 뿐입니다
벌레들이 푸른 잎맥을 갉아먹어도
잎잎이 단풍으로 물들 때까지
푸르른 마음 한결같아야 하고
더 센 폭풍에도 뿌리를 지켜야 합니다
단비를 받아 어린 나무를 살 찌우고
질풍노도 속에 힘 잃은 나무도
두 팔로 끌어 앉아 수액을 나누며
탐스러운 열매가 맺힐 때까지
잡고 있는 젖줄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푸른 힘이 넘치는 중년의 나이
6월이니까요
유월 /서영처
완행열차가 소처럼 철로를 되씹으며 지나가고
기찻길 건너 숲에는
꿩-꿩-꿩이 우는 소리
여자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바이올린을 켠다
부드러운 소리는 바람에 실려
개울 건너 포도밭의
새파란 포도송이마다 화음을 넣어 준다
사랑에 빠진 듯 온갖 멜로디로 휘어지는 넝쿨
괴로움 같은 열매를 배며 무성해진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여우처럼 포도밭을 기웃거린다
새콤한 향기에 이끌려
개구멍에 머리를 디밀어본다
검게 익은 음표들을 포도송이들에게 넘겨주며
그녀는 빠르고 경쾌한 곡을 켠다
이파리 밑에 숨어 고양되어가는 알맹이들
비 온 뒤의 들척지근한 향기가 밀려오는 듯
구름 위에 얹힌 듯
악기를 놓고 여자는 노곤한 시간 속에 부유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의 모습은 투명하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유월, 이 하루 /이태수
어디를 헤매다가 마음아,
곤죽이 되어 돌아왔니? 구겨진 길들
발목에 매단 채 봉두난발(蓬頭亂髮),
해진 옷자락으로 되돌아왔니?
하늘의 푸른 잉크 빛 속으로 아득하게
새들이 빨려 들어가는 유월 한낮.
모란이 뜨락에서 꽃잎을 떨어뜨리는 동안
가까스로 햇살에 몸을 맡겨
제정신이 드는 마음아,
이 풍진(風塵) 세상을 어찌하리.
누군가 산을 넘고 물 건너 멀리 가보아도
끝내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 하지 않니.
바람 잘 날 없어도 낮게 비워보면
작은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실로 가련한 마음아, 네가 깃들여
길을 트고 걸어야 할 지금 여기는
그래도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 올려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늘지고 헐벗어도 다스한 가슴들이
한낮에도 조그맣게 불을 밝혀주어,
물러서던 길도 환해지고 있지 않니?
나무들이 껴입은 초록빛에 스며들며
물방울처럼 글썽이는 유월, 이 하루.
다시 유월 /장정애
웅크린 비둘기와 잠시 눈길 마주치다.
절룩이는 걸음에다 날갯짓도 어설픈데
눈빛 속 두려움보다 한 줌 몸이 더 무겁다.
닫힌 광장 밖을 서성이던 사람들도
희뿌연 새벽빛에 슬금슬금 사라진다.
내 나라 지친 평화가 촛불심지로 눕는다.
날은 점점 밝아오고 새떼 군무 활기찬데
그 한 마리 비둘기는 종적을 감추었다.
유월도 또 떠나는구나, '낮에 나온 반달'처럼.
6월 /장수남
6월
어찌 잊으리까.
나 어릴 때 그 날의 피바람 나는
보았네.
반세기 피 흘린 역사 나는 다시
보았네.
6.25 민족의 비화
삼천리 지옥의 강산 조국은 울었네.
민족의 수호천사
젊음 불태운 호국 영령들이여.
당신들의 위대한 죽음 나는 지금
말하리라.
민족의 뜨거운 가슴 당신 기억하고
울지 않는다고 나는 말하리라.
유월의 연서 /은파 오애숙
정오의 햇살로 갈맷빛 푸름
들판에 붓들어 채색해 갈 때
농부는 땀방울의 유월이다
삼 년 동안 등교하였던 학생들
졸업의 한 아름 *여울진 꽃다발
기쁨에 엄마의 입 귀에 걸렸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의 의미라
무엇 하든 만끽하길 바라는 맘
담장 넘어 곱게 피는 장미처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로 곧게
잘 자라주기 바람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우리네 부모의 마음
유월의 뜨거운 태양처럼 작열한
한 해의 획 만드는 하반기로서
가을풍요에 휘파람 부는 것처럼
유월의 햇살로 *나르샤 하자고
연서 곱게 써 한 장은 아들에게
한 장은 맘에 곱게 접어 넣는다
6월에 /박인걸
자유로운 6월 바람은
풀향기 꽃향기 실어나르며
도시 골목을 배회하는 노인에게
고향 냄새 한아름 실어다 준다.
찔레꽃 별처럼 쏟아지고
붉은 장미꽃 풀무처럼 타오를 때면
벌판 자줏빛 감자꽃이
파도처럼 출렁이던 밭 가에 나를 앉힌다.
푸른 세상이 뱉어내는 향취에
새들은 취해 비틀거리고
밤꽃이 산비탈에 쏟아지던 밤에
비단개구리 짝 찾아 밤새 울었다.
녹음이 숨 막히게 덮은 숲에는
길잃은 바람도 깊이 잠들고
이따금 울려 퍼지는 산새 소리에
풀잎에 맺힌 이슬이 굴어 내린다.
나를 품에 안았던 어머니보다
더 풋풋한 6월 흙냄새에
나그네 비틀거리며 길을 간다.
유월 /장진기
유월의 헛간 사립 뒷길에서
그늘은 음침하여
산호 호박 푸른 먹빛의 욕설이
살이 되고
비늘이 되어
설마 내가 배암의 혀를 애무하였겠지
비온 뒤 미끈거리는 황토길처럼
뜨거운 숨을 가파하는 여인의 허벅지를 부여잡고
그냥은 가지 못하게
꽃신 빠진 버선자국의 속살 벗겨내며
울고 있었겠지
그런 내 몸의 설움이 한 길은 되어
빛이 들지 않는 담밑에 한 또아리로 웅크리고
혀를 낼름이고 있었겠지
마당가 감잎에 번들거리는 햇살을
육실나게 욕하면서,
유월 /권복례
종려나무 노란 꽃 주위를 맴돌다
하늘위로 높이 날아오르는
종다리를
팽나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푸레나무를 보고
아침식사는 끝마쳤냐고
눈인사 하는
첫여름 아침
고향의 유월 /이원문
씨 넣고 옮겨 심고 모내기까지 끝냈으니
이제 얼추 큰 일은 다 끝낸 것 같은데
이유 없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구나
칠월도 스므날 그 스므날 지나면 칠월이겠고
이렇게 빠른 세월 빠르고 빠른 시간
뜸북이 부르는 앞 산 뻐꾸기는 알려나
그 뜸북이 불러 놓고 먼저 떠날 뻐꾸기인데
얼마를 더 있겠다고 저리 울어 대는지
텃밭에 옥수수 잎도 하루가 다르구나
올려 놓은 오이 넝쿨 호박 넝쿨도 그렇고
이 빠른 시간 문간 바람이 알기나 할런지
논 밭 적셔줄 먼 비 구름 떼 들어오는구나
유월의 계곡 /임재화
계곡 너머 저만치서
산들바람이 산들 불어오면
개망초 꽃송이 하늘 하늘거린다.
깊은 계곡 길 따라서
굽이굽이 돌아가는데
깎아지른 바위 절벽 좁은 틈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키 작은 소나무
늘 푸른 모습으로 생명 지키고
맑은 물이 벼랑 바위를
힘차게 휘돌아서 흐르는데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옆
늙은 밤나무 한 그루
말없이 우뚝 서 있는데
어느새 밤꽃 송이 피웠습니다.
유월의 들길 /이원문
그날들의 그림
고향의 그 그림을 어떻게 다 그릴까
메꽃에서부터 엉겅퀴꽃에 큰 꿀벌 날아들던 날
풀숲에 크고 작은 꽃들도 그렇게 많이 피어있었지
먹을 것에 들딸기 밭 자락에 산딸기
뽕밭에 오디는 없었겠나 그 뻐꾸기 그리 울어 댔었고
논마다 벼 포기 불어 파란 들녘
물꼬 보는 머슴 아저씨의 하늘에 구름일까
날아가는 왜가리 떼 어디로 가는지
한참을 바라보는 머슴 아저씨
삽 씻어 맨 머슴 아저씨의 고향 생각인 듯
아저씨의 그 마음 구름 따라 산 넘어었다
유월이 가기 전에 /하영순
유월이면 할 말이 많아
수 없이 뱉어 내고 뱉어 내었지만
그래도 못 다한 이야기가 있어
밤잠을 설친다.
6 25 전쟁 그해는 나락 논에
나락이 검게 잘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었으면
사람 죽어 썩은 물이 내려와서 거름이 되었다는
웃을 수 없는 이야기
중공군의 인해 전술
그들도 죽고 유엔군도 많이 죽었다
미군은 우리 도우려 와서 죽고
중곤군은 우릴 죽이려고 와서 죽고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중국에 목메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군 물러가라 외치는 사람
역사 시간에 뭘 가르쳤을까
유월이 가기 전에 이 말이 하고 싶어
까만 밤을 하얗게 보내고 있다.
유월 대관령 /허 림
바닷가 마을에 봄꽃이 다 지고 난 무렵 대관령에 갔다 이제야 노란 향기 품은 꽃들과 발가스름한 까마구 복사꽃이 폈다 밭두렁에서 봄을 캐는 아낙들이 나물처럼 환하다
오래 전에 대관령 어딘가 산다는 산막의 여자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봄이 다 지나갔다고 쓴 것 같은데 다 지나간 봄을 만나러 오지 않겠냐는 답장이 왔다
몇 번의 봄이 바닷가를 지나간 후 문득 보고 싶은 봄꽃을 보려고 대관령을 갔다가 어떤 꽃향기에 끌려 산막을 지나게 되었다 안개가 밀려오고 이내 바람이 불었고 어떤 꽃향기도 이내 흐릿해지고 서늘했다
긴 밭고랑 끝에서 그 여자 닮은 여자가 이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내 안개에 묻히고 밋밋한 등강에서 한 떼의 소들이 울며 내려왔다
유월 대관령 지날 때마다 봄을 만나러 오라는 한 여자가 산다고 여태 기억하곤 한다
유월의 잔고 /정기현
그해, 기일이 가까우면
죽순처럼 돋아나는 그리움이
그녀 빈자릴 점령하고
허공을 찢는 부엉이 부르짖음에
유월의 가슴은 울렁증이다
감자꽃 필 때면, 떠오르는
둥근 두레상의 향수가
아픈 자리 덧나게 만든다
노곤한 멍석을 가로 누이고 둘러앉아
풀벌레, 뻐꾸기, 개구리 울음소리
둥둥 띄운 쌉싸름한 손맛
달빛 가득한 국그릇 속 은하수를 낚으며
함박꽃 피우던 그 시절,
유년의 자국은 시간이 털어내도
떠날 줄 모른다
생각의 가지마다
피어나는 애틋한 옛 기억이 떠올라
경유지 없이 볼을 타고
수직으로 미끄러지는 아픔이
아무도 이체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불어나
숨겨놓은, 내 유월의 계좌로
밀고 들어온다
잔고가 쑥쑥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