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마가복음 9:2-29 요절/ 마가복음 9:7 | 2024. 6. 23 | |
마가복음 제 14 강 |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소리를 듣습니다. 마음의 소리도 있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듣는가에 따라 살아나기도 하고 지옥 맛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실체를 알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엿새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마치고 떠나시면 새로운 리더가 복음역사를 계승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은 수제자 그룹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키멤버로 키우심으로 장차 그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실체를 보여주고 복음의 진수를 심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변형되셨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본래 모습, 다시 말해 존귀와 위엄과 영광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저자 마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습니다. 그 옷도 빛이 났고 최신식 세탁기로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변형되심으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졌던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기운데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 땅에 오시기 전 본래 하나님의 모습이요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차기 리더들로서 고난을 많이 받을 그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영광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현재의 고난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만 있다면 그 고난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눌리고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뒤에 따라오는 영광을 보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눌리지 않고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극한 고난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분명한 믿음과 철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롬8:18).
또 하나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제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선지서도 쓰지 않았지만 선자자들의 대표요 능력의 선지자로서 고난을 많이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고 그의 죽음은 신비로웠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들의 대화 내용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많이 상하시고 힘드셨을 겁니다. 그런데 구약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별세하는 것 다시 말해 엑소더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하고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영적 눈을 뜨지 못해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했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길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둡고 슬프고 밥 맛도 없고 의욕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길, 제자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힘이 있는 것처럼 영광을 본 사람은 고난을 견디고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만 있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는 영광에 취했습니다. 영광을 보여주신 주님의 의도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었는데, 베드로는 영광 예스, 고난 노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 밑보다 여기가 좋으니 멋진 집을 짓고 영광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습니다. 이곳에는 힘든 사람들도 없고 고난도 없습니다. 말씀의 은혜가 있고 쉼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길,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고난 없는 영광을 원했고, 희생 없는 열매를 원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도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7b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은 누구의 말을 듣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형성됩니다. 부모의 말은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어려서부터 ‘너는 부자가 되라’는 부모님의 말을 들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부자 되는 길로 갑니다. ‘너는 판검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저는 고시패스해서 판검사 되어야겠다고 진로를 정했고, 대학도 행정고시를 목표로 행정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부모의 말을 들음으로 판검사가 되고 축구 선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은 우리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교만의 소리, 탐욕의 소리, 분노의 소리, 원망의 소리가 있습니다. 또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메스콤과 유튜브를 통해 많은 정보들과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도 유튜브를 많이 보는데 잘못된 정보들이 많고 나쁜 것들도 많습니다. 어린이들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부모님과 선생님이 잘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롬10:17).
생명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왕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존재의 뿌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순종하고자 듣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와 다르게 전인격적으로 듣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면 듣지 않는 것입니다. 듣고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경청하는 자세로 들을 때 생명을 얻고 변화를 경험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 제자도에 대한 말씀, 고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합니다. 부담이 되고 고난이 따르는 말씀을 듣지 않고자 합니다. 듣는 것부터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인본적인 소리, 교만과 탐욕의 소리, 원망의 소리, 의심과 불신의 소리, 정죄의 소리를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제자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삶의 방향과 지침으로 삼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어떤 어두움과 절망도 이기는 행복한 인생이요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영광에 취했던 제자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시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변화산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는 제자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기에 그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며 서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제자들은 엘리야가 실제로 왔는지, 율법학자들이 언급한 말라기 4장 5,6절 말씀이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말리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와 같은 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함부로 대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와 같이 고난 받음으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산 아래 제자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치 못함으로 율법학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았지만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때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아이를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집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말을 들으신 후에 그 세대를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시대를 섬겨야 할 율법학자들도 믿음이 없고, 그 아버지도 믿음이 없고, 제자들마저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들은 믿음이 있었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귀신들린 자들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홉 명이 힘을 모았는데도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에게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믿음이 있었다고 현재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늘 새롭게 충전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산 위에 올라간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왜 우리들만, 왜 나만 찬밥 신세인가? 그리고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왔을 때 내 실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능력을 믿고 귀신을 내쫓고자 했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데려오자 귀신이 예수를 보고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즉시 고쳐주지 않고 그 아버지가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어릴 적부터라고 대답하며,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반신반의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 앞에서 더욱 세게 공격하는 귀신을 보면서 예수님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면 도와주시고 할 수 없다면 안 도와주셔도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어떤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산에서 보여주신 대로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자에게 능력을 행하시고 영광을 보여주십니까?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생명과 능력의 원천으로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 치유와 구원과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예수님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의 병을 낫게 하려면 부모인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양의 물질문제, 인간관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자인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돕기 전에 아버지를 도우시고 양들 돕기 전에 목자를 도우십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책망 앞에서 자기의 불신앙을 인정하고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자 할 때 먼저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어야 주님은 나를 통하여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고 능력의 역사,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믿음을 받으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말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 권세로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경련을 심하게 일으킨 후 나갔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자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치유의 과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가져야 하며 온전해 지기까지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정확한 답을 주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귀신에도 급수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은 일급 귀신이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을 쫓아내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능력도 없고 치유도 없습니다. 귀신의 세력뿐 아니라 오래된 병을 고치는데도 기도가 많이 필요하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끝까지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야5:15). 우리 주변에는 깊은 어두움 속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주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친구가 필요가 필요하고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명 여름수양회에 한 사람을 데리고 갈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구원 얻기까지 믿음의 기도를 쉬지 않고 줄기차게 드려야 겠습니다.
제자의 길은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영광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을 때 제자의 길,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크고 작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감당함으로서 영광에 이르는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