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술 이야기 : 맛없는 물, 맛있는 물
노성열 문화일보 부장
음식과 요리의 과학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 그동안 10회의 연재를 통해 맛이란 무엇인가, 왜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의 입문 코스부터 음미하기 시작했다. 맛과 향의 이론적 원리를 배운 다음 실전 요리 코스로 들어가 현대적인 과학 조리법인 분자 요리의 세계도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았다. 오늘부터는 주당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술의 과학을 다룬다. 음식에 곁들이는 반주(飯酒)인 술, 그리고 물의 과학을 5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물과 술의 맛은 어른이 돼야 안다고 흔히 말한다. 인생의 쓴맛도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야 느낄 수 있듯, 쓴 술과 무미의 물도 그 맛을 제대로 알려면 산전수전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물, 무색·무취·무미의 생명 재료
우리가 맛을 느끼려면 최전선에서 작용하는 다섯 가지 미각 수용체와 향을 감지하는 수십 가지 후각 안테나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음식마다 맛과 향을 결정하는 분자의 비율은 전체의 5%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대부분은 무색, 무취, 무미의 재료들이 차지한다. 바로 물과 3대 영양소(탄수화물·단백질·지방)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물은 인체의 65%를 구성하는 주재료이며, 고기·채소·과일 등 식재료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채소·과일은 80~90%가 물로 이뤄져 있어 사실상 이들은 ‘고체 물’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을 구성하는 주성분인 물은 냄새도 맛도 없는 신비의 물질이다. 생명체는 3대 영양소 없이는 몇 주도 버티지만, 물 없이는 단 며칠도 견딜 수 없다. 사람은 몸속 수분의 2%만 모자라도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5%가 줄어들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른다. 외부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이를 다시 배출하는 신진대사 작용의 각 과정에는 물이 필수 중간 재료로 사용된다. 그래서 우주에 물이 풍부하게 존재하는 지역 중 하나인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다른 생명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단서가 물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인 것이다.
미네랄과 탄산이 더해주는 특별한 맛
그런데 물에도 맛이 있다. 이른바 ‘물맛’이다. 무색, 무취, 무미라고 해놓고 물맛이라니! 그러나 엄연히 물속에 녹아 있는 무기질(미네랄)과 탄산의 양에 따라 인간은 입에서 조금씩 다른 맛을 느낀다. 물맛은 사람마다 각인각색이라 일률적으로 단정할 순 없지만 몇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물이 지하에 스며들어 토양에 녹아 있는 무기질 성분을 흡수하면서 우리가 부르는 ‘약수’ 맛이 된다. 유황 온천이나 칼륨 온천의 물맛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녹아 있는 유기질의 종류별로 조금씩 다른 맛이 난다. 인간의 혀에 나트륨(Na)과 칼륨(K)은 짠맛으로 느껴진다. 나트륨과 칼륨은 신경세포의 막을 경계로 들락날락하며 탈분극(脫分極)과 재(再)분극을 일으키는 이온성분에 해당한다. 즉, 세포막의 안쪽과 바깥쪽을 교대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기 상태로 바꾼다. 이 현상을 통해 활동전위라고 부르는 신경세포의 통신전류가 만들어져 우리 뇌에 감각 신호를 전달하거나 거꾸로 뇌 신호를 신체에 보낸다. 나트륨과 칼륨이 드나드는 통로를 나트륨·칼륨 펌프라고 한다. 나트륨은 소금에, 칼륨은 각종 채소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무기질 중 칼슘(Ca)과 마그네슘(Mg)은 쓴맛으로 느껴진다. 철분(Fe)이 많으면 소위 ‘쇠맛’이 난다. 구리(Cu) 역시 마찬가지이다. 약간 시큼하고도 금속 특유의 목마른 듯한 느낌을 유발한다. 이렇게 무기질, 즉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물을 단단한 물, 경수(硬水)라고 한다. 반대로 적으면 연수(軟水)로 분류한다. 석회암 등 연질의 토양이 분포한 나라의 물맛은 텁텁한 반면에, 우리나라처럼 단단한 화강암 암반에서 물이 지하로 빠른 시간 내에 침전하면 연수가 되기 쉽다. 물맛 좋은 금수강산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에 녹은 수소이온 농도(pH)에 따라 산성수와 알칼리수로 나누기도 한다. pH 7.0 중성을 기준으로 이보다 낮으면 산성, 높으면 알칼리성 용액이라고 부른다.
탄산이 품은 청량의 비밀
탄산이 녹아 있는 물은 탄산수라고 한다. 천연 상태에서 발견되는 탄산수는 시원한 약수나 탄산 온천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은 인위적으로 탄산을 물에 녹이는 과학기술을 발명해 ‘소다’라고 통칭하는 탄산음료도 만들어냈다. 흔히 ‘사이다맛’이라고 불리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의 물이다. 청량감과 상쾌함의 대명사로 쓰인다. 탄산이 이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물에 녹아 있던 탄산 성분이 체내에서 기화되면서 기포, 즉 공기 방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방울이 툭 터지는 물리적 자극이 아니라 수소이온, 이산화탄소가 주는 화학적 자극에 시원함의 뿌리가 있다고 한다. 탄산 탈수소 효소(CA-Ⅳ)가 탄산에서 수소이온을 분리해내야 시원함을 느끼고, 이 효소 작용을 차단하면 그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섭씨 15도 이하의 차가운 영역을 감지하는 온도 수용체(TRPA1)에 이산화탄소도 결합하기 때문에 뇌에 시원하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캡사이신의 자극을 뜨거운 감각으로 잘못 인식해서 매운 고추를 먹으면 열이 나듯, 이산화탄소의 자극은 차가운, 시원한 맛으로 잘못 인식되는 것이다. 탄산의 양이 많을수록 더 시원하다고 느낀다.
콜라, 맥주, 막걸리 같은 탄산음료 말고 물김치에서도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는 것은 발효에서 생성되는 탄산 때문이다. 앞서 요리의 과학에서 배웠던 것처럼 발효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생성된다. 막걸리나 포도주를 숙성시킬 때 뽀글뽀글 올라오는 거품이 그것이다. 젖산 발효에서도 곰삭은 김치나 젓갈을 먹을 때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느끼는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구마를 먹고 체했을 때 시원한 음식이 당기는 것은 여기에 뻥 뚫어주는 듯한 청량감이 있기 때문이다.
답답할 때 시원한 한 방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매운맛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너무 자주 먹으면 중독이 되고 위를 상하게 하듯, 시원한 맛도 남용하면 시원하지 못한 평범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마약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그저 무색, 무취, 무미의 담담함으로 살아가는 무심의 경지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