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추억의 보따리
최월성
가을만큼이나 문학의 문턱이 높게만 여겨지던 대학 수필창작반.
쑥스러운 발걸음을 조심스레 들여놓고 오곡백과 익히는 가을 햇살처럼 뜨거운
학우들의 열정속에 더불어 익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터지는 석류알처럼
가슴에 맺혀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하나 풀러볼 용기도 가져본다.
대학에 역사만큼이나 울창한 숲속, 농대 앞 오솔길을 걷노라면 마치 시인이
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풀냄새, 흙냄새, 저마다 피어나는
이름모를 꽃들...
갖가지 향기와 멋을 지닌 풀숲에 섞여 자라난 까마중도 귀엽다. 대롱대롱
달려있는 까마중 열매에서 유년시절 추억을 떠올려본다. 간식거리가 흔치않던
시절, 새벽밥 해먹고 일터로 나서는 들길에 흔히 볼 수 있던 까마중을 보게 되면
얼마나 반갑던지.
까마중은 열매 맺는 동안에도 곁순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가 달리는 순서대로
익어간다. 그렇게 드문드문 익은 것 몇알 따먹고 해질무렵 돌아올 때면 다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게 된다. 낮동안에 또 몇알 익어 나를 반기던 까마중 열매,
빡빡깎은 중머리를 닮았다하여 이런 이름을 갖게된 전설속에, 밭매고 나무하러
다니던 동자승이 까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시장끼를 달래기 위해 따먹었다 한다.
이제는 저만큼 흘러 가버린 유년시절 가난했지만 꾸밈없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가을들녘은 가난한 친정집보다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속담이 어울리던 시절.
밭고랑에만 앉아 있어도 부자된 느낌이었다.
누가 가꾸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라 익어가는 땅꽈리와 개참외,
검정색 무명치마폭에 한가득 따 담으면 속옷이 보이는 부끄러움 따위야 아랑곳
할 필요도 없었다.
내고향 제주도 그 곳은 논이 귀해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 이맘때쯤이면
가을걷이가 시작되던 곳. 콩꺾고 고구마 캐고 조 이삭도 배었다. 해발
600m이하 돌무더기에 자라나는 제주 특유의 모람열매도 깊은 맛은 없지만
헛헛한 아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었다.
담벼락에 담쟁이가 붉게 물들 때면 으름과 깨금, 까만 머루송이도 탐스럽던
들녘이 아른거린다. 가을은 이렇게 유년시절 추억을 한아름 안겨온다.
고향에 향기를 전해주는 가을, 나는 이 가을이 참 좋다. 사색에 젖어 높고
푸른 하늘 향해 서투른 시 한 귀절 띄워본다. 세월이 흐를수록 곱게 채색되는
추억, 언제적이던가. 내리쬐던 가을햇살 아래 소 몰고 가던 아이.
패랭이를 푹 눌러 쓴 채 달콤한 머루송이 불쑥 내밀던 우직한 손.그것이
사랑이었던가. 쑥스러운 볼이 붉게 피어나던 그 옛날 지금은 하늘 저편 희미한
그리움으로..
1998.
첫댓글 평생교육원 선배문우님 이시군요.
그 시절을 추억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