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폭풍전야(暴風前夜)
①
백삼호는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끌어가며 어렵게 창가로 다가섰다.
'사랑하는 내 아들 좌혼.... 이 에미가 이런 치욕 속에서도 목숨을 이어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너때문이란다.......'
한편, 포구에서 메고온 술독을 만해전 마당에 내려놓던 백사호는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로 흘러드는 땀을 훔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보았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긴 머리와 벌거숭이인 채 유방을 드러낸 한 여인을!
"......!"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떴다.
창문 안쪽과 밖!
서로를 바라보는 모자의 눈빛이 부딪쳤다.
여인은 괴로움에 비틀거렸다. 너무도 냉막하여 도무지 사람의 눈빛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아들 좌혼의 눈을 본 것이다. 또한 그 눈 속에는 야수와도 같은 증오와 경멸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아! 아들아!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니? 네눈에... 이 에미가 사람으로, 에미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여인 백삼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좌혼, 백사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②
하역작업을 마친 두 척의 범선은 인솔자인 장소덕의 승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현령, 그럼 먼길 조심해 가시오."
연신 빙글거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조탁이다.
장소덕은 마치 소중한 가보라도 탈취당한 듯 마음이 좋지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배로 오르며 버럭 외쳤다.
"물품은 빠짐없이 내렸느냐?"
"예, 나으리. 소인이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곁에 선 포쾌(捕快)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출발해라!"
장소덕은 큰 소리로 외쳤고 조탁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장소덕은 평소에는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작자라고 생각했던 조탁이 오늘만큼은 황제보다 더욱 부럽게 느껴졌다. 그는 코를 휑 풀면서 자신의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범선은 닻을 올렸다.
곧 출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탁은 오색빛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객실에 홀로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녀를 어떻게 요리할까 벌써부터 궁리하고 있었다.
그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억?"
그는 깜짝 놀랐다. 한 인물이 마치 석상(石像)처럼 우뚝 선 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 감히 누구 앞이라고......."
노갈을 터뜨리던 조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나이의 이마에 푸른색의 영웅건이 둘러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황금색 수실로 동(東)이란 문자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놈은?'
"조도주. 난 동창의 왕승(王升)이라 하오."
삼십대 중반의 바로 갑판 위에 서 있던 삼 인의 동창 소속 무사 중 한 명이었다. 조탁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범선은 막 출항하는 중이었다.
그가 언제 배에서 내렸는지 그는 보지 못했다. 동창 무사 왕승은 전신이 한 자루의 검처럼 싸늘한 예기를 뿌리고 있었다.
"여, 여긴 국법에 의해 내가 관장하는 곳이오. 어째서 허락도 없이......."
조탁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왕승은 차갑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한마디만 하고 떠날 것이오."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조탁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하실 말씀이라면?"
왕승은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방금 도착한 아가씨를 잘 부탁하오. 앞으로 조도주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관리들은 아가씨를 대함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시오. 만에 하나, 아가씨의 신상에 조금이라도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나와 동료들은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오. 그리고 그날... 이 섬은 피바다에 잠길 것이오."
조탁은 땀이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왕승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부디 국법만을 믿고 내 충고를 무시하는 우(愚)를 범하지 마시오. 난 이미 언제든 국법을 거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소."
그렇다.
동사군도는 황명에 의해 호송관과 수인들 외에는 어떤 자도 출입을 금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왕승은 이미 황명을 어긴 중죄를 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는 태도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잘 알아 들었으리라 믿고 가 보겠소. 결코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없기를 바라오."
말을 끝낸 왕승이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잠깐!"
어느새 조탁의 뒤에 다가와 있던 곽초량이 싸늘한 일갈을 발했다.
"귀하는 누구요?"
날카롭게 뻗어있는 검미를 찌푸리며 왕승이 물었다.
"본인은 황궁어의 곽초량이오."
자부심이 실려있는 곽초량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왕승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용건은?"
곽초량은 거드름을 피우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런 무례한 방문을 왕야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순간 왕승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반면 조탁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으며 곽초량을 돌아보았다.
"그래, 이제 보니 그랬었군."
신음을 흘리며 왕승은 곽초량에게 다가섰다.
"네놈이 언급한 왕야란 물론 건친왕을 말하는 것일테지."
곽초량은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라고?"
막 노성을 지르려던 곽초량은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헉!"
분명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왕승의 어깨 위에 걸려있던 검이 뽑혀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충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본인도 한마디 첨언을 하지. 조금 전 내 경고는 네놈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유효하다. 설사 네놈들의 배후에 어떤 자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네놈의 성이 곽가라 했는가?"
곽초량은 태어난 이래 이렇게 긴장하긴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가, 네놈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본인은 동창의 십이수라검(十二修羅劍)의 수장(首長)인 냉혼검(冷魂劍) 왕승이다. 네놈이 모시는 왕야에게 이렇게 고해라. 왕승과 그의 형제들이 머지않아 이 섬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그 말을 전하면 틀림없이 후한 상을 받을 것이다."
"......!"
곽초량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악몽 같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 뿐이었다. 왕승은 고개를 돌려 섬뜩한 안광으로 조탁을 쏘아보았다.
"조도주, 다시 한 번 말해둔다. 아가씨를 능멸하는 자, 그자가 누구라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삶에 일말의 미련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왕승은 검을 제 자리에 꽂으며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섬뜩한 눈길을 보냈다. 이어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범선은 이미 삼십여 장 밖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왕승은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갔다. 단숨에 이십여 장을 날아간 그의 몸이 하강하는 듯 싶더니, 범선으로부터 누군가 나무토막을 던졌다.
팍!
바다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발로 차며 왕승은 다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은 후 갑판에 가볍게 내려섰다.
실로 신비막측한 경신술이었다.
범선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잠시 후에는 수평선상의 두 개의 검은 점으로 화하고 말았다. 조탁과 곽초량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감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거야, 막 되먹은 놈 같으니라구!"
곽초량은 목젖을 쓰다듬으며 투덜댔다. 그는 특히 조탁의 면전에서 치욕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조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색이 무관이다.
더구나 용담호혈(龍潭虎穴)로 일컬어지는 건친왕부 내에서 서열 백위 안에 드는 무공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던 그의 체면이 왕승으로 인해 형편없이 구겨진 것이다.
"허허.... 알 수 없는 일이군. 왕야께 변고가 있을 리 만무한데 어찌 저런 불한당이 이곳까지 와 흰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아! 덥다, 더워! 뙤약볕 아래 오래 있었더니 머리에 김이 다 나는군."
곽초량은 공연히 너스레를 떨며 몸을 돌렸다.
③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진류(陳留), 양주(梁州), 변경(卞京)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고도(古都)로 명성이 자자한 기승절경이 즐비하여 풍광이 뛰어날 뿐아니라 문물이 번창하고 시황(市況)이 성하여 수많은 인파가 넘쳐나는 대도였다.
동가(東街)의 만화대로(萬華大路) 변에는 한껏 치장을 한 주루, 객잔들과 갖가지 점포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 있는 바 초가을 저녁의 미풍을 맞으며 오가는 행인들이 대로에 넘쳐 흘렀다.
만화대로의 끝에는 순천부(順天府)의 황궁에 못지않는 웅대한 규모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당대무림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무림군왕성(武林群王城)이다.
역대의 무림제파들이 대부분 도성이나 저자거리를 피해 산이나 인적 드문 곳에 자리잡는 데 비한다면 무림군왕성이 대도인 개봉의 번화가를 본거지로 삼은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용비천군(龍飛天君) 남궁혁(南宮赫).
그는 수백 년의 맥을 이어온 남궁세가를 발판으로 무림군왕성을 일으켰다. 태화천이 갑작스럽게 몰락한 이후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강호를 평정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무림의 지존이 된 것이다.
그는 파천황교가 등장하면서 몰락해 버린 가문을 십수 년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오늘날의 무림군왕성으로 부활시킨 초인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신공절학은 오랫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스스로 창안한 독보적인 것으로 그동안 수없이 치룬 사마외도(邪魔外道)들과의 격전에서 그 가공스런 신위를 충분히 떨쳐 보였다.
그 누구도 그에게 삼초지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룡헌(潛龍軒)은 군왕성의 내성에 위치한 칠층으로 이루어진 수상누각이다. 이 수상누각은 성주 남궁혁이 귀빈들에게 주연을 베풀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
지금 잠룡헌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홍목(紅木)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삼십여 명이 앉아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사마의 무리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명문정파의 지존들인 것이다.
상석의 용좌(龍座)에는 가슴까지 내려온 풍성한 백염을 쓰다듬으며 만면 가득히 부드러운 웃음을 담고 있는 인물이 앉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군왕성주 용비천군 남궁혁이었다.
가슴에 금룡의 자수를 새긴 곤룡포와 허리에 주황색 채대(彩帶)로 격을 갖춘 의관만 보더라도 위엄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남궁혁은 비록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안으로 갈무리한 신광(神光)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은은히 번쩍여 한 시대를 관장하는 대영웅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좋소. 그렇다면 여러분들께서 새롭게 결성될 태자당(太子黨)에 적합한 영재들을 추천해 주시오."
오늘 잠룡헌의 회합은 향후 무림에 중대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군왕성주 남궁혁이 제안한 태자당에 관한 긴요한 회의였기 때문이다.
남궁혁의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야 사십대의 중년미부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태자당은 각 문파의 대를 이을 후손이나 수제자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비록 경륜이 일천하고 자질도 미흡하지만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는 제 여식을 성주님께서 거두어 주시면 저희 화산파(華山派)로서는 큰 경사가 될 거예요."
남궁혁은 첫 발언이 나오자 반색을 했다.
"오호! 연문주의 여식이라 하면 화산옥검(華山玉劍) 연채령(燕彩玲) 낭자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오? 어린 나이에 화산파의 비전을 모두 깨우쳤다는 기재 중의 기재이거늘 내 어찌 마다하겠소?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이오."
"성주님의 칭찬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너무 과분하신 말씀이에요."
화산파의 장문인인 매화십검(梅花十劍) 연백경(燕白鏡)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비록 겉으로는 겸양하는 척 했으나 기실은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유별났던 그녀였다.
그런 차에 군왕성주가 군호들 앞에서 찬사를 보내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때 우람한 체구의 중년대한이 컬컬한 음성으로 발언했다.
"연장문인께서 장중보주(掌中寶珠)를 내놓으시는데 이 탁모가 어찌 사양하겠소이까? 비록 우둔하기는 하나 장차 금사신궁(金獅神宮)을 이끌어 나갈 소생의 장자(長子)를 성주님께 맡기려 합니다. 부디 엄히 가르침을 주시기 바라오."
벽력천극(霹靂天戟) 탁발륜(卓拔崙)이었다.
그는 독문병기인 풍뢰화극(風雷火戟)으로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 낸 금사신궁의 궁주였다.
과거 파천황교에 죽음으로 항거했던 선친의 뜻을 이어 악의 무리들을 척결하는 일에는 선두에 섰던 열혈인이기도 했다.
"잠깐, 성주! 이 쓸모 없는 퇴물도 한마디 해야겠소이다."
창노한 음성이 터지자 장내의 군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한 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황갈색 도포를 걸친 도인으로, 장백파(長白派)의 장문인 무진도장(無盡道長)이었다.
오 년 전 무림군왕성의 출범 때부터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무림의 원로 중 한 명인 무진도장은 노안으로 군웅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이 퇴물도 차기 장백파를 이끌어갈 제자를 군왕성에 의탁하겠소. 더불어 몇 명의 영재들을 함께 천거하고자 하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태자당에 입당해야 할 이 시대 최고의 기재들이라 할 수 있소이다.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계시는 용봉칠영(龍鳳七英)이외다."
용봉칠영!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들이다.
그들은 당금의 무림천하가 공인하고 있는 절세의 기재 칠 인을 말했다.
그중에는 군왕성주의 아들인 칠절신군(七絶神君) 남궁청운(南宮靑雲)과 그의 누이 천향옥녀(天香玉女) 남궁소연(南宮小蓮)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그밖에도 백병지왕(百兵之王)으로 일컬어지는 검에 관한한 최고의 달인만을 배출해 온 철검장(鐵劍莊)의 소가주 비천검(飛天劍) 철무영(鐵武榮)이 있었다.
또한 오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황보세가(黃甫世家)의 금지옥엽인 벽월선자(碧月仙子) 황보수선(黃甫水仙), 지난 날 파천황교에 대항하기 위해 무림의 태두인 소림사와 무당파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전인 혜왕(彗王)을 비롯하여.......
독(毒)과 암기(暗器)에 관한한 천하제일가문인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백 년 이래 최고의 기재인 금적수재(金笛秀才) 당세곤(唐世昆), 무림출도 일 년만에 흑도의 거물 삼십여 명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신비의 청년무사 무영객(無影客)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용봉칠영!
그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능히 한 시대의 제왕이 되기에 충분한 재목들이었다. 다만 불행이라면 한 시대에 한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의 기재가 동시에 탄생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기도 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그야,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허허! 용봉칠영이 빠져서야 태자당은 유명무실할 뿐이 아니겠소?"
군호들은 앞을 다투어 찬동했다.
"핫핫핫! 노부도 찬성이오!"
문득 잠룡헌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그는 금관(金冠)과 금의화복(錦衣華服)을 입고 있는 비대한 체격의 거두인(巨頭人)이었다.
만금대인(萬金大人) 호금수(胡金壽)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되는 거구였는데 좌중의 군호들과는 이질적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즉,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상계(商界)에 속한 거물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명물 만화루(萬花樓)와 만보점(萬寶店), 중원의 최대규모의 만해표국(萬海驃局)과 만금전장(萬金錢莊) 등을 소유하고 있는 대부호였다.
세인들은 그가 대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황궁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보다 많다는 일설이 나돌 뿐이었다.
그가 무림인이 아니면서도 이 회합에 참여한 것은 군왕성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군왕성이 출범할 때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재정의 반 이상을 후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왕성의 신위만큼이나 그는 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군웅들 중에는 그런 호금수에게 은연중 불만이 없지도 않았으나 군왕성과의 관계 때문에 아무도 감히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금수는 거대한 머리를 갸웃거리며 탁성으로 말했다.
"우리 성주님께서 태자당을 만들고자 하시는 까닭이 무엇이겠소? 그것은 제마멸사(制魔滅邪)를 위한 부단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곳곳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사마의 무리들을 반드시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니겠소?"
"......."
군호들은 모두 침묵했다.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호금수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구천마교(九天魔敎)와 사사련(邪邪聯)은 천 년의 마맥을 이어온 가공할 능력을 갖춘 존재들이오. 그런 마인들과 맞서야 할 태자당이 아니겠소? 그러니 용봉칠영이 빠지면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호금수의 열변(?)에 몇몇 군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일개 상인이 무림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뻔히 아는 얘기를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는 꼴이 눈에 거슬린 것이었다.
그러나 호금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는 용봉칠영 중 사영(四英)의 부친이 있으니 먼저 그들의 입당부터 경하하는 것이 어떻겠소?"
"허허허! 백 번 옳은 말이외다. 호대인의 말씀대로 그럼 본인의 자식놈들부터 입당시키도록 하겠소이다."
군왕성주 남궁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두 사람에게 향했다.
나란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은 황보세가의 가주 신주수사(神州秀士) 황보일학(黃甫一鶴)과 철검장의 장주 검존(劍尊) 철자성(鐵仔星)이었다.
두 사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무언중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체념의 빛이 순간적으로 오갔다.
이윽고 황보일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태화천의 무혈신화를 이뤄보리라는 성주의 뜻을 어찌 거역하겠소이까?"
태화천의 무혈신화!
그것은 무림인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무한한 감동이었다. 군호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남궁혁이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고맙소이다. 황보가주."
그의 음성에는 진심이 배어 있는 듯했다.
군웅들은 모두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혁의 가문인 남궁세가와 황보세가 간에 지난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견원지간의 사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가문은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란 명예를 놓고 수백 년간 팽팽하게 대립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대립 구도는 파천황교의 등장으로 확연한 전환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궁세가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멸문(滅門)을 택하느냐 굴욕적인 굴복을 택하느냐의 기로에서 파천황교의 십이마존에게 영부를 바치며 무릎 꿇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반면 황보세가는 소수의 군소방파들과 함께 멸문을 각오하고 필사의 항전을 펼친 바 있었다.
뒤이어 태화천이 파천황교를 무너뜨리자 황보세가는 세인들의 칭송을 받으며 당당한 명문으로 중원제일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반면 남궁세가는 무림계의 싸늘한 시선을 피해 십수 년 간을 은둔에 들어갔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태화천이 의문의 실종으로 몰락한 지 오 년이 지났다.
강호에 모습을 감추었던 남궁세가는 다시 강호에 나타났고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욱이 남궁혁의 가공할 신공과 탁월한 영도력은 삽시에 무림을 평정하며 무림군왕성을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두 가문의 성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남궁세가는 명실상부한 무림의 종주가(宗主家)가 되었으며 황보세가는 상대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은 황보세가의 행보에 주목했다.
과연 그들이 남궁세가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보세가의 처세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특히 가주인 황보일학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남궁혁이 이끄는 무림군왕성의 뜻에 추호도 거슬림이 없이 따라주어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오늘만 해도 그러했다.
그는 잠룡헌의 회합에 기꺼이 참여했으며 흔쾌히 자신의 일점혈육인 황보수선을 태자당에 입당시키겠노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행동은 당연히 군호들을 감동케 했다.
한편, 용봉칠영중 비천검 철무영의 부친인 검존 철자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만금대인 호금수가 컬컬한 음성으로 물었다.
"철장주께서는 어찌 말씀이 없으시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철자성에게 쏠렸다. 특히 남궁혁의 얼굴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철자성이 무림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별호인 검존이 말해주듯 검도(劍道)에 관한한 남궁혁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무림계 최고의 검의 달인이었다. 또한 평소 의(義)와 협(俠)을 생명보다 중시하는 성품 탓으로 강호인치고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황보일학과는 태화천 시대부터 피로 맺은 의형제지간으로 두 사람은 군왕성과는 독자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었다.
철자성은 자신에게 쏠린 군호들의 시선과 호금수의 추궁(?)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돌려 황보일학에게 말했다.
"형님, 소제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뿐만 아니라 남궁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황보일학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막 뭐라 말하려는데.
"거 무슨 소리요? 이곳에 모신 모든 분들이 난세를 평정코자 스스로 혈육을 내놓아 무림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철장주만이 대의를 외면하는 것이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만금대인 호금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철자성의 얼굴이 처음으로 호금수에게 향했다. 그의 기다란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호대인은 지금 본인을 질책하는 것이오?"
"......!"
호금수는 철자성의 눈빛에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예기를 느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헛험! 내 어찌 천하의 검존을 질책할 수 있겠소이까마는... 허허! 아마도 철장주의 자식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는가 보오? 어찌하여 태자당의 입당을 거부하는지 이해가 안가서 말이오."
호금수의 말에는 다분히 조롱기가 배어 있었다.
군호들은 가슴을 졸였다. 그들은 대쪽 같은 철자성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철자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지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을 들어 호금수를 지목하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간덩이가 부은 돈벌레 한 마리가 군왕성의 물을 더럽히고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들었건만 오늘 보니 사실이었군! 이놈!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방금 뭐라고 지껄였느냐!"
철자성의 냉혹한 일갈에 호금수의 안색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다. 이때였다.
"철장주, 진정하시고 그만 앉으시구려."
남궁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섰다. 황보일학도 철자성의 소매를 당기며 만류했다.
"철노제,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시는가? 더욱이 이곳은 여러 군호들께서 함께 하고 있는 자리가 아닌가? 어서 앉으시게나."
"끄― 음."
철자성은 의형 황보일학의 손길만은 뿌리칠 수 없는 듯 어쩔 수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이렇게 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말았다.
남궁혁은 좌중을 둘러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태자당의 입당은 결코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아니되오. 비천검 철무영 소협의 입당 문제는 철장주께서 좀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니 호대인도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될 것 같소이다."
부드러우나 위엄있는 말이었다. 호금수는 급히 그 큰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성주께서 그리 하라시면 따르지요."
하지만 한순간에 중인들 앞에서 하찮은 돈벌레로 전락해 버린 그의 심사는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찌 하랴!
그는 감정을 앞세우는 무림인과는 틀렸다.
냉철하게 잇속을 차리는 장삿꾼답게 벌써부터 그는 득과 실의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그것은 당대 최고의 검객인 검존에 대항해 보아야 묘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흐흐! 오늘날까지 한 푼의 손해도 본 적이 없는 나 호금수다. 기필코 오늘 받은 모욕은 백배, 천배로 돌려주마!'
그는 내심 이를 갈며 이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문득 황보일학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좌중을 향해 물었다.
"용봉칠영 중 남은 삼영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그의 말에 제일 먼저 답한 것은 사각진 턱에 피부가 검은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사천당문의 후예인 금적수재는 소생이 직접 찾아가 의향을 알아 보겠소이다."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소이다. 진문주께서 나선다면야 당문에서도 호의적으로 검토할 것이라 생각하오."
중년인은 신도문(神刀門)의 문주 뇌전도(雷電刀) 진충이었다.
그는 광활한 사천성 일대에서 당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었다. 같은 영역에 속한 당문과는 빈번한 교류를 통해 일찍부터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천 당문은 그의 요청을 쉽게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뒤이어 술 대신 차를 음미하던 무진도장이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량수불.... 공교롭게도 오늘 회합에는 소림과 무당의 두 분 장문인이 모두 참석하지 않으셨으니 이 퇴물이 소림사로 나들이 겸 들러 소림 방장과 혜왕을 만나 보겠소이다."
남궁혁은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하오이다. 무진도장."
비록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처신하고 있었으나 남궁혁의 미간에는 불편한 심기가 깃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오늘의 회합에 불참한 무림명숙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편으로 일일이 초대장을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통고도 없이 이십여 명이나 불참하는 통에 회합은 진작부터 김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철자성과 호금수의 대립으로 인해 가뜩이나 썰렁한 회합이 더욱 볼품없게 전락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남궁혁의 가슴속에는 은연중 노기가 치밀고 있었다.
매화십검 연백경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영객이 남는군요. 어쩌지요? 그는 내력불명이니 이 넓은 중원천지를 찾아 헤맬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군요."
남궁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영객은 본성의 일월단(日月團)을 통해 찾아보면 될 것이오."
연백경은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일월단이 움직이면 쉽게 해결되겠군요!"
일월단.
그것은 군왕성의 눈과 귀였다. 중원천하에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일월단의 천라지망(天羅之網)에 의해 남궁혁은 천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일월단은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활동하는 천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이었다.
그들 중에는 주루의 점소이나 기루의 기녀, 농부, 나뭇꾼, 중, 거지, 심지어는 사창굴의 창녀나 백정 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서로간에도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철저히 비밀이 유지되는 조직이었다. 강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하늘을 속일 수는 있어도 일월단의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다.
회합은 끝났다.
일단 용봉칠영의 문제는 매듭 지어졌고, 참석 중인 각 방파의 지존들은 자신들의 혈육이나 수제자를 태자당에 입당시키겠다는 공언을 했다.
④
광대한 무림군왕성의 후면에 위치한 잠풍각(潛風閣)은 성주 남궁혁의 거처로 작은 가산(假山)을 등진 채 빽빽한 자작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잠풍각의 한 방안.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미백염의 용비천군 남궁혁과 군왕성의 총관(總官)이자 일월단의 단주이기도 한 신산(神算) 소손방(蘇孫邦)이었다.
소손방은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턱밑에 짧은 염소수염을 기른 음침한 인상의 위인이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는 천하를 뚫어보는 지모가 담겨져 있는 듯 쉴새없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군왕성의 실질적인 이인자였다.
그러나 외부에는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설사 알고 있다해도 그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고 있었다.
소손방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성주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아직은 방심을 할 때가 아닙니다."
남궁혁은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일이야. 아직도 마음을 열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그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다수의 불참자로 인해 썰렁했던 회합의 분위기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손방의 외눈에서 살기가 번쩍거렸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본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됩니다. 그 같은 행동은 본성의 존엄을 해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태화천의 망령에 사로 잡혀있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해야 합니다. 당금 무림은 태화천이 아니라 무림군왕성의 천하임을 뚜렷이 새겨줘야만 합니다."
남궁혁은 탄식했다.
"총관, 아직도 각처에서 사마의 무리들이 횡행하는 터에 어찌 동도들과 다툼을 한단 말인가?"
소손방은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은 소수이나 차제에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리지 않으면 공공연히 항명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본성에 정면대응하는 연맹까지도 결성할지도 모릅니다."
소손방의 어조는 단호했다.
남궁혁은 이미 소손방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자신이 무림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도 소손방의 책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그렇다면 그 고집 센 위인들을 설득할 묘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소손방의 음성이 은밀해졌다.
"성주님, 소인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묘안이 있습니다."
'역시!'
남궁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래, 무언가? 그 묘안이?"
"오늘 확정된 태자당의 젊은 기재들을 남궁 공자님께 맡겨 천하를 주유하게 함으로써 모든 우환은 해결될 것입니다."
"천하주유?"
"그렇습니다. 이미 공자님의 무예는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감히 맞설 자가 없습니다. 태자당의 출범에 즈음하여 무림의 명숙들에게 예를 갖춘다는 명분으로 방문하게 하는 것입니다."
"흐음, 그래서?"
소손방의 각진 얼굴에 음침한 빛이 떠올랐다.
"소위 명숙들이란 자들은 선배의 예로 공자님의 방문을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때 공자님께서는 하루 이틀씩 그곳에 머물면서 지닌 바 무공신위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명숙들은 간담이 써늘해지게 되어 자연히 항명하려는 마음이 절로 꺾이게 될 것입니다."
남궁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일부러라도 문제를 일으킨단 말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명숙들 체면에 결코 공자님을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으음, 그러다 청운의 신상이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소손방은 괴이하게 웃었다.
"후후,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종리무(鍾里戊)를 붙여 호위토록 할 것입니다. 거기다 함께 동행하는 명문들의 후손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공자님을 위해하겠습니까?"
남궁혁의 미간이 펴졌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군. 결국 천하의 명문가의 자손들이 모두 움직이는 것이니 아무도 흑심을 품지 못하겠군."
소손방의 음산한 얼굴에 한 가닥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뿐만 아니라 태자당을 이끄는 공자님의 활약은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결국 무림군왕성의 천하를 굳히게 되는 효과를 보게 될 겁니다."
남궁혁은 자신의 무릎을 쳤다.
"과연! 총관의 묘책은 두 마리 토끼를 잡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군."
"황송합니다. 후후, 성주님께서 하실 일은 그저 젊은 용봉들의 유람길에 노잣돈이나 두둑이 건네주시면 됩니다."
"주지, 암! 두둑이 줘야지. 허허허헛.......!"
어둠이 깔린 잠풍각에서 남궁혁의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울려 나왔다.
같은 시각.
편월(片月)이 어슴푸레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한 인물이 부복하고 있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봉으로 둘러싸여 인적은 고사하고 짐승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단애(斷崖)의 정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십대 중반의 문사였다.
은은한 월광 속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하는 그의 눈은 심연과도 같아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듯했다. 또한 수양의 깊이를 짐작케 하듯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와 청수한 이마, 곧게 뻗은 콧날은 고매하고 강직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 문무(文武)를 겸전한 중년문사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에게 최상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마군자(魔君子), 너의 노고가 대단함을 알고 있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낮고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이한 것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
나이조차 추측할 길 없는 그 음성에는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이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년인은 급히 이마를 땅에 박으며 대답했다.
"주군(主君),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소신의 목숨은 이미 주군을 위해 바친 지 오래이니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별호에 마(魔)자가 붙어있는 중년문사의 음성은 야공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럽고 온화했다.
"마군자, 본좌 앞에서 그리 겸양할 필요는 없다. 천외천(天外天)의 깃발이 천하를 뒤덮는 날 그대는 일등공신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위대한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좀더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날이 오기까지는 지금처럼 모든 일을 본좌 대신 집행해야 한다."
"존명!"
기이한 일이다.
야심한 시각 험준한 고봉에 황제가 출어(出御)했을 리는 없을 터, 주군은 웬말이며 천외천이란 뚜 무엇인가?
"지난 백 일간의 천하정세에 대해 보고하라."
어디서 들려오는지 방향조차 감을 잡을 수 없는 예의 음성이 메아리를 일으켰다.
"예! 아직은 군왕성이 독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교의 후예인 구천마교와 사도의 종주인 사사련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손잡을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녹림(綠林)이 최근 연맹을 이뤘으며, 백도의 동정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
"예, 최근 군왕성의 독주를 꺼려하는 몇몇 문파들과 무림명숙들이 군왕성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회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무림에 태풍이 불 것이 분명했다.
"이미 예상한 바로군. 한데 좀처럼 뭉치지 않았던 녹림이 연맹을 이뤘다니, 주도한 인물은 누군가?"
마군자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게도 아직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현재 그자는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바에 의한 것은......."
마군자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보고를 계속했다.
"그자는 오십대 초반쯤 된 것 같으며 십팔반무예에 모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불어 지략도 겸비한 인물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중원쪽의 무공과는 이질적이란 소문도 들립니다. 소신은 이미 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장 잠입한 밀정들에게도 세세히 보고하라는 전갈을 해두었습니다."
예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천지계(逆天之計)에 변수가 파생했군. 녹림은 오래전부터 본좌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더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속히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라. 아울러 포섭이 가능한지도 알아보도록. 알겠느냐?"
"존명!"
"그럼 황궁은 어떤가?"
마군자는 이마를 땅에 대며 공손히 대답했다.
"건친왕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의 측근들은 이미 황궁의 요직을 절반 이상 차지했습니다. 특히 동창(東廠)과 어림군(御臨軍)도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흐음! 동창과 어림군까지? 역시 건친왕은 일대효웅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로군."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본좌는 반 년간의 폐관(閉關)에 들 것이다. 그동안 그대는 역천지계를 집행함에 혼력을 다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존명!"
먹구름이 밀려와 편월을 삼켜버렸다. 사위는 칠흑 같은 암흑에 휩싸이고 말았다. 삼라만상이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폭풍이 불려는가?
먹구름이 가득 덮힌 하늘에서는 습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후두둑 흔들리는 듯했다. 아직은 고요하기만한 세상이다.
첫댓글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