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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을 믿는 믿음 11:17~2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 11:23~31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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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습니다. 이삭, 야곱, 요셉이 믿음으로 행했고,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유월절 예식을 행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믿음으로 라합이 구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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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을 믿는 믿음 11:17~22
믿음의 외적 증표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기를 낳기에는 이미 죽은 몸과 같은 사라에게서 출생한 이삭을 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능력을 확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았습니다. 이삭은 장차 있을 일을 확신해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습니다(창 27:27~40).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었습니다(창 48:12~20).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며, 임종 때 자신의 유골을 옮겨 줄 것을 유언했습니다(창 50:25).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 야곱, 요셉으로 대를 이어 갑니다.
● 더 깊은 묵상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기에 내가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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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 11:23~31
믿음은 위기에서 더욱 빛납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석 달간 모세를 숨겼습니다(출 2:2). 그것은 애굽의 바로 앞에서 생명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거절의 믿음’입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칭호를 거절했습니다. 잠시 누릴 죄악의 권세보다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그는 상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출애굽의 믿음’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출애굽했고, 유월절을 지켰으며, 홍해를 건넜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믿음의 사람 모세가 선택한 가치는 무엇이었나요?
‘세상의 즐거움’과 ‘그리스도인의 고난’ 중에서 나는 무엇을 택하나요?
한절묵상:히브리서 11장 30절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관문인 여리고 성문은 고고학 사료에 따르면 성벽 두께가 약 2m, 높이가 약 10m 이상 되는 굳건한 문이라고 합니다. 여리고성은 전략으로 정복할 수 있는 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를,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믿음은 무모해 보이는 현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기적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과 믿음'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믿는 사람은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 데이비드 윌커슨
오늘의 기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인생사마저 하나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제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확고한 부활 신앙으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하소서. 가장 값진 약속인 구원의 복음을 일가친척과 다음 세대에게 전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49 예수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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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기꺼이 고난을 선택하고, 기꺼이 당신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면서,
당신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바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보이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의를 택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삶은 고난이 따르지만 하나님이 주실 상이 큽니다.
1. 믿음으로 모세는 왕자의 자리를 거절하였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 받는 길을 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더 값진 것으로 여겼음(23~26v)
2. 믿음으로 모세는 이집트를 떠났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홍해를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건넜음(27~29v)
3. 믿음으로 이레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성벽이 무너졌고,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영접해 주어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였음(30~31v)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세상적인 편안함과 안락이 아니라,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
② 세상적인 권력과 권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참되신 왕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그분을 위해 기꺼이 드려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③ 믿음의 삶이 어리석게 보인다 할지라도, 승리의 길이 아니라 패배의 길처럼 보이고, 실패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그 어리석음을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을 바꾸어 주시길 바라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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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런 하나님께 어찌 감사 없이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우리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아닐까요?
세상을 살면서도 그 고백을 따라 본향을 바라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며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특징이자 특권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남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에고이스트들입니다. 심지어 빠져나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택하시고 믿음을 주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사용되는지 모르거나 차후에나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 나타나는 성도의 특징은 누구라도 자신을 위해 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선한 목적 안에서 사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성도만의 특권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면 사람은 그대로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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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관한 내용으로,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그리고 기생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리고, 이삭, 야곱, 요셉은 믿음으로 행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라합이 구원받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약속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믿음, 미래를 바라보는 이삭, 야곱, 모세의 믿음, 상 주심을 바라보는 모세의 믿음, 구원을 바라보는 라합의 믿음 등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 모세 부모의 믿음에 관한 해설입니다. 부모는 그 아이가 단순히 용모가 뛰어나기에 숨긴 것이 아닙니다. 숨긴 이유는 그 다음 문장인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에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애굽 왕 바로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지요. 이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여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모세 부모의 믿음은 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나일강에 띄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 구원을 받은 기생 라합의 믿음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기생이라는 말은 우상의 신전에서 종사하는 성창이 아니라, 일반 창녀를 말합니다. 그녀는 그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다윗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 유대 민족을 구한 왕비 에스더와 더불어 구약의 대표적인 여인일 뿐만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호수아에 따르면 그녀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요단 서편에 있는 나라들을 진멸시켰다고 진술합니다. 더불어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은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소문으로만 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은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는 일은 동족에게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는 모험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녀의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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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틀 속에서 사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틀에서 벗어나면 불편해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그렇게 나타나야 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다르게 나타나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이고 자비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어느 날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여태껏 만난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입니다. 자신을 선택하고 여태껏 사랑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실리 없다는 것이죠.
이제 아브라함은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틀 안에 있는 하나님인지 아니면 틀 밖의 하나님인지를... 그는 놀랍게도 후자 하나님을 택합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자기가 믿고 싶고 자신의 이익이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틀에서 벗어나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정녕 하나님되신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아니 넘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을 믿음의 후손들에게 정확하게 소개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방법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현하시는 방법, 지도하시는 방법, 인도하시는 방법 등 천차만별입니다. 성경을 보면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것도 딱 한 번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도, 양털 표징 보이신 것도 딱 한 번입니다. 하나님은 진부한 것을 싫어하고 대신 다양한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궁무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그분의 놀라운 조화를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틀 속에 가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광활한 우주를 한 뼘으로 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은 대개 맛이 없지만, 건강에는 좋습니다. 입에 맞는 인스턴트 음식을 즐기면 건강을 해칩니다. 주로 그분께서는 땅에서 나온 원재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가공식품이냐? 조리할 것이냐?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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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방향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에 자기를 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했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살리실 줄 믿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임종할 때에 죽을 처지에 놓인 자기를 보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포기했을 때에
당할 손해와 괴로움을 염려하지 않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고,
애굽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거대한 성에 비해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능히 세우기도 하시고 헐기도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믿음이 없어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다 멸망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인자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집의 푸른 감람나무 같이 번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52:7~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시선을 나를 향하지 아니하고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 향하기 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3)
그리하면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또 베푸실 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시123:1~3)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눈으로 그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아 그를 죽음으로부터 담대하게 지켰고
모세는 믿음으로 풍요로운 안전한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피 뿌리는 의식으로 사망의 권세가 넘어가게 하고 홍해를 건넘으로 과거 자신이 강에서 건져짐과 같이 죽음을 통과한 부활을 경험하였습니다.
어이없는 방법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눈앞에 보이는 칼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믿음으로 두려워하여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은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가장 연약한 부분, 그리고 부족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론 재물로, 자녀로, 관계로, 그리고 질병으로 큰 벽 앞에 서있습니다.
이때 믿음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의롭다 여김 받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 가운데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믿음의 길을 담대하게 좇아가는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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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13-19)
아브라함의 모든 삶은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본토에서 가나안땅으로 나온 것, 가나안땅에 거하면서 장막생활을 한 것, 독자 이삭을 바친 것, 이 모든 삶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한평생을 장막에 거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또한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19). 우리의 삶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
1.믿음으로 이삭(20-22)
믿음으로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했다는 것은 장차 있을 일들을 믿음으로 미리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또 믿음으로 야곱이 죽을 때 요셉의 아들을 축복했다는 것도 믿음으로 장차 있을 일들을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또 요셉의 마지막 유언도 역시 미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유언은 애굽에서 떠날 것과 가나안에 묻힐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앞으로 있을 일을 내다보는 안목 있는 삶과 비전 있는 삶인 것입니다.
2.믿음으로 모세는(23-26)
모세의 삶은 시작부터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바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죽이지 않고 숨겨두었습니다. 또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거절하고, 고난받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한 것도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세상의 잠시 낙을 누리는 삶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3.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27-31)
출애굽사건도 믿음으로 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당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바로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에게 담대함을 줍니다. 또 어린양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장자의 죽음에서 구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으며,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또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멸망당할 자신의 동족과 같이 되지 않고, 믿음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자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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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19절).
저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언급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은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제물로 드렸습니다(17절). 후손을 주시겠다(18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이 이해하기 힘든 매우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19절)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것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오늘날 믿음의 조상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내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의 진리임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영광이 맛보게 될 것임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나 역시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0~22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래 일을 놓고 야곱과 에서를 축복해 주었습니다(20절). 야곱 또한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축복해 주고, 그의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21절). 야곱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가눌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잔한 상태에서도 정성껏 하나님께 경배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임종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확신했으며, 그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부탁(22절)했습니다.
즉, 믿음으로 요셉은 미래를 내다보았고, 하나님은 요셉이 바라보았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40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창 47:31). 기력이 다 떨어진 순간에도 하나님께 경배하였다는 것은 죽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기에, 나 역시도 이런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면 죽음마저도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힘들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생활을 해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희미하게 나마 보이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 약속이 눈앞에서 성취 되어짐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23~26절).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에서 아기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행 7:20) 말하였을 정도로 모세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했습니다. 그의 부모들 역시 태어난 아기로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태어난 모세는 그 즉시로 나일 강에 던짐을 당했어야 했는데도, 모세의 부모는 석달 동안이나 모세를 숨겨 키웠습니다. 이는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보다 더 크고 능력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장성한 모세가 믿음으로 애굽 왕손의 지위를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죄가 주는 즐거움을 잠시 동안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25절)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수고한 데 대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하늘의 상급으로 반드시 갚아 주실 것(26절)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출애굽 여정을 선도하는 믿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낙’은 즐거운 것이지만 즐거운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즐거움이 있기에 절제라는 성령의 은사로 세상적 즐거움을 제어해야 합니다. 반대로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세상에는 생명을 가져다 주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것은 새 생명을 낳는 출산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영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고통이기에 오히려 고통받기를 기뻐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주를 위한 수고와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고통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환난의 인생을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27~28절).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참고 인내하였습니다(27절).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지만, 온 우주 가운데 편만해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않고서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유월절과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하여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자가 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28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린 양의 피를 취해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도록 모세에게 명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장자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보게 하는 특수 렌즈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삶으로 증거하는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는 크나큰 고난과 환난의 삶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해 가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환난의 인생을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원한 가치를 붙잡으며 살아야 합니다(29~31절).
이스라엘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29절). 또한 그들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성벽이 무너졌습니다(30절). 기생 라합도 그 믿음으로 순종해 멸망 당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31절).
홍해를 건너고,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의 정복을 위해 백성들이 한 일은 그 명령을 받았을 때, 엉터리 명령이고, 허무맹랑한 명령이라고 일축하지 않고, 명령에 순종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그들은 무모하게 보이는 하찮은 일에 순종함으로 손쉽게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단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아무런 공로없이 장차 영적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이처럼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에도 감히 도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최후 승리와 같이 부활을 믿고 그 영원한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역사를 기대하므로 모든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서 헤쳐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생을 얻도록 하는 영원한 복음의 가치를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므로 어떤 방해와 장애물에도 넉넉히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히 11:23~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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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절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통해 수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는 명령에도 아브라함은 곧이곧대로 순종했습니다. 외아들 이삭이 죽으면 성립할 수 없는 약속임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칼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만큼 늙어 죽은 자'(11:12)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생명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 생명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실도, 죽음도 저해하지 못하는 믿음의 상상력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우리 삶도 그 말씀의 권능으로 빚어 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내놓으라, 포기하라, 맡기라' 요구하시는 대로 그저 믿고 순종합시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
100세에 얻은 독자를 바치는 믿음이다.
그는 약속을 믿었다.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믿었다.
바칠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믿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22)
나는 어느 만큼 믿고 있는가?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머리에서만 맴도는 믿음이지는 않은가?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길 소망한다.
20-22절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죽음 이후에 성취될 약속을 '실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하나님 약속의 새로운 시작임을 알았기에, 이삭과 야곱은 그 약속을 계승할 자손들을 믿음으로 축복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삶을 마감한 요셉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그곳에 자신의 뼈를 이장해 달라고 믿음으로 유언을 남겼습니다. 믿음은 죽음 앞에서까지 우리를 꿈꾸게 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에도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대로 제물이 되고 있었다.
그의 후손인 야곱도 요셉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는 것이 그들의 유언에 나타나 있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다.
그 믿음을 우리에게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을지라도 믿는 것이다.
그렇게 그 나라를 바라본다.
오늘도 그 나라 백성답게 살기 원한다.
23절 :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은 세상의 대세를 거스르는 용기입니다. 애굽 제국은 히브리 노예를 인종 청소의 대상으로 취급했지만, 모세의 부모는 자기 아이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바로의 명령과 질서를 거스르며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겨 둔 그들의 '믿음'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라는 '실상'(11:1) 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저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대세'라며 좇는 것들에 함께 줄 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용감했다.
그녀의 용기가 민족을 살기는 계기가 된다.
물론 큰 그림은 하나님 안에 있지만 요게벳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다.
믿음의 결과였다.
왕의 명령보다 생명을 보내신 하나님을 더 믿었다.
석 달을 숨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뿐이다.
대중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정의에 서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오늘 살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다수가 옳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릇됨을 알면 과감히 물리칠 수 있을까?
세상이 점점 애굽과 같아진다.
하나님의 뜻 따르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따라야 할 길이다.
요게벳과 같은 믿음을 갖고 싶다.
24-26절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은 죄악이 주는 즐거움 반대편에 있는 고난을 선택하는 의지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영화와 낙을 다 버리고, 노예로 학대받는 자기 백성과 '사귀는'(10:33) 삶을 믿음으로 택했습니다. 모세가 자처한 수모는 그리스도가 참으실 '부끄러움' (12:2)의 그림자였고, 그 실상이신 예수님께서 모세에게 주실 상은 애굽의 그 어떤 보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치에 동참하는 믿음이 내 삶에 있습니까?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모세의 결단은 위대하다.
왕궁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렸다.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
부끄러운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길이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고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악을 선택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네"라고 대답할 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세의 용기가 참으로 부럽다.
그 용기를 갖고 싶다.
27,28절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정말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거짓 왕 바로의 분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두려워했기에, 장자의 죽음을 면하는 방법으로 주신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여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만큼 영적인 긴장도 우리 신앙에 필요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이 믿음이 나에게도 필요하다.
참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참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모세는 궁궐을 떠난 광야 40년도 참아냈다.
바로의 수많은 저항도 참아냈다.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모세와 같은 담대한 믿음이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인내함이 필요하다.
29-31절 :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의 삶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합니다. 홍해 한가운데를 향해 행진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철옹성 여리고를 7일 동안 열세 바퀴 도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 여리고의 신은 거짓이고 나라도 없는 떠돌이들의 신 여호와가 참 신임을 인정하여, 주인을 바꾸고 나라를 바꾸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졌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적국의 기생이 이스라엘 왕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더 우직한 믿음으로, 더 바보 같은 신앙인으로 살아 봅시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을 때 모든 것은 가능하다.
모세의 믿음이 홍해가 갈라지게 했다.
모세의 믿음이 광야 길을 걷게 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짐도 결국은 믿음의 결과였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믿음이 있어야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질 수 있다.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믿음 갖기 원한다.
그 믿음으로 그 나라를 보기 원한다.
그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한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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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믿음의 미래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갇혀 있지 않고 미래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하늘에까지 이어집니다.
1.멀리서 보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완성이기 보다는 미완성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13, NKSV) 앞에서 인용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수많은 자손은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목표점이었습니다.
아주 멀리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따라갔지만 그곳까지 도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기에 그것에 가까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비록 약속한 것을 자신의 시대에 다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그것을 바라보고 가까이 걸어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믿음을 말할 때 사람들의 실수 중에 하나는 '믿음으로 복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고자 합니다. 물론 믿음으로 복을 받습니다. 믿음은 복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그 복을 '이 땅에서의 복'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믿음은 땅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복보다는 먼 미래의 복과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삽니다. 그가 약속으로 받은 것은 먼 미래의 일이며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땅에서 살 때는 길손과 나그네로 삽니다. 그들은 그것이 먼 미래의 일이라 하여 그들이 받을 복이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멀리 있는 그것도 오늘 이곳에 있는 것처럼 즐거워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아주 분명하게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나 미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나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시간의 차이가 존재의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것도 현재의 것처럼 동일하게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2.더 나은 본향
믿는 사람이 하늘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히브리서 11:16, NKSV) 하늘의 것을 갈망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갈망하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탐욕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을 보십시요. 참으로 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하고 다투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면 어찌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름만 믿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이름만 먹칠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십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라면 진정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말씀이 전해졌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9, NKSV) 지금 죽어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살리실 수'도 있고 더 좋은 어떤 것을 주실 수도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현재보다 미래를 더 신뢰하였습니다. 현재보다 미래를 더 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할 때, 야곱이 그의 자녀들을 축복할 때, 요셉이 출애굽 때 자신의 뼈를 가나안에 가지고 가라는 유언을 남길 때에 그들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 미래가 먼 나중의 일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미래를 마치 현재의 일처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미래도 현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일을 현재를 보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미래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나 현재에 주시는 복이나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행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세상 나라가 아니라 신앙인이 이루어가야 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세상 나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오늘 내가 더 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오늘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세상에서 어떤 것을 누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현재에 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본향을 바라보는 것이고 본향의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누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수없이 땅의 것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을 봅니다. 부자이니까, 교회가 부흥하였으니까, 자녀가 잘 되었으니까 등으로 한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어찌 땅의 것으로 하늘에 속한 믿음을 판단하려 하는 것인지 참 안타깝습니다. 믿음으로 궁궐에 사는 것이 아니라 길손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일을 확신하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세상에서 머무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
오늘 본문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믿음의 길을 갔는지를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합니다.
다른 경험을 합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자녀로서 사는 것과 외톨이로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을 믿습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의 중보자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더욱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이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매일 예수님의 중보 속에 하늘의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매일입니다.
매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험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것이 홍해를 건넌 경험이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경험과 같습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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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작은 믿음을 드려서 더 큰 믿음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도록 하시는
그 놀라운 섭리를 오늘도 바라보게 해주셔셔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
성령 충만한 인생이 되도록 오늘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평강으로 덮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지진과 홍수의 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그 붙드심에
온전히 맡기며 나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