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광주대구(구 88)고속도로를 타고 거창과 함양을 지나 남원 IC로 빠져든다. 전북 남원은 경남과 이마를 맞대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수지면 물머리로 525에 있는 수지미술관에 도착했다. 박상호 관장이 우리를 초대한 곳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50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만나는 순간 그 물리적 시간은 그저 세월의 한 매듭에 지나지 않았다. 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박 관장이 전시회를 할 때 한번 만나고 이번이 10년 만이다. 우리 일행의 안전운전을 책임진 윤달호 사장은 평생을 안경사업에 종사한 글로벌 기업인이다. 두 여자분이 동행했다. 한 분은 미술을 전공한 구 교수님이다. 섬유공예 중 펠트 공예를 전공한다. 한 분은 중학교 교사로 퇴직했다. 국어 교사이면서 서예에 조예가 깊다. 우린 대구 경대사대부고 동기들이다. 구 교수와 박 관장은 고등학교 다닐 때 청도로 미술공부를 함께 다닌 인연이 깊은 벗이다.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을 구입해 만든 멋진 미술관이다. 박 관장은 영남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울산 현대여고 미술교사로 퇴직하고, 10년 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와 자신의 미술관을 마련했다. 그동안 들인 공이 한눈에 선하다. 지난 5일부터 4월 28일까지 ‘자연예찬’이란 제목으로 2024년 신년기획전을 열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추상화는 화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도움을 받아도 결국 의미부여는 관람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박 관장은 유홍준 전(前) 문화재청장과 인연이 깊다. 유 청장이 제2회 작품전 때 써준 평론이다. “박상호는 그가 알게 모르게 익어 있는 이 방법 속에서 사실상 많은 비밀스런 조형언어를 체득해 있었고, 그것이 지금 그의 작품 속에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신선한 감동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 관장은 지금까지 300회의 초대전을 했다. 이 분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그는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끝없이 내려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그런 거 같다. 주로 나무를 그리는데,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이 화가를 그리는 듯한 착각을 한다. 작가의 생각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작품이다. ‘나무’라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 있는 그대로를 그리려고 애를 쓴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자연에 무언가를 새겨넣으려고 할 때 그 오브제는 더이상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저절로(自) 그러그러(然)하다.
우린 작품을 볼 때 추상/구상의 장르를 분류하는데 민감하다. 하지만 섣부른 분류는 오히려 작품 자체로 돌아가는 데는 방해물이다. 작위적인 분류를 떠나 작품이 말해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무를 그리되 가능하면 작가는 인위적 조형을 제한한다. 그러면서 지나친 추상이 주는 절제미를 구상적 터치로 보완하고 있다. 그는 나무를 그리면서 나무에게 배우고 있다. 나무는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미움과 사랑이라는 격정의 노예가 되어 살고있는 우리에게 나무처럼 살라고 주문하는 듯하다. 자연은 인위적으로 어떤 일도 하지 않지만, 또한 하지 않는 게 없다. 자연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묵언(默言)으로 위로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 일행에게 베푼 박 관장의 환대에 깊이 감사드린다. 남원예촌이라는 전통 가옥형 호텔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오랜만에 자 본 온돌방이다. 저녁은 대방어 회로 소수 10병을 비웠다. 주로 나와 박 관장이 마셨다. 세월의 무상을 안주 삼아 마셨다.
박 관장은 내년 기획전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외국과 국내를 다니면서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관장의 특기가 어떤 오브제이든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는 것이다. 매우 빠른 손놀림으로 스케치하는 역량이 탁월하다. 술 마시면서 박 관장이 나에게 고마운 약속을 해주었다. “김 교수 글이 너무 좋다. 다음 출간할 책 표지 그림은 내가 책임진다.” 대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외국이든 국내든 동행하면서 박 관장은 그림으로 글을 쓰고, 난 글로 그림을 그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봐도 좋겠다고. 대구로 오는 내내 그의 맑은 우정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얀 세월이 사뭇 애잔했다. 박 관장, 건강하시게.
첫댓글 _()()()_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명징한 그림이
겨울 나목에 서설이 내린 듯 아름답네요.
맑은 우정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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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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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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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