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규X권석준에게 듣는 '전문가를 위한 반도체, Now'
✔ 미·중 패권경쟁 격화… 중국 반도체 산업, 어떻게 흘러갈까
✔ 미국도 안심할 수 없어…경제 대신 안보 택한 속사정
✔ TSMC의 일본 공장, 래피더스의 기세... 일본의 반도체 권토중래 주목
✔ 국내 반도체 R&D인력 부족... 외국 우수 인재 정착 정책도 필요
현대인에게 반도체는 공기와 같다. 어디에나 있고, 그것이 없으면 사실상 (현대인으로서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한국 경제에 있어 반도체는 글로벌 경쟁우위를 가진 몇 안 되는 상품 중 하나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면서, 경기가 안 좋을땐 한국 경제를 수렁에 빠트리는 주범쯤으로 몰리기도 한다. 세계적으로도 반도체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서 지난 수십 년간 만들어진 제조-공급망의 재편을 둘러싸고 미중일 등 강대국들이 전략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2월 29일 <피렌체의식탁>이 개최한 '전문가를 위한 반도체, Now' 포럼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과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반도체 산업의 경제적, 기정학(技政學)적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며, 글로벌 경쟁 상황에서 한국이 처한 위기 인식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국가 차원의 정책 수립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결정적이었던 포럼 현장을 전한다. [편집자 주]
기정학의 시대가 열렸다. 그 중심은 반도체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협력체제를 만드려는 반도체4국동맹 전략 외에 '팀USA'라는 목표로 자국 반도체 기업 육성 우선 전략을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과 갈등으로 산업이 분리되는 상황, 파운드리 시장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민 인텔과 TSMC 공장 유치 등을 계기로 '권토중래'를 꿈꾸는 일본까지. 한국의 반도체 산업 전략은 국가 차원의 전략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중국은 우리보다 10~15배가 넘는 엔지니어를 쏟아낸다. (우리와 달리)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의사가 아니라 엔지니어가 된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포커스를 맞춘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 (임형규, <히든 히어로스 저자>, 삼성전자 전 사장)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이길 경우) 글로벌 반도체 진영이 미국과 중국으로 분리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 시장을 다 버릴 필요는 없다. 미국이 중국을 제재해도 다 하는 게 아니다. 레거시에 대해선 제재하지 않을 거다. 반도체 시장도 시나리오 게임과 같다. 시뮬레이션을 통한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권석준, <반도체 삼국지> 저자,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부 및 반도체융합공학부 교수)
반도체 전쟁의 1차 전장, 파운드리 패권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 한국 반도체 산업'이라는 등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진두지휘한 임 전 사장은 "지난 40년, 글로벌 반도체기술 경쟁의 승자였던 삼성전자는 기존 메모리 분야를 수성하면서도 첨단 파운드리 경쟁력도 함께 확보해야하는 도전에 직면했다"고 상황을 분석했다.
파운드리 산업은 TSMC가 견고하게 1등의 지위를 구축하고 삼성전자가 2위로 추격하는 시장 구도에서 인텔이 2030년 2위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면서 전운이 감도는 상황이다.
임 전 사장은 "(나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의 역사를 2007년 사업부를 만든 때를 기준으로 본다"며 "(독립 사업부로 만들어진 2017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35년된 TSMC보다 여러 면에서 기술력이 뒤질 수밖에 없고, 갈 길이 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TSMC와 격차는 있지만, 우리 반도체 산업이 제조허브로 도약할 기회 역시 여기에 있다"고 기회와 가능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1세대를 건너고 2세대 EUV로 승부하는 인텔의 전략이 성공할 지는 지켜봐야한다"고 전제한 뒤 "고객에게 맞춤형으로 접근하는 인텔의 전략에 대해선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항간에서는 인텔이 공공연하게 파운드리 2위 목표를 내건 데 대해 삼성전자가 자사 공급용 칩과 외부 고객사의 칩 조달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만으로는 인텔의 추격을 따돌리기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즉,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본부 독립법인화 필요성이다.
‘전문가를 위한 반도체, Now’ 포럼의 강연자로 나선 임형규 삼성전자 전 사장. 그는 반도체 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우리나라가 첨단 제조를 배울 만한 나라가 됐다."라며 "(해외 우수 인력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사진=백범선 메디치미디어 영상팀장
기정학 관점에서 보는 중국의 반도체 대응 전략
권 교수는 이날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분석하며, 한국의 대응전략을 시나리오로 전망했다. 특히 중국, 반도체를 둘러싼 기정학 관점의 산업 재인식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기정학이란 기술의 힘이 국제 질서를 재편하고 이로써 세계의 패권을 좌우한다는 시각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격화하는 양상이고, 그 핵심은 반도체다. 미국은 '칩스법'을 만들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보호하고자 하고,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목표를 70%까지 상정했다.
권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흘러갈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권 교수는 중국이 미국에 굴하지 않고 현재와 같은 자급률 제고를 추진한다면, 반도체 생태계가 미국과 중국이 중심된 두 개의 블록으로 쪼개질 것이라 말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었던 ‘미일 반도체 협정’과 같은 조약이 맺어질 가능성이다. 이 경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안정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일본이 1980년대 미일 반도체 협정 이후 반도체 산업에서 쇠락의 길을 걸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중국이 미국 반도체 제재 정책에 굴복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에 큰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경제적 혹은 정치적 불안정성이 생기고 종국에는 반도체 산업이 붕괴하거나 세컨드 티어(Second tier)로 전락할 수 있다고 권 교수는 경고했다.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교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현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모두 안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사진=백범선 영상팀장
미중 경쟁 우위 및 세계 1등국가를 위한 미국의 반도체 패권 전략
미국 역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칩스법과 IRA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고, 해외로 나가 있던 기업들을 자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을 추진한다. 그 이유는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인데, 동아시아 지역에 생산 기지를 만드는 것보다 큰 비용을 초래하는 상황이라 부담이 적지 않다.
권 교수는 "미국의 이러한 선택은 안보적 관점에서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있을 경우 첨단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을 실현하기 위한 공장이나 기반이 중화권에 있다면 미국 입장에서 인질이 잡힌 셈”이라며 “미국은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안보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즉, 반도체 기술은 경제와 산업의 영역이지만, AI 시대에서는 그 자체가 국가 경쟁력에 직결되는 의미다. '기정학'의 중요성은 여기서 시작한다.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날 포럼에서는 일본의 첨단 반도체 기업 ‘래피더스’ 전략에 대한 질문과 답도 오갔다. 반도체 강국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전략이 성공할 지에 대한 궁금함이다.
권 교수는 “일본 정부는 래피더스에 한화 2조 9천억 원 정도의 자금을 투자했으며, 향후 2~3년간 5조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라며 “반도체 산업의 중심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자국으로의 리쇼어링 계획이 여의찮을 경우, 우방국으로의 리쇼어링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권 교수는 “래피더스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인력 수급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 인력은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쇠락하면서 다른 나라로 가거나 은퇴한 상황이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도 전문 인력 확보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도 이 때문이다.
'반도체 권토중래'를 꿈꾸는 일본 정부의 정책이 성공할 지는 미지수이나, TSMC 공장 유치 등 반도체를 중심으로 경제활성화와 산업부흥을 노리는 일본 정부의 정책은 우리 정부 역시 주목할 대목이다.
일본의 반도체 기업 래피더스(Rapidus)가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 IIM-1의 완공 이미지. IIM은 Innovative Integration for Manufacturing의 약어로 연구와 생산을 한곳에서 수행하는 공장을 말한다. 2023년 9월 1일 기공식을 가져, 25년 4월부터 2나노급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의 파일럿 라인을 가동, 27년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 사진=래피더스 홈페이지
반도체는 한국의 '운명적 산업'이다, 국가 총력전의 고민 필요
권 교수는 한국의 대응 전략을 설명하며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 경쟁에 동참할 것을 선언한만큼 이 시장은 3강 구도 형성이 불가피하게 됐다"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다변화할 때"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은 기정학적 과점에서 AI, 양자컴퓨터 시대를 염두에 두고 기존 메모리 반도체의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차세대반도체 기술 선점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특히, 첨단 패키징, 로직반도체, 파운드리,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등 반도체 생태계를 개방하고 다변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 시절을 회고하며, 반도체 산업을 두고 한국에게 ‘운명적 산업’이라 말했다. 반도체, 소프트웨어 등과 같은 분야에서 한국이 약진할 수 있었던 배경을, 시기적 적합성과 정부의 의지에서 찾았다.
그는 “돌이켜보면 첫째로 글로벌 환경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20세기 반도체 시장은 미국이 시장을 (한국에게) 주고 일본을 견제해줬다. 여기에 정부의 의지도 있었다. 임 전 사장은 "과학 분야 인재를 만들고 병역 특례 주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겼다”고 분석했다.
임 전 사장은 “선진국이 완전히 장벽을 쌓기 전에 우리가 공업화됐다"며 "우리가 진입한 시기와 우리가 성장할 때 산업이 동시에 성장해서 우리한테 기회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PC 탄생이 1970년대인데, 삼성이 메모리에 진출한 게 1984년"이라며 "반도체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하고 10년 정도 지났을 때"라고 돌이켰다. 즉, 꽤 빠른 시기에 반도체 산업에 들어간 게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효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는 데에 삼성의 역할도 컸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를 위한 반도체, Now' 포럼>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두 발제자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이 담당자들과 함께 포럼에 참석한 김관영 전북지사다. / 사진=백범선 영상팀장
한편, 이날 포럼에는 새만금 간척지를 이차전지 산업단지로 구성하려는 정책을 추진중인 전북도에서 김관영 도지사가 담당자들과 함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권 교수는 "반도체산업에서는 신재생 에너지 확보율도 중요하다"며 "주택밀집 지역에 대용량 배터리 단지를 지을 수 없으니 관련 단지, 신재생 에너지 저장 기지로 위치가 적합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경제자유구역 등을 만들어 관련 외국기업 유치도 도전할만 하다고 조언했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과 양향자 의원이 함께 쓴 <히든 히어로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도전과 성취, 그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디케, 2022)와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의 <반도체 삼국지: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과 한국의 활로>(뿌리와이파리, 2022).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 과제를 준비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이다. / 사진=디케,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