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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20-25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은
20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합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주며, 자신을 지지해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고,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닐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진정,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 주님께 소유당한 사람만이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더블류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
(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재물이 보물이 되도록>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 곳간에 재물을 많이 쌓은 부자가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부자, 재물의 부자가 뭣인지는 우리가 알겠는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 말씀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 재물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도 통하는 것입니까?
말씀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볼 때 자신을 위해 쌓아놓지 않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 곧 사랑은 하느님 앞에서도 통하는 것일 겁니다.
재물이 사랑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똥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돈을 똥으로 여겼는데 왜 똥입니까?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는 똥이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욕망과 욕심의 배설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욕망과 욕심 채우는 것은 음식을 허겁지겁 처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채우고 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이요, 남는 것은 똥밖에 없는 허무함입니다.
재물은 쌓아놓을 것이 아니라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은 보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물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되도록 재물은 활용해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참 부자가 되십시오>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참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잠언 15,16).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로다’(코헬 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 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 23,4)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
(하바2,5)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습니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습니다."
(토비 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은 물론 친지가 없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계셨는데 본당 수녀님께서 틈틈이 방문하여 청소도 해드리고 말벗도 해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녀님께서 할머니를 책임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처분해서 양로원에 들어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혹 서운해하실까 조심스레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양로원에 들어가면 당신의 재산을 다 잃는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생각을 접고 할머니를 열심히 챙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은 홀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발견하고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관계로 이러저러한 조사 끝에 동사무소를 통해서 쓸쓸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아파트가 생명이나 다름없었겠지만 그 아파트를 잘 활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0.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능력>
영화 <더 룸>(2019)은 어느 날 시골의 값싸지만 커다란 집을 산 젊은 부부, 매트와 케이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집에는 폐쇄된 비밀의 방이 있었고, 그 방 안에서는 원하는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건이나 예술 작품 같은 것을 만들어내며 그 방의 능력을 즐깁니다.
그러다 케이트는 자신들의 아기를 두 번이나 유산한 슬픔 속에서 그 방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기를 다시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매트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원대로 방에서 아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매트는 소원의 방에서 얻은 돈으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돈이 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돈을 집 밖으로 뿌렸더니 재가 되어 떨어졌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나갔더니 아기는 1초에 1년씩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집 안에서 만들어진 것의 시간과 집 밖의 시간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트는 그래서 괜히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고 아이를 다시 소원의 방에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케이트는 아이에게 집착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다시 없애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 청년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소원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아버지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어머니와 남편처럼 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케이트는 아들을 이겨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매트는 아내가 소원의 방에 갇힌 것을 알고는 벽을 뚫고 그녀를 구하러 갑니다.
결국 아내를 구하고 아이를 집 밖으로 유인하여 재가 되게 합니다.
케이트는 자기 아들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쾌락,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는 자기 형더러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영원의 시간을 살고 계십니다.
영원 안에 사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재와 같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재를 나누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떤 부유한 사람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그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 곳간을 늘리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불교에서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집착하는 자아를 없애는 것입니다.
결국 나아가는 방법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으면 이 세상은 마치 꿈처럼 의미 없는 세상이 됩니다.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 죽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동물들이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집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기억 때문에 잠을 무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때는 잠을 자도 부모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며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자기 전에 매번 기도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야 나뿐인 사람에서 내어줄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잠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고 그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 영원히 갇히느냐, 아니면 이 세상을 꿈처럼 즐기며 살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능력도 있고 그 선택대로 믿을 능력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 삶이겠습니까?
결국 집착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며 즐기다 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죽을 수 있다고 믿읍시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신앙 없이,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느님 없이 살다 보니 자신의 힘만 믿습니다.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어디 믿을 수 있던가요?
지금은 혈기왕성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나이 들고 여기저기 아프고 시들기 마련입니다.
그때야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 자신의 능력, 자신의 돈만 믿고 기고만장한 얼굴로 살아가던 어느 날, 갑작스레 다가온 한계, 능력 밖의 상황에 직면하고서야 겨우 하느님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매달리고, 묵주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습니다.
기도는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대놓고 무시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큰코다치는 사람 한두 명 본 게 아닙니다.
죽기 살기로 모아 들이는 데 혈안이 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들 다 놓쳐버리기 마련입니다.
‘영혼이나 신앙, 사랑이나 우정이 밥 먹여 주냐?’며 정신없이 허상만을 쫓아다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청천벽력 같은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복음 12장 20절)
시편 작가의 강조처럼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그저 육(肉)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릴 것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당신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그런가 생각도 듭니다.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탐욕에 대한 처방법 -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뿌리에는 “불신”이 있다 -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삽시다>
그동안 참 많이도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마음의 병 중 무지가 으뜸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질투, 폭력, 전쟁등 끝이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거의 대부분 결국은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무지입니다.
무지 중 대표적인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의 무지, 탐욕의 어리석음입니다.
끝없는 탐욕입니다.
탐욕에 눈멀면 누구나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정의같습니다.
참으로 대안이 없는 무지 같습니다.
탐욕의 인간에 때로 절망할 때도 있는데 하느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작금의 기후재난도 순전히 인간의 탐욕에 기인합니다.
예수님의 충고가 참 엄중합니다.
“모든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200주년 공동번역은 더 실감이 납니다.
“사실 제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소유로 자기 생명을 보장 받지는 못한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소유로, 재산으로 자기 생명을 보장 받으려 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후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을 들어보세요.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자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일부 현상이 아닌 보편적 무지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탐욕스런 인간입니다.
탐욕이 그를 눈멀어 어리석게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땅의 현실만 있었지 위로의 하늘은 없었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을 줄만 알았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하늘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도 없었고 이웃과의 나눔도 없었습니다.
위로 하느님과의 관계도, 옆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완전히 차단된 고립무원,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자기 감옥의 수인이 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참으로 전격적 회개의 은총이 절박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탐욕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과 선행의 나눔뿐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 또한 하느님 믿음의 표현입니다.
제가 이래서 평소 강조하는 하느님 믿음입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이라 극구 강조합니다.
노골적으로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돈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관계들입니다.
하느님 믿음 없이는 세상 그 무엇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궁극의 탐욕의 제동장치가 하느님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이라고 많이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부자의 독백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의 탐욕의 인간들에게, 부자들에게 주는 전격적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아, 이게 어리석은 부자에게 주신 최후의 경고 같은 한밤중 꿈이었다면, 아마 부자는 잠깨는 즉시 전격적 회개로 하느님을 찾고 이웃과의 나눔 생활로 방향을 바꿨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도 해봅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정말 진짜 부자는,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 재화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땅에 보물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단히 자선과 나눔의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로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탐욕의 정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주위 환경에서 오는 예측 못할 생명과 안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이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기인하는 자연적인 방어본능이, 보호본능이 탐욕으로 작동된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이, 그 많은 재물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함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원인인 불신에서 기인하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탐욕의 순서입니다.
탐욕의 가장 깊은 뿌리는 불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믿음이 탐욕에 대한 궁극의 해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빛 앞에서 자취없이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이요 이어 탐욕의 악이자 환상도 저절로 정체가 폭로되어 힘을 잃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의 뿌리를 깨달은 이들은 이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재미로,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갑니다.
세상맛, 돈맛, 밥맛이 아닌 하느님 맛, 기도 맛, 말씀 맛, 사랑 맛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들입니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사랑만 있으면 욕심만 비워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일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바로 그 전형적 인물이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선망하는 하느님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탐욕에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두려움과 불안의 뿌리에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탐욕의 궁극의 처방은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영원한 모범이 아브라함입니다.
바로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탐욕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과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날로 튼튼하게 해 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는 믿음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힘을 잃어가는 무지의 탐욕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롱아일랜드의 락빌센터 교구의 성 라파엘 성당에서 본당 신부 착좌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본당신부 부임미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희는 인사이동으로 본당에 부임하면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에 환영미사를 합니다.
몇몇 친분이 있는 사제가 오기는 하지만 교구에서 주교님이 오시지는 않습니다.
환영미사와 축하식이면 됩니다.
브루클린 교구와 락빌센터 교구를 보면 제가 속한 교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인사이동으로 본당에 부임하는 것은 같지만 본당신부 착좌미사는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주교님께서 함께 해 줍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함께 축하해 줍니다.
주교님은 사목자의 책임을 전하고, 본당 신부는 그 책임을 다하겠다고 응답합니다.
주교님과 본당 신부가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착좌미사가 진행됩니다.
본당의 사목위원들이 제대 앞으로 나오고 본당 신부는 사목위원들과 인사합니다.
본당 신부의 착좌미사에 몇 번 다녀오면서 느낌이 좋았습니다.
착좌미사는 한바탕 축제와 같았고, 교구와 본당의 연대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Song Leo'라고 소개했더니 사람들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한글의 송은 영어로는 ‘노래한다’는 의미가 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날 복음은 ‘두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안 듣겠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서 아버지의 말을 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겠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어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나는 몇째 아들일 것 같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신부님은 ‘나는 사제가 아니라 신랑이 될 겁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서 사제가 되었으니 첫 번째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혼인은 배우자가 서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혼인한 배우자들이 말로만 책임을 다한다고 하면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혼인한 배우자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다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를 사랑한다면 항상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론 후에 사제들과 교우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하였습니다.
마치 멋진 뮤지컬이 끝난 후에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부자가 자신을 위해서 창고를 세우고 거기에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눔’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 것 없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 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기립박수로 환영 받을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버드대의 데이비드 맥클랜드 박사는 학생들을 모집해서 두 집단으로 나누어 영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집단에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돌프 히틀러의 행적을 그린 영화를, 다른 집단에는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봤던 마더 데레사 성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과 후에 두 집단에 속한 학생들의 면역항체 수치를 측정했습니다.
히틀러에 관한 영화를 본 학생들보다 데레사 성녀의 영화를 본 학생들에게서 훨씬 더 많은 면역항체가 형성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수치는 자그마치 50% 증가했고, 효과는 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행동으로 유발된 감정은 면역력을 높여주는 신체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선행을 간접적으로 접했을 때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칭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선행을 실천한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행복감을 높일 뿐 아니라 면역체계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실험도 합니다.
돈을 받고 남을 도와줘도 면역력이 높아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취약계층 아동에게 학습지도를 하게 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봉사하자고 했고, 다른 집단에는 돈을 지급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료로 봉사한 집단에서만 면역항체가 증가했습니다.
실제로 월급만 생각하며 참고 일하는 사람과 자기 일의 의미를 떠올리며 일하는 사람의 행복도는 다르다고 하지요.
면역항체가 생성되는 것이 좋을까요? 나쁜 일일까요?
당연히 몸에 좋은 것으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끕니다.
많은 이가 영양제를 복용합니다.
몸에 좋다고 하면, 비싼 돈이 들어도 영양제를 구매해서 복용합니다.
이 영양제보다도 더 효과 좋은 영양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공짜입니다.
바로 봉사나 희생을 통한 우리의 사랑 실천입니다.
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을 모으는데 온 힘을 기울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부자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지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을 사는 ‘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며, 동시에 하늘에서 살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의 삶 사는 것을 항상 뒤로 미룹니다.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삶은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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