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
요즘 한창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4강에 진출해 요르단과의 준결승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근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한창이고
이를 둘러싸고 예멘의 후티반군이 홍해를 지나는 상선 들을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이 이 들에 대해 반격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카타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쪽 귀퉁이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다
그런데 카타르 앞바다에 거대한 해저가스전이 있다
이란과 각각 자국영해에서 가스를 퍼올려 부자나라가 됐다
몇 년 전에 카타르가 이란편을 들어 수니파 이슬람국가들에게 왕따당했다
이란과 공유하고 있는 해저 가스전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조치였다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예멘을 장악한 후티반군이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을
뒤에서 지원하기 위해 홍해를 지나는 해상운송 선단을 연일 공격 중이다
이에 맞서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예멘을 비롯한 시아파 나라들에 있는
이란 지원 기지들에 연일 공습과 미사일공격을 퍼붓고 있는 중이다
중동의 분쟁을 이해하려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왜 같은 이슬람이면서 이렇게 반목을 하고 서로 으르렁거리는지.
수니파가 85% 다수이고 시아파는 겨우 15% 소수에 불과하다
수니파의 종주국이 사우디고 시아파는 이란이 주도하고 있다
수니파는 성지순례를 사우디의 메카로 가고
시아파는 성지순례를 이라크의 카르발라로 간다
또 시아파는 아슈라라고 하는 끔찍한 피의 행사를 한다
올해는 7월16일이 아슈라의 날이다
거기다가 세계1차대전 후 터키를 대신해 영국이 들어와서
이리저리 정치적인 국경선을 긋고 이후에 빠져 나가고
설상가상 미국의 주도로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중동의 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마침 예전에 작성해 놓았던 글이 있어 대폭 손을 보아 다시 올려본다
이 글을 통하여 중동의 오랜 역사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을
제대로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기를 바란다
러시아는 주로 가스관을 통하여 유럽으로 가스를 수출한다
카타르는 수니파 국가이긴 하지만 노스돔 가스전때문에 이란과 잘 지내야 한다
예멘은 지금 거의 시아파인 후티반군이 지배하고 있는 중이다. 파란색이라는 말이다.
예멘을 거의 장악한 시아파 후티반군정부가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을 연일 공격하고 있다
명분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예멘을 비롯한 시아파 나라들의 군사시설을 연일 폭격중이다
바야흐로 중동전쟁이 확대될 것인지 그 결과가 주목된다
오래 전에 밀려난 수니파 전임 정부는 사우디 리야드에 망명정부를 꾸리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들이 2022년 7월9일, 토요일, 이라크 카르발라에 있는 종교지도자 압바스의 성전에 모였다.
이 날은 시아파 무슬림들의 에이드 알 아다 축제의 첫째날이었다.
◆수니(Sunni)파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이자 전 세계 무슬림 18억 인구의 85%를 차지해 ‘정통’을 자처한다.
신의 말씀인 코란과 함께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를 따른다.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세속적으로 교세를 확장한 까닭에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등
새롭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국가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시아(Shi’ite)파
무슬림 전체의 15%를 차지하며 주로 이란·이라크에 분포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적통 계승이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에게 있다고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만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받든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포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은 크게 두개의 종파,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로 나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억 무슬림 중 약 85%가 수니파고 15%는 시아파다.
하지만 두 종파로 구분하기 애매한 소수 종파도 적지 않다.
시아파는 지금의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반면 수니파는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의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 다수를 차지하지만,
수니파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40 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한다.
시아파의 최대 종주국은 이란이고,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은 원한의 뿌리가 깊다
이러한 종파 간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14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비교적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중동 여러 국가와 종교 세력들이
종교적,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서구(미국)의 개입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며 이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걸쳐 복잡하디 복잡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에 대해 알아보자.
분파의 유래
이 두 이슬람 최대 종파 간 차이는 아들이 없던 무함마드의 계승자를 누구로 보느냐를 놓고 발생했다.
632년,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다수인 수니파는 선출된 칼리파(대표자)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고 본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계승자로 여겼다.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쿠데타 세력에게 암살당했고,
그러자 알리의 추종자인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 만이 칼리파의 자격이 있다'며
새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다.
결국 1400년 전의 지도자 계승 문제로 갈린 종파지만,
현대의 갈등 관계는 단순 교리의 차이를 넘어 국가 간 세력 다툼과 직결되어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오랜 기간 평화와 분쟁 사이를 오가며 지냈지만,
20세기 들어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갈등, 석유, 초강대국의 개입을 비롯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후계자 갈등과 분열의 과정
시아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약칭으로
이슬람의 4대 칼리프(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이다.
처음부터 수니 종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아파가 주류집단을 박차고 떨어져나가자,
예언자 언행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집단이란 의미로 기존 집단을 수니로 불렀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또 그는 두 번째 이슬람 개종자로서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시종일관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프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 (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다.
그런데 알리가 오스만의 살해세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무하마드의 부인이자 오스만을 지지했던 아이샤의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된다.
두 세력간의 알력은 전쟁으로 비화됐고,
656년 최초 이슬람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낙타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한다.
그러자 오스만의 사촌이었던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대항했다.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돌진하는 무아위야의 군대를 향해 알리는 화해를 요청했고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화해 협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알리의 강성 추종자는 661년 알리를 살해한다.
두 번의 배반 후 완전히 갈라져 시아파는 알리의 장자인 하산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직적 군대를 가졌던 무아위야는 스스로가 칼리프임을 선포했고
하산에게 칼리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하산은 다음해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은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여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칼리프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다.
이는 무아위야의 사후 칼리프직을 후세인에게 물려주겠다는 묵시적 선언이었다.
그런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지드는 약속을 깨고 칼리프직을 찬탈했다.
후세인은 즉각 야지드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680년 시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모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후세인의 어린 아들 알리만 겨우 피신해 시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발라 전투 후 이슬람 세계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나고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아파들은 통한의 응어리를 안고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별도의 둥지를 틀었다.
이후 예언자의 혈통인 후세인이 무참하게 도륙당한 680년 이슬람력 1월10일은
시아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후세인 묘당이 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최고의 성지가 됐으며
이슬람력 1월10일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 됐다.
수니파의 성지 : 사우디 메카에서의 하지 순례
하지[hajj] - 메카로의 성지 순례. hadjdj, hadj라고도 씀.
이슬람력으로 12월8일에서 10일까지 진행되는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로
일생에 한 번 어떤 방식으로든 행해야 한다. 메카 주변 성지를 순례할 때에는
'이흐람'이라는 순례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순례가 끝나면 메카에 돌아와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의식을 마무리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Mecca : 이슬람 교의 성지 )까지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무슬림 (이슬람교 신자) 은
일생에 한번 이상 메카로 순례할 것이 의무로 되어 있다.
이슬람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도 메카를 순례하는 것.
모든 성인 이슬람교도는 남녀를 막론하고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순례해야 한다.
하즈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Arkan al-Islam)으로 알려진
이슬람의 기본적인 의식과 실천의무들 중 5번째 의무이다.
순례의식은 이슬람력의 마지막 달인 '순례의 달'(Dhū al-Ḥijjah) 7일에 시작하여 12일에 끝난다.
하즈는 신체적·경제적으로 순례의 능력이 있는 모든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의무이다.
그러나 그가 떠남으로써 그의 가족이 고생을 겪을 경우에는 면제될 수 있다.
대신에 순례할 친척이나 친구를 정하여 대리로 순례를 할 수도 있다.
순례의 형식은 예언자 무하마드가 정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했기 때문에
순례자들이 엄격하고 형식적인 일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본래의 순서와 관계없이 메카의 여러 지역을 방문한다.
메카에서 10㎞ 떨어진 곳에 오면
순례자는 이람이라는 성스럽고 성결한 상태에 들어가며
이곳에서 이음매가 없는 2개의 흰 천으로 된 이람 의복을 몸에 걸친다.
순례자는 하즈가 끝날 때까지 머리나 손톱을 깎지 않는다.
순례자가 메카로 들어가면 대(大) 모스크 안에 있는 카바라고 불리는 성소 주위를 7번 돌고,
카바의 벽에 붙어 있는 '흑석'(Ḥajar al-Aswad)에 입맞추거나 그것을 만지며,
아브라함의 무덤(Maqām Ibrāhῑm)과 카바를 향해 2번 예배 드리고
사파 산과 마르와 산의 조그마한 돌출부 사이를 7차례 달린다.
두 알히자 달의 제7일에 순례자는 자신의 의무를 상기한다.
순례의식의 2번째 단계에 순례자는 메카 외곽에 있는 성지들인
라흐마 산(Jabal ar-Rahmah)과 무즈달리파, 미나를 방문하고
아브라함의 희생제를 기념하여 동물을 희생한다.
순례자는 이때 대개 머리를 깎으며 3일 동안 계속해서
미나에 있는 3개의 기둥에 각각 7개의 돌을 던진 뒤에 메카로 돌아와서
메카를 떠나기 전 카바를 도는 의식인 타와프(ṭawāf)를 행한다.
매년 약 200만 명의 순례자들이 하즈를 행하며,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이슬람교도들이 이러한 종교의식을 통하여 연대의식을 느낀다.
하즈를 수행한 이슬람교도들은 자신의 이름에 하즈(hajj)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다
하즈(아랍어:حج) 는 메카의 성지를 순례한다는 뜻이고
순례를 마친 자를 '하지'(الحجّي)라고 부르며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
무슬림 (이슬람 교 신자) 이외의 사람은 메카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 (신자 아닌 사람) 으로서 메카 내의 의식을 본 사람은 극히 적다.
13 억이 넘는 전세계의 무슬림들은 매일 5번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 예배를 드린다.
이 기도의 방향을 '기블라(qiblah)'라고 한다.
카바 신전이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는
매년 약 200 만 ~ 300 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이들 순례자들은
속계(俗界)에서 입는 옷을 벗어 버리고 무늬없는 흰색의 순례복을 입는다.
수렵, 손발톱을 자르는 일, 향수를 바르는 일, 모자를 쓰는 것, 성교 따위는 금지되고
이와 같은 터부 상태는 순례의식이 모두 끝날 때 까지 지킨다.
성지 메카에서도 핵심은 카바신전, 직육면체 모양의 신전으로 높이는 약 15m
15 미터 높이의 카바(알라의 집) 위에는 검은 헝겁이 덮여있으며
그 위에는 코란의 경구들이 금실로 수놓여 있다.
순례자들은 메카의 중심인 카바 신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7 번 도는 의식인
사이(Sai')를 가장 중요한 예배의식 중의 하나로 반드시 치러야 하며,
가능하다면 신전의 성묘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만지곤 한다
동쪽 구석에는 지면에서 1.5m 정도 높은 곳에 흑석(黑石)이 끼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브라힘(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
알라의 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카바 신전에는 검은 돌이 있다.
이것은 석신으로서의 알라를 상징하고 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카바 신전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노아 홍수 이후 알라는 아브라함을 부르게 되는데,
알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도록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은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알라는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스마엘을 다시 살렸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그 검은 돌이 있는 자리에 신전을 건립했는데
바로 카바 신전이라는 것이다.
흑석이 있는 모서리의 반대쪽에 잠잠 이라고 하는 성천(聖泉 성스러운 샘)이 있다.
카바주위를 7번 도는 사이를 행한 후에는 이 잠잠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하즈가 진행되는 동안 순례자들은 미나라는 작은 마을로 향해
돌기둥으로 상징화된 악마 (사탄) 를 돌로 쫓는 의식을 행한 뒤,
무함마드가 최후의 설교를 한 아라파의 언덕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린다.
시아파의 성지 : 이라크 카르발라
모든 시아파 순례객들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한다.
당시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는 종교적 동일체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동시에 예언자의 혈족을 살해하고 종교적 신성함을 훼손한 수니파에 대한
역사적 원한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칼리프직을 찬탈했던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조는 750년 아부 알 압바스 장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때 무하마드 가문 출신인 압바스는 시아파의 절대적인 협력을 받으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후세인의 증손자인 자파르 알 시디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칼리프로 옹립하려는 구상을 한다.
하지만 754년 압바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만수르가 자파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한다.
시아파로서는 두 번째 배반을 당한 셈이다.
이 왕조가 압바스 제국으로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다.
시아파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몇몇 시아파 왕조를 건설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16세기 현재 이란 지역에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가 들어선 후 대다수 국민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
이것이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모태다.
이처럼 수니파와 시아파는 교리적 논쟁이 아닌 계승권 분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다.
혈통 계승을 주장하는 시아파에게 유일한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촌인 알리뿐이다.
그 전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로 간주한다.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제외하면 두 종파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코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예언자 무하마드를 따르는 기본적인 코드는 서로 같다.
결정적 의식의 차이 ‘아슈라의 날’ - 2024년 7월16일
그럼에도 두 종파는 의식의 실행과 종교적 관점,
이슬람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왔다.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차이는 ‘아슈라의 날’에 나타난다.
아슈라는 후세인이 순교한 이슬람력 1월의 열흘간을 의미한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이 처참하게 전사한 고통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시아파는 자신의 가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칼로 긋는 행위(마아탐)를 통해
당시 후세인의 죽음을 방치한 나태함에 대한 참회(타으지아)를 한다.
후세인의 순교 정신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것이다.
시아파는 이런 참회의식을 행하면 최후 심판의 날 후세인이 중재자로 등장해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는다.
이에 대해 수니는 역사를 왜곡하고 알리와 후세인에 대한 그릇된 종교의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 행사의 과격성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두 종파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슬람의 기본 의무인 예배에 있어
수니파는 시간에 맞춰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보는 것을 철저히 지킨다.
하지만 시아파는 상당한 융통성을 부여한다.
예배를 묶어서 한꺼번에 보기도 하고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세 번으로 줄이기도 한다.
선 자세에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리지 않고, 절을 할 때도 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는 것이 아니라
카르발라에서 가지고 온 작은 돌조각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절을 한다.
이슬람 첫 번째 원칙인 신앙 고백 (샤하다)에서도
수니파는 “알라는 유일신이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한다”는 구절을 암송하지만,
시아파는 이 구절에 알리에 관한 구절(알리는 신의 대리인이며
, 예언자 무하마드의 계승자이며, 최초 칼리프다)을 첨가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대해서도 수니파는 ‘그가 원래 무학의 인물이었으며,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임무만을 부여받은 보통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시아파는 ‘무하마드가 높은 학식을 소유했던 완전무결한 존재였으며
신의 빛을 부여받고 신적 속성을 소유했던 인간’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시아파는 그런 속성이 무하마드 딸 파티마,
그녀의 남편 알리, 그리고 이들의 자손들에게도 부여됐다고 주장한다.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고 있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종교적 지도자) 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맘 제도와 관련해 시아파는 873년경 은둔한 12대 이맘이 마흐디(메시아)로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12대 이맘이 마흐디로 재림함으로써
이슬람 공동체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등, 단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물 중심 종교활동이 강한 시아파
이슬람 법 적용에 있어서도
수니파는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하나피파 등 정통 4대 법학파를 모두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편집하고 성문화한 ‘자파르 법전’만을 신봉한다.
신앙 의식에서도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인물 중심의 종교활동이 강하다.
시아파의 성인 숭배 의식이 대표적이다.
특히 무하마드 가문 출신의 성인들에 대한 숭배 의식과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주요 시아파 지도자들 묘소에 대한
방문과 순례가 주기적으로 이뤄진다.
이란의 주요 기관이나 가정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그리고 카르발라 전투 등에 대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수니 세계에서는 그런 사진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아파는 계약결혼제도인 ‘무트아(mu’tah)’를 인정한다.
무트아는 무하마드 시대에 일부 허용됐으나 수니파에서는 죄악으로 금지한다.
시아파 국가인 이란 여성운동가들은 ‘일생동안 13명 여성과 결혼했던 예언자
무하마드도 처녀와의 결혼은 단 한 번뿐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고정관념을 깨고
기혼 여성의 자유로운 결혼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무트아를 지지한다.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여성의 상속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한다.
이란 여성의 정계 진출과 전문적 사회활동이 다른 아랍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것은 이런 시아 교리의 영향이 크다.
시아파의 또 다른 특징은 ‘따키야(taqiya: 거짓 믿음)’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시아파는 수니파의 정치적, 종교적인 박해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종교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거짓으로 자신의 신앙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
[현대사]
이란 이슬람 혁명, 중동 내 시아파 권력의 부상
분란의 조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란의 국왕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Reza Pahlavi) 는
미·소 냉전 체제에서 미국에 의지하며 국내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1970년대 미국의 이란 중시 중동 정책 하에 이란의 석유 수출이 급증했는데,
일부 국왕 측근 만이 이에 편승하여 부를 누렸고, 일반 국민 대부분은 파산하였다.
이렇게 국정운영의 비민주성,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서구화 과정에서의 성직자 불만 고조로 왕정 체제의 위기가 가중되었다.
종교 혁명:
계속된 노동자의 파업과 반국왕 시위가 이어지면서 결국 국왕 팔레비는 이집트로 탈출했고,
추방되었던 시아파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
1979년 2월 11일 혁명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혁명에 공적이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이슬람 의회로 진출했고,
이들에 의해 채택된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에 의해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삼권분립을 초월한 지위를 가졌으며,
종교 지도자로 이루어진 초의회적인 헌법감시평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이란에는 시아파 이슬람 신정 체제에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공화제가 덧붙여진 독특한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슬람 혁명의 파장:
1979년은 이슬람 세계에 추요한 시기였다.
이란에 시아파 정부를 수립한 호메이니는
자신이 단지 한 나라에서 혁명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 통치 이데올로기와 서양 식민 유산에 대한 거부 의식이
무슬림에게 보편적으로 통할 메시지라고 느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단순히 시아파와 이란과 페르시아인의 지도자가 아닌
전체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수니파 지도층의 반발
아랍권의 수니파 종교·정치 지도자들은 호메이니의 이러한 급진적 사상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란의 군주를 무너뜨린 혁명을 목격하며 다수의 무슬림 대중은 이미 현혹되어 버렸다.
급진적 수니파 집단들 등장:
시아파의 자라나는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의 종교 지도자들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사상적 차이를 강조하며
시아파에 대해 강경하고 급진적 수니파 정치·테러 단체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알 카에다(Al Qaeda), 탈레반(Taliban), ISIS(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과 같은
급진적이며 폭력적인 정치 테러 집단이었다.
이 집단들의 목표는 세속적 정부 체제의 전복과
이슬람 국가의 설립 뿐만 아니라, 시아파를 억압하는데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
이란의 시아파 혁명에 대해 가장 폭력적으로 반응한 국가는 이웃나라 이라크였다.
당시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1980년, 이란의 유전을 장악하고 호메이니의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침공을 명령했다.
이라크의 침략과 후세인의 잔혹한 정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아랍 전역의 수니파 무슬림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전쟁은 또한 이라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과 차별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1982), 헤즈볼라(Hezbollah) 설립: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게릴라 공격을 막는다는 명목 하에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때 이슬람 혁명 수비군에 의해 레바논에서 창설된 헤즈볼라는 시아파 무장 조직으로,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지배에 맞섰다.
헤즈볼라의 설립은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 대한
시아파 이란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시아파 숙청 (1990년대):
시아파 대 수니파 분쟁이자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사이 분쟁이었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 국민은 2급 시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 정권의 차별적 대우에 불만을 터뜨린 시아파 시위대는 무참히 묵살되었다.
심지어 이라크 내 시아파 종교 지도자와 그들의 가족이 후세인 정권에게 차례로 숙청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렇게 이라크 정권에게 처참히 짓밟히는 시아파 시민을 보호하러 도와주는 세력은
이웃의 사우디 아리비아도, 시위를 명목상 지지하던 미국도 아닌,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정부였다.
이렇게 이라크에서는 점차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 되돌릴 수 없는 정치적 감정의 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구 세력의 개입으로 더욱 불안정한 중동의 종교·정치 역학
이라크 전쟁 (2003~2011):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 시아파 분열을 조장하려는 계획은 없었지만,
그것이 이 전쟁의 가장 파급력있고 장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인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일방적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 미국을 점령자가 아닌 해방자로 볼 것이며,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고, 이라크가 평화로 돌아갈 것이라고 세계에 말했다.
그러나 그 장밋빛 예언은 이라크의 빈번한 종교 폭력과 비극적인 역사,
특히 잔인하게 핍박 받던 시아파 다수의 열망을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 기간동안 사담 후세인의 정권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이라크에 아랍 국가로는 최초로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다.
물론 대다수 페르시아인으로 이루어진 이란에 시아파 무슬림 정부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시아파 아랍 정권이 처음으로 성립되면서
중동 지역의 시아파 아랍 무슬림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이다.
또한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이어 이란에게 강력한 시아파 동맹국이 생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중동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권력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었다.
수니파와 시아파 국가간 21세기 냉전:
국경을 넘어 시아파 민병대와 정당을 지원하는 이란의 정책에 맞서
수니파 정권들도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견해를 대변하는 단체를 지지한다.
오늘날 중동 지역의 많은 분쟁은 강한 종파적 성격을 띄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여전히 이란의 군대, 헤즈볼라, 그리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시아파 주도 정부가 수니파 야당과 싸우고 있다.
ISIS를 비롯한 수니파 테러 단체는 시리아와 이라크 시아파와 예배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2016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 저명한 시아파 성직자가 처형되면서
중동 전역에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란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외교 관계는 현재까지도 단절된 상태다.
정리:
14세기 동안 존재했던 이슬람의 종파 분쟁은
중동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의 정치적, 경제적, 전략적 쟁점의 기저에 깔려있는
긴장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여기서 핵심은 표면적으로는 종파 갈등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실제 종파 간 신념 차이보다는 국가를 비롯한
이해 집단의 정치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수니파 사우디 아라비아와 시아파 이란은
최근 들어 종파적 분열을 이용해 치열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다.
중동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앞으로 두 대국의 경쟁 구도, 그리고 특히 소수 시아파가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의 내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한참을 보고 또 이해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과 사진을 헤아렸습니다
사실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입장이 ...
수고하셨습니다
어쨌든 축구는 이길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의외로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고 봅니다
열강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지요
사우디는 일단 친미
이란은 반미, 현재는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네 축구는 이겨야지요. ^^*
감사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마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장문의 글을 이리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두어번 읽으면 더욱 이해가 잘 될 듯요.
인간을 완벽하게 창조해주셨다는 하나님은
왜 이리 갈등과 전쟁을 예견 못하셨는지?ㅎ
종교의 이슈, 생각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요.
UAE 국민들은 모두 무료- 집, 생활비, 교육비, 유학비까지 모두 무료라 들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누대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때는 함께 강성한 사라센제국을 세웠지요
이베리아반도, 동유럽, 북아프리카,
중동과 인도까지 지배했지요
이를 계승한 터키도 강성대국이었구요
지금은 서로 으르렁 거리지만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이슬람제국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시니님
맛진 하루 보내시구요
오늘밤 자정부터 벌어지는 축구
반드시 요르단을 잡고
결승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청솔님 어디서 이런 방대한 귀한자료를 구하셨는지 아주 궁금합니다. 거의 전공한 학자같습니다. 지난주 8박10일 집사람과 아랍에미레이트. 카타르. 오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다녀와 아주 우연히 이런글을 보게되었답니다. 자유게시판도 처음 들어오게 되었구요.
어제 삶의 이야기방에 < 두바이서는 돈자랑하지마세요> 를 쓴사람입니다. 혹시 시간되시면 통화한번하고 싶습니다.. 010-3080-4428 입니다.
네 여기저기에서 짬짬이 모은 것입니다
관심이 좀 있어서 모아 봤습니다
벌써 꽤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관광을 다녀 오셨군요. 부럽습니다
그 글 저도 보았습니다
통화는 제가 조금 그렇구요
쪽지로 메시지 남겨 주시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메일주소는 ssl3613@hanmail.net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