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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의 역사]
역사속에 기록된 최면가들
최면이 걸어온 길
전 세계의 인류가 생명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터 최면 현상은 존재했고, 이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오래 전 고대로부터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제례 의식이나 샤먼니즘적인 질병 치료를 위한 의식 속의 주술(呪術), 그리고 종교의식 속에서 승려나 성직자들은 이미 최면 현상과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고, 함께 어우러져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 등도 질병에 대한 기대심리에서 진행하는 하나의 최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음과 율동 등은 자연스럽게 마음에 편안함을 가져오고, 이는 트랜스를 일으키게 된다. 이런 트랜스(최면 현상)는 내담자로 하여금 신뢰를 형성하게 한다. 이로써 치유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대 문헌이나 그림, 벽화에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집트의 나일강의 여신 이시스의 신전에 있는 조각이나 기원전 10세기 그리스의 '잠의 사원'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최면 상태로 유도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좀더 발전된 모습을 인물별, 시대별로 알아보자.
메스머의 동물 자기
근대 최면의 창시자로 불리는 메스머(Franz Anton Mesmer;1734-1815)는 오스트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동물 자기설'을 주장했으며, 영국의 막시밀리안 헬이 환자를 자석으로 치료한 것에 흥미를 느껴 자력을 사용한 치료를 시도했다.
메스머는 자기 자신이 유체의 생명력을 조성하여 치료의 힘을 환자들에게 전송하는 자석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의술로서는 잘 낫지 않던 난치병 환자들이 짧은 시간에 치유되었으며, 이것이 메스머가 '동물 자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오늘날 최면을 뜻하는 '메스메리즘(mesmerism)'이라는 말도 그의 이론과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메스머의 자기 요법'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 했고,
그 결과 치유 효과는 인정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상상력에 의한 심리 효과이며 자기 이론에 근거를 둔 '자기요법'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과학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판정이 내려졌고, 그 후 메스머의 몰락과 함께 최면도 한때 쇠퇴기를 맞았다.
가스너 신부
오스트리아 출신 가스너(Johann Joseph Gassner;1727-1779)는 스위스 동부에서 성직자로 활동하며, 구마(驅魔;사람이나 사물에서 악마나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행위) 의식을 행하였다. 가스너는 어슴푸레하게 불이 켜진 방에 환자들을 모아 놓고 거대한 십자가를 들고 나타나 라틴어로 '잠들어라'고 명하여 트랜스 상태로 빠지게 한 후, '이 병에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내재되어 있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금 즉시 나오라' 라고 선언하였다.
가스너의 구마 의식을 전통적 권위를 배경으로 한 '권위 최면'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등장 시에 들고 나오는 수많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 된 커다란 십자가와 구마 의식 중에 이용하는 장엄한 라틴어는 일종의 '위광 암시'를 강조한 연출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환자들의 병이 나은 것은 악령을 쫓았기 때문이 아니고 '악령을 내쫓아 주면 병이 낫는다'라는 환자의 믿음과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최면 암시의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퓌세귀르
메스머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 후작 퓌세귀르(Puysegur;1751-1825)는 오늘날의 최면법에 가까운 유도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는 우주 유체는 자력이 아니라 전기이며 이 전기 유체는 동물뿐 아니라 식물 등 모든 생명체에서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전기 유체'를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동안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환자들 중 일부가 '몽유병'상태가 되었으며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의식도 있었으며 암시에 반응을 보였다. 바로 '자기수면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파리아 .클로케 .오뎃
포르투갈의 사제 파리아(Abbe Faria;1756?-1819)는 퓌세귀르에게 최면을 배웠다. 파리아는 또 언어 암시만으로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여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통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도 밝혀냈는데 아마 근대 최면의 역사에 있어 암시만으로 최면 상태로 유도하여 치료를 행한 것은 파리아가 최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1829년 의과 외사인 클로케(Jules Cloquet)는 메스메리즘 하에서 유방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였으며, 1836년 오뎃(Jean Victor Oudet)은 처음으로 메스메리즘을 이용하여 무통 발치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엘리엇슨 . 에스데일
영국의 저명한 의사이자 런던 대학 병원의 교수인 엘리엇슨(John Elliotson;1791-1868)은 1837년에 최면 실험을 시작한 이래로 환자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그 기술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는 최면 마취만으로 1800여건이 넘는 외과적 수술을 통증 없이 시술하였으며 암시를 통한 신경성 질환의 치료도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에 엘리엇슨의 제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외과의 제임스 에스데일(James Esdaile;1808-1859)은 인도에 머무르면서 '자기적 수면'이라고 이름 붙인 최면 수술을 함으로써 최면이 보다 과학적 인정을 받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행한 무통 수술은 작은 수술만으로도 수천, 대수술은 300건 정도 이다. 그 중에는 손발 절단 수술, 거대한 종양 적출 수술, 무통 분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후 마취제의 발명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제임스 브레이드
영국의 의사인 브레이드(James Braid;1795-1860)는 굳이 동물자기 등을 사용하지 않아도 빛나는 물체를 응시하면 최면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현재 최면의 유도법으로서 매우 대중적이고 유명한 방법인 '응시법'의 시초이다. 그는 신경 수면 학설을 도입하여 메스메리즘이란 말 대신 1842년 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hypnos(최면)'이란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는 후에 자신의 수면 학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최면이라는 명칭을 바꾸려 했지만 무산되어 결국 오늘날까지 그대로 불리게 되었다.
낭시 학파 : 리에보 .베르네임
프랑스 시골 마을의 개업 의사 리에보(Ambrose Auguste Liebeault;1823-1904)는 환자들을 최면성 트랜스 상태로 유도한 후 '직접 암시'를 줌으로써 치료하는 혁명적인 테크닉을 개발했다. 그는 최면 유도에 있어 환자의 기대감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던 중 리에보가 최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티푸스(독;Typhus)의 연구 등으로 유명한 베르네임(Hippolyte Marie Bernheim;1840-1919) 교수가
리에보라는 시골 의사를 내방했던 것이다. 베르네임 교수는 자신에게 치료를 받던 극심한 증상의 좌골 신경통 환자가 전혀 호전되지 않자 리에보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리에보는 직접 암시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료하게 된다.
베르네임은 환자가 치료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어 리에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20여 년을 함께 최면요법을 이용해 85%의 경이로운 성공률을 보이며 3만 여명의 환자를 치료해 내게 되었고 성공 사례를 모아 암시 치료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 유럽 전역에서 의사들이 최면요법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후 리에보와 베르네임의 제자들을 낭시 학파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낭시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살페트리에르 학파 : 샤르코
낭시 학파와 쌍벽을 이룬 또 하나의 최면 연구 학파가 있는데, '살페트리에르 학파'로,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유명한 신경병 이학자 쟝 마르텡 샤르코(Jean Martin Charcot;1825-1893)가 그 중심인물이다.
그는 분리설을 주장한 피에르·자네, 후에 지능 테스트를 개발한 알프레드·비네 등 우수한 제자들을 양성하여 낭시 학파에 대치하는 강력한 학파를 형성해 갔다. 샤르코는 최면 수면의 각 단계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는데, 첫째는 경직증, 둘째는 기면상태, 셋째는 몽유병이라 하였다.
이런 샤르코의 견해는 그가 쓴 평론이 188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면서 메스머 이래 100여 년 동안 오로지 자기 요법(최면요법)을 계속 부정해 온 일반인과 의학계 그리고 과학계가 마침내 이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샤르코는 최면학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최면분석과 정신분석 : 브로이어와 프로이트
1893년 브로이어(Josef Breuer;1842-1925)와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가 '히스테리아에 관한 연구'를 저술해 카타르시스법과 그 이론을 발표하여 후에 정신분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와 리에보, 베르네임에게도 최면에 대해 배운 후 브로이어와 함께 이야기 요법(굴뚝 청소)이 어떻게 환자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수립했다. 최면 상태에서의 환자가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털어놓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감정이 경감되어 정서적 해소 현상이 일어남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리요법(카타르시스)이라고 불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의식'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암시가 아닌 방법에 의한 정신병에 대한 최초의 최면 치료가 되었는데 이로써 '최면분석'이 성립되었다. 브로이어는 정신적 저항 등으로 최면 상태로 유도할 수 없었던 환자들을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라는 기법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는데 가벼운 수면 단계에서 활용되는 자유연상의 치료 방법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이란 학문을 완성해 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칼 융
또 초기에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함께 일하였고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던 융(Jung;1875-1961)도 한때 유능한 최면 치료사였다. 최면으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질병의 원인에 관계없이 증상 치료에 좋은 결과를 나타내자 환자들이 융을 마법사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회의를 품었으며 이 후 최면을 멀리 하였다.
파블로프
'조건반사'로 유명한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1849-1936) 는 최면을 계속 사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면의 정의를 '본래의 수면은 대뇌 피질의 대부분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제지한 상태이며, 최면은 대뇌 피질의 일부분이 활동을 정지한 부분적 수면이다.'라고 하였다.
피에르 자네
1890년 샤르코의 수제자인 프랑스의 신경 학자, 심리학자였던 피에르 자네(Pierre janet;1859-1947)는 최면이 갖는 이완 효과와 치유를 촉진하는 효과를 발견 후 열성적인 최면 학도가 되었고 후에 분리 학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후 샤르코의 수많은 오류를 수정하고 설명하였으며 샤르코와 함께 최면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많이 도입하였다.
에밀꾸에
프랑스의 에밀 꾸에(Emile Coue;1857-1926)는 자기암시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임상적 이용을 통해 최면 분야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본래 약제사로서 대부분의 환자가 마음(자기암시)으로부터 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암시할 수 있고, 치료 효과도 높일 수 있는 각성 암시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는 연구와 임상 시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무의식적인 암시가 아닌 의식상의 '자기암시 요법'의 체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꾸에가 환자에게 가르친 암시 중 유명한 것이 「나는 날이면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진다.」라는 것이다. 꾸에는 '암시의 본질은 자기암시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환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암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피암시자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암시가 성공하는 필수 조건이라고 하였다.
보크트
독일의 신경과 의사이자 대뇌 생리학자인 보크트(Oscar Vogt;1870-1950)는 자기암시 상태가 환자로 하여금 이완과 상쾌함을 경험하게 하며 정신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내면의 무의식적 내용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슐츠
또한 환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을수록 자기암시 상태를 스스로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 쉽게 이완함을 발견하였다. 이 같은 보크트의 연구 보고에 자극을 받은 독일의 슐츠 (Johannes Heinrich Schultz;1884-1970)는 1905년 무렵부터 최면의 정신 생리적 메커니즘에 관해 연구를 시작했다.
슐츠는 최면 상태에서의 공통적 주관적인 느낌인 극도의 무겁고 나른함과 따뜻함을 스스로 자기암시를 통하여 일으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무려 20여 년의 오랜 세월을 연구한 끝에 최종 6단계의 암시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암시 체계를 완성해 오늘날의 유명한 자율훈련법(Autogenes Training)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많은 전쟁 신경증 환자가 속출하면서 이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최면요법이 적합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환자들은 급격히 늘어나는 반면, 정신분석법과 같이 오랜 기간이 걸리는 치료 방법의 한계로 인해 신속한 치료 효과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많은 병사들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작은 참호에 몸을 감추며 공포에 떨면서 싸우던 장면들이 밤이면 밤마다 꿈에 나타나 시달림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최면을 멀리하고 정신분석을 창시한 이래 최면은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린드너, 월버그, 왓킨스, 긴드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 신경증의 치료에 한층 더 최면요법의 가치가 인정되어 의학자들도 다수 참가하게 되었고 정신분석학에 집중되어 있던 이목이 최면으로 옮겨가면서 1944년 린드너(R. M. Lindner)가 정신분석과 최면을 혼합하여 「최면분석;hypnoanalysis」이라 부르고 최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5년에는 월버그(L. R. Wolberg)가 최면분석이 이전의 강박적 부적응 행동을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의식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달아 1949년에 왓킨스(J. G. Watkins)가 최면으로 전쟁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여 빠른 효과를 본 사례를 발표하였고 이 사례는 심층적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일에 최면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51년에는 긴드스(B. Gindse)가 최면분석의 방법을 최면의 새로운 개념에서 더욱 발전시켰다.
헐
미국의 심리학자인 헐(Clark Hull : 1884-1952)은 최면 실험을 통해 최면 상태의 피최면자와 각성 상태의 사람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최면 상태에서는 최면자의 암시를 잘 받아들이게 되는 피암시성이 고도로 항진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최면과 피암시성'이라는 책을 펴냄으로써 이후 최면이 보다 표준화되고 객관적인 실험 절차에 따라 연구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에릭슨
헐의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밀턴 에릭슨(Milton Hyland Erickson;1901-1980)은 현대 최면 요법의 아버지라 불린다. 에릭슨의 업적을 최면에만 한정해 보자면 크게 다음의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방대한 최면 실험을 실시하여 실증적, 과학적인 지견을 축적했다. 최면에 관련한 수많은 미신과 오해를 불식시킨 연구자로써의 실적을 꼽을 수 있다.
둘째, 간접 최면법, 손가락 등을 이용한 관념운동의 원리 등 다양한 최면 유도 기법을 개발하여 피최면자의 적응 범위를 대폭 넓힌 임상가로써의 실적이다.
셋째, 심리요법에 있어서의 최면의 이용에 대하여 발본 적으로 개혁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밴들러와 그라인더의 NLP 체계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에릭슨은 1959년 미국 임상 최면 학회 (ASCH)의 창시자가 되었다.
앨먼
데이브 앨먼(Dave Elman;1900-1967)은 1948년 공개 방송에서 최면쇼를 선보이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타고난 최면 능력을 인정받아 최면 강좌를 개설하여 많은 의료인과 최면 전문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또 그는 재빨리 증상의 원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퇴행시키는 방법인 급속유도법을 개발하여 현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최면 전문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최면의 급속한 발전
오늘날 최면의 추세를 보면 1950년대부터 최면은 몇 가지 커다란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영국,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의학 단체 등에 의하여 정식으로 최면은 가치 있는 수단으로 인정 된 것이다.
1949년 미국 임상 최면 학회(The American Society of Clinic Hypnosis)가 창립되었으며 1955년 4월 23일 영국 의학 협회British Medical Association (BMA)는 장기에 걸친 조사 검토 끝에 최면은 많은 유용성이 있으며 의료 상 지극히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최면과 암시 기법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했다.
1958년에는 미국 의학 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AMA)가 최면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치료 수단으로 인정하였다. 같은 해에 미국 치과 협회(American Dental Association)는 치의학 분야에서의 치료 수단으로 최면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미국 의학회와 함께 의학 및 치의학 전공 학생들이 최면 교육을 받도록 권고하는 정책을 두기도 하였다.
1961년에는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도 최면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치료의 방법으로 공인하였다. 이미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펜실베이니아, 콜롬비아 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 최면 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1969년 미국 심리 학회는 최면에 관심이 있는 심리학자를 중심으로 심리 최면과를 신설해 놓았다.
그리고 근년 미국 종합병원이 신설한 통증처리실에서는 최면을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에는 최면 전문 클리닉 센터가 건립되어 환자들이 최면 치료를 손쉽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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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한번. 잘 복습하였습니다.고맙습니다. 마인드무브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공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