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리정도 소보면쪽으로 길을 따라 가면 송현동(松峴洞:속칭 솔티)이라는 동네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약 5리 정도 가면 조그만 산 밑에 속칭 농바우라는 동네가 있다. 앞서 솔티에는 풍산 유씨가 살고 있었고, 또 농바우에는 연안 이씨가 살고 있었다.
조선성종때 (1480년경) 이곳 농바우의 연안 이씨 집안에서 솔티의 유씨 집으로 한 규수가 출가해 왔던 것이다. 아직 신혼 초 일 무렵인 어느날 오전 이 새 색시는 빨래거리를 머리에 이고서 마을 옆에 있는 조그마한 연당에 나와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하던 중 조금 일손을 멈추고 쉬는 순간, 마침 그 못 옆을 지나가던 어떤 남루한 옷차림의 과객이 건너 산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어허, 참으로 명산이구려"하면서 지나가지 않는가! 이 과객의 말을 연못 아래서 들은 새 색시는 체면을 무릅쓰고 그 과객에게 건너 산이 명산인 까닭이며 또 그곳을 묘택으로 쓰면 어떤 경사가 있을지를 물었다.
과객은 아마 지맥을 통달한 도사이었으리라.
이 새 색시의 간청을 듣고난 도사는 이윽고 산의 정기며 산형이 오지(五指:다섯손가락 모양)의 모양인데 그 손가락 다섯 개 가운데 어느곳이 명산, 명택일 거라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마침 새 색시는 친가에서도, 또 시가에서도 연로한 노인들이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후에 친정에서 부음이 왔던 것이다..친정 조부께서 타계 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양가 모두가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이라 지관을 불러 명산명곡을 다니며 묘택을 볼 수도 없었던 중 우연하게도 전날 그 도사가 일러 준 바로 그곳에 묘택을 정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새 색시는 속으로 몹시 번민하였다.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이 묘터야 말로 나의 후손을 위해서 써야지'라고 결심하고 그날밤에 이미 입관 할 자리를 파 놓은 그곳에 전날 빨래를 하던 그 연못에서 물을 날라다가 붓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베틀에 감긴 베를 깔고 밤새도록 동이에 물을 이고 날라다 부은 것이다. 그 이튿날 친정집에서 묘택을 살피러 와 보니 아니 물이 그득히 새어 나왔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그 옆쪽의 산등성이로 묘택을 옮겼던 것이다. 새 색시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그날의 운상을 마쳤던 것이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새 색시의 시조부도 노환으로 별세했던 것이다. 이 때 그 색시는 어려운데 풍수를 볼것없이 전날 친정집에서 택했던 그곳을 묘택으로 정하자고 했던 것이다. 가서 보니 물이 흐르지도 않고 해서 묘소로 정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그 새 색시의 후손에서 정승(전설에는 서애 유성룡이라고도 하고 실제로 서애의 조부산소가 그곳에 있음)이 나고 가문이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다섯 손가락의 형상인 이 산세가운데 바로 그곳은 둘째 부명지에 해당하는 곳인데 어찌해서 엄지가 최고이지 그것이 명당일 수 있느냐는 말들이 전해지는데, 그것은 그 비껴 맞은편 산이 거문고 형상이라 그것과 합치된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딸년은 도둑년>이라는 전설이 풍수지리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출처: 군위군청 홈페이지
첫댓글 이 묘소가 간성할배 묘소지요. 간성할배 며느님은 안동김씨로 金光粹公의 따님입니다. 이 할머니께서는 풍수와 관련된 많은 일화가 있는데 이 묘터얘기와 더불어 사촌의 정기 얘기도 유명합니다. 서애할배의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지요. 이 카페 어딘가에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이 글은 좋은 글게시판으로 옮겨 두겠습니다.
이 글과 내용이 비슷한 글이 좋은글 게시판 21번글에 올라있습니다. 비교하시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헌씨 공들여 올려준 글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