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26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
미국 뉴욕의 최고층 건물인 세계무역센터는 매일 10만명의 사람이 오가는 곳이
었다. 1993년 2월26일 오후 12시17분,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인 이때 이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을 이용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6명이 죽고 1000여명이 다쳤다.
미국은 세계 대전을 비롯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한 번도 본토에서 전투를 치른 일이 없으며, 테러도 무풍지대였다. 미국의 경제, 문화 중심지인 뉴욕 한복판에서 어진 폭탄 테러는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뉴욕 주지사인 마리오 쿠오모는 “지금까지 어떤 외국인이나 외국군대도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테러 여파로 주차장 벽이 붕괴됐으며, 많은 재와 연기가 건물 위로 퍼져 올라갔다. 건물에서 근무중이던 수천 명의 뉴요커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건물 안에 머물러야 할지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일부 시민들은 사무실 집기로 창문을 부순 뒤 공기를 순환시키기도 했다. 사건 수사를 시작한 경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보석강도단의 소행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폭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 잔해 일부를 수거하면서 수사가 진척됐다.이 차량은 미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분류돼 있던 모하메드 살라메란 남자가 빌린 것이었다.
살라메는 사건 전날 차량이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뒤 렌터카 회사에 보증금을 찾기 위해 나타났다가 FBI에 의해 검거됐다. FBI는 살라메의 자택을 수색해 폭발물을 찾아냈으며, 3명의 용의자를 더 검거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이들 4명은 이듬해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엔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하는 테러조직알 카에다가 납치한 비행기 2대가 충돌했다. 쌍둥이 빌딩은 무너졌고 3000여명이 사망했다. 전대미문의 끔찍한 테러로 보였던 1993년의 사건은 8년 뒤 벌어진 대재난의 작은 전조에 불과했던 셈이다
▶2011년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별세
▶2010년 김연아, 여자 피겨 스케이팅 신기록 작성
▶2010년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유선씨 별세
▶2007년 부동산 실거래 첫 집계
▶2006년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공개
▶2006년 세계인구 65억명 돌파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첫 미사
▶2006년 프랑스, 유대청년 피살에 반유대주의 시끌 정치인·시민 등 3만여명 추모 행진
▶2006년 프랑스, 유대청년 피살에 반유대주의 시끌 정치
▶2004년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마케도니아 대통령 비행기 추락사
▶ 2003년 대법원,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용의자인 남편에게 무죄 판결
https://youtu.be/Jcr2zBz0cuQ
https://youtu.be/qKNfxnsjqOc
▶ 2002년 대법원, 정리 해고, 구조 조정은 단체 교섭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결
▶2001년 남북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3차 상봉
▶ 2001년 서울대학교,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고 박종철에게 명예 졸업장 수여
▶1996년 전두환 전대통령 비자금 첫 공판
▶1996년 제46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에 리안감독 `감각과 분별` 수상
▶1995년 김영식(9세) 킬리만자로 정복, 세계 최연소 등정
1995년 김영식 군(당시 9세)은 산악인인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봉우리 중 하나인 길만스포인트(5685m) 등정에 성공. 이는 그 당시 세계 최연소 등정기록.
▶ 1995년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응단이 45.4%로 남아 선호 분석
▶ 1994년 김영삼 대통령, 1974년 중단후 20년만에 현직 대통령으로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참석 북, 미 뉴욕 회담, 북한의 핵사찰 수용과 3단계 고위 급회담
▶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전면 개방 발표
▶ 1990년 미국, 제1차 한미 금융 정책 회의에서 자본시장 개방 요구
▶1980년 서울지하철2호선중 왕십리~문래동 강북구간 건설공사 착공
▶ 1976년 미 육군 ,1977년도에 한국 내 핵 저장 시설 현대화 위해 의회에 5천만 달러 요구
▶1967년 KBS TV, 아침방송 실시
▶1967년 자전거 개조한 비행기 실험
▶ 1965년 대한 상공회의소, 노동법 개정을 정부에 건의, 산별 노조를 기업별 노조로 변경, 생리휴가 폐지, 50인이하 사업장 근로 기준법 불적용등
▶1960년 미국 해군기와 브라질 여객기 리우데자네이루 상공서 충돌
▶1954년 서독하원, 재군비허용 개헌안 가결
▶1952년 영국, 원폭소유 확인
▶ 1950년 오제도 등 서울지검 5명의 검사, (국가보안법) 3심제 개정 반대의 건의문을 당국에 제출
▶1949년 유엔안보리 심사위원회, 한국유엔가입자격 가결
▶1948년 유엔소총회, 남한지역 총선거안 가결
▶ 1946년 안재홍, (신조선보) 게제, (한성일보) 창간 위생국 화학 연구회, 살충약 DDT제조 성공
▶ 1938년 (조선 육군 특별 지원 병령) 공포 (4.3 시행) 만 17세 이상, 소학교 졸업 이상자 지원 대상
▶ 1932년 서울의 제일 고등보통학교 4년생 100여 명, 교련 훈련 거부
▶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크에서 해조신문 (海潮新聞) 창간 (주필 장지연)
▶ 1906년 손병희, (천도교대헌) 제정, 공포
▶ 1899년 찬양회, 서울 느릿골에서 여학생 30명 모집 , 순성여학교 설립
▶1876년 부산 개항
▶1876년 한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조약) 조인
▶1869년 미국 헌법개정으로 흑인에게 투표권 부여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802년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 출생
▶1801년 조선후기 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 사망
▶1801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 순교
▶ 1881년 경상도 유생 이만손등, 척사와 (조선책략) 공박하는 [ 만인소] 올림
▶1767년 (음)영조가 전배례, 친경례, 노주례를 행함 (조선왕조실록)
▶14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禁火)도감` 설치
△금화도감 설치(1426.2.26)
"지금 우리나라의 화재가 일찍이 이렇게 심한 적이 없었다."(세종실록 권31). 국왕 세종이 크게 우려할 정도로 1426년(세종 8) 조선 도성인 한성에 화재가 그치지 않았다. 특히 2월 15~16일 이틀 동안 발생한 대화재는 수도를 세운 이래 최대 재난이었다.
2월 15일 낮 한성 남부의 한 가옥에서 처음 치솟은 불길은 때마침 세차게 불어온 서북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대부분 집들이 초목으로 지어졌고 닥지닥지 붙어 있는 상태여서 도성 안은 금세 불바다로 변했다. 민가 2천170호와 행랑 160칸이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 23명이 사망했다. 불에 타 재로 변한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날에도 다시 불이 나 민가 200여 호가 소실되었다. 단 이틀 동안 도성 안 가옥의 6분의 1인 2천400여 호가 사라져 버렸다. 화재는 북청·길주·영흥 출신의 유민 7명이 저지른 방화로 밝혀졌고, 이들은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화재를 방비할 전담기관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2월 26일). 제조(提調) 7, 사(使) 5, 부사(副使)·판관(判官) 각 6명으로 구성된 금화도감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기관이다. 금화도감은 그해 6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통합,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이름을 바꾸어 화재 방지와 도성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1460년(세조 6)에 폐지되기도 했으나, 화재가 빈번해지자 1481년(성종 12) 수성금화사(修城禁火사司)로 다시 설립되었다. 수성금화사는 멸화군(滅火軍)을 별도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24시간 대기해 있다가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출동해 진화에 나서는 전문 소방대원이었다.
▶ (음)1423년 남산에 봉화대를 세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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