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열과 광서 본질의 갈등.
그 아가씨는 이미 여기 제이제이 당구장에 명물인 듯 했다.
속된 말로 저 정도의 탐스러운 외모에 얼핏 봐도 제대로 된
폼으로 샷 을 잡으니 그녀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이제이 단골들
입에 수군수군 오르내릴 법도 하겠다.
더욱 근사한 게 그녀는 검정 가죽 가방에 개인 큐대를 지참해
다니는 듯 했다.
헌데, 왜 난 여태껏 한 번도 못 봤지.
하기야, 당구장 코너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이구,,, 포켓볼이라면 신물이 나서 말이지...
벌써 그녀의 샷 하나하나에 ‘우~’ 하는 추종자들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입을 다물고 뒤에서 맥주나 솔솔 들이키며 쭉 지켜봤는데,
뭐랄까. 솔직히 여자가 저렇게 안정된 포지션으로 각을 잡아나가는 건
처음 봤다. 절로 고개가 끄덕일 만큼 괜찮은 실력이었다.
볼을 구멍에 넣는 게임인 ‘나인볼’은 말 그대로 9볼을 마지막으로
넣는 사람이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다.
제아무리 1~8번 볼을 넣었다고 하더라도 9번 볼에서 실수를 범하고
그 9번 볼을 상대편이 넣는다면 승리는 상대편에게 돌아간다.
그 아가씨의 실력은 뛰어났다.
물론 그래봤자. 아마츄어 아닌가.
몰라 그렇지, 이 당구의 판데기에도 아마와 프로가 구분되어 있었다.
마치 노름판의 ‘타짜’처럼, 프로들은 내기나 돈이 걸리지 않으면
대를 잡지 않는다. 그리고 이 포켓볼의 경기는 일반 4구와는 달리
안정된 샷과 정확한 각도도 중요하지만 알고 보면 8할이 ‘디펜스’
의 싸움이다. 내가 지금 직면한 번호의 공이 구멍에 불과 1센티를 앞두고
서 있다할지라도 그 다음의 나열된 번호들이 공들의 위치가 잘해봤자
세구 이상 나가지 못하겠다 싶으면 과감히 포기하고 상대방이 각을 잡기
더러운 곳에 내 공을 포진시켜야 한다. 때론 넣게 두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치열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원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첫 샷을 빵! 때려 볼이 분산되는 동시에 이미 수를 다 읽어낸다.
어느 시점에서 디펜스를 이렇게 해야 되겠군. 속으로 수를 읽는다.
예컨대, 상대방이 4, 5번 볼을 다 홀인 했을 때 6번 볼이 키가 될 우려가
있다. 순식간에 판세를 읽고 7번, 8번 볼 중에 하나를 가장 더러운 위치에
갖다 놓는 실력이다. 가장 마지막 볼인 9번 볼은 6,7,8볼의 위치에 따라
그 위치도 결정되는 것이다.
말이야 쉽지만 , 어느 정도 기본 4구 실력에 최소 2, 3년의 수련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봐야한다. 완전히 본능화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장원식에게 내가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은,
수 만 가지 중의 단지 하나인, 그깟 나인 볼 게임 따위에 너무나 거창한 철학 따위를 주입하려 들었단 것이다.
‘ 인생이 앞 만 보고 가다보면 저렇게 3번 볼이 변수로 작용하고
3번 볼을 넣지 못하면 적들에게 결국 4, 5번 연결되면서
게임에서 지게 되어 있다. 게임은 이겨야 된다!
승부에 비겁한 게 어딨노! 광서 넌 너무 생각이 없다.
얕다!. 앞만 본다.
항상 그 다음 수를 생각해라. 빠져 나갈 구멍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
참으로 가찮다. 게임은 게임일 뿐, 무슨 인생을 논하고 그럴까.
하지만, 나 또한 점차 나인 볼에 내공이 커갈수록 장원식의
개똥철학에 왠지 동감이 갔다.
별 것 아닌 게임이지만, 그 게임마다 룰이 있고 룰이 존재하는 이상
그리고 승부가 존재하는 이상 지구상 그 어떤 게임도 인생을 투영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은 게임이지만 이겨야 한다.
자꾸 지는 버릇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겨야하는 게임을 벌어졌다면,
변수를 생각하고 또 그 변수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구멍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펜스’의 기술인 것이다. 즉 ‘공격을 위한 방어’의
기술이었다.
그 아가씨는 샷도 파워가 있고 정확하지만 아직 디펜스가 약했다.
힘 조절도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러니 무조건 정확하게 닥치는 번호의 볼에만 집중하다보니 시원시원하게 볼을 들어가더라도 곧 난관에 봉착하기 십상인 것이다. 승부수를 너무 남발했다.
그녀는 완벽한 샷으로 1번에서 4번까지 볼을 홀인하였다.
난 박수를 쳤다. 그 정도면 굉장한 것이었다.
그러다 5번 볼을 실수하여 상대방에게 순서를 넘겨줬다.
상대방은 5번 볼을 넣고 6번 볼을 놓쳤다.
6번 볼의 위치가 더러웠다. 하지만 8번 볼의 위치가 더 더러웠다.
나 같으면 6번 볼을 치는 척 하면서 7번 볼을 약간 구석진 곳에 두겠다.
즉, 이게 동시 터치인데... 좀 어렵다 아마추어 애들에겐..
통상 당구라는 말하는 4구 실력 300이상은 되어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정 안되면 6번 볼을 상대방이 넣기 좋게 최대한 구멍 가깝게 두어야 한다.
그러야만 6번과 7번 볼을 넣고 8번 볼에서 결국 막히기 때문이다.
8번 볼은 여하튼 상대방의 샷에 의해 포지션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는 마지막 9볼의 위치에 따라서 또 디펜스전략을 짜야한다.
헌데, 상대방 큰 귀고리를 한 가죽바지의 젊은 사내가 워낙 실력이 없으니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그녀가 8,9번 볼까지 깨끗하게 정리하고 이겼다.
난 박수를 또 쳤다. 그리고 흥분된 억양으로 그녀에게 외쳤다.
“야~!, 아가씨는 힘 조절 하고 디펜스만 더 배우면 정말 물건 되겠다. ”
부지불식중에 게임에 몰입하고 만 것이다.
마치 장한 제자에게 칭찬을 내리듯 그녀에게 말 한 것이다.
사실 어찌된 판인지 흐뭇했다. 여자라고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녀는 날 보고 구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니 따위가 뭔데 감히 나에게 지적질이야.’ 뭐 ,이런 투였다.
“아가씨. 시원한 샷만 날리면 잘한다는 소리는 들어도
게임을 이긴다는 보장은 할 수 없잖아..안 그래? “
난 진심이었다. 그러니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는 큐대를 세워 쵸크칠을 짜작짜작 해대며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 한 게임 하실래요? 지시면 셧-업하고 사라지세요. 궁시렁거리지말고 ”
이런, 못된 계집애. 말하는 꼬락서니하고. 성깔머리 있네.
다음 순서의 청년에게 피쳐를 하나 사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난 큐대를 잡았다. 그리고 살짝 키스를 했다.
그 옛날의 버릇이었다.
좌우로 목도 돌리고,
너무 오랜만에 대를 잡아서인지 지리릿 정전기가 돋았다.
“먼저 시작하슈~~”
그녀는 당구대 조명아래에서 몸을 엎드려 샷을 준비했다.
검고 윤이 번들거리는 생머리 . 그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드러나는 가느다란 목선 그리고 그 선에 딱 등급이 맞는 맑고 투명한 피부.볼수록 차~암 예쁘네... 그러면서 문득 상열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내 꿍꿍이는 음흉하다. 더럽다.
‘빵!’ 소리를 내며 볼들이 흩어졌다.
이미 7, 8볼이 구멍으로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모든 볼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았다.
대충 훑어보니 1,2,3은 이 애가 쉽게 넣을 거 같고.
어쩌면 4번까지.... 이런 결승구인 9번이 당구대 세로 선에 딱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6번 볼이 키 볼이다.
그녀는 실력을 한껏 뽐내듯 1-5번 볼까지 모조리 구멍에 넣었다.
마지막 5번 볼은 다소 재수.
6번을 넣다. 그녀는 실패했다. 내 차례가 왔다.
난 6번 볼을 9번 볼이 붙어있는 반대쪽 코너 가까이에 붙여 놓았다.
그녀는 초크칠을 한 번 힘 있게 하고 나서 6번 볼을 쾅! 하고 집어넣었다.
이제 문제다. 제발 일 직선으로 서라.
볼이 데굴데굴 굴러 딱 내 생각대로 중앙에서 멈췄다.
그녀의 표정이 난감하다는 투다.
결국 뭔가를 결심하더니 9번 볼을 약간 왼쪽을 노렸다.
즉 9번 볼을 붙은 벽을 타고 반대편 구멍으로 넣겠다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확률은 30%다.
쾅! 소리를 내며 흰공이 9번 볼을 때렸다.
물론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각도로 굴러가면서
9번 볼이 결국 중앙 사이드 구멍 가까이에서 멈췄다.
아이고, 눈 감고도 넣겠다.
난 살짝 힘만 주어 9번 볼을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 발가스름 상기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생각을 안 하니 손발이 고생이지...”
난 큐대를 놓고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까 순서를 양보해 준 청년에게 약속대로 피쳐를 사겠다며
함께 바 테이블로 가자 말했다.
그 청년은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다.
에이, 약속은 약속이지. 하지만 끝내 그 청년은 사양했다.
“아저씨, 한 게임만 더 하시죠.”
어느 틈에 내 뒤 그녀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난 고갤 흔들었다. 약이나 올리자는 심산이었다.
“아가씨가 좀 더 배우고 오면..”
그녀는 천정을 바라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한 게임 더 하시죠.”
아이, 가시-나 앞으로 천천히 보면 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제법 승부욕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나 또한 그런 식으로 대쉬하면 불끈 승부욕이 올랐다.
“내기합시다. 그럼.”
나도 슬슬 발동이 걸려 버렸다.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리라 내심 마음먹었다.
“무슨 내기요?”
그녀의 머리가 어리둥절 약간 옆 기울었다.
난 손가락을 튕기며 비열하게 웃었다.
“땡꼬 다섯 대”
그리고 손바닥을 활짝 폈다.
“제가 이겨도 별 좋을 게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럼 내가 지면, 양주로 한 병 사지. 뭐.”
“그럼, 좋아요!”
당구장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내가 아닌 그녀의 승부에 호기심을 보였다.
뭐, 다들 그녀 편일 것이다.
흰 공이 탁! 충돌을 일으키며 볼들을 분산시켰다.
1, 5번 볼이 첫 샷에 구멍으로 빨려갔다.
전체적으로 조감을 해보니 어려운 포지션은 없고
2번 볼만 넘기면 3,4,7번 볼 까진 무난했다.
8볼이 약간 애매하지만 9번 볼은 그리 난해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2번 볼을 넣고 3번 볼에서 실수를 했다.
잘 풀리지 않는다는 뉘앙스인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댔다.
헌데, 3번 볼이 당구대 긴 면에 붙으며
그 면에 3볼과 흰 공 9볼이 약간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아, 옛날 같으면 3볼을 치면서 쭉 빨면서 흰 볼을 역회전 시켜
9볼을 바로 치는 게 딱 정답인데..
에라이 모르겠다. 8볼이 애매하게 있으니까...안되더라도. 보험 들었다.
난 의도대로 3볼을 치면서 역회전 샷을 구사했다.
뭐가 흥미진진하게 판이 이어 가야하는 재미가 나는 데,
정확하게 생각대로 볼이 역회전이 걸리며 9볼을 치고 밀며
9볼은 구멍으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완샷에 승부가 판가름 나 버렸다.
에이, 싱거워라.
“아가씨,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번 판은 재수가 붙은 판이네..”
난 큐대를 귀퉁이에 세워두고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닦았다.
“아뇨, 내기는 내기니까. ”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이마를 갖다 댔다.
“됐다니까요.”
무턱대고 들이대는 일방적 태도에 괜시리 짜증이 났다.
“아뇨. 대신 약속대로 맞고 한 게임만 더 하시죠. 마지막으로. ”
그리고 이마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이것봐라!-싶었다.
나도 결국 화가 났다.
다시 공을 세팅하고 그녀에게 무겁게 말했다.
“ 이번에도 지면 진짜 맞습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샷을 준비했다.
결국 그녀는 그 게임에서도 날 이기지 못했다.
내가 쳐놓은 디펜스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그래도 워낙 그녀의 샷이
좋아 아슬아슬했지만 8, 9볼을 내가 연이어 잡으면서
게임은 종료되었다.
3판을 연짝 깨졌으면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안되지....이 아가씨야.
손가락을 움직여 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녀도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듯 이마를 다시 한 번 까고 들어왔다.
난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닦은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왼쪽을 단단히 잡았다.
그런 다음, 정말이지 있는 힘을 다해 첫 땡꼬를 날렸다.
그녀도 고통이 극심했는지 입술을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면 알 수 있었다.
어의가 없었다. 보통 고집이 아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봐줄 거 없다. 때려라!’라는 일종의 시위를
하는 듯 했다.
“고수가, (두 대)한 수 가르치면,(세 대) 예, 하고 (네 대)
배우면 되는 거지. 어디서 개아리를 지겨(다섯 대) “
따가움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녀의 눈가에 배여든 눈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나 또한 결심했다.
‘넌 탈락이다. 승부욕은 좋은 데 아집이 너무 세다.’
그녀의 이마에 어느새 불룩한 빨간 뿔이 돋아 있었다.
“아저씨, 정말 마지막 부탁인데, 한 게임만 더 하시죠. ”
뭐, 이런 게 다 있어!. 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소름마저 확 끼쳤다.
그 때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내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여보~, 나 치킨 먹고 싶어. 올 때 사와. 사랑해.’
“아저씨, 한 게임만 더 하시죠.”
난 핸드폰의 액정에 나온 아내의 문자를 그녀의 눈앞에 갖다 댔다.
“나도 솔직히 머리에 구멍을 내고 싶지만,
마누라가 오래. 닭 튀겨서...”
난 자리로 돌아왔다.
바텐더 ‘송석현’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배아씨 우리 제이제이에서 알아주는
선수로 통하는데...“
난 카드를 꺼내 바텐더 ‘송석현’에게 주었다.
빨리 치킨이나 한 마리 구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석현씨, 저 아가씨 빌(Bill)지도 있으면 같이 계산해줘”
바텐더 ‘송석현’이 고개를 돌려 입 모양으로 ‘같이요?’라고 했다.
난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도 왠지 미안하고 그래서...
난 카드를 돌려받고 싸인을 한 다음 양복 상의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뚜벅뚜벅 제이제이를 빠져 나갔다.
막 입구를 벗어날 쯤,
그 배아라는 아가씨가 기둥 뒤에서 나타나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섰다.
“아저씨, 언제 또 오실 건가요?”
이것이 참 당돌하네....
“어이, 배안지 배아트리첸지 하는 아가씨. 당신 꼴 보기 싫어서 안 올래.”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난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 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또 그 특유의 구린 미소를 지으며 획 돌아섰다.
그리고 팔을 길게 뻗곤 가운데 손가락을 삐죽 내민다.
촬랑촬랑 긴 생머리를 흔들며 그녀는 안으로 사라져갔다.
참,,네... 정말 못돼 쳐먹었네.
33부.
“ 어, 난 데... 좀 보자. ”
내선으로 상열에게 호출이 왔다.
하기야 너무 진척사항이 없었다. 그러니 별 다르게 보고할 내용도 없었다.
철환에게도 전화를 걸어 체크를 몇 번 했지만 그 녀석도
그 녀석 나름대로 이리저리 탐문하기 바쁜 모양이었다.
‘몸 챙겨 가면서 해.’-라고 말은 그랬지만,
사실 난 때를 기다린다지만 다소 초조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상열의 호출을 받으니,
아~, 이거 한 소리 듣겠는데.- 싶었다.
나쁜 예상은 꼭 적중하는 것 같다.
상열은 다리를 꼬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내가 방을 들어서자 ‘지찍’ 재떨이에 공초를 비벼댔다.
얼굴에 나름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맞이한다지만 왠지
약간의 불만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 진도는 좀 나가고 있나?”
난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니가 기자들 수습해라고해서 어제 술 한잔 했다.
헌데, 무슨 작업인지 한 번도 애기를 안 하네? “
어떻게 보면 너무나 유치한 작업이라 솔직히 그에 대해선 세세하게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그냥 나중에 압박용으로 좀 쓸 때가 있어서..지금 찾고 있어..”
경청하는 상열의 얼굴이 검붉게 타올라 있었다.
요즘 뭔가 풀리지 않는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그래. 알아서 하고... 요즘 상가도 분양이 약간 주춤하네. ”
상열은 그 말을 하고나서 똥이라도 씹은 듯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사실 난 한석에게 그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었다.
지금 그 어떤 상가든 알짜배기 목 좋은 자리야 구태여 열 올릴 필요도 없이
30%까지야 무난히 분양이 되지만, 그 이후로부턴 분명한 컨셉과 테마가
있어야 하고 과연 투자가치가 있을 만큼 임대수익을 올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1층 쇼룸의 효과로 그럭저럭 이미지는 먹혀들었지만 임대수익에 대한
투자자의 예리한 질문엔 분양대행직원들도 버벅거리기 일쑤인 모양이었다.
예컨대 1층 한 구좌에 6평을 1억 8천만 원에 매입한 경우,
투자수익률 8%를 가정했을 때, 과연 누가 공유면적을 뺀 실 평수 3평짜리
코딱지만 한 공간을 월 120만원을 내고 임대하겠냐는 현실적인 질문이
나올 터였다. 인근 보통 옷가게에 비해 턱없이 비싼 임대료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강력한 메리트도 없는데 누가 얼씨구 좋다 입점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통상,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일반 소비층을 흡수하는 힘이 일반 로드 샵보다
뛰어나다며 광고를 한다. 그리고 그 예로 백화점을 예시하거나 걸핏하면
동대문의 기존 상가들을 걸고 자빠진다.
어마어마한 유동인구를 눈으로 보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물며 전문화된 테마를 내걸면 더 배가된 소비층이 흡수될 거란 그럴 듯한 가설을 내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기존의 동대문 상가는 부동산 전문가가 아닌 유통업자가 구조를 짰다.
철저히 유통적 측면에서 , 그리고 소매와 아울러 도매의 개념을 모두 가지는
집적효과까지 몽땅 계산한 시장조사에서,
장사라면 이골이 난 ‘꾼’들이 과거의 경험과 장사의 통계를 통해서 이룩한 것이었다. 소위 'M.D' 즉 ‘상품구성 디자인’은 하나의 거대한 작업이다.
유통전문가 중에 전문가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거대한 작업인 것이다.
그들 머릿속엔 이미 거울의 위치까지도 계산에 들어가 있다.
그야말로 프로 중 프로, 유통에 잔뼈가 굵어진 그 프로업자들이
부동산의 개념을 도입해서 만든 것이 바로 ‘상가’의 컨셉이자 구조이다.
헌데, 유통에 대해 문외한인 부동산업자들이 ‘유통의 구조’를 짓고
분양을 하니 운영적 측면이나 테마로 내건 아이템의 예상 수익적 측면
그리고 수익적 측면을 잘 운영하여 발생된 이익의 크기에서 월세를 지불하고도 남는 장사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당연히 새로운 테마에 입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입점도 하지 않는 상가를 누가 또 분양하겠는가.
하지만 보통 분양이 우선임으로,
틀림없이 임대가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무조건적인 가정을 때려놓고 나서 분양 메리트를 주장한다. 그러니 대개가 소위 ‘사기분양’인 것이다.
무슨 ‘국내최초~~~’이니, ‘대규모 인삼~~’ 이니 ‘유아전문 ~~몰’이니
내가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유통전문가는 없었다.
원천적인 가격 조절력을 가지 않으면 모조리 사기인 것이다.
3:3:3의 법칙.
원가 33%, 고정비 33%, 수익 33%에서
원가에서 원가와 수익의 합을 나눈 것이 0.5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그리고 수익을 전체의 합을 나누어 0.4가 넘지 않으면,
그 상가의 임대솔루션은 진실이 아니다.
난 답답함을 느꼈다.
진정으로 분양을 성공하려면, 임대솔루션에 대해 많은 보강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미 기존 상가들에게 서너 번씩 속은 분양자들이 보도매체를 통해서
여러 번 이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한 터에 더 이상 분양대상자 즉 투자자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난 이점을 굉장히 주시하고 있었다.
상열은, 자기 소원인 확실한 분양성공이 바로 임대솔루션의 진정성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 임대솔루션을 보강하고 더 연구해야 한다.
사람들 바보 아니다..“
난 결국 입을 열었다.
“야! 광서야 답답하다. 분양이 안 되면 결국 우리도 망한다.
임대는 그 후의 문제다. “
목소리가 몹시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상열은 담배를 또 꺼내 물었다.
계속 그 우거지상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답답하다. 답답해. 애들이 전부 바보 멍청이들이다.
그나마 광서 너 마저 그런 소리하면 난 어떻게! “
상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담배연기를 마구 피워 올렸다.
“광서야, 그냥 상가로 돌아갈래? ”
“아직 한 달이 안됐잖아...”
난 힘없이 대답했다.
“ 자금이 점점 메마른다. 수원 건도 사실 좀 서둘러야한다. ”
상열의 말에 뭔가 덜컹 불안함이 걸렸다.
수원 재개발 건에서 우선 발생하는 금원은 임대솔루션으로 투여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차후 상열의 컨디션이 좋을 때 다시 한 번 그 문제를 짚자.
이렇게 서둘러 결단을 내렸다.
“알겠다.”
“그래 , 일 봐라.”
내가 방을 나올 때까지 상열은 계속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
퇴근 후, 난 제이제이에 발길을 옮겼다. 결국 답답해서였다.
난 자리에 앉자말자 바덴더 ‘송석현’에게 잭 다니엘을 주문했다.
그리고 조용히 담배 반 갑이 모조리 소진될 때까지 고민에 빠져있었다.
“아저씨, 안 오신다더니... 한 게임 하실래요? ”
향수냄새가 함께 옆자리에서 이상한 음성이 들여왔다.
베아트리체였다.
“오늘은 별 내키지 않네. 다음에 합시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슬렁슬렁 흔들었다.
“ 술 한 잔 주실래요? ”
참, 애가 볼수록 예의가 없는 건지. 앉아란 말도 안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 의자에 앉아버렸다.
바텐더 ‘송석현’이 수수께끼같은 미소를 띠며 잔을 내어왔다.
‘처먹어라. 가시-나야’
난 잔에다 술을 따라주었다.
“아저씬, 정체가 뭐예요?”
슬그머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꿈꾸는 양아치다. 왜? ”
순간 그녀의 입술이 오므라들며 비웃듯이 작아졌다.
그리고 또 고개를 슬렁슬렁 흔들어댔다.
‘쯧. 아이~씨. 그래 넘어가자. 꿀꿀한 하루다’
“ 아저씬, 어디서 나인 볼 배웠어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만사 귀찮다.
그 때, 검정 대리석 테이블에 누운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철환이었다.
“어, 나다.”
철환의 목소리가 몹시 다급했다.
‘행님, 잡았습니다. 여기 강남 차병원 앞 룸빵에 들어갔습니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기다려라! 바로 갈게! ”
난 급하게 상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버턴을 눌렸다.
‘응, 광서야.’
그새 상열의 목소리는 회사 때완 달리 많이 사그라지어 있었다.
“그 기자 연락해 대기 좀 시켜줘. 나중 다시 연락할 께.”
‘무슨? 어. 일단 알았다. 그럴게. 욕봐라 ’
난 빠른 동작으로 계산을 마쳤다.
호기심이 가득 배여든 베아트리체에게 말했다.
“어이, 배아. 이 술 나 대신 잡숴. 남으면 배아 이름으로 키핑하고..
다음에 봐! ”
그리고 난 미친 듯이 제이제이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