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셨다. 해산하는 여인이 주는 일반적인 의미는 출산의 고통 뒤에는 아기가 태어난 것으로 인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본 구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아이를 낳으면'이란 구절과 같이 '호탄'과 연결된 부정의 시상절로서 '해산할 때마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고통 후에 따르는 기쁨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구약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가 지닌 의미를 살펴본다면 본절에서 예수가 이 비유를 사용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좀더 깊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종종 슬픔과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에 비유하였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후기 유대교는 이 수난기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위한 해산의 고통이라고 교리화시켰다. 에수는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적용하여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하심으로써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부활의 사건을 미리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 본문이 구약의 메시야적 종말론 사상을 전제하고 있지만 태어난 '아이'를 사 9:6에 나오는 '한 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제자들의 고통과 함께 탄생할 새로운 이스라엘 곧 교회를 의미한다.
[요 16:22]"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 이는 16절과 19절에서 사용된 '나를 보리라'에 암시된 부활의 사상과 관계되어 있다. 즉 16절과 19절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것에 예수의 부활뿐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이중적 의미로 암시되어 있으며 본절에서는 예수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보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는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나타내실 것을 미리 알리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저들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마음이 기쁠 것이요 - 성도가 얻는 마음의 기쁨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한 후:다윗은 숱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기버할 것을 권했다
. (2)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의 삶에 있어서 두드러진 점은 기쁨이 충만했다는 사실이.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 사랑 다음으로 '희락' 곧 '기쁨'을 언급했다.이 기쁨은 모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원한 기쁨이다. 본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기쁨은 두 가지 종류의 기쁨 모두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기쁨을 얻게 되었으며,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들의 기쁨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이 말은 제자들이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잠시 체험하는 일시적인 기쁨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말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 후 더욱 심화된 기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빼앗다'란 동사가 사본에 따라 세 가지로 각거 달리 기록되었다. (1) '아페레이':이 표현은 유일하게 W사본에서만 언급되었다. 이 말은 '없애버리다'란 의미로 본 구절의 의미를 매우 강화시킨다
그러나 이 말은 필사자가 '들어올리다' 또는 '제거하다'를 의미하는 '아이레이'를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닌 '아페레이'로 잘못 보고 필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아레이':이 말은 '아이로'의 미래형으로 몇몇 사본의 지지를 받는다. 본절이 시제상 미래를 나타내므로 그런면으로 보면 이 단어가 적합하다는 주장이 많다. (3) '아이레이':현재형으로 가장 많은 사본의 지지를 얻고 있다.
본절이 미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형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거나 미래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3)의 동사가 가장 적합하다.
[요 16: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그 날에는 - 헬라어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마지막 날', '시대의 종말'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구절은 부활 이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그날'은 19절의 '조금 있으면'이라는 단어와 같이 유동적 의미를 지녔다고 볼 때 '성령이 오시면'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다.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헬라어 '에로타오'라는 동사는 16절과 30절에서 (1) '질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단어는 후기 헬라어에 있어서 (2) '복 주시길 구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서에서는 '무엇을 요청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2)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본절의 의미는 후반부와 연결되어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의 의미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본절은 27절과 연결되어 구절 전체가 간구에 관한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들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에게 간구한다는 것을 설명하심으로써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이름을 가지고 성부께 직접 기도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1)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구하다'라는 동사를 수반하는 후반부와 별개의 문장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고별 설교 가운데서 계속 의문을 가졌다.모리스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본 구절 다음에 오는 '진실로 진실로'란 용어가 주제의 전환을 암시하므로 하반절의 기도에 관한 내용과 본 구절은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따르면 본 구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하의 근거로 (2)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1) 요한은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야 할 경우에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여 중복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2) 하반절의 '아버지께 구하는'이란 표현은 제자들이 직접 기도해야 할 대상을 밝혀주는 의미를 지닌다.
(3) '진실로 진실로'란 예수의 언어 습관은 반드시 주제가 바뀌어질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강조하며 확증하실 때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4) '그날'은 미래적인 날로서 성령이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직접 질문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므로 구태여 이 사실을 밝히실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 본 구절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26절 ; 15:16)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16도 본 구절과 같은 어순을 지니고 있지만 개역 성경은 각기 어순을 바꾸어서 번역하여 '내 이름'이란 용어가 '구하는 것'과 '주시는 것' 모두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그의이름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
[요 16: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 16:25]"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것을 비사로..일렀거니와 - '비사'로 번역된 '파로이미아'는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본서에서 '비유'으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로이미아'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거나 난해한 말, 또는 상징적인 말의 형태를 가리킨다. 한편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1) 21절에 언급된 해산하는 여인에 관한 비유. (2) 14:1에서 본장 24절까지 말씀하신 것으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사들. (3) 지금까지 예수가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모든 것. 혹자는 '이것'을 세 가지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세번째의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말씀하시는 시점과 장소가 12:36을 기점으로 구분되므로 '이것'이 12:36이전에 말씀하신 것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추정은 '이것'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복수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두번째의 추정이 가장 적당하다. 때가 이르면...밝히 이르리라 - '밝힌다'는 동사는 10:24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예수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던 곳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서 예수는 숨기는 것과 밝히는 것을 그 이유를 깨닫는 집단과그것을 깨닫지 못한 집단을 대조시켜 설명하시지 않고 '때'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하신다.
본절에서는 비유의 깊은 뜻에 대한 이해의 유무가 마가의 기록처럼 제자이냐 아니면 막연한 집단이냐에 따라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그 계시를 밝히시는 때에 의하여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 따라 구분된다. 즉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모든 무리들(제자들 포함)과 부활을 경험한 무리들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비밀을 밝히 알리시는 '때'는 직접적으로 부활 이후 곧 성령의 오시는 때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지상 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오시는 때에 가서야 성부에 관한 것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