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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2일(주일) 주일설교 레위기 19:1~18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새찬송가 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권면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은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명령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세 번이나 명령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도 훗날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1,2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레19:2) 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룩 자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거룩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통해서 유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공의, 자비, 오래참으심 등과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평강 등을 다 합친 개념이 거룩입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이웃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 그리고 자기 부인을 행하게 되는 상태를 거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룩’(Holines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의 원어상의 뜻은 ‘구별하다’, ‘분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세상의 속된 것과 더러운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나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즉 성도들이 옛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성도는 거룩할 성(聖)에 무리 도(徒), 즉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피의 공로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게 된 자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십계명에 잘 요약되어 있고,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 될 수 있으니, 거룩하게 사는 것이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부모를 경외하고 주일을 잘 지켜야 합니다(1~4절).
오늘 본문 3절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부모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한 4절에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4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절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의 한 토막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십계명 중의 5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십계명 중의 4계명)는 계명과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식일과 부모 공경의 연관성 즉 예배와 부모공경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의 예배를 말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주일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넓은 의미의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주일동안 그 안식일에 받은 제의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봉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의 주일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나머지 6일 동안의 삶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예배의 확장이고, 예배는 삶의 축소판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고, 사는 것은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과 부모공경을 함께 제시하였다는 것은 일주일 동안 우리의 삶이 부모 공경의 삶이 될 때 비로소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부모공경이라는 개념도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변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에서 [세태기획]으로 ‘부자외면시대, 부모부양해야 31.7%’라고 하는 제목으로 이런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노부모 부양은 가족 책임이라는 인식이 변하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10명 가운데 9명은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10명 중 3명만 같은 생각을 한다. 전문가들은 “가족 구성원 내에서도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결과”라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 부양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8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5 성인지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조사에서 ‘누가 나이든 부모를 부양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가족’을 고른 사람은 31.7%에 불과했다. 2002년에는 70.7%가 가족에게 부양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1998년에는 이 비율이 89.9%나 됐었다. 응답자들이 가족 대신 부양 의무를 져야 할 주체로 지목한 것은 ‘정부·사회’였다. 2014년 47.3%가 ‘정부·사회가 가족과 함께 노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답했다. 2002년 같은 대답은 18.2%에 그쳤다. 스스로 부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도 2002년 9.6%에서 2014년 16.6%로 늘었다. 홍 연구위원은 “가까이 살면서 자주 왕래하는 근거(近居) 형태의 가족 부양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통합 측 총회장을 지내신 목사님께서 어릴 때 다닌 교회에 독실한 믿음 생활을 하는 18세 소녀에 대한 간증입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교회 생활을 못하도록 핍박했습니다. 그래도 소녀가 생명을 걸고 주일을 지키니 하루는 아버지가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토요일 늦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내일은 산기슭에 있는 목화밭의 목화를 다 뽑아라. 만일 목화를 다 뽑지 않고 교회에 가면 죽을 줄 알아라.”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일어나 보니 딸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혹시나 하고 교회에 가보았더니 예상대로 딸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화를 다 뽑지 않고 교회에 가면 죽는다고 했는데도 내 말을 거역하고 교회에 가다니!”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지만 목화밭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목화가 다 뽑혀 있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그 어린 소녀가 밤새도록 목화를 뽑은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장갑도 없었으니 맨손으로 목화를 다 뽑았습니다. 아버지가 목화 줄기에 묻어 있는 피를 보았습니다. 어린 딸이 그 넓은 목화밭의 목화를 손에 피가 터져도 밤새도록 다 뽑고 교회에 간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딸을 보며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내 딸이 이렇게 까지 하면서 교회에 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그래서 그날 아버지도 예배에 참석했고 예수님을 믿고 나중에 장로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쉽게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주일은 뒷전이고 다른 세상 일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본원칙으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10가지 계명 중에 가장 내용이 길고 자세하게 주신 계명이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입니다. 왜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다른 계명들보다 길고 자세하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안식일 계명이 십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 찬양하니까 망령되이 일컫지 않습니다. 주일성수 잘 하면서 하나님 말씀 듣는 사람은 부모에게 불효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않습니다. 간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성수는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핵심 되는 계명입니다.”
적용) 나는 세상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거룩한 삶을 살고자 주일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고 삶 속에서 부모의 능력과 인격만 보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둘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5~8절).
5~8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목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5~8절 함께 읽겠습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되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목제물을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되 화목제물을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대로 드려야 합니다. 화목제는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제물을 더럽히거나 욕심을 부려 남겨둘까 봐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규례를 어기고 그 제물을 기한이 지나서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고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구약시대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드린 제사는 이웃들과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할 때 신앙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적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양보하지 않고 이웃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상호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도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이 상호관계를 잘 준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앙적관계는 잘 맺는 데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진다면 이것은 반쪽신앙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정에서 하나님께 드림은 이웃에게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 5:22~2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은혜를 베푸는 삶은 물질을 나누는 것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용서를 베푸는 삶을 포함합니다. 이웃과 음식이나 물질을 나누는 삶을 살을 살려면, 먼저 그들과 화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웃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은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내게 먼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증오심이나 원한을 그냥 품고 있으면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노한 소의 우유는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방송 기자가 미국의 큰 농장에 가보니까 우유를 짜는 큰 방 안에 좋은 음악을 해 놓았어요. 그래서 "이거 음악은 뭐 하려고 해 놨는가?" 물으니까 소들이 음악을 듣고 마음이 기뻐야 우유가 잘 나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노한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는 불행합니다. 그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성나고 독한 마음을 품으면 위액의 분비가 잘 안 되어 소화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도 선의를 품고 살게 지으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물론 우리의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집니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물론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한을 오래 품게 되면 그 자신이 손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 속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든지 죄는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고상한 인격의 요소는 물론 성결, 진실, 사랑, 충성, 온유, 겸손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아마 그 가운데도 최고의 요소는 용서할 줄 아는 용서의 정신일 것입니다. .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장 31~32절) 칼루 린포체는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해 주는 일이 아니다. 용서는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용서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용서는 피해자로 남지 않고 강자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라기는 화목제물을 드리며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일보다 더 앞서야 하는 일은 이웃을 향해 원망과 분노의 칼을 가슴에 품지 말고,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의 실수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먼저 용서하는 강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내가 혹시 거룩함이라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용서라는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지 않은 성도는 아닙니까?
세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이웃과의 악행을 멈추어야 합니다(9~18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악행을 멈추어야 함을 말씀하는데, 그 악행을 9절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둑질과 속임, 거짓말과 거짓맹세, 억압과 착취, 삵 치르는 일을 미루는 일, 귀먹은 자를 저주하는 일,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불의한 재판이나 편파적인 두둔, 비방, 이웃의 피를 흘리는 이익추구,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는 일, 원망하는 일도 하면 안되는 악행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사랑은 최고의 법입니다.
예화) 일본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구멍가게를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날로 가게가 번창했는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옆집 구멍가게들이 안된다고 아우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게가 잘되는 것이 옆 가게를 망하게 하는 것인줄 몰랐어요. 가게를 줄입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일 것같아요‘ 그녀는 가게를 축소하고 손님들을 옆 가게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남게 되었고, 그 시간에 미우라 아야코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이 바로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이웃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행각하며 사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예화) 남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어느 선교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는 우연히 코브라와 검은 맘마 뱀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코브라가 독이 담긴 이빨로 물자 맘마 뱀은 금방 축 늘어지면서 죽고 말았습니다. 코브라는 죽은 맘마 뱀을 서서히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맘마 뱀 안에 있던 코브라 자신의 독이 었습니다. 맘마 뱀을 반쯤 삼켰을 때 그 안에 있던 독이 효력을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코브라 역시 몇 번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웃에게 행한 악행이 나열되고 있는데, 이웃을 향한 악행은 코브라의 독과 같습니다. 이웃을 죽이는 독이 결국 자신을 죽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이웃을 세워 주는 아름다운 마음은 오히려 자신을 굳게 세워주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경쟁관계에 있고, 이웃을 이겨야 살 수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고 했습니다. 적용) 내 옆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두신 것은 억압하고 착취하는 나의 죄성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시려는 그 분의 손길임을 믿습니까?
거룩할 수 없는 죄인 (나옥경님의 큐티인 간증)
결론)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우리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또한 믿으십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삼아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땅은 자기를 사랑하고 불의하며,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악한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로 거룩한 자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일예배를 성공적으로 드리며, 삶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이웃에게 악행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교회 예배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며 사시는 수정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