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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묵상글 들 ( 연중 8주 목요일-하나로서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됨으로써 완전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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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8주 목요일-하나로서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됨으로써 완전한
오늘 집회서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신체적으로 불완전한 것은 물론이고,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불완전하고,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도 불완전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모든 것이 하느님만큼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창조된 그것으로서 완전하다는 뜻인가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에 뱀은 뱀으로서,
또 개는 개로서 완전하다는 그런 뜻 말입니다.
그런 뜻이 있을 겁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창조에 결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뭣을 만들려고 하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예를 들어 도공이 자기가 만든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깨버릴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원하시는대로 다 만드실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다 완전하고 다 선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당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지혜서 11장은 이에 대해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당신의 뜻 안에서 완전하다고
하시고 좋다고 하시는 데 비해 인간은 욕심 때문에 자기 욕심에 비추어
하느님이 만드신 것을 불완전하다 하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집회서가 얘기하는 완전함은 조금 다른 차원의 말씀 같습니다.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싫증을 느끼겠는가?"
지혜서의 완전함이 개인으로서의 완전함이라면
집회서의 완전함은 공동체로서의 완전함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완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로서는 불완전하지만 둘로서는 완전하고
셋으로서는 더 완전하고 모두 함께라면 더더욱 완전하여
모든 선이신 하느님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은 모든 선"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 하나도 그것으로서 선이고 나름대로 완전하지만
그 일부 선들이 모두 모여 하나가 되면 전체 선 또는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요, 모든 선이신 하느님만큼 완전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오늘 집회서가 얘기하는 완전함은 하나됨의 완전함이요
사랑의 완전함인데 인간이 혼자 살지 않고
가정 공동체든 수도 공동체든 같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라는
오늘 집회서의 말씀처럼 서로의 선을 붇돋우고 돋보이게 하며
완전하게 하는 공동체가 되고 공동선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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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께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이요,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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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뜨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1990년부터 7월15일부터 현재까지 텔레비전 시청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와 맞지 않아서"라고 하셨고 인터넷도 사용하지 않으시며 신문도 한 가지만 보신답니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한 좋은 사람"이라고 밝히셨는데 2013년 266대 교황으로 취임한 후 쉴 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시지만 휴가를 하신 적이 없답니다. "한 번도 교황이 되는 것을 꿈꿔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대통령이나 군대를 이끄는 장군을 꿈꿔본 적도 없다"고 하시는데 교황께서는 세상에 우뚝 서서 영의 눈으로 주님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요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어 사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강의를 하면 녹음을 합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도 방송기기를 잘 다룹니다. 녹음을 하여 나눠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료정리를 위해서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강연이 있어도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를 합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을 뜨고 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압니다.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자료를 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뜬장님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는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간절히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항상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랑입니다. 죄를 저질러도 잘 잘못을 가리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사랑을 갈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나를 어떤 모양으로 부르고 계실까? 누구를 통해서 부르실까? 아니 나를 불러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당시에 겉옷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신분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고, 밤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이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 되는 전 재산, 신분마저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모두를 내려놓고 예수님만을 갈망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이제 그는 거지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겉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못된 습성, 높은 자리에 앉아 지배하고 대접받으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희생 봉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았으면 지체없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노숙자들을 만나보면 구걸하는 삶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 하고 말합니다. 연민에 갇힌 자신의 신분에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눈먼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영적인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이며 소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 볼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여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의 도움입니다”(27,8-9).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꼭 볼 것을 보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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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신 눈먼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8장에 나오는 벳싸이다의 소경이고 다른 하나가
오늘 복음인 10장에 나오는 예리코의 소경입니다.
벳싸이다의 소경은 이름 없는 무명씨이고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티매오입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소경 치유 기사를 배치한 이유는 8장의 말미에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베드로가 펄쩍 뛰며 만류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야단을 맞았습니다.
묵시적으로 베드로에게 동조하던 나머지 제자들도 군중과 함께 예수님께로부터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는 특별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기적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에 있어서 왜 믿어야 하는지 하는
이유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 목표를 보여 주셨다고 하겠는데,
그 목표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그 이유가 바로 거룩한 변화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이 목표와 이유를 눈을 뜨고 보게 된 사도를 상징합니다.
벳싸이다의 무명씨 소경은 비록 눈을 뜨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보다가 나중에야 뚜렷이 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다니시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마르코의 편집 의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벳싸이다의 무명씨보다 예리코의
바르티매오가 되라는 듯합니다. 부활과 십자가의 진리에 눈을 뜨라는 것이지요.
이는 복음선포의 공리입니다.
복음선포의 목표요 이유가 되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변화시켜주실 미래를 미리 보는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이 전망의 근거는 과거에도 그렇게 이끌어주신 섭리에 대한 역사의식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는 하느님께서 변화시키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사회를 멀리 보게 해 줍니다. 나와 우리의 이해관계나 관심사에 갇히지 않고
공동의 선을 볼 수 있는 사회의식에 눈을 뜨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께서 열어 주실 미래를 보고,
이 미래를 함께 열어 갈 공동선도 볼 수 있는 눈을 뜨기를 바라셨습니다.
미래를 보는 눈은 역사의식에 근거한 부활 신앙이요, 공동선을 보는 눈은 사회의식에
근거한 십자가 의지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비추어주시는
세상의 빛이 보입니다.
교우 여러분,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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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46-52: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바르티매오는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가문의 사람으로, 눈이 먼 채 주저앉아 구걸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되어 버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타락한 인류의 비참하고 무력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예리코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갔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은총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초대와 약속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하에 따라 생명이나 죽음이냐가 갈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것이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혀 주었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잘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신 분을 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인 우리의 묵은 나를 떨쳐버리고 빛을 선택하여 빛이신 그분을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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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장미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넝쿨장미같이
사람의 관계도
이어져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신다.
다시
살게하시고
다시 볼 수
있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시다.
치유의 물결에
우리의 아픔을
맡겨드린다.
하느님 사랑을
거슬러 살았던
지난 시간이었다.
그래서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았다.
소중한 것을
잃고 헤매며
사는 우리들을
치유하여 주신다.
사랑의 치유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된다.
병든 마음이
건강을
되찾는다.
우리 마음이
순화되면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자연스레
아름다워진다.
마음이 너무
분주한
우리들 삶이다.
마음도
다시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쉬어 주어야 한다.
다시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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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만나시고,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라는 이 간단한 설명에서 그의 고단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볼 수 없었고, 구걸하여 먹고 살았으니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만남을 가집니다.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만남만 있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잘못된 만남, 비참한 만남을 통하여 아픔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눈먼 바르티매오 또한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뵘으로써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가집니다.
바르티매오는 간절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의 간절함이 주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가져옵니다. 바르티매오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눈을 뜨게 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유일한 방법, 곧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상이 아닌 주님을 찾고 만나 뵙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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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도자의 덕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시작하면서 지도자에게는 4가지 덕목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통찰력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으로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는 다수의 의견과 올바른 의견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설득력입니다. 다수의 의견이 올바른 의견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득하지 않는 결정은 자칫 독선과 독재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애국심입니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모두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애국심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청렴입니다. 지도자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정책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면 부정과 부패가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는 청렴해야 합니다. 이런 지도자를 선택하는 국가는 민주주의가 꽃 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가지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에 머물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물을 주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가 하나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죄인도, 병자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사제에게도 이와 같은 지도자의 덕목이 필요합니다. 사제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는 공동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경험과 연륜은 배려와 존중을 만나야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제는 청렴해야 합니다. 세상에 보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야 합니다. 하늘에 쌓을 보화는 나눔, 희생, 사랑입니다. 한 가지 더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마음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오늘 바르티메오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능력과 준비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만이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그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눈앞에 주어진 일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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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1923년 핀란드의 중거리 육상선수 파보 누르미는 1.6km를 4분 10초로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1초씩 기록이 당겨지다가, 1945년 스웨덴의 군데르 하그가 4분 1초 3까지 끌어내렸습니다. 이제 곧 4분의 벽이 깨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마의 4분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1954년이 되어서야 영국의 로저 배니스터에 의해 깨졌습니다. 3분 59초 4. 사람들은 4분의 벽이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기에, 이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도 되지 않아 그 기록은 깨졌고 계속 기록이 경신되었습니다(그 뒤 로저 배니스터의 기록을 깬 사람은 자그마치 1,400명이 넘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스로 한계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4분의 벽은 도저히 깨질 수 없다는 한계. 그 한계가 깨지자 비로소 계속된 기록 경신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한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한계, 사랑의 삶을 사는 한계,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한계…. 이 모든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만이 지금보다 더 큰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에리코의 거지 ‘바리티메오’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한계를 짓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지 않습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른 뒤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그는 곧바로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므로, 다른 방해들에 한계를 두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않으며, 어떤 구속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는 이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 것에 한계를 짓지 않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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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바꾸기를 바랐지만,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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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중요할까요?
2005년 미국 뉴저지 주립 럿거스대학교에서는 흥미로운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와 꽃을 받았을 때의 표정을 비교하는 실험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꽃 선물의 완승이었습니다. 꽃을 받은 사람은 모두 ‘진정한 미소’를 지였고,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좋은 기분이 더 오래갔습니다. 또 꽃은 스트레스를 큰 폭으로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식량 문제가 절실한 와중에도 꽃을 심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꽃을 본 사람들의 회복이 더 빠르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치료제이며 선물인 ‘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이 더 좋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꽃으로부터 얻는 혜택도 당연히 얻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꽃과 같은 분이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면 절대로 주님을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을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줄여나가면서 참 행복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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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르티매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10,46ㄴ-48).”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외친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어서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즉 예수님이 바로 ‘구원’을 주실 분이며
‘새 인생’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바르티매오는 할 수만 있었다면 예수님을 직접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기다리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심정은 시편 42편 저자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고쳐 주신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 쪽에서 생각하면, 간절하게 기도해서 주님의 응답을 얻은 일이고,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일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큰 빛’으로서 오신 분입니다(마태 4,16).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얻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9-52).”
여기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곧바로 예수님께 갔다는 뜻인데, 자기가 바라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고,
바르티매오가 직접 자신의 희망을 고백하기를 바라고서 하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또는 “네가 바라는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하신 질문인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요한 1,38).
(이 질문도 “너희가 바라는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라는 뜻입니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바르티매오의 대답은,
구걸을 하면서 먹고사는 일이나 걱정하는 인생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가 앞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암흑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 덕분에 다시 볼 수 있게 된 일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일이 됩니다.)
첫 제자들의 경우에는, “무엇을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요한 1,38).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숙소가 어디인지 알고 싶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도 역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희망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바르티매오의 눈을
고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눈을 뜬 다음에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를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뜻일 수는 없고,
이 말씀은 뒤의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믿음과 구원의 길로 가거라.”,
또는 “믿음을 갖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첫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39).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일단 한 번 와서 함께 지낸 다음에
나를 따를 것인지 결정하여라.” 라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전후 상황을 생각하면, 사실상 “나를 따라라.” 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은, “한 번 구경해 보아라.”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살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원래 ‘부르심’은 ‘함께 살자는 초대’입니다.)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를 예수님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가 갈망하던 ‘새로운 인생’은,
그저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첫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뒤에 곧바로 자기 형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41).
그때부터 이미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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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갈망渴望, 떠남, 만남, 개안開眼, 따름의 여정旅程-
참으로 잘 살고 싶습니까? 한번뿐이 없는 각자 고유의 유일회적인 삶, 누구나의 깊고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 믿는 모든 이들에게 답은 단 하나 분명합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님입니다.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늘, 끊임없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찾는 그리움의 갈망으로 떠남, 만남, 개안, 따름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32년전 사제서품 미사중 입당시 성가 445장을 들을 때 가슴이 뭉클, 눈물지으며 입장하던 때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내 한 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2.“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3.“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이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요즘 새롭게 발견한 ‘뭉클하다(북받치는 감정으로 가슴속이 갑자기 꽉 차 넘치는 듯하다)’란 참 좋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이번 제자들이 열창해줬던 ‘스승의 은혜’의 동영상을 많은 지인들과 나누면서 들은 공통적 말마디가 ‘뭉클하다’라는 표현입니다.
“신부님, 행복하셨겠어요. 옛날 제자들이 부르는 스승의 날 노래가 뭉클합니다. 감사합니다!”
과연 일상의 삶에서 가슴 뭉클했던 감동의 순간이 얼마나 되는지요? 모든 아름다움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로 가슴 뭉클한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우리 마음을 치유하고 순화합니다. 얼마나 많이 무뎌져 있고 거칠어진 우리 감성이요 정서인지요. 아름다운 사랑의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우리를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인도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주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장미꽃 어디에 피었나요?”
“수녀원 가는 길가 담벼락 넘어입니다. 요즘 자연책 읽기만 해도 바쁩니다!”-
어제 도반과 저녁식사시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요즘 곳곳에 끊임없이 이어 활짝 피어나는 ‘환대의 꽃들’이 참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참 좋은 살아있는 성경책이 자연입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면 온통 사랑의 기적으로 가득한 자연성경책임을 깨닫습니다. 1.신구약 성경, 2.내 삶의 성경만 렉시오 디비나 할 것이 아니라 3.자연성경도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렉시오 디비나의 한결같은 수행이 우리를 참 관상가로 신비가로 만듭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제5부 하느님의 영광’이란 주제 아래 전개되는 자연 안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제가 볼 때, 참 관상가이자 신비가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입니다.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눈에 본 것을 묘사하리라.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 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께서는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한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없다.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싫증을 느끼겠는가!”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요즘 제일 좋은 시절 성모성월 5월의 수도원 주변의 자연경관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흡사합니다. 살아계신 파스카의 우리 예수님을 만날 때 무지에 가린 눈이 활짝 열리는 개안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상징으로 가득 한 말마디들로 이뤄진 오늘 복음이야말로 참 좋은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입니다.
‘길가에 앉아있는 눈먼 거지 발토로매오’, 바로 무지의 가난한 우리 인간 실존을 상징합니다. 길복판이 아닌 길가에 앉아서 길이신 주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눈먼 무지의 거지신세인 줄도 모르고 평생 탐욕의 무지에 눈멀어 살다가 인생 허무하게, 억울하게 마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電光石火, 눈먼 거지 발토로매오의 반응이 신선한 감격이자 충격입니다.
“다윗의 자손 에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발토로매오의 갈망과 열망의 반영이자 믿음의 표현입니다. 갈망과 열망은 성소의 원천입니다. 저는 주님 갈망의 그리움이 간절할 때는 불암산 정상을 바라보든지 또는 수도원 집무실 앞 푸른 풀밭 정원을 수없이 동그라미 원을 그리며 걷곤 합니다. 오늘은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로 시작되는 ‘얼굴’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문득 정지용의 ‘호수’란 글과 더불어 역시 제 자작시 ‘호수’도 생각납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정지용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월)–이수철
간절히 찾아야 만나는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없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못만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우리가 바칠 궁극의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여기서 유래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결코 좌절함이 없이 주님을 불렀을 때 주님의 응답입니다.
“그를 불러 오너라.”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적대적이든 주변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에 호의적으로 변합니다. 감사해야 하는 이웃들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한 주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이웃사람들을 통해, 성경을 통해, 교회를 통해, 전례들을 통해, 성사들을 통해, 자연을 통해 만나는 주님입니다. 이런 예수님 주변인들이 없었다면 눈먼 거지 발토로매오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예수님 중심의 도반들 공동체 덕분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길가에 실의에 빠져 시들어가는 우리 영혼들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의 영적 부활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올라야 함을 배웁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불운했던 과거와의 극적 결별의 떠남의 순간입니다.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어부 제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한 두 번 떠남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떠나야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가장 좋았던, 기다리던 시간이 새벽에 일어나 새롭게 떠남의 여정에 올랐을 때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 떠나야 흘러야 맑은 강같은 인생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해 무지에 눈먼 안주의 삶을 살다보면 십중팔구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인생이 됩니다.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의 순간이 참 감동적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정답은 ‘개안의 은총!’ 이것 하나뿐입니다. 흡사 간명하기가 선사禪師와 구도승과의 문답같습니다. 참으로 간절하면 말도 글도 군더더기 없이 짧은 법입니다. 어제 주님의 똑같은 질문에 주님께서 영광중에 오실 때 주님의 양쪽에 앉게 해달라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지요. 진짜 무지에 눈먼 두 제자들과는 달리 발토로매오의 내면의 눈은 활짝 열려 올바른 분별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 떠남, 만남, 개안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갈망과 떠남, 만남과 개안으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마지막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고맙고 반갑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감동적, 결정적 말씀입니다 헤피엔드로 끝나는, 주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무지의 눈은 활짝 열려 다시 주님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등정登程에 오르니 이제부터 진짜 참 삶을 살게 된 눈먼 거지 발토로매오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 있는 두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두귀요, 주님을 따라 걸으라 있는 두발임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갈망과 떠남, 만남과 개안, 따름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참으로 잘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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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피조물의 완전함을 묵상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집회 42,24)
집회서 저자는 주님의 업적을 찬양하며 이렇게 단언합니다. 굳이 남을 보지 않고 우리 자신만 들여다봐도 적잖은 결함과 결핍 투성이인데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니, 저절로 고개가 갸우뚱, 의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완전함과 완벽함을 혼돈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불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완벽은 완전함과 다르고, 또 그건 인간의 영역 밖의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내적 외적 결핍, 결함을 불완전하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이 품고 있는 완성태를 보시니까요. 그래서 그분께 우리 모두는 선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시며, 자비와 용서의 아버지를 닮은 상태를 완전하다고 하셨습니다.(마태 5,38 참조) 또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면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까지 하셨지요.(마태 19,21) 뭔가를 그럴듯하게 다 갖춰야 완전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얕은 생각에 균열을 내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에서는 육체적 물질적 관점에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이가 나옵니다. 바로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8)
예수님께서 완전한 분이심을 믿고 아는 눈먼 이가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는 자비가 완전함을 표출하는 한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 지혜로운 외침은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로 많은 이의 불쾌감을 자극해 그저 묻혀버릴 뻔했지요. 누구에게는 참으로 절박한 필요가, 다른 누구에게는 귀찮고 성가신 소음일 뿐이니 그날 예리코 길거리는 세상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현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그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멈추시어 그를 불러오게 하시자,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청합니다. "다시"라는 걸로 보아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라 중도 장애를 입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어느 편이 '봄'에 대해 더 간절할지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의 간절함에 함께 머무르며 공감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그의 간절한 열망과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그 치유는 기술이 아니라 당사자의 믿음이라고 하시니 그분은 얼마나 겸손하고 또 완전하신지요!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2)
드디어 그가 원하던 바를 얻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바를 얻게 된 이의 첫 행동이 바로 지체없는 따름이었으니까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에 나아간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니 사실 어쩌면 험한 일만 남은 여정이 될 터이지요. 그가 어디까지, 어느 순간까지 예수님 곁에 머물며 신의를 지켰는지 이후 복음사가는 침묵하지만, 그의 나머지 여정은 우리가 채워야 하는 열린 결말로 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성의 얼굴을 봅니다. 자비를 믿는 이의 완전성! 버림과 따름의 완전성! 스스로 자비가 된 이의 완전성! 간절히 원하던 바를 얻자 그것으로 기꺼이, 기쁘게, 겸손히 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야말로 그의 지향과 의지가 오롯이 주님의 바람과 일치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가 단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무언가를 열망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이지요.
결과론적이고 외적인 견지에서야 예리고의 눈먼 이가 실제로 보게 된 치유를 완전함의 회복이라 보겠지만, 신앙의 눈은 한 걸음 더 들어가라고 촉구합니다.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 그리고 그로써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된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마련하신 완전함이 극대화된 표출일 것입니다.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집회 42,15)
그렇습니다. 모든 창조, 모든 피조물은 불완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분의 충만함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분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으신 선의로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 선하심의 열매이고, 그분 자비의 완전함을 나날이 더 닮아가는 중입니다. 결함과 결핍의 아쉬움을 안고도, 믿기에 행복한 이들이지요. 그분은 우리의 결핍과 결함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완전함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부끄러워 말고 어떤 방해에도 포기하지 말고 더욱 용기를 내어 주님께 치유를 청하며 나아갑시다. 버림과 따름의 여정에 들어서서 나날이 완전하게 되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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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10,51)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을 보면 태생 소경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의 간절함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눈먼 거지!'
그의 처지가 어떠했을 지가 짐작이 됩니다.
비참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었을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라고' 부르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함인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시어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된 그는 예수님께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일어나야 할 복음입니다.
우리가 지닌 오관(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제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오관의 기능이 점점 약해지기도 하고,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감각기관이 약해졌거나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관이 건강하게 살아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요 감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오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감각기관'입니다.
영적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고, 맛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영적 오관'이 있습니다.
이 영적 오관이 제대로 살아 있다면,
이 또한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바르티매오처럼,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구세주로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얼마나 간절한가?
굳건한 믿음 안에서,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간절하게 매달려 봅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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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도 때 분심 없애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바르티매오라는 눈이 먼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특징적인 모습은 “스승님!”이라는 칭호에서 잘 나타납니다. 루카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마르코 복음에서만 예수님을 “스승님!”, 즉 “라뿌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부르는 방식과 같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게 된 것은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배움을 우리는 ‘기도’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떠한 기도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만드는지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여기며 배우려 하는 자세입니다.
기도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신의 ‘생각’과의 싸움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고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잊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증가함으로써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듭니다. 생각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숲에서 다람쥐가 야생 비둘기에게 말했습니다.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아?”
야생 비둘기가 말했습니다.
“무게가 거의 없어.”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내가 전나무 둥치 바로 옆 가지에앉아 있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한 눈보라도 아니었어.
전혀 격렬하지도 않고 마치 꿈속처럼 내렸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앉은 가지 위에 내려 앉는 눈송이들의 숫자를 세었어. 정확하게 3,741,952개였어.
네 말대로라면 무게가 거의 없는 그다음 번째 눈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다른 가지로 뛸 수 있었지. 만약 내가 하나의 숫자에 집중하여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던 거야.”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 생각이 아무리 가벼운 생각이라도 결국엔 나를 죄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을 보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람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숫자’에 집중한 것입니다.
수많은 명상의 전문가들조차 명상은 기도를 끊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라이프 코치이며 영적 카운슬러인 크리스틴 해슬러는 처음 명상 수련할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중지시킬 수 없어서 계속 나 자신을 ‘형편없는 수행자’라고 비난했다.”
언플러그 명상 설립자 수지 얄로프 슈와르츠는 말합니다.
“명상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다.”
독자적인 요가법을 창시한 브렛 라킨도 고백합니다.
“종아리와 발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등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잠에 곯아떨어졌다.”
[참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이 명상의 대가들이 힘겨워했던 내용이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 느끼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생각만 없애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우리 속의 원숭이들을 보고 있으면서 원숭이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잘 될까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생각을 멈추려 한다는 것은 “절대 생각하지마. 특별히 원숭이 생각은 하면 안 돼!”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코끼리 생각하지마!”라고 하면 머리에 코끼리가 떠오릅니다. 이렇듯 생각은 멈추려 한다고 멈춰지는 게 아닙니다. 그 멈추려는 생각이 더 나고 그 멈추려는 주제가 더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과의 대화를 멈추려 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등 뒤에 하느님을 바라보았다면 자동적으로 자아와의 대화는 끊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라봐야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냥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스승님!’으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승에게는 무언가 배웁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무언가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왜 오늘 바르티매오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라뿌니!”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분심을 끊는 일은 그저 내 앞에 예수님께서 스승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는 노력으로 좌우됩니다. 물론 자아와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쉽게 그분에게 집중하고 배움을 얻게 되지는 않습니다.
기도의 어려움 때문에 금방 짜증이 나는 사람은, 망고 씨를 땅에 묻어놓고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는 데도 왜 망고나무가 생기지 않고 망고 열매가 맺히지 않느냐고 짜증 내는 원숭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고 조금씩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분심을 없애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되 그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바라보고 듣고 배우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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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은 아니 계신듯 하지만 반드시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목부터 조금은 생뚱맞은 성경이 집회서(集會書)인데, 알고보니 엄청난 책이더군요. 먼저 집회서는 유다 지혜문학을 총결산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집회서는 유다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저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탈무드에도 자주 인용될만큼 유다 문학의 탁월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집회서는 초기 교회 입교 대상자들을 위한 교재로 사용된 책입니다.
불가타 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라고 표현되는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모임의 책’, ‘교회의 책’입니다. ‘교회 공동체 모임에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집회서의 기본 주제는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핵심인 ‘주님을 경외함’입니다. 이 주제를 바탕으로 저자는 인생사 거의 모든 주제를 섭렵하고 있습니다.
우정, 자선, 자녀 교육, 여성과 아내, 의학과 질병, 부와 가난, 종을 다루는 법, 잔치와 식탁 예법, 축제와 경신례, 하느님과 율법, 창조와 인간의 자유, 죽음 등등.
오늘 집회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느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꼐서는 온갖 통찰력을 갖추시고, 시대의 표징을 살피신다. 그분께서는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서는 말 한 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서 42장 18~20절)
집회서 저자의 강조처럼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태초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란 존재는 부족한 인간의 지력으로 언제나 포착하기 힘듭니다.
수많은 현자들과 학자들이 하느님이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딱! 손에 잡힐 듯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계시는 듯, 아니 계시는 듯, 피안의 언덕 위에 그렇게 계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느님이란 존재가 인간의 노력으로 낱낱이 다 파헤쳐지고, 그 모습이 온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니 계신듯 하지만 반드시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듯 하지만 사실 너무나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진작 내게서 떠나신 듯 느껴지지만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내 안에 현존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영혼 안에, 내 정신과 마음 안에 항상 현존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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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앞을 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믿음으로 인해서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자기가 다시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을 겁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온통 암흑 같은 세상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광명의 세상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뜬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뜬 장님과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었는데도,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 믿음이 실제로 눈을 뜨게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눈을 뜨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장님입니다. 마침 지금 눈에 관한 자료를 번역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과학은 아니고 심리적인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이번에 이런 게 사실이라는 걸 번역하면서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재미난 실험으로 이런 사실을 밝혀낸 것 같습니다.
한 그룹은 가림막을 하고 대화를 하도록 했습니다. 한 그룹은 가림막 없이 사람의 눈을 보고 대화를 하게 했습니다. 간단한 결론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눈을 보면서 대화를 한 그룹은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숨길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가림막 때문에 눈을 보지 못하고 대화를 한 그룹은 마치 전화로 통화를 하는 것과 같은 대화를 할 때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실험은 나중에 두 그룹에 대해 실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해 솔직한 느낌을 설문을 통해서 검증을 한 것입니다. 이걸 실험한 사람이 이런 사실에서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연구는 안과 의사와 정신과 의사가 공동으로 연구한 자료입니다.
우리는 요즘 세상에서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실명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실제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진실되게 표현을 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포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제 공개적으로 오픈된 상황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을 한다고 해도 오픈되지 않은 상황보다는 좀 더 신중을 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장님이 된 눈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장님은 단순히 자기 눈이 먼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눈앞을 가리는 가림막 같은 게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뉴스입니다. 가짜뉴스는 멀쩡한 사람도 영적인 장님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 겁니다.
요즘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제대로 정보를 잘 알려고 한다면 액면 그대로 정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이 잘 검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짜 뉴스를 자주 접하다 보면 나중에는 진짜도 진짜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가 다시 앞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지금 보인다고 해서 앞을 본다고 말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신앙의 눈은 장님일 수 있을 겁니다. 실제 무서운 것은 단순히 앞을 못 보는 장님보다 영적인 장님이 우리에겐 더 무서울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도 영적인 장님인 사람이 많다는 강론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던지라 오늘 복음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 신부님 말씀으로는 자기가 장님이면서도 남을 보고 장님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인지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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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김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집회42,15-25)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16)
집회서에서 '창조와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42장 15절에서 43장 33절에 묘사되어 있다.
저자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분의 모든 업적(22)이 그분의 지혜를 드러낸다(21).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22)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한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없다.' (21)
이같은 명상의 내용은 자연 현상과 그 질서를 통해 심도 있게 표현되어 있다(집회43,1~26).
맑은 창공(집회43,1), 태양(43,2`5), 달(43,6`8), 별(43,9`10), 무지개(43,11~12), 눈(43,13.18), 번갯불(43,13),
구름(43,14~15ㄱ), 우박(43,15ㄴ), 이슬(43,22), 깊은 바다와 섬들, 바다의 온갖 생물과 용들을 기억하면서 결론에 이른다(집회43,23~35).
집회서 저자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는 데 '모든 피조물은 좋다'고 표현하고 있는 사제계 전승(Priest codex)의 창조 신학(창세1장)에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완전하심이 들어있는 당신 피조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 피조물 자체가 그렇게 나타내 보이지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인간 내면의 선하고 아름다운 음이다.
인간이 먼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사랑이신 성령 충만으로 가득차 있을 때, 모든 것이 기적 아닌 것이 없고, 그분의 손길 아닌 것이 없으며, 그분의 영광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복음(마르10,46ㄴ~52)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0)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불러오라고 명하시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소경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였으며,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소경 바르티매오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기록하여
역동감을 더해 준다.
여기서 '겉옷'에 해당하는'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은 70인역(LXX)에서 '겉옷'과 '의복'의 두 가지 뜻을 모두 나타내는 히브리어 '베게드'(beged)에 대한 역어로 나온다.
이 겉옷은 일교차가 큰 팔레스티나에서는 밤에 이불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것은 생활 필수품이었으며, 특히 거지 바르티매오에게는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수 있는 유니폼이었다.
낮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지 노릇을 할 수 있는 유니폼이요,
밤에는 이부자리가 되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갔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요 용기였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께 갔다가 치유받지 못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소리가 들리는그 방향으로 재빨리 나아가는데 있어서 그 겉옷이 방해물이 되자 그토록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었지만, 미련없이 가차없이 내어 버렸다.
참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가까이 대면하고 싶었던 그의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과, 예수님을 만난다면 자신이 반드시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내적 확신(믿음)과 희망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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