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다
미얀마 난민들을 위해 긴급구호를 시작한 것 자체가 나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깜박 죽게 만드는 권력도 없고,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박사 교수도 아니고, 사람들의 머리를 굽실거리게 하는 부(富)도 없고,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도 아니고, 모금을 함께 할 수 있는 법인체도 없는 나 자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으로 쫓겨났거나 피난 나온 사람들과 양식을 나눔을 시작한 것 자체가 너무 순진하였다. 이번에도 계산할 줄 모르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단순성과 마음의 감동을 그대로 따르는 여린 마음 때문에 덤터기를 팍 쓴 것이다. 그런 성품 때문에 그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어려운 일을 피해가지 못하고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어려운 일에 쉽게 뛰어든다. 그리고 일을 벌이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기 때문에 징징거리며 기도를 한다.
2021년 12월에 나눔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기적으로 62회의 사랑의 쌀을 나누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쌀을 찾아 모으고자 처음부터 징징거리며 기도로 문을 열었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기도는 미얀마 난민을 위해 모금하는 나의 일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매회 나눔이 끝나고 사진과 보고를 받으면 바로 후원자들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특별한 절기나 모금이 너무 어려워질 때 개개인에게 모금을 요청하는 호소문에 사진을 곁들여서 개톡을 보낸다. 일백수십 개의 개톡을 며칠에 걸쳐 보내노라면 손끝이 닳아서 아리고 쓰리다. 목이 빳빳해지고 팔이 무거워져 온다. 그럴 때 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이번 사순절기간에는 이백여 통에 가까운 개인서신을 카톡으로 보냈다. 난민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만나처럼 부어주시라고 기도하면서 한편으로 많은 분들이 수난을 지나 부활의 주님을 뵙는 축복을 누리길 구하였다.
하나님께서 난민들과 우리 후원자님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순절 기간 동안 두 번의 사랑의 쌀 구호와 6,000개의 부활절 계란을 나누게 해주셨다. 또한 부활절 후에 62번째 나눔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셨다.
사순절 둘째주일과 셋째주일에 인도에서 난민들을 만나고 있는 중에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난민들의 배고픔과 불안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주셔서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타는 목마름으로 울부짖었다. 미얀마 난민들과 마니푸르 난민들에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난민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라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평화 세상을 이루시라고 간구하였다.
몇 차례 기도를 절박하게 아뢰었는데 한국에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모은 헌금 이백만 원을 보냈으니 가장 급한 일에 사용하라는 내용이었다. 기 막힌 응답에 신명이 났다. 이어서 어느 교회에서 난민 구호헌금으로 일백만원이 들어왔고 아들에게 받은 용돈을 보낸 고향 후배와 지인 후원자로부터 난민구호 헌금으로 일백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부활절 계란 헌금 오십만 원이 들어왔다. 이어서 애정 어린 구호헌금이 수시로 답지하였다.
인도에 머무는 며칠 사이에 하나님께서 60차 구호헌금과 부활절 계란 헌금을 다 예비해주셔서 돌아오자마자 곧 바로 60차 구호후원금과 계란후원금을 송금하였다. 이어서 61차 구호헌금을 모금하였다. 후원자들이 아들과 딸들을 다 동원하고, 지인들이 서로 격려하여 바친 헌금이 줄을 이었고 아기 출생을 기뻐하는 헌금과 여러 후원이 답지하여 종려주일에 61차 구호헌금을 보냈다.
61차 후원금 나눔에 대한 보고와 함께 마얀마 국경선 가까이에 있는 미얀마 내 4개 마을 140세대에 대한 구호 요청 편지를 받았다. 무엇보다 나를 숨이 막히게 한 것은 그 지역의 촌장들과 목회자가 구호책임자에게 와서 ‘긴급구호 양식 없이는 마을로 절대로 못 돌아간다.’ 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들이 마을의 대표로서 기아에 직면한 주민들을 대신하여 식량을 구하고자 산 넘고 강 건너 국경선을 지나 수백리 길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호책임자를 찾아온 사실에 가슴이 싸하게 아리고 눈물이 났다. 그러나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는 요청 편지에 마음 한 편에서는 ‘내가 은행장이냐?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서 돈을 만드는 사람이냐? 내가 흙을 파서 일하는 사람이냐? 네가 언제 돈을 맡겨 놓았느냐? 내가 네 빚을 썼냐?’ 하는 등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불만을 터뜨린다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므로 입을 다물고 하나님께 하소연을 시작하였다.
“사순절 기간에 이백여 개의 개톡을 교회와 개인에게 보냈는데 응답이 별로 입니다. 저는 기도하고 개톡을 보내면 감동과 강권은 하나님의 몫이잖습니까? 그런데 여느 때 같으면 절반은 못 미쳐도 상당한 응답이 올 터인데 선거도 있고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그런지 음직임이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주시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난민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몇 개 교회와 교우님들을 통해서 부활절 헌금을 받게 해주셨다. 난민구호 책임자는 후원금을 받은 그날로 그 지역 목회자와 촌장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루에 가지 못하고 도중 국경 마을에서 자고 그 다음 날에 씨아씨에서 출발하여 구 응가파이피마을에서 50세대, 신 응가파이피마을에서 20세대, 파트랑마을에서 50세대, 쿠아필루마을에서 20세대와 쌀 25킬로그램 1포, 식용유 1리터, 설탕 1리터, 홍차 잎 1팩을 나누었다. 대략 2개월분의 양식이었다.
구호를 마친 후 책임자인 사무엘이 짤막한 편지를 보내왔다.
사랑하는 선생님
이번 구호의 여정은 산과 강과 국경선이 있어 힘들었습니다.
4개 마을 주민과 난민들이 우리를 구세주처럼 환대하였습니다.
우리를 맞이하는 그들의 눈빛이 감사와 감격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비상식량을 받고 아이처럼 즐거워하였고 어떤 분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 광경을 보았으면 감동의 눈물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미얀마 국경선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던 그들은 섬처럼 고립되어 단 한 번도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전쟁 이후 저희들이 이 마을들을 방문한 첫 번째 구호단체였습니다.
이 지역은 미얀마 본토 중부까지 연결되는 교통수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절된 지역입니다. 실제로는 친주 하카시 까지는 교통수단이 있지만 미얀마군과 친주 자유투사들의 끊임없는 교전으로 인하여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어 저절로 고립되었습니다.
선생님!
이 마을 사람들은 현재 인도 국경을 넘어 씨아하타운에서 쌀과 설탕, 의복 등의 생필품을 구입하고 있지만 국경 가까이로 흐르는 콜로디강 때문에 우기에는 완전히 고립됩니다. 장마철에는 차량이 일체 출입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우기가 되기 전에 한번 더 비상식량을 받기를 희망합니다. 식량을 한번 더 받지 못하면 추수기인 10월 하순 이전에 마을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선생님!
난민과 주민들에게 선생님과 비전아시아와 한국 교회 후원자님들의 사랑과 기도로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선생님과 후원자님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길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 민족의 고통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 외에는 선생님을 도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기도에 힘씁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묘시
4월 10일 사무엘에게 받은 편지를
우담초라하니 정리하여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