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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멜로 스릴러 드라마
신외숙
호숫가 주변에 있는 산은 온통 꽃밭 축제장이었다. 새하양 샛노랑 진분홍이 군데군데 초록과 함께 자연의 향취를 흩뿌리고 있었다. 흙바닥 위에 떨어진 벚꽃송이는 흰 눈밭으로 변해 봄과 겨울이 합치된 느낌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흰꽃송이와 음악처럼 물결치는 강물은 그야말로 봄의 환상곡이었다.
강 건너편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붉은 꽃잎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치솟고 있었다. 하늘과 강을 사이에 두고 각양 색채가 경쟁하듯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했다. 호숫가를 지나자 좁은 차로가 나타났다. 차로 양 옆으로 만개한 벚꽃이 일직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와! 멋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참을 걸어가자 편의점과 모텔건물이 보였고 노인요양원도 보였다. 요양원은 숲 쪽으로 길이 나있어 공연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요양원 팻말 위로 은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곳에도 투기 바람이 불었는지 땅 투기를 암시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눈을 왼쪽으로 돌려보니 세상에…… 산 전체가 샛노란 개나리로 물들어 있었다. 그 화려함에 그저 입이 딱 벌어질 뿐이었다.
근처에 빈 공터가 많은 걸로 보아 머지않아 대규모의 위락타운이 들어설 것 같았다. 사시사철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북한강과 가까이서 보이는 산야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돈벌이로 하려는 투기꾼들을 잡아끌 게 분명했다. 좁은 차로 위로 승용차가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매연이 자연의 바람을 타고 길게 길게 내뻗쳤다. 군데 군데 음식점이 보였는데 대부분 폐쇄된 것들이었다.
한참을 걷는데 자갈길이 나타났다. 눈부시게 핀 벚꽃무리와 함께 화랑 팻말이 보였다.남자가 화살을 쏘는 듯한 자세로 서있는 흰 조각물이 마당 한가운데 보였다. 3층짜리 화랑 아래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었는데 그것은 곳곳에 서 있는 조각물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개울 건너편은 우거진 숲으로 까치와 꿩이 특유의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사방천지가 수채화 물감을 펼쳐놓은 듯 원색 계통으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마음을 잔잔하게 터치하며 감성이 최고조로 달했다. 특히 개울물 소리가 마음을 찰랑이며 흥분시켰다. 화랑은 3층으로 그 또한 예술작품이었다. 계단으로 오르는 대리석은 휘영청 늘어진 꽃나무를 옆에 끼고서 봄의 환희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부로 들어서자, 국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한국화가의 그림이 단번에 시선을 장악했다. 선과 색상의 조화가 그야말로 절묘했다. 가격대도 천차만별이었다. 작게는 10만원대부터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출입구 옆으로 커피머신과 안내대가 보였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여자가 미소 띤 얼굴로 반가이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네 화랑이 아늑하면서도 운치가 있네요.”
“네, 천천히 둘러보면서 감상하세요, 커피하고 따듯한 모과차도 있습니다.”
창밖으로 벚꽃 잎이 흰눈처럼 펄펄 날리고 있었다. 낭만이 가슴 가득 차오르며 탄성이 나왔다.
“세상에 저 흰 꽃잎 좀 봐 꼭 눈 내리는 것 같다.”
“그러게 너무 멋있죠? 꼭 멜로 드라마 보는 것 같아요.”
“이런 풍경이면 멜로 드라마 찍으면 딱인데 말이죠.”
먼저 온 관람객들 사이에서 계속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발코니를 나서자 곧바로 뜰이 나왔다. 거대한 벚꽃나무가 하늘을 다 차지하고 바닥에까지 흰 꽃잎으로 눈밭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울가 파라솔 아래 중년 남녀가 모여 찻잔을 기울이며 한참 담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듯 보아도 그들은 지식인이거나 예술가 같았다. 차림새로 보나 대화 내용으로 보아 식자 계층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간혹 언성이 높아질 때면 머리 끝이 쭈뼛해지면서 긴장이 흘렀다. 언듯 들리는 대화 내용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몰락이었다. 선거철이 가깝다 보니 어딜 가나 정치에 관한 비관론이 난무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누가 정치를 해도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민심은 천심이라지만 그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온갖 욕을 다 뒤집어쓰던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영웅적 인물로 둔갑하는가 하면 나라의 경제를 말아먹었다고 원흉처럼 취급 받던 전직 대통령도 죽자마자 민주화의 거목으로 다시 한번 칭송과 명예를 회복했다. 뿐만 아니라 조문정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전 현직 정치인들이 조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판세가 달라지고 몰표가 발생할 때마다 여야는 세력판도가 바뀌었고 정세는 날마다 반전을 거듭했다. 파라솔 아래 중년 남녀는 찻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더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빨들이 말야, 지금은 저렇게 큰소리쳐도 전쟁만 나봐라, 제일 먼저 죽는다.”
“어째서요?”
“원래 공산주의 이념이 그래. 구 소련이나 중국 북한에서도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자기들한테 충성했던 세력을 가장 먼저 치는 거야, 바로 역사가 증명하지. 남로당 사건이 바로 그 증거잖아.”
“난 제일 궁금하고 이해 안 가는 게 있어. 그렇게 북한 체제가 좋으면 북한으로 가서 살던가 해야지. 왜 안 가느냐 그거야.”
“그건 남쪽을 적화시키기 위해 끝까지 남아서 투쟁하겠다는 거 아닐까요?”
“그런 놈들이 밤낮 미군철수 외치면서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시키는 거 있지.”
“요즘은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기도 힘들어요. 진보 색채 내세우는 것들이 보수라면 죽일 듯이 달려드니까요.”
그들은 아무래도 모 정당의 소속인사들 같았다. 편향적인 사고가 그러했고 양비론적인 측면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기득권층이 틀림없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다 내 짐작일 뿐이다. 그들은 주변을 맴돌며 산책하는 나를 보았는지 갑자기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이번 선거 잘 치러져야 할 텐데. 그저 좌빨들은 고무 풍선에 매달어서 강제북송 시켜야 한다니까.”
붉은 꽃잎이 벚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껏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꿩 한 마리가 건너편 숲속에서 날아와 버드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아슬아슬 하게. 중년 남녀들은 화랑 입구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빗겨진 남자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누구였더라?
TV에서 보았나? 아님 신문 잡지?
그러다 아! 하고 생각이 솟았다. 그렇지 그렇지 바로 거기였어.
모 방송 프로그램 정치토론장에서였다. 보수를 자처하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지만 편향적이고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측면이 많았다. 그는 말끝마다 최후 극단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럼에도 논객들은 그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또다른 주장을 제기하지 못했다.
진보측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부의 실책만을 부각시키며 나라가 곧 파국을 맞을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종북과 좌파라는 단어만 나오면 흥분하여 막말을 내쏟다가 경고를 듣기도 했다. 그들의 논리는 질서정연한 듯 보였지만 논객들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사람들은 이념의 갈등 앞에 대체로 침묵한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 생각의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사상 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한번 뿌리 내린 사상은 아무리 상황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사상 교육은 어려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획일화 정형화 된 사고(思考)도 마찬가지다. 어떤 환경이나 사건으로 인해 굳어진 사고는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아 일평생을 따라 다닌다.
편견이나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사고(思考)의 틀은 그만큼 무섭고 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것이 심리상담이다. 중년남녀들이 탄 자동차가 화랑 입구를 빠져 나가는데 자세히 보니 차종이 에쿠우스였다.
어딘가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서 가진 자의 오만이 느껴졌었다. 이것도 나의 잘못된 편견일까? 아님 상대적 박탈감? 갑자기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승혜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필시 다른 사정이 생겨 늦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선생님 저 전철역에서 마을 버스를 탔는데 전혀 엉뚱한 곳으로 자기 뭐예요?”
“거기가 어딘데?”
“카페도 보이고 갈수록 산만 나와요.”
“반대편에서 탄 모양이군. 그럼 그곳에서 다시 전철역으로 와서 이쪽 문호리로 오는 버스로 타, 마지막 종점에서 내리면 내가 데리러 갈게.”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러면 그렇지. 평소 그녀는 길치로 유명했다. 몇 번이나 갔던 길도 방향을 못 잡아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기를 반복하는 그녀였다. 모처럼 바깥 나들이를 하고 싶다기에 그림도 구경할 겸 찾아오라고 했더니 길을 잘못 접어든 모양이다. 나는 도로 화랑으로 올라가 그림 구경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중년남녀들이 앉았던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으로 화창한 날씨였다. 극심한 가뭄을 몰아내고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나는 자연의 소리 중에서 물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성경에 보면 물소리를 신의 음성으로 비유한 곳이 있다. 물소리는 혼탁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세파에 찌든 마음을 정화하고 창조적인 영감력을 중대시킨다.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혼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신비한 꿈의 여행, 과거와 미래를 향한 소설 여행이다. 까치와 꿩이 우르르 날아오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로 숨어든 걸까? 그때였다. 화랑 입구에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매끈한 다리가 차 문 밖으로 보이더니 눈부시게 흰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자락이 나풀나풀 내게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핸드폰을 머리 위로 올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잘록한 허리가…… S라인 V라인이라고 노래하던 유행가 가사가 생각났다.
“어떻게 된 거야?‘
“오는 길에 태워 달라고 했죠 뭐.”
“뭐야? 여자가 겁도 없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더라고요. 여기 아느냐고 하니까 잘 안다고 하면서 타라고 했어요.”
그녀는 제가 먼저 성큼 성큼 걸어 화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 몇 점 좀 볼까하는데요?”
“네 어서 오세요. 천천히 구경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그런데 전부 구상뿐이네요. 추상화는 없나 봐요?”
“네 저희가 고객분들 취향에 맞추다 보니까요.”
“하긴 추상을 이해할만한 수준의 사람들이 많진 않겠죠?”
그녀는 그림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으로 올라서는 그녀의 다리가 조각처럼 예뻤다.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얼마나 탐스러운지 저절로 손길이 갈 뻔했다.
“왜요? 만지고 싶죠?”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생긴 모습은 청초하고 순진무구한데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대담한 걸까? 도무지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다. 그녀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을 한 모양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카톡을 하더니 내게 묻는다.
“이백만원이면 비싼 건 아니겠죠?”
싸다는 건지 비싸다는 건지…….
“당장 현찰이 없으니까 카드로 긁어야지.”
창밖으로 벚꽃 이파리가 바람결에 날아가고 있었다. 펄펄 눈이 내리는 것만 같다.
“사기로 결정한 거야?”
“조금 전에 카톡 보냈으니까 좀 기다려 보구요?누구한테? 물으려다 참았다. 그녀의 사생활까지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핸드폰에서 계속 카톡이 울렸다. 그녀가 확인하더니 그림을 가슴에 안았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카운터 앞에 섰다. 그림을 확인한 여주인이 환하게 웃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국내에서 아주 유명해요. 돈이 급하다 하기에 아주 저렴하게 내논 것인데 잘 고르셨네요, 훗날 값어치가 있을 겁니다.”
“카드 계산 되죠?”
“그럼요. 그림 직접 가지고 가실 건가요?”
“네 그래야죠.”
그녀는 카드를 내밀며 나를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마치 나보고 대신 내주면 좋겠는데 하는 의미로 들렸다. 이렇게 기분이 나쁠 것 같았으면 이쪽으로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계산을 끝낸 그녀가 그림을 포장해 달라며 모과차를 시켰다.
“밖에 나가서 마시지.”
“그럴까요?”
여주인이 말했다.
“제가 파라솔 밑으로 차 갖다 드릴께요, 먼저 나가 계세요.”
우리 둘은 발코니를 통해 뜰로 나왔다. 흰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날아가는 꽃잎을 낚아채더니 말했다.
“선생님 이곳에서 촬영하면 좋겠어요. 분위기가 멜로 드라마 찍기에 딱이에요.”
“나도 방금 그 생각했어.”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생각나세요? 제목이 스릴러였던가? 있잖아요? 어느 유력한 집안에 들어온 젊은 여자애가 주인 여자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하려다…….”
“아! 그거?” “네, 전 극 중간쯤에 봤는데요, 그 젊은 여자애가 끝내 주인 남자와 엮어질 줄 알았는데 그 남자의 친구와 결혼해 버리더군요, 싱겁기도 하고 아무튼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봤어요.”
“결국 그 두 불륜 남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나? 통쾌 짜릿하더군.”
“어머!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저는 보는 내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여주인공이 그 불륜남녀를 용서해버리는 건 아닌가, 복수가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닌가.”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의 드라마들은 대체로 바람난 남편을 용서하면서 아내의 희생을 강요하는 식이었잖아요.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면서 해피엔딩 식으로 처리했는데 요즘은 바람난 커플들이 서로의 배우자를 바꿔치기 하면서 새로운 가정으로 엮어지는 막장 드라마가 유행이에요, 마치 불륜을 정당화 하고 시청자를 우롱하는 듯한 심지어 동성커플마저 등장시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공영방송에서 과연 그래도 되는 건지 윤리위원회에 따지고 싶었어요.”
“그러게 말야. 요즘은 막장 드라마가 대세라는군.”
“그런데 그 스릴러는 그렇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여주인공이 공황장애를 일으키며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차츰 제정신을 찾으면서 복수의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가는데 참 흥미진진했어요, 이전의 드라마와는 확실하게 차이가 났어요.”
“꽤 열심히 본 모양이군.”
“처음에는 심약했던 여자가 남편의 배신 앞에서 철저하게 속아주는 척하더니 결국엔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는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말았어요, 그 치밀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더라고요.”
배신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복수의 화신이 된다. 그녀 역시 복수하고 싶었던 연적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승혜도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나 보군.” “선생님은 그런 경우 없었나요?”
“……….”
나는 대답 대신 날아가는 흰 꽃잎을 주시했다.
“복수가 그리 쉬운 건 아냐.”
“그러니까 드라마를 통해 대리충족을 하잖아요.”
“승혜의 마음속에 복수를 심어준 사람은 어떤 스타일이었지?”
“칼.”
“칼이라구?”
“매일 밤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어요. 꿈속에라도 나타나면 찔러버리려고.”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섬광과 함께 살의가 느껴졌다. 생긴 모습은 청초한데 내뱉는 말은 섬뜩하다. 나는 작가다운 상상력으로 그녀의 과거를 추리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을 소유했던 남자는 어떤 류의 사람이었을까? 짐작컨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했을 것이다. 외모 또한 특출 나지 않았을까? 집안은? 마음은 물론 몸도 소유했겠지. 둘 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을 테니까. 저런 미인을 품에 그 남자는 분명 복 받은 한량(?)이었을 것이다.
순간 질투가 나려 했다. 그런데 어쩌다 헤어진 걸까? 무슨 스토리가 있었던 걸까? 나는 얼마 전 내가 썼던 시나리오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던 그렇고 그런 썸남썸녀의 이야기. 그러나 예상은 언제나 빗겨간다.
“헤어진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결혼해 버렸지 뭐예요?”
엉?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그렇담 이건 이별 스토리? 머릿속에서 환하게 상상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동안 썼던 수많은 대사와 지문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게 죽일만한 이유가 되나? 자식 낳고 살다가도 헤어지는 마당에.”
말을 해놓고 보니 나는 갑자기 아내에 대한 분노로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아내는 완벽주의 성격으로 예외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융통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철벽녀였다. 방안에 먼지 하나 없이 쓸고 닦는데 강박증도 그런 강박증이 없었다. 겉으로는 완벽한 척해도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것을 나는 이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들을 끔찍이 여겨 마마보이를 만들더니 이혼할 때는 필요 없다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가 그 이유였다. 나나 되니까 저런 독종을 데리고 살았지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데리고 살았을까 했는데 이혼한 지 육 개월 만에 새 남자를 꿰어 차고 웨딩마치를 올렸다.
마치 나 보란 듯이.
어쩌면 그 두 남녀는 미리부터 재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짜 놓은 각본처럼 모든 상황을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깔끔한 성격은 나를 질리게 하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였고 이혼 과정에서 너무도 차분하게 각본처럼 움직였던 것도 의심스럽다. 얼마나 냉정하고 표독한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그녀는 재산 분할 과정에서도 미리 변호사를 선정해 모든 준비를 마쳤고 내 모든 기(氣)를 다 뻬앗아 버렸다. 그나마 아들을 포기한 게 내겐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아들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재산 분할에서 많은 것을 차지했다. 그녀는 그악을 떨었지만 별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그 표독하고 완벽주의 스타일인 그녀가 재혼을 한 것이다.
내 상상을 벗어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 남편도 얼마 안 가 이혼 도장을 찍고 말 걸. 그런 나의 기대는 벌써 5년을 벗어나 있었다. 승혜는 분노로 파르르 떨다가 내 처지를 생각했는지 잠시 멈칫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쉽게 다른 여자한테 가버릴 줄 몰랐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 독한 여자한테 그런 이중성이 있어서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아들도 팽개친 채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냐?
“그런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해요.”
“죽다니? 그럼 그 남자가 승혜만 생각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단 말인가? 그건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이야.”
“난 헤어진 뒤에도 매일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면서 수도 없이 자살 유혹에 시달렸는데 딴 여자를 꿰어 차고 결혼식을 올리다니 너무 괘씸하잖아요?”
“승혜도 좋은 남자 만났으면 결혼했을 것 아닌가?”
“전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쉽게 바뀌냐고요?”
아! 승혜에게 이런 지고지순한 면이 있었다니. 헤어진 남자를 두고 미련을 가질만큼 순정이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승혜는 요즘 젊은 세대들과 일반으로 감정에 쿨한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게 바로 여자와 남자의 차이야.”
나는 말해 놓고 나서 아차 싶었다.
“그런 인간을 두고 목숨 걸었던 내가 미쳤지.”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열 계집 싫다는 남자 없다고.”
순간 승혜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그 열 명 중에 제가 포함돼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런 게 아니고 승혜와 헤어지고 나서 마음이 허전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결혼해 버린 건 아닐까, 내 말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저 남자란.”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런데 승혜가 좋아할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뭐하는 사람이었어?”
“아티스트였어요.”
“아티스트? 연예인?”
“아뇨.”
“그럼 순수예술 하는 사람이었나?”
“네, 화가였어요.”
어쩐지, 그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기다렸단 듯이 응락한 것과 그림 보는 눈이 남다른 것도 다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승혜는 지방에 있는 사립대를 다니다 중퇴해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심했다. 원래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현실인식이 잘 안 되는 이상론자였다.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꾸며댄 핑계 같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미술계통이 아닌 차라리 연극무대가 더 낫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가끔씩 허무맹랑한 소리를 잘 하고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 오버센스 할 때가 더 많았으니까.
연극을 했다면 외모와 연기가 뒷받침돼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표정과 몸 동작 하나 하나가 신들린 듯 연기자론 최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새 화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걸까. 그녀는 내 독자이자 지인의 절친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고 함부로 내놓고 말을 하기가 껄끄러웠다.
가장 부담되는 건 그녀가 나를 너무 믿어준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나를 전혀 남자로 대하지 않고 사생활까지 거침없이 까발리는 데 있다. 하긴 나이 차이가 십년도 다 나니 그럴만도 하다.
“선생님 시나리오는 언제 크랭크인(crank in) 되나요?”
“아직 투자자가 정해지지 않았어.”
“혹시 저를 배우로 쓰실 생각은 없으세요?”
“뭐야?”
나는 너무도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설마 승혜가 그런 생각을 가질 거라곤 생상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전 그냥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표정을 보니 전혀 농담 같지 않다. 또다시 상상력이 승혜를 처음 만났던 적으로 회귀하며 출몰을 거듭했다. 영화 쪽에서 오래 전부터 알아 온 지인이 절친이라며 그녀를 소개했을 때 청초한 인상에 빼어난 미인이라 생각했었다. 대담한 듯 보였고 목표의식이 확실해 식견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별다른 히트작 없이 시나리오 몇 편 써서 영화계를 기웃거리는 내게 그녀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몇 번의 윤문 과정을 거쳐 상영되긴 했지만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다. 요즘은 영화감독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전 스탭이 모여 한 컷 한 컷을 완성하는 추세다. 그녀의 말은 놀랍기도 하고 은연중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내심 고맙기도 했다.
“내 시나리오가 크랭크인 되면 감독한테 말은 해 보지? 재능 있어 보이는 신예가 있으니 한번 고려해 보라고.” “너무 고마워요. 꼭 크랭크인 되길 저도 기도할께요.”
그래 꿈에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전 영화중에서도 스릴러물을 좋아해요.”
난 이제야 승혜의 본심을 조금 알 것 같다.
“영화는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박감이 있어야 해요. 짜릿한 전율감이 있어야 영화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거기에 약간의 멜로 분위기를 띄우면 최상이죠, 사랑이 빠지다면 그건 영화라고 할 수가 없어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배경이 좋아야 해요, 배우들의 연기도 중요하지만 촬영기술도 뛰어나야 해요.”
그래. 니가 전문가 해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의 눈가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황당한 순간이었다. 영화 이야기 하다말고 눈물이라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한동안 영화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어요. 영화는 가상의 세계를 그린 영상물이지만 현실을 잊게 하는 데는 그것만큼 강력한 마취제는 없었어요. 현실을 부정하고 영상이라는 상상물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나면 모든 게 꿈같고 있잖아요, 일장춘몽이라고.”
“영화나 소설은 대리만족이고 꿈이고 허상이야. 카타르시스 그거면 만족해.”
“예전에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선과 악의 대결 양상으로 펼쳐졌는데 요즘은 그 구분이없어지고 악과 악의 전쟁뿐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이죠.”
“승혜가 그렇게 영화 매니어인 줄 몰랐는데.”
“일본이나 외국에선 아동포르노 영상을 제작했다가 개망신 당한 일도 있대요. 이제 동성애 영화도 나오는 데 아닐까 심히 우려돼요.”
“대중의 구미에 꿰어 맞추려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대중문화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표시야. 문화는 곧 공기(公器)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말야.”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하잖아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꼭 그게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봐요,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잖아요.”
“세상은 다수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소수의 의인이 펼치는 힘으로 유지된다고 봐. 바로 선과 정의를 지망하는 소수의 힘에 의해서.”
말해 놓고 보니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가 된 것 같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민주화와 사회 정의로 이어지다가 끝이 났다. 건너편 숲에서 날아온 꿩과 까치가 꽃나무 위를 한참 맴돌더니 강쪽으로 날아갔다.
“요즘은 인터넷의 범람과 스마트폰으로 순수예술은 종말이 온 거 같아, 도무지 책을 안 읽으니 창작할 기운이 안 나.”
“그래서 영화 쪽으로 눈길을 돌리신 건가요?”
“원래 나는 영상학과 출신이야, 감독 공부도 했고 시나리오가 내 꿈이었어. 소설은 그 다음이었어. 하긴 요즘은 둘 다 사망선고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세상엔 기적이라는 게 있다잖아요.”
“어릴 적 꿈은 다 어디로 갔나?”
언젠가 모 수필가 쓴 글이 생각난다.
「세상은 갈수록 종말론이 힘이 받는 것 같다. 하긴 창세 이래로 말세 아닌 적이 있었던가? 혼탁한 세상에서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불의가 의를 핍박하고 비난한다. 소수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짓밟고 조롱한다. 대지진이 일어나 수천 명이 매몰당하고 핵전쟁의 암운 속에서도 불의는 득세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악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편승하기까지 한다.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촛불도 끄지 말라고 했지만 약자는 언제나 피해당사자가 된다. 몇 년 전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세 번째 이혼을 했는데 그걸 두고 인터넷 상에서 별별 욕을 다 들은 모양이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혼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는데 내 상처가 왜 비방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유명한 연예인일수록 안티 팬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아이에게도 안티카페가 생겨 소동이 난 적도 있다. 사람들이 분개하며 사랑의 편지 쓰기 운동을 벌여 맞 대항 한 일도 있었다.
몇 년 전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가 기막힌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일제에 충성한 친일파를 비난한 글을 썼다 해서 엄청난 비난과 함께 악성 댓글이 달린 것이다. 우파의 입장에서 좌파를 경계하는 글을 썼다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몇 년 전 총선에선 좌파의 세상이라고 내놓고 현수막에 써진 걸 본 적도 있다. 성소수자들이 합법화를 서두르고 있고 좌파가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도 우클릭! 좌클릭! 하면서 이념의 혼란화가 인다.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쓴 작가는 죽어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어떤 작가는 김일성을 나라의 해방자라고 찬양하는 글을 버젓이 올려놓고는 신 좌파를 자처하고 있다. 때에 따라 정의와 선의 개념도 달라지는 세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흥부와 놀부 이야기다.
세상은 피해자를 욕보이고 가해자를 두둔한다. 수많은 사건 앞에 달리는 악성댓글이 그 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악성 댓글을 방치한다.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상처 주는 당사자보다 그들을 편들며 부아를 돋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밝아오듯이 선과 정의는 더 아름다운 감동과 영원한 빛을 우리들의 가슴속에 심어 놓을 것이다.
선과 정의를 지망하는 소수의 힘에 의해서.
일제치하 36년 동안 우리 민족 대다수가 일제에 복종 협력했다면 일제와 목숨 걸고 맞서 싸운 독립투사는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영원히 빛나고 교훈 정신으로 남아 후세를 가르치고 있다. 세상은 다수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소수의 의인들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그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글의 내용이 편향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밝아오듯이 선과 정의는 더 아름다운 감동과 영원한 빛을 우리들의 가슴속에 심어 놓을 것이다.
선과 정의를 지망하는 소수의 힘에 의해서.
승혜와 헤어진 뒤 일주일 쯤 지난 뒤였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곧 영화 촬영이 시작될 건데 참한 신예 여배우가 있으면 추천하라는 거였다. 단번에 승혜가 떠올랐지만 망설여졌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추천했다가 연기력에 문제가 생기면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약속이나 하지 말 것을.
후회감으로 머리가 어지러운데 승혜에게 카톡으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영화 크랭크인 하신다면서요?”
그녀는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듯 잔뜩 기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응 곧 시작할 거 같아.”
“저하고 하신 약속 잊진 않으셨겠죠?”
오 마이 갓.
“저도 벌써 들어 알고 있다고요. 이번에 신예 여배우 뽑는다는 거.”
이건 옴쭉 달쭉 못하고 말겠군.
“내가 감독한테 추천은 해보지. 그런데 승혜 연기 경험은 있는 거야?”
“저 동숭로 연극무대에서 쌓은 경험 있잖아요?”
“그래? 그런 적이 있었던가.”
나는 뜨듯 미지근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연극무대에 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내가 알기론 그녀는 완전 백수로 지내다가 연극 무대 몇 번 기웃거려 본 게 고작이다. 그걸 연기라곤 할 순 없다. 그런 초보를 배우로 추천했다가 낭패라도 보게 되면 내 이미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내가 생각해 둔 여배우는 따로 있었다. 최상의 연기 수준과 외모 또한 단연 으뜸인,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 시나리오가 스릴러물로 승혜와도 어울릴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승혜는 내 지인을 통해 벌써 손을 써 두었는지 모른다. 영화계의 소식통은 승혜가 나보다 빠르니까.
사람은 알게 모르게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현대에 있어 영상물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영상물에서 뿜어내는 장면과 대사는 뇌 속에 잠재의식으로 남아 가치관까지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것이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살해 장면이다. 어린 영혼들이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 실제로 살인 행각을 벌여 사회적 이슈가 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잔혹한 장면은 가일층 발전해 영상물을 마구 휘젓고 다닌다. 제목도 섬뜩하게 살인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인명경시 사상에 요즘엔 스마트폰까지 가세하고 있다. 여과되지 않은 잔혹하고 음란한 영상물까지 마구 흐트러 놓으니까. 그런데 내가 쓴 스릴러는 과연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촬영이 진행됨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대중의 구미에 맞아야 할 테니까. 또 영화계의 흐름을 전혀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영화가 크랭크인 되면서 내 발걸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액션 감독이 투입됐고 광고물 제작에 들어가면서 인터넷 쪽에서도 많은 제의가 들어왔다.
승혜는 여배우로 추천했지만 당연히 미끄러졌다. 인지도에서 떨어졌고 연기 경험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여배우 캐스팅 하는데 나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사 썼던 대사나 장면도 스탭들에 의해 삭감되거나 변형됐다. 말이 멜로 스릴러지 잔혹하고 공포스런 장면이 더 많이 들어갔다. 나중에 종합해 보니 치정사건에 얽힌 미스테리물과 흡사했다. 처음의 의도와 전혀 빗나간 그러나 내 의견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승혜는 자신이 캐스팅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실망 대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캐스팅 된 여배우가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서울을 떠나 있기로 했다. 지방을 여행하면서 다른 시나리오를 구상할 작정이었다. 시놉시스부터 완성해 놓고 각본을 쓸 요량이었다.
거리는 봄 언덕을 지나 여름을 훌쩍 지났고 가을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고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인심은 흉흉했다. 인터넷마다 오염된 사상은 극을 치달았고 음란스팸과 함께 악법의 통과를 위해 악의 연대는 더욱 굳어졌다. 정신이 혼탁하고 영감력이 고갈될 무렵 나는 문득 물소리가 그리워졌다.
신의 음성을 들려주는 듯한 물소리는 마음의 진정 효과를 가져온다. 그 물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자동차의 엑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로 접어들었고 개울물가를 지나 거대한 물줄기를 만났다. 그리고 여러 조각물이 서 있는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초록물결이 물소리와 함께 나를 반기고 있었다.
수채화 물감을 펼쳐놓은 듯 원색 계통의 하모니가 가을을 앞두고 마지막 초록을 발하고 있었다. 새소리가 시끄럽게 귓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벚나무와 개나리 진달래가 향취를 내뿜던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화랑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길이 맞는데.
개울물을 따라 올라가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분명 봄에 왔던 그 화랑이 있던 곳이 맞았다. 그렇다고 건물을 부서졌거나 사라진 흔적도 없었다. 나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고 물가로 다가갔다. 찌든 마음을 정화하고 영감력을 중대시키기 위해서였다. 물은 암반을 타고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돌덩어리를 옮겨다 놓은 듯 암반은 개울물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전에는 잔잔한 모래흙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나는 주차해 놓은 자동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자석을 붙여놓은 듯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하늘에 바람이 폭풍처럼 일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가. 가슴이 동강나는 통증이 일었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떠밀며 세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어나 걸으라.
순간 다리에 힘이 느껴지면서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건너편 숲속에서 새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까치와 꿩 소리였다.
운전석에 앉아 기어에 힘을 주는 순간 카톡이 왔다.
선생님, 방금 인터넷에 그 사람에 대한 기사가 떴어요. 어젯밤에 그가 죽었대요.
승혜가 보낸 카톡이었다. 순간 내 발에 힘이 주어지면서 액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가 전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영감력이 마음속에 휘몰아치면서 강한 암시가 들려왔다. 그건 내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자동차가 좁은 도로를 지나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강변도로를 향해 접어들고 있었다. 강변을 끼고 거대한 아파트 군락과 위락시설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화 촬영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몰래 웃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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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5.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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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어제 급히 완성하다 보니 많은 부분이 생략 된 것 같아요, 다시 수정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결말 부분은 원래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완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이념의 갈등 앞에 대체로 침묵한다//그러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