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1-13절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어떤 청년이 우연히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거인 지니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니는 단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돈도 많이 가지고 싶고, 아름다운 여자도 얻고 싶었고, 멋진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단 한 가지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지니가 빨리 한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다그치자 이 청년은 다급하기도 하고 욕심도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이 세 가지 소원을 빠르게 지니에게 말했습니다. “돈, 여자, 결혼” 지니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마침내 돈(미친)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재물 오늘 비유 말씀은 돈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교훈이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교훈을 제외하고는 물질과 관련된 말씀들을 가장 많습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돈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삶을 움직이는 가장 중심축이 바로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기가 죽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돈이 많으면 또 교만해지고 사치하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 중에 슈퍼주니어(슈주)의 “돈돈(Don't Don)”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돈 돈 모든 게 돈 세상 원 안에 갇힌 너...... 돈돈 이젠 그만 좀 해 위선의 가면도 벗어버려 벗어버려 니 가식의 가면도” 여기서 돈이라는 의미는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은 돌아버린 세상이며 돈은 안 된다(Don't)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 청년 세대의 고민과 저항을 담고 있는 노래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돈은 안 돼 하면서 슈퍼주니어는 이 노래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만큼 우리 사회에서 돈은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13절 말씀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돈을 하나님과 경쟁하는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서 신앙적 태도와 가치관을 분명히 정립한 사람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복한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재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학자들 간에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청지기를 불렀습니다. 불러서는 청지기 직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고 하며 청지기 직을 정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주인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청지기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땅을 파고 농사일을 하자니 힘이 없고, 거지처럼 빌어먹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 빚을 탕감해주자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저들이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100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그 증서를 조작하여 50말을 빚졌다고 쓰라고 하였습니다. 기름 100말은 당시 가치로는 1천 데나리온(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려 5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다음 밀 100석을 빚진 자에게는 80석이라고 기록하게 합니다. 밀 100석은 2,5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데 역시 500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어 자신이 쫓겨 날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문제는 8절입니다. 이런 청지기의 태도에 대해서 주인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여러분 주인의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됩니까? 이 비유 해석이 어려워진 것은 바로 이 8절의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 때문입니다. 주인은 화를 내는 것이 더 당연합니다.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이런 술수는 얄팍하다고 할 수는 있을망정 지혜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주인에게 탄로 나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노후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청지기의 얄팍한 꾀를 웃어넘길 정도로 주인은 너그러운 사람 또한 아닙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허비한다는 소문만 듣고도 청지기를 해고한 대단히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8절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런 오해를 빚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8절 말씀의 ‘주인’은 청지기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 곧 예수님입니다. 이 주장은 제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의 비유연구』로 유명한 예레미아스의 주장이기도 하며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입니다(김창락 교수). 오해가 빚어진 결정적 이유는 8절의 주어 ‘퀴리오스’ 때문입니다. 퀴리오스는 ‘주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예수님에게 적용이 될 때는 ‘주님’이 됩니다. 그래서 8절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 1-7절은 예수님의 직접 말씀이고, 8절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9절 이하는 다시 예수님의 직접 말씀입니다. 실제로 ‘퀴리오스’란 단어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간접적으로 지칭할 때 세 번 사용 되었을 뿐이며(3, 5절), 실제 주인은 단지 돈 많은 부자로 소개됩니다(1절). 2절의 ‘주인’은 ‘퀴리오스’가 아니라 단지 He를 한글 번역상 ‘주인’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래야 이 비유가 이해됩니다. 아무리 너그러운 주인이라도 이런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돈을 허비하고 또 사문서 위조를 통하여 주인의 돈을 착복하였으므로 불의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마지막 권리를 이용하여 퇴출당한 이후의 대책을 세웠으므로 그는 지혜롭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대의 아들들도 이렇게 지혜로운데 빛의 아들들은 이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지헤로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예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 다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이 땅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비유와 같은 맥락의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의한 재물 오늘 비유 말씀에서 주님은 여러 번에 걸쳐 재물을 불의하다고 말씀합니다. 9절에서 “불의의 재물”이라 하였고, 11절에서도 “불의한 재물”이라 하였습니다. 13절에서는 재물을 맘몬이라 하여 하나님과 경쟁하는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돈 자체를 불의하다고 규정하고 있는가? 돈은 결코 하나님과 함께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악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돈을 사용하여 친구를 산다면 그 돈은 의로운 돈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축적의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악한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문제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재물의 취득 과정 자체도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청지기의 주인을 생각해 봅시다. 이 주인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획득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던 갈릴리 땅에는 부재지주들이 많았습니다. 자기는 예루살렘 근처에 살면서 갈릴리에 땅을 구입해서 청지기를 통해 수입을 가져갔습니다. 빚을 내주는 경우도 율법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50% 이자에서 100% 이자까지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자 또한 선이자를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청지기의 행동을 변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청지기가 기름 100말을 50말로 쓰라는 했던 것은 원래의 원금은 50말이었고 나머지 50말은 이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만큼 고리대금업을 통하여 주인은 재물을 획득하였습니다. 사실 그래요 옛부터 부자 하나가 나오면 세 동리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주셨을 때 듣고 있던 백성들은 청지기의 불의함보다 오히려 통쾌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이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청지기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불의한 주인 밑에서 그 또한 재물을 착복했습니다. 주님이 지혜롭다고 칭찬했지만 그는 사문서 위조라는 행위를 했으며 남의 재산을 빼돌렸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를 8절에서 “옳지 않다”고 이미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예수님의 비유에만 등장하는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아닙니까? 우리가 번 돈은 얼마나 의로운 돈일까요? 순전히 자기 땀만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좋은 집 한 채 안고 있는 것이 더 많은 부를 가져다줍니다. 불노소득이라고 하지요. 우리 나라의 재벌들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굴직한 기업의 형성 과정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보호해주고 국가가 은행 보증을 서주어 불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부를 이루었습니다. 저임금 구조 위에서 성장했기에 사실 많은 사람의 노동의 대가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된 것과 같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제3세계의 저임금을 통해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선진국은 잘사는데 제3세계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이런 불의를 기초로 성립되었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본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컴퓨터와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소수의 자본가와 엘리트 층만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경제는 발전하는데 오히려 실업은 증가하게 되고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런 흐름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얻은 부가 순전히 우리 능력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돈에는 다른 사람의 피와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누리는 평안함은 제3세계 사람들의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이 되었다고 해서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이런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죄의식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는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는데 돈은 말이 없습니다. 이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울다가 웃고, 피와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재물이 불의하다는 죄의식이 있어야 나눔이라는 것도 가능합니다. 나눔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편안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한 이유는 그가 그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름 100말, 밀 100석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다른 많은 빚진 자들 또한 탕감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탕감을 받은 자들은 고마워할 것입니다. 돈은 언젠가 떠나고, 자신의 직위는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에게 신실한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에게 어떻게든 그 고마움을 갚으려 할 것입니다. 그 진가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결정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우리를 변호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도왔던 자가 설사 지옥에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가 불구덩 가운데서 소리칠 것입니다. “저 사람만은 내게 자비를 베풀었던 고마운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의 위대함이며 하늘에 쌓는 보화라 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왜 호출했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동안 가장 소중히 생각해왔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같이 가자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은 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번째 친구는 궁궐 앞까지만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친구는 요청을 받자 왕의 앞까지라도 같이 가서 자기가 변호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이 의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왕의 호출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돈은 죽음의 순간 그 자리에서 떠납니다. 가족은 장례식 자리까지 따라가고 당분간 추모도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행은 하나님 앞에까지 가서 그를 변호해줍니다. 성경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고 세리장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세무 공무원은 돈의 유혹이 많습니다. 고대 사회였으니 자기가 마음대로 돈을 착복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접근할 수 없게 되자 뽕나무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마 복음서의 모든 만남 중에 가장 희극적인 만남이고 또 그만큼 간절한 만남이었다 할 것입니다. 삭개오는예수님을 만나면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내용은 불의한 재물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 삭개오는 지혜로웠습니다. 자신의 재물이 불의의 재물인 줄 알았다는 데 그는 첫 번째 지혜로왔습니다. 이 불의의 재물을 소유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서 나눔으로써 영원한 세계를 준비했다는 데 그는 두 번째 지혜로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삭개오는 인간은 주고 베풀 때 더 행복하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정말 지혜로왔다 할 것입니다. 현대판 삭개오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입니다. 요 근래 한국교회는 십일조 신앙으로 유명하면서도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에 대한 예화가 유행입니다. 록펠러의 신앙은 목회자들이 인용하기에 딱 좋은 예입니다. 그의 신앙은 첫째 십일조를 철저히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십일조 신앙은 세계의 대부호가 되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자기회사에 20여명에 이르는 십일조 담당 부서를 둘 정도였습니다. 둘째 목사님 말씀은 절대 순종했습니다. 셋째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순종해서 축복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과정은 불의의 재물을 쌓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록펠러가 세웠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은 독점기업으로 유명합니다. 자기 자본을 기초로 낮은 값으로 물건을 판매하여 동종 기업들을 도산시킵니다. 유사 기업들을 회유하고 뇌물을 주어 자기 기업으로 합병시킵니다. 독점 기업을 세운 후에는 가격을 올려 그동안의 손해를 보상합니다. 록펠러는 석유와 철도 부분에서 전미국의 95%를 독점하게 됩니다. 당시 록펠러를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괴물로 그린 만평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록펠러의 이런 행동 때문에 미국에서는 독과점 금지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록펠러는 “당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록펠러에게도 생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53세 되는 나이에 그는 그만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됩니다. 알로피셔(Alopecia)라는 탈모증 비슷한 병인데,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썹도 빠지고 몸이 초췌하게 말라가는 병이었습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이 병 때문에 그가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우유 한 잔과 크래커 몇조각 뿐이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마침내 결정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1년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투병 생활 가운데서 자기가 번 돈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 중에 침대에서 괴로워하다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 록펠러는 이후 자선 사업에 전념합니다. 그가 모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학교, 병원, 문화 의료 사업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명문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세운 것입니다. 12개의 종합대학과 490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도와주었습니다. 페니실린의 약제화나, 결핵, 디프테리아 등 질병 치료에 그의 기부금이 절대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1928년 착공한 록펠러 센터는 당초 계획보다 훨씬 큰 고층빌딩으로 확대 건축되었는데 그 이유는 1920년대 말의 경제 공황을 해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엔 건물의 땅도 록펠러가 기증한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에서는 수도료와 가스료가 공짜인데 모두 록펠러가 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록펠러는 “신에게서 돈을 버는 재능을 부여 받았기에 신이 명하는 대로 더 많은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써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마치 수도승처럼 살았습니다. 술,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자식들 용돈도 같은 또래 친구보다 적게 주었습니다. 1937년 그의 나이 9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의 생활은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물론 록펠러가 불의의 재물을 쌓았던 것은 비난받을만 했지만 그는 불의의 재물로 옳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의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불의의 재물에 대해서 당연한 사회적 환원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불의의 재물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그 주인이 자기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11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우리가 록펠러만큼 노골적으로 돈을 벌지 않았을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진 돈도 불의의 재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여전히 불의의 재물을 자기 소유라 여기며 불의의 재물의 노예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주권을 인정하고 재물을 맡은 정치기로서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청지기와 같은 위기에 있습니다. 2절의 경고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언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내어 놓을 상급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주인도 아니면서, 그것도 불의의 기초 위에 쌓아올린 재물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마지막 날 냉혹하게 그 재물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겠습니까?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 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위기를 알고 이제는 미래를 대비하며 살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자녀들이 이렇게 지혜롭게 행동하는데 빛의 자녀인 여러분은 더 지혜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대는 빛의 자녀인 여러분의 지혜로운 행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1-13)|작성자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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