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6. 11(주일)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 (2023년 24주)
제목; “설교(선포)란 무엇입니까?”(교육16)
성경; 막 16:14-20 (p.84) (마 4:23, 202<241>, 200<235>, 6)
<예배의 부름>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 둘째 주일,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금년에는 교회의 5대 사명인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 중 “교육”에 중점을 두고, 교육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내가 제대로 교육 받고, 훈련 받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제자 공동체”를 이룩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말 “교육”(敎育)은 ‘가르칠 교(敎)’+‘양육할(기를) 육(育)’의 합성어로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이란 뜻으로, 인간은 교육을 통하여 생존하게 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으며,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교회) 교육은 이런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는 세상 교육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교육은 많이 배워서 어떻게 하면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갈까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승자 독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교육합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이와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눠주고, 더 낮아지며, 더 섬길까 하는 교육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 곧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께서 교육의 주제가 되시고, 그 교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1. “성경 교육의 유익”(교육11)(시 119:9-16)은 ① 깨끗해집니다(9-10,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② 담대해집니다(11-12,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③ 즐거움이 회복됩니다(1316).
2. “광야 훈련과 말씀 훈련”(교육12)(신 8:1-6)은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걷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광야 40년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대한 순종 훈련 기간이었습니다(1,3). ②광야 40년은 겸손 훈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2-3). ③광야 40년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간이었습니다(3-4). 2) 광야 훈련과 말씀 훈련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①명령을 지키며 삽시다(1-2). ②영의 양식을 먹으며 삽시다(3). ③자족하며 삽시다(4).
3.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교육13)(마 28:19, 요일 5:7-8)은 1)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①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고, ②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며, ③인간들로부터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2).예수님은 누구실까요? ① ‘참된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 예수님의 신성(神性) ②참된 인간 ☞ 예수님의 인성(人性), ③예수님은 ‘믿는 자의 구주’가 되십니다. 3) 성령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요? ①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시고, ②마음을 거룩하고 새롭게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며, ③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믿게 하시고, ④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주시고, ⑤불의의 세력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시며, ⑥전도할 수 있는 열심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⑦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좌정하셔서 지키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4. “주일(主日)은 어떤 날입니까?”(교육14)(시 118:24, 계 1:10), 주일(主日)은 말 그대로 “주의 날”로 기독교의 주(主)이시요 왕(王)이신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1) 이레 중 첫 날을 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①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기념하는 날(창2:1-3), ②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마28:1, 행20:7), ③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된 날(행2:1이하), ④교회 설립 시초부터 주일을 지켜왔습니다(행20:7, 고전16:2, 계1:10). 2)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①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신 날(창2:2), ②육신의 휴식과 영혼의 예배를 위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축복의 날(사58:13-14), ③예수님께서 주일(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막2:27-28). 3)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①일체의 노동을 쉬면서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출20:8-10). ②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쁨과 평안으로 안식해야 합니다(시118:24). ③선한 일(전도와 구제와 헌신)에 힘써야 합니다(막3:1-5).
5. “사람의 근본 문제는 무엇입니까?”(교육15)(창 2:7, 마 4:4), 인간(人間)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 인간은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2) 사람은 “영적인 존재”, 3)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는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시켰으며, 인간은 이 죄로 인해서 죽은 영혼이 되었는데, 1)‘죄’란 무엇입니까? ①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 ②악한 생각을 품는 것, ③마땅히 해야 할 선을 행치 않는 것, ④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2)‘죄’의 결과: ①하나님과의 사귐의 단절, ②하나님의 정죄를 받게 되고, ③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며, ④영원한 형벌이 왔습니다. 4)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데, 1)구원을 받으려면? ①죄를 회개해야 하고, ②예수 믿고 입으로 시인하므로, ③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2)언제 구원 받아야 할까요? 성경은 바로 지금이 구원받을 만한 때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5) 사람에게는 “내세”가, “영생”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II.
금년도 목회 주제 “교육”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지난달부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주일(主日), 찬양(찬송), 헌금(봉헌), 성례(전), 사람의 근본 문제와 구원, 정통과 이단,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등 기초 교리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은 “설교(선포)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신언, 神言)의 선포’라고 말하는데, 따라서 설교의 핵심은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입니다. 우리는 설교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란 사실을 잊지 않고, 설교자도 청중도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하며 또 들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한국교회사 초기에 있었던 짧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누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떤 부인이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도 다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처럼 설교가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그 같은 사실을 목사님께 찾아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난번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러 왔지만, 이번에는 이 목사의 말을 들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1. 설교의 사전적 의미 및 유래 :
1) 사전적 의미 :
설교(說敎) = 말씀 ‘說’ + 가르침 ‘敎’
① 종교(宗敎)의 교리(敎理)를 설명(說明)함. 또는 그런 설명 Ex) 목사의 설교를 듣다.
② 어떤 일의 관점(觀點)이나 견해(見解)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說得)시키기 위해 타일 러서 잘 가르침. 또는 그런 가르침.
* 유의어 : 가르침, 강론(講論, 가톨릭), 설법(說法, 불교의 교의를 풀어 밝힘)
2) 설교 ‘설몬’(sermon)의 유래 :
설교를 의미하는 영어 ‘설몬’(sermon)은라틴어 ‘세르모’(sermo) 혹은‘세르모니스’ (sermonis)에서 왔는데, 그것은 고대 로마의 웅변가들의 웅변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단순히 ‘연설’(speech)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단어에 세례를 주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옷 입혔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책일 수 없듯이 설교도 단순한 연설이 아닙니다. 커버넌트 신학교의 초대 학장이었던 로버트 레이번은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공부에 왕이시라면 설교학은 여왕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설교의 본질과 설교 사역의 성격에 대해 보다 깊은 신학적 접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설교의 원어적 의미 :
설교(說敎, sermon, preaching)는 본질상 하나님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설교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신빙성은 물론 존재조차 보장할 수 없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 말씀과 선지자와 예언자들, 사도들과 제자들의 설교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말 신약성경에서 ‘전파하다’(preaching), ‘선포하다’(proclaim)로 번역되는 단어는 사실은 33개의 다양한 동사들에서 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케륏소(κηρύσσω), 케뤼그마 : ‘선포하다, 전하다’란 뜻으로, 신약에 약 61회 사용되는, 가장 자주 사용된 용어로 ‘선포’(proclaim, preach)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되어져 권위를 가졌기에 청중들은 듣고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예: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마 3:1, 4:17. 행 28:31 등).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케륏소)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케륏소)말하되”(마 3:1)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케륏소)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2)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 유앙겔리온 :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preach)’을 뜻한다. 이 단어는 본질이 ‘좋은 뉴스, 즉 앞으로 다가올 것, 혹은 왔던 좋은 소식’을 가리키는 말로, 때로는 ‘케륏소’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 눅 8:1, 행 8:4-5, 15:35).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케륏소) 그 복음을 전하실새(유앙겔리조)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눅 8:1)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유앙겔리조),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케륏소)”(행 8:4-5)
3) 디다스코(διδάσκω), 디다케 : 메시지의 내용과 목적에 초점을 맞춘 말로써 ‘가르치는 것(teach), 가르침(teaching)’을 의미한다. ‘케륏소’와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하고(마 11:1), ‘유앙겔리조’와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행 5:42). (예: 마 28:20, 딤전 6:2, 딤후 2:2).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디다스코) 전도하시려고(케륏소)거기를 떠나 가시니라”(마 11:1)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디다스코)와 전도하기를(유안겔리조)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디다스코)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4) 말튀레오(μαρτυρέω), 말튀리아 : ‘어떤 사실을 체험한 사람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testify)’을 말한다. (예: 계 1:2, 요 1:7-8).
“그가 증언하러(말튀레오)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말튀레오)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말튀레오)온 자라”(요 1:7-8)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말튀레오)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말튀레오)”(계 1:2)
5) 프로페튜오(προφητεύω), 프로페테이아 : ‘신적 계시를 선포하거나 감추어진 사실들을 예언적으로 드러내는 것(reveal)’을 뜻한다. (예: 행 2:17f, 마 26:68, 벧전 1:1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프로페튜오)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f)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프로페튜오)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8)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프로페튜오)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6)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파라칼레시스 : ‘곁에 서다, 곁으로 부르다’라는 어원에서 왔는데 ‘격려하다, 위로하다, 탄원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예: 행 16:40, 고후 10:1, 히 3:13).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파라칼레오)가니라”(행 16:40)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파라칼레오)”(고후 10:1)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파라칼레오)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상의 여러 단어들이 함의(含意)하는 사전적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설교 사역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 설교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먼저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증거하는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지를 전하는 증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문제(에토스, ethos)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의 메시지의 진정성은 그의 영성과 직결되며, 메시지의 감화력은 그의 인격의 깊이와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② 설교는 가르침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눅 8:1) “입을 열어 가르치심”(마 5:2)처럼 복음을 선포할 때 설교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왜 필요하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③ 설교는 신적 계시를 선포하거나 감추어진 사실들을 예언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를 예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설교자가 점술가와 같이 미래의 일을 점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언이란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하며,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역’입니다(행 2:17). 설교자는 사람들의 죄와 불의를 질책하는 선지자의 철장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곤고함과 연약함을 싸매어 주는 연민에 찬 의사의 손길도 가져야 합니다.
3. 설교(선포)란 무엇입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본질상 하나님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에 있어 설교(說敎, sermon, preaching)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첫째, 선지자들을 통해서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신의 활동들의 의미를 설명하셨고, 동시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로나 글로써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독생자,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말씀하셨고, 그리스도의 말씀들 속에서 말씀하셨다. 셋째, 그리스도와 성경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와 성경 말씀이 살아 역사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를 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설교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
① 칼 바르트(Karl Barth)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 케뤼그마
“설교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설교자로 하여금 성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회중에게 그의 이름으로 말하게끔 하신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하실 말씀을 성경의 한 구절로부터 설교자의 말로 설명해 줌으로 선포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복음의 선포란 왕이 전령을 통하여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설교자가 그 당시의 언어로 그 시대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지라도 실상은 하나님 자신이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한 회중들에게 어떤 도덕적인 충고를 주거나, 중요한 문제나 제목에 관한 설교자의 의견을 말하거나, 아니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종교적인 원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음성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선포하다, 전하다’는 헬라어 ‘케륏소’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전령으로, 그의 사명은 왕이 명령한 내용을 그대로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왜곡하거나 변형 축소 또는 확대해서는 안되고, 왕으로부터 받은 내용을 그대로 가서 전하는 것이 전령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정확히 전파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② 칼빈, 척 스미스, 척 스윈돌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가르침)이다. - 디다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11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말했듯이, “목사와 교사”는 동일한 직책으로 ‘목사가 교사요 교사가 목사’입니다. 따라서 목사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회중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잘 가르쳐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교회는 말씀을 배우는 학교이며, 하나님은 회중을 가르치기 위해서 목사를 임명했다”고 말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와 가르치는 것은 같은 내용으로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따라서 목사는 본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해석해서 회중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목사의 최우선적인 임무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회중들에게 가르치는 교사로 보고있는 수많은 설교자들은 강해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케뤼그마’를 비기독교인, 곧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디다케’는 기독교인, 곧 믿는 성도에게 설교하고 윤리적 훈육과 지도를 하는 것이라고 구별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③ 해리 에머슨 포스딕(H. E. Fosdick) : 설교는 하나님의 돌봄(목양)과 치유의 말씀이다.
앞서 말씀드린, 복음의 선포와 전달, 교육(가르침)으로 보는 설교가 본문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돌봄(목양)과 치유의 말씀으로 보는 설교는상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포스딕은 “모든 설교는 문제 해결을 설교의 중요과제로 삼아야 한다. 설교는 회중들의 진정한 문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설교의 전문분야는 바로 사람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설교는 에세이나 강연과 다른 것이다. 모든 설교는 회중들의 매우 생생하고 중요한 문제들, 즉 마음속에 있는 난제를, 양심의 무거운 짐, 혼란된 삶의 문제 등에 건설적인 해결책을 주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의 어려움에 빛을 비춰주고, 그 어려움에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교라면 어떤 설교도 결코 헛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 해결과 치유는 최신의 심리적 치료 방법이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치유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설교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문제들, 성도들의 아픔과 고통을 연결시켜 돌봄과 치유의 메시지와 은총을 나누어야 합니다.
2) 설교(선포)는 무엇입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설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요, 교육(가르침)이며,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치유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 심포니❯란 저자 요한 실리에(Johan H. Cilliers)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 본문의 음성을 통해서 시대의 음성 (회중의 상황) 속에서 설교자의 (독특한) 음성으로 들려올 때 발생한다. 이 네 음성이 하나의 음성으로 합류할 때야말로 설교는 진정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viva vox evangeli)이다.”
실리에는 “음성”(voice)이란 용어를 통해 설교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음성”(voice)은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리 그 이상으로 ‘상호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살아 있는 현상(living phenomena)’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음성은 말하는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설교자의 음성은 설교자의 인격과 삶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청중, 그리고 말씀에 대한 그의 경험을 전달하는 통로가 됩니다.
실리에는 계속해서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적, 문법적 및 신학적인 주해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성경 본문에 우리 귀를 기울여서 성경 속에 숨어 있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 그분을 만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설교가 사람의 음성을 듣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므로,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는 탁월한 혜안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지만, 설교를 통해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냐 합니다.
II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설교의 홍수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24시간 언제든지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무한정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더 공허하고 기갈든 모습입니까? 교회는 텅텅 비어가고, 교인들의 범죄는 더 늘어나며, 세상은 왜 더 사악해져 갑니까? 설교가 부족해서입니까? 설교자가 부족해서입니까?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오늘 진행되고 있는 설교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인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함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설교자의 용모와 제스츄어만 감상 되고 그의 개인적인 체험담과 세상 철학과, 문학, 지식을 들으면서 설교자와 관계된 연상만을 계속하게 만든다. 진정한 성서적인 설교는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전달하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에 대한 참으로 통렬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교 내용이 설교자의 경험과 지식과 업적 자랑 등 그가 즐겨 쓰는 축복과 형통, 그런 예화로 완전히 채색이 된 그런 설교에 빠지게 되면. 교회 전반의 문제까지 독선적으로 변하여 점차 전횡의 모습을 드러 내지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맹신도가 되고 맙니다, 그런 목사의 특징 중에 하나는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자기의 어떤 이야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진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니다.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현란한 말에 가려져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는 설교는 강연일뿐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해석되지 않은데서 생깁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양 강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본문으로 봉독한 성경 말씀이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전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자기 귀에만 들어오고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에만 ‘아멘’하고 은혜가 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가 말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성찰과 감동,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보다, 설교자의 외모와 언변, 함께 예배드리는 이웃들의 모습, 예배가 드려지는 예배당 등에 마음이 가 있다면 그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깊은 감동과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청중들은 설교의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며, 지금 선포되는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아멘’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되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총무와 감리교신학교 교장, 감독을 역임하셨던 마경일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마 목사님이 이화여고 교목으로 있을 때에 한 학생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정이었는데 기독교 신앙에는 호의적이었으나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 목사님이 그 가정을 방문했을 때 ‘왜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묻자, 학생의 아버지는 “왜 안 나겠습니까? 서울 시내에만도 유명하다는 교회는 다 나가보았고, 유명하다는 목사님의 설교는 거의 다 들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마 목사님이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요?”라고 묻자, “대부분의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설교의 형태와 내용을 두 가지로 구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하나는 저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딴 세상에 관한 이야기로밖에 볼 수 없는 설교요, 다른 하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시사적인 이야기를 파는 설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우리들이 오히려 더 깊이 자세히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실 기독교라는 것이 그런 것만이 아닐 터인데, 참된 의미에서 기독교가 말해지는 설교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교회의 설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해주는 말씀이지요...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지상에서의 인류 구원 사역을 전부 다 마무리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려는 순간에도 믿지 않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책망하시며 사명을 주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5-16)우리는 복음을 전파(케리그마) 곧 설교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는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7-18)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이 치유함을 받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19-20)우리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마지막 지상 대명령의 약속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 기도해 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함께 역사해주셔서 기적의 역사를 이뤄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충만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히 알고, 말씀을 통해서 육신의 질병이 고침받고,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고 참 샬롬, 평안이 임하며,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기도가 응답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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