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등 이후 내내 등반을 못가다가 지난주 원주 여심바위 단피치를 다녀와서 운동 부족, 실력 부족, 노력 부족을 느꼈던 터였다.
어프로치가 없는 단피치 등반이 주는 달콤함도 한몫하여 열정 뿜뿜하며 이번 주 등반에 "참석!" 꼬리말을 달았다.
모처럼 35기 남자셋 여자셋이 졸등 이후 다시 뭉치게 되어 더 기분이 좋았다.
유쌤께서 시원한 설악산 계곡에 발담그고 놀러 간다고 하셔서 무척 기뻤다.
그래서 계곡에서 먹고 놀려고 수박도 챙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했거늘...
기어이 가고야 만 봄여름가을겨울!
집 앞 24시 김밥집에 5시반에 주문예약을 해놓았다.
내내 받기만 했던 선배들과, 동기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해서 김밥 시키실 분~ 주문도 받았다.
설악산인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 잠을 설쳤나보다. 눈을 뜨니 5시 20분!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 눈꼽만 겨우 떼고 미친듯이 달려가 겨우겨우 김밥을 전달할 수 있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 액땜 크게 했어. 오늘은 이제 꽃길만 걷는 거야"
그러나 그 땐 몰랐다. 그것이 나의 환장대잔치의 시작인 것을...
"차가 하나도 안밀리네, 비도 안오고. 오늘 분위기 좋아~"
예상시간보다 일찍 설악동으로 들어서며 좌회전을 하다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핸들을 꺾어 피한 우리 차 뒤로 부딪힐뻔 한 그 차는 많이 놀랐던지 한참을 서 있더라는...
물을 냉동실에 고이 넣어놓고 안가지고 왔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던 나 대신, 스윗한 지웅씨는 놀라서 가슴이 벌렁거린다면서도 편의점에 들러 물을 사게 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철한 선배님이 계셨다.
동네 마실 나온듯한 편안한 복장! (아~ 부럽다.. 저 여유~)
어프로치는 20분 정도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랬자나요... 정말 그렇게 말했자나요.. ㅜㅜ)
걷다 잠시 쉬는 동안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개울가 돌 위에 유썜이 작은 돌 두 개를 더 얹었다.
오~ 능력자!
조금 더 올라가다 뒷팀을 기다리며 소토왕골 암장 앞에서 쉬었다.
계곡물에 발담그고 논다길래 싸왔던 수박도 먹고, 귤도 먹고~ 가방은 가볍게, 마음은 결연하게!
그래 가보는 거야. 비오는 유선대도 다녀왔는데 뭘~ 후훗^^
그런데 길이 좀 이상하다.
돌들이 뭔가 푸석거리고 밟으면 흔들리고 부스러진다. 모래가 많나? 비가 온 후라 그런가?
북한산의 단단한 바위길과 느낌이 다르다. 이러다 말겠지 뭐.
앞서가던 선두가 기다리라고 한다.
길을 잘못든 것 같다고, 유쌤이 길 찾으러 가셨다고.
기다리는 동안 사진도 찍고, 농담도 하고 있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빗물이 조롱조롱 달린 풀잎이 예쁘다.
유쌤, 어디까지 가신 거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지웅씨가 유쌤을 찾아 내려갔다.
한참만에 나타나신 유쌤, 이번엔 벗어놓은 하네스를 못 봤냐며, 하네스를 찾느라 주위를 또 둘러보신다.
아.. 오늘 뭔가 이상해...
1피치.
5.8 이라는데 나는 왜 어렵지?
운동부족인 내 몸을 탓하며 축축하고 미끄러운 바위를 셀프로 올라갔다.
후덜덜.. 뾰족하고 까끌한데 푸석거린다.
디딜 데가 많다는데 내 발을 믿을 수가 없다. 유선대 추락 이후로 더 겁쟁이가 되었다.
2피치.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란 말이야?
나로써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 앞사람들은 쉽게 가더구만, 나는 왜 발을 떼지 못하는 걸까? ㅠㅠ
넋놓은 나에게 다정한 기숙언니가 속삭여준다. 셀프니까 너무 힘들면 줄에 매달려서 당겨도 돼.
부끄럽지만 도리가 없다. 마구마구 매달리며 어떻게든 쫓아가 본다.
3피치, 4피치, 5피치.... 이제는 몇 피치인지 모르겠다.
잡기 좋은 바위를 잡으니 흔들린다.
발 디딘 곳은 퍼석 바스라지고 애써 잡은 나무는 뿌리채 흔들린다.
용기내어 언더로 잡은 바위는 덩어리째 뜯어졌다. 뒤에 있는 수현씨에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하아...
하얀 줄은 셀프, 파랑줄은 빌레이, 빨강 줄을 풀어서 회색자에 연결하고, 어쩌고 저쩌고...
어느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뭐가뭔지.. 뭘 어쩌라는 건지.
살뜰히 챙겨주는 수현씨와 기숙언니 덕분에 어찌어찌 올라간다.
늦게 출발했으니 중간에 탈출하겠지? 누가 언뜻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래, 이제 조금만 버티면 내려가는거야.
유썜이 뒤에 자일 몇 개 남았냐고 물어보신다.
이미 혼이 나간 나는 남은 자일이 없다고 했다. 본인 등반하랴, 나 챙기랴, 도철씨 빌레이 보랴 정신없는 와중에도 갸웃거리는 수현씨에게 자일 없는 것 맞다고 큰소리쳤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 그렇게 믿었다...)
유썜이 누구는 자일이 없다하고, 누구는 있다하고 도대체 뭐가 맞는 거냐며 답답해 하셨지만 나는 이미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영혼은 이미 들락날락하고 있었으므로...
내 얼굴을 본 사람들마다 괜찮나며 한마디씩 걱정해준다.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한 얼굴.
"아니오, 안 괜찮아요.." 마음은 괜찮아요~ 하고 싶은데 입이 안따라준다. 내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심신분리의 무아지경!
살겠다고 볼트를 밟는다. 쭉 미끄러진다. 볼트는 왜 비스듬히 박혀있는 거야 ㅠㅠ
버터보려고 볼트에 손가락을 끼운다. "손가락 넣으면 안돼요!" 그럼 어쩌라구 ㅠㅠ
"썜, 잡을 데가 없어요 ㅜㅜ"
"손 재밍해"
"손재밍 어떻게 하는 지 몰라요 ㅜㅜ"
"........"
누군가는 발을 받쳐주고, 누군가는 엉덩이를 밀어주어 무서워 죽을 것 같은,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암벽을 어찌어찌 올라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
"쌤~ 탈출 언제 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촉촉한 눈으로)
"이미 늦었어. 끝까지 가야 돼. 늦었으니까 빨리빨리 올라가!"
으허헝... 탈출한다 했자나요...
자일을 하나 뒤에 달고 무시무시한 뾰족 바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뒷 줄이 따라오지 않아 발을 딛는데 몸이 자꾸 휘청거린다.
"도철씨, 줄이 당겨져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못 가겠어요"
"뒷 줄 풀고 그냥 가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
"쌤이 줄 달고 오라고 하셨는데..."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 그냥 가세요."
정말 몰랐다. 나 하나 살자고 뒤에 남은 두 분을 자일 지옥에 빠트린 것을.
(기숙언니와 도철씨, 정말 죄송합니다!!! 소원권 하나씩 드릴께요~ ^^;)
시간이 너무 늦었다.
목이 마르고, 발이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토할 것만 같다. 그래도 물 마실 여유도 없이 세 피치를 연속으로 올라갔다.
바위를 잡는 손가락이 따갑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영혼이 분리되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다 왔단다. 이제 그냥 걸어 올라가면 된다며 암벽화 벗어도 된다고 했다.
유쌤이 내 신발은 릿지화가 아니라 위험하니 계속 신고 있으라신다.
왜 안샀을까, 릿지화! ㅠㅠ
쭉 길 따라 가면 된다며, 헷갈리면 왼(?)쪽으로 가라고 했다.
"네, 왼쪽!" 대답을 했는데... 어느쪽으로 가라고 했는지 헷갈린다.
위를 향해 목놓아 불러본다. 어디로 가야 해요?
진훈씨가 내려와서 도와준다.
"내려와서 자일 좀 받아가!" 유쌤 부르시는 소리에 승민씨, 진훈씨가 자일 받으러 다시 내려간다. 웃으면서 내려갈 힘이 있다니.. 대다나다..
저 위에 철한 선배님이 앉아계신다. 아 정말 다 왔다보다.
잠시 신을 벗고 쉬려고 발을 빼려는 순간, 엄지발톱이 들리는 느낌이 든다. 올 것이 왔구나!
신을 벗으면 그대로 발톱도 함께 벗겨질 것 같다. 울고 싶다.
무시무시한 바위 오르락내리락을 한다.
구름이 끼어 아래가 보이지 않아 고도감 없어 안무섭다고들 하지만 아찔하다. 줄도 없는데 발 빠져서 떨어지면 어떡해?
"여길 어떻게 가요?"를 백만 번은 한 것 같다.
그 무서운 곳에서 두 팔 벌려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명숙씨! 오오~ 존경스럽다!
"남근석 봤어?" 복희 언니가 정상을 지나왔음을 알려준다.
아무것도 못봤어요. 눈에 뵈는 게 없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뒷사람에게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주는 기숙언니와 복희언니가 너무 고맙다.
어떻게어떻게 겨우 따라 내려간다. 멋진 경치와 기암괴석의 감동?따위는 없다!
어둑어둑해진다. 깜깜해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한단다.
하강을 시작한다.
지웅씨가 아래쪽에서 60자 자일을 찾는다. "60자 가진 사람 빨리 먼저 내려가!"
"조심해서 하강해. 나는 걸어 내려갈 테니까." 썜~ 그러다 다치시면 어쩌려고...
선배들과 유쌤의 말투와 표정에서 조급함이 묻어난다.
우리 괜찮을까?
내 거친 호흡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던 너~~
도철씨가 무서우면 두줄 하강해도 된다고 안심시켜준다.
맨 마지막을 지키며 못난 후배를 챙기는 그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쇳덩어리들이 도대체 몇 키로나 될까?
내 빈 배낭에 나누어 넣어줘도 되었을텐데도 괜찮다며 나를 더 돌봐주는 선배님의 마음씀이 너무 감사하고 미안하고..
내 한몸 건사 못해 여러 사람에게 폐끼치는 내가 부끄럽고 속상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하다.
세 번인가 네 번인가에 걸친 하강이 끝나고 이제 하산이다.
등산화로 갈아신었다. 살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미끄럽다. 조심조심 딛는데도 쭉 미끄러졌다.
아... 허벅지가 꽤 쓸린 것 같다. 추락하고 미끄러지고, 사고는 혼자 다 치고 다니네.
하산 내내 승민씨가 뒤에서 방향을 알려주고 불 비춰주고 정신줄 놓지 않게 챙겨준다. 고마운 사람.
한번 미끄러지고 나니 더 자신이 없어서 두 손, 두 발, 엉덩이까지 총 동원해서 엉금엉금 내려왔다.
다행히도 로프가 옆에 설치되어 있어 위험한 구간을 무사히 내려간다.
나 때문에 하산 속도가 더 늦어지는 것 같다.
이제 더는 못 가, 119에 구조될래..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수십번 삼키며 깨문 입술 틈으로 신음소리가 자꾸만 새어나온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랜턴 없이 끙끙 앓으며 엉금거리는 나를 위해 앞서가며 길을 밝혀주던 철한 선배님이 당신 랜턴을 내 배낭에 달아주셨다.
그 빛은 정말이지 생명의 빛! 감사합니다!! ㅜㅜ
아무래도 나는 선배는 못될 것 같다.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가 어찌 선배될 자격이 있으리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하산 길, 끝이 있기는 한걸까?
잠시 앉아 쉬는 중에 유쌤 목소리가 저 뒤에서 들린다. "도철, 괜찮아?"
대답이 없다. 가슴이 덜컥 한다. 한참만에 괜찮다는 소리가 들린다.
아.. 장비를 조금이라도 나눠지고 왔었어야했는데... 미안함에 머리가 더 아파온다.
없는 게 없는 승민씨의 배낭에서 타이레놀이 나왔다. 허겁지겁 삼켜본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내려와 드디어 선생님이 아침에 세워놓은 돌탑이 발견되었다.
아.. 무사히 내려왔구나!
돌길에서 폭신한 흙길로 바뀌고 또 약간의 헤매임 끝에 드디어 포장도로에 발을 디뎠다.
"다 왔다~~~~~!!!"
안도감에 말문이 터진다. 팽팽하게 터질듯이 곤두서있던 신경이 풀어지며 앵그리버드 미간이 드디어 펴졌다.
살! 았! 다!
수현씨의 차에 있던 살얼음 낀 멀티비타민 카프리썬, 올여름 최고의 음료수로 인정!
힘든 등반 내내 불평불만 하나 없이 웃으면서, 나보다는 남을 먼저 챙기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더탑 사람들, 인성 최고 능력자들로 인정!
하루종일 힘든 등반을 마치고 모두 잠든 중에 빗길 운전을 하여 집 앞까지 데려다준 수현씨, 최고 배려남 인정!
[ 에필로그 ]
'음... 설악은 아무래도 나랑 잘 안맞는 것 같아. 앞으로 설악산은 쳐다도 안볼거야.'
상처투성이 허벅지에 듀오덤을 붙여주며 딸이 속상해하며 한마디 한다.
"엄마, 이렇게까지 하면서 꼭 산에 다녀야겠어? 이게 뭐야! 이러고도 또 산에 갈거야?"
..
..
"응. 갈거야."
그동안 후기를 올리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로 처음 후기를 올려봅니다.
올드한 줄 알면서도 글로만 써보았습니다.
죽다 살아난 저에게 사진은 있을리 만무하겠죠? ^^;;
첫댓글 고생많으셨어요~~!! 더탑에서 소토왕골에 소풍간다는 말은 소토왕골+릿지 그 어딘가…입니다! (그 말에 속아 한싯길에서 눈물 뚝뚝 흘린 1인🤣🤣🤣) 이렇게 에피소드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사진이 없어도 한편의 수필을 읽듯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글을 정말 잘 쓰십니다!
따님의 물음에 다시 산에 가겠다는 선배님의 대답 뭉클이요~~😭 함께해용~♡♡
설악 분투기 잘읽었어요.
언젠가 멋진 경치 볼 날이 꼭 있을거에요^^
아~~너무 생생한 일지네요..진짜 고생하셨어요~~저 설악산갈때마다 울면서 다신 안가~~하면서 계속 가고있어요 ㅋㅋㅋ 경치를 쉽사리 보여주질않지만 울 같이 함 보러가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고생하셨어요. 담엔 매우 쉽게 등반하실거예요.
아이고 딱해라.
선배님~👍 고생하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소영씨 그날 고생 많았어.
발톱도 빠지고.. 날씨 좋을때 가면 경치도 좋아서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가는데 두번 모두 비가와서!! ㅠㅠㅠ
우왕 글 너무 잘 쓰신다!!👍 제가 다녀온 거 같아요 ㅎㅎ
덕분에 설악 다녀온 거 같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엔 힐링 등반하시길 바랄게요🤗
경지나 넌 이제 진짜로 가야되지 않겠뉘........??
@mOng(김명숙) 9월쯔음…
@이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