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유월)에 관한 시모음 47)
유월 정원 /박연준
바보를 사랑하는 일은 관두기로 한다
아는 것은 모르는 척
모르는 것은 더 크게 모르는 척,
측립(側立)과 게걸음은 관두기로 한다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실제를 감지하기로 한다
행운도 불행도 왜곡하지 않기로 한다
두려움에 진저리 치다
귀신이 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을 김밥처럼 둘둘 말아 바닥에 두지 않기로 한다
먹이가 되어 먹이를 주는 일,
본색을 탈색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부수는 건 겁쟁이들의 일,
집을 부수는 대신 창문을 열기로 한다
두 시간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고양이가 되어 사냥하고 할퀴기로 한다
발톱을 쭉쭉 빨며,
함부로 피어나지 않기로 한다
오뉴월은 엎드려 지나고
팔월 즈음 푸르게, 해산(解産)하기로 한다
뻗어 나가는 건 아이들뿐,
누추한 어른들은 삽목하기로 한다
한 그루 두 그루 세다
남은 건 버리기로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자에게선 아름다움을 빼앗고
무지렁이로 골방까지 걸어가는 사람에게
신발을 골라주기로 한다
(정확함은 문학의 신발 치수!)
맞는 신을 신고 걸어가는 노인들을 골라
사랑하기로 한다
오른쪽으로 행복한 사람과 왼쪽으로 불행한 사람이
한집에서 시간을 분갈이하는 일,
뒤척이는 화분에 물을 주기로 한다
진딧물도 살려주기로 한다
영혼을 낮은 언덕에 심고
이제부터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
유월의 살구나무 /한경희
네 문턱 지켜가듯 살구 알이 매달렸다
그 열매 새콤한 것 당신의 손등 같아
나 여기 너의 빛깔로
어머님을 그린다.
낙과(落果)에 노을 지는 슬픔이어서 좋아라
어머니의 어머니가 화관 쓰고 오시듯이
내 주름 놓일 자리로
눈물겨워지는 것을.
살갗을 찢고 나온 씨알을 지켜본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땅에 묻힐 그 한 톨
저 하늘 문자(文字) 같아라
당신 닮은 봄이 온다.
유월의 번역서 /은 종
녹음(綠陰)을 번역하러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우거진 낱말들이 사전을 펴 놓고
풀잎체로 써 내려가거나
바람이 비뚤어진 글자를 교정해 주는 것은
태양이 글귀 위로 가만히 돋보기를 갖다 대 주기 때문이다
허리 접힐라 아름드리 나무에 기대어 숨 한 번 깊숙이 들이쉬면
기억의 저장고인 이파리들 속마음 열어 보이듯
무성한 낱말들을 쏟아 놓는다
부리로 두드리며 숲의 자간을 알은체하는 새소리
직역하면 푸름이요
의역하니 힐링이라
삶의 분기점을 가르듯
계곡 따라 흐르는 산의 눈물이 내 심장을 교열할 때
원본을 완역한 나는
푸른 문장들을 육화(肉化)하는지
온몬이 서늘하게 해석되고 있다
유월설 /김지유
웃음이야 아니, 통곡이야
밤새 그림자 꿰맨 속말이
콧구멍으로 터진 거야
벚꽃 아래 맛본 도다리 쑥국처럼
까꿍, 속살로 피워 올린
꽃잔치라지만 지상의 모든 애인
손가락보다 야윈 미소라고
눈물 감추어 만나는 이별이라고
전부 내어주는 일이란
유월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거
잊지 말자니, 모두 잊히고
꾹 참고 맞던 아이의 불주사처럼
지워진 그림자 닻 내리고
처량하게 무심하게
식어가는 심장을 살아내는 일
내 웃음과 당신 눈물에 무관심하던
계절 접을 때 호접몽, 꿈은
닫혔다 열리는 지상낙원이므로
깜빡 취해 웃었다 운다 해도
모두가 희디흰 꽃잔치, 곧 녹아 없어질
유월의 시린 사랑설
통곡이야 그래, 만질 수 없는
그런 웃음이야
*유월설 : 오뉴월에 눈처럼 수북한 흰 꽃을 피우는 관목.
6월의 기도 /정연복
서서히 달아오르는
태양의 열기에
머잖아
무더위가 찾아오겠지요.
내 삶의 열정도 조금조금
더 뜨거워지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에
더욱 불길이 치솟게 하소서.
더운 날씨 속에서도
끝없이 짙어가는
초록 이파리들을 바라보며
새 힘과 용기를 얻게 하소서.
유월 -가천 다랭이 마을에서 /박숙경
바다로 가는 길에
보랏빛 수국 환합니다
무릎을 꺾어
층층으로 걸어놓은 꽃잎의 문장을 만지며
반음 쯤 접어둔 고백 하나 꺼내 펼칩니다
문득, 바람이 스칩니다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랑의 향기이거나
바래길 지나 앵강다숲으로 가는 기척이겠죠
바다에 닿습니다
열사흘 달빛이
수면에 쪼그려 앉은 뭇별의 등을 토닥이면
밤의 원고지엔 말줄임표만 무성합니다
위험 수위를 찰방거리는 어둠의 감정선,
우리의 간격은 무엇입니까
박하향 가득한 길을 되돌아 걸으면
개구리울음 마저 달빛 무등 타고 층층으로 쌓이는 밤
달콤한 비파향이 마을을 에워쌉니다
저, 달빛 등 돌리기 전
오래된 그리움에게
긴 편지를 써야 할 것만 같습니다
안타까운 유월아 /황영칠
꽃과 신록으로 찬란하던 오월 앞에
미사여구로 붓 놀림에 바쁘던 시인들
오월이 떠나고 네가 온 날부터
찬사에 침이 마른 붓대도 내려놓고
청춘 남녀의 만남도 발길을 돌리더구나
화려한 외모에만 눈이 먼 민심에
시들어버린 장미의 시체만 받아 들고
눈물로써 호국 영령들의 영혼을 달래며
피비린내 나는 민족 상잔의 총 칼을
맨 가슴으로 막아낸 안타까운 유월아
슬픈 시인들을 위하여
산 자락에 밤꽃도 피워 놓고
접시꽃 오솔길도 다정하게 꾸며 놓고
담장 위에 올라선 능소화도 피워준
너의 눈물겨운 사랑이 애처롭구나
아픔이 얼마나 컸기에
38도의 열병도 앓았고
서러움이 얼마나 깊었기에
참지 못한 눈물을 쏟아 놓고 떠난 유월아
눈물 많고 속 깊은 너의 아픔을
유월아
나는 알고 있단다
잘 가거라 유월아
다시 보자 유월아
6월 첫날의 햇살 /정연복
아무리 한낮의 햇살이라지만
어제와 너무 다르다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확연히 느껴진다.
단 하루의 시간의 징검다리
건너왔을 뿐인데
성큼 와 있는
새 달 새 계절.
단지 하룻밤 새에도
확 달아오르는
여름 같은 사랑도
세상에는 더러 있으리.
유월에 보내는 편지 /조규옥
유월입니다...
바람부는 언덕
느티나무 밑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던 날 처럼...
감자꽃 무수히 피어나고
숲에선 뻐꾹기 울어대니
요즘은 들판으로 나서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만
사랑하면서도 헤어져 산다는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른날이나...
노란 붓꽃이 흔들리는것을 보면
그리워 눈물부터 나니
나도 같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대가 사는 그 곳에도...
감자꽃 피어나고 뻐꾸기 울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어찌하고 사시는지요
당신도 붓꽃 처럼 흔들리며 사시는지요........
유월의 햇살 /허후남
지금, 밖을 보고 있나요?
햇살이 투명하고 눈부십니다
누군가 내게 준 행복입니다
지옥의 문을 들어서는 공간에
당신과, 하늘에는 햇살이 닿아 있고
땅으로는 지열이 닿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손잡고, 길을 걷지는 못하겠지만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존재랍니다
삼월에 새싹 돋고
유월에 곧은 햇살 쪽쪽 내리꽂히는
이 세상은, 그래서 나에게는
화사하고 눈부신 낙원입니다
당신이 오로지 내게만, 문 열어 준
그 낙원에서, 나 살고 있습니다
6월, 찔레꽃 /정선희
섬진강 강가를 달리며 장사익의 찔레꽃을 듣는다. 눈으로 입으로 귀로 파고드는 하얀 선율. 남편의 여자가
선물한 노래. 서예학원에서 만났다는 여자. 남편이 맨날 저 노래만 들었어. 저 노래를 들으며 밥을 먹고 저 노래를 들으며 잠을 잤어. 그 여자 때문에 남편은 자주 집을 비우곤 했어. 이혼하고 서울로 간 여자.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갔지. 도와주세요. 무조건 무릎부터 꿇었지. 아이들이 어려요. 제발 남편을 놓아주세요.
그리 구질구질하게 살지 마세요. 그러니 남편이 바람을 피죠. 그녀의 옷차림을 보며 훈계를 했지. 그녀는
선심이라도 쓰듯 남편을 안 만나겠다고 했어. 결국 가정을 지켰지만.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가슴에 불은 끌 수 없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찬물을 들이키고, 설거지 하다 접시를 맞은 편 벽 쪽으로 던지고, 6월이 되면 홧병처럼 피는 꽃. 찔레꽃이 펴야 섬진강이 흐르는데. 아주 천천히 울고 싶은데. 찔레꽃을 다 피워서 없애 버리고 싶은 밤. 찔레꽃이 싫다. 찔레꽃이 싫다. 찔레꽃이 좋다.
6월 15일 /이능표
고요한 밤 집집마다 문 닫고 자는데 성안 가득 비바람이 찬 하늘에 몰아친다.
“점치세요!” 외치는 이 어느 집 자식일까? 내일 아침 쌀 살 돈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밤 새워 글을 짓지만
남는 것은 언제나 연필 한 자루
가장 된 삼십 년
살아온 절반이 빚이었는데
빚으로 빚을 살며
빚 없이 살아본 세월이 없는데
별빛도 달빛도 내게는 다 빚이었는데
새벽에 마신 술은 이자를 묻지 않고
날이 밝기 전에
숙취는 반드시 돌려달라고.
*범성대(1126~1193)의 「밤에 앉아 있노라니」 전문, 류종목이 옮긴 글을 읽었다.
유월의 입술-사라진 문장은 야위지 않는다 /연명지
출가한 문장이 돌아오는 계절
깊은 음모로 자욱한 이름들
그 이름을 죽일수는 없어 칡뿌리를 씹는다
틈만 있으면 어디든 자리를 잡는, 칡넝쿨
허락 없이 남의 옆구리를 기어 올라간다
세상 별스럽게 굴지 말라고 빌려준 옆가지를
칭칭감아 햇빛을 차단하고 서서히 죽게 만든다
숲속 질서를 망가 뜨리는 소문의 곁가지들.
우리는 칡뿌리를 나누어 먹으며 어른이 되었다
보라색으로 변하던 입술을 보며 깔깔대고 웃던 아이들
그땐 명랑한 햇살이 귓구멍을 들락거렸다
검은 서랍이 열리는 골목으로 비린 문장들이 건너 오고
칡뿌리를 씹듯, 돌아온 문장을 씹는다
여기서 잠깐,
어른들은 누구나 비밀의 숲을 가지고 있어
귀먹은 새들을 키우고 있지
우리가 먹은 칡뿌리를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돼요
마음을 빌려, 고개를 끄떡이는 유월의 입술들
가끔은 사라진 문장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