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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디고운 순천의 봄 - 낙안읍성 가는 길 금둔사는 '납월매' 구름에 파묻혔다. 선암사 홍매화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화 축제가 끝나는 이번 주말이 마지막 기회다. | |
순천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 상사호 등 전국적으로 이름난 여행지가 반경 50㎞안에 모여있는 데다, 부산에선 보성 벌교 여수 등으로 통하는 관문이라 다른 데 놀러가면서도 꼭 한 번은 들르게 되는 곳입니다.
그 뿐입니까.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하다못해 김밥을 한 줄 시켜먹어도 실망 안 할 곳이 순천입니다. 한 상에 스무 가지 이상의 반찬이 오르는 순천의 호남한식을 두고 '딱히 이거다 할 음식이 없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한 음식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래서일까요. 여행을 즐기는 사람 가운데는 유독 순천에 첫 정을 준 사람이 많습니다. 저의 첫사랑도 순천입니다. 20대의 어느 날 정호승 시인의 시 한 편을 읽고 다음 날 바로 순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더랬습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그때 처음 만난 선암사는 마침 홍매화가 한창이었습니다. 순천까지 달려가게 했던 그 슬픔의 종류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붉은 구름에 싸인 듯 황홀한 선암사의 모습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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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선암사, 송광사, 낙안읍성으로는 부족하다면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촬영한 오픈세트장도 코스에 살짝 끼워보시지요. 1960~1980년대 배경을 재현해 둔 곳인 데 생긴 지 몇년 됐어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진 애호가들의 출사지로도 인기 있는 곳입니다.
잠은 어디서 자냐고요. 순천은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준비하면서 한옥 체험시설을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순천시 홈페이지 등에서 숙박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지요. 특히 선암사 입구의 순천전통야생차체험관에서는 한옥 숙박과 함께 다례를 배우고 다식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어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곳입니다.
뭘 먹어야 하냐고요. 순천의 수많은 맛집 가운데 몇 곳만 고르라니 정말 잔인하시네요.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추려봤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토박이도 토 달지 않는 전통적인 맛집과 순천 사는 미식가들이 숨겨놓고 다닌다는 맛집이 쏟아집니다.
◆ 순천의 맛
- 한정식·주꾸미·홍어애탕… 맛의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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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다리 휘어질라. 장천동 '대원식당' 한식 | |
순천 한식의 '대모'는 장천동의 대원식당(061-744-3582)이다. 이 집 호남한식이 30년 넘게 사랑 받는 것은 '반찬 가짓수'에 대한 욕망도 채워주면서 웬만한 한정식 못지않게 고급스러운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매력은 배 꺼지면 또 먹고 싶어지는 푸근한 남도의 맛이다. 찌개 생선구이 전 나물반찬 등 어느 하나 타박할 음식이 없지만 그 중 백미는 김오르는 밥에 넣고 쓱쓱 비벼먹는 토하젓과 익을대로 익은 묵은지다. 따로 시켜 먹는 갈비찜, 홍어찜, 홍어애탕, 주꾸미무침도 참 맛있다. 몇년 전에는 2명이 가도 저녁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4인 이상만 받는다. 점심은 4인 기준 8만 원. 저녁은 10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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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동 '백우한정식' 간장게장 | |
청해한일정식(061-741-5555)은 굴비정식으로 유명한 집이다. 이 집이 유독 이 메뉴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순천시내 웬만한 한식집에서 다 맛볼 수 있는 게 굴비정식이다. 순천 굴비정식은 특이하게 녹차물에 밥을 말아서 살을 다 발라 내오는 굴비구이와 함께 먹는다. 물에 반 밥과 생선이라니 어쩐지 비릿할 것 같지만 짭쪼롬한 굴비와 개운한 녹차물밥의 궁합은 상상 이상이다. 굴비가 왜 밥도둑인지 알게 되는 곳. 1인분에 1만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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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향동 '여수정통사시미' 사시미회 | |
이제 부담없는 곳을 찾아보자. 승주 IC에서 선암사로 들어가다보면 5㎞쯤 전에 진일기사식당(061-754-5320)이 나온다. 여기선 메뉴판 대신 '식대 7000원'이라고 쓰인 종이만 한 장 붙어있다. 메뉴는 단 한 가지, 김치찌개다. 이름은 김치찌개지만 김치가 들어간 돼지두루치기에 가까운데 달달 볶은 다음 프라이팬째 내준다. 밑반찬이 여러가지 나오지만 이것저것 집어먹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땀 뻘뻘 흘리면서 밥에 김치찌개와 돼지고기를 얹어먹을 뿐이다. 1인분을 시켜도 눈치 안 보고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나홀로여행자는 여행수첩에 꼭 적어두면 좋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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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리 '전망대가든'의 대표 맛 짱뚱어탕 | |
선암사 바로 앞 길상식당(061-754-5599)에서는 맛깔스러운 반찬의 산채정식을 1만2000원에 맛볼 수 있다. 1만5000원짜리 더덕정식도 괜찮고 6000원짜리 산채비빔밥도 훌륭하다. 비싼 듯 느껴지지만 상을 받아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송광사 앞에도 길상식당(061-755-2173)이 있고 메뉴도 반찬도 비슷하다.
◆ 그리고… 茶(차)
- 조선시대 허균도 감탄한 깊고 고소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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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례 체험과 한옥숙박을 함께 할 수 있는 '순천전통야생차체험관' | |
예약해둔 2~3인실은 생각보다 작다. 감물염색 바탕에 조각보로 장식한 예쁜 침구를 한구석에 정갈하게 개 놓았고, 다기와 찻잎도 소담하게 놓여 있다. TV는 없다. 퇴근하자마자 TV부터 켜는 습관이 있어서 허전하다.
한옥이라 해도 각 방마다 현대식 욕실이 딸려있다. 전주를 가도 그렇고 요즘 한옥체험은 다 이렇다.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는 즐기되 불편함은 마다하겠다는 여행객들의 모순된 욕구에 맞춘 것이다.
대충 씻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찻잎을 불린다. 차맛이 좋다. 잎을 보니 세작인데 우전만큼이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난다. 잘 덖어서 그런가, 야생차라 그런가. 차 한잔 하고나니 또 할 일이 없어 불 끄고 눕는다. 사각사각 소리가 날 정도로 청결하게 빨아 잘 말려놓은 이불이 기분좋다. 이렇게 적막하고 어두운 밤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여행에 지친 몸은 잠속으로 빠져든다.
아침 잠을 깨운 것은 휴대전화의 요란한 알람이 아니라 새소리다. 얇은 창호지 사이로 햇살이 어른거린다. 창을 활짝 열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봄 햇살이 밀고 들어온다. 조계산이 바로 올려다보인다. 삼나무가 빽빽한 체험관 뒷쪽 산책길은 선암사와 통하게 돼있다. 산 속의 아침 공기는 어쩌면 이리도 상쾌할까.
■순천차 마시며 듣는 순천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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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야생차는 뿌리가 땅 속으로 2, 3m씩 파고들어갈 만큼 생명력이 뛰어난 종자로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에 냉해를 입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지요. 보성·하동차보다 덜 알려졌지만 순천도 예부터 유명한 차 재배지예요. 허균 선생은 도문대작편에서 작설차는 순천이 제일 좋다 말했지요." 야생차 교육·홍보를 담당하는 김재희 씨의 청산유수 언변 때문인지 어제 밤 혼자 마신 차보다 더 향긋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체험 행사
12동의 고급스러운 한옥으로 이뤄진 이 곳 체험관에선 숙박과 함께 다례체험을 할 수 있다. 또 규모가 꽤 큰 강당에는 프로젝트 빔을 비롯한 최신 음향·영상시설이 돼있어 워크숍이나 세미나 장소로도 인기가 좋다. 차전시관에는 순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기가 전시돼있고 차의 역사와 종류, 효능, 제조과정 등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뒀다.
아이들은 다식만들기 체험을 특히 좋아한다. 선식가루에 꿀을 넣고 작게 빚은 다음 도장을 찍어 모양을 내는 간단한 체험인데 만들기도 쉽고 첨가물·설탕이 안들어간 웰빙간식이라 배워두면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한옥 숙박요금은 5만~15만 원이고 다례 체험은 2000원, 다식 체험은 5000원이다. 월요일에는 쉰다. (061)749-4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