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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 온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허물고 세우는>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데,
건물로서의 대성전의 의미를 기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성전인 우리와 우리 공동체의 의미도 기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코린토 1서 3.16-17)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사람들이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얘기하자,
당신의 몸인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렇지만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나라는 성전이나 공동체라는 성전이 그 안에 하느님께서 계셔야지만 성전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고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 안에 계셔야 할 하느님이 아니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폭격받거나 사람들이 허물지 않아도 무너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기에 폐허가 되고 무너진 거지요.
그러니까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성전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성전에 오히려 아니 계시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은,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고,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처럼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려면 프란치스코처럼 성당을 재건하기도 해야 하지만,
성당 재건에 앞서 무너진 인간 성전들을 재건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사실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망하고 무너지는 곳을 보면,
그곳에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시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모여 살고,
그러니 자기들끼리 혹 사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미워하고 싸움박질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끼리,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니,
사랑의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 아니 계신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는 셈이요,
그러니 당연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설 수밖에 없게 되고 망하게 되겠지요.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성전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무너지기 전에 우리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허물어라! 다시 세우겠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허무는 것이고,
이렇게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싹 허물어버릴 때 오늘 주님처럼 우리도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요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이 과감한 작업을 주님과 프란치스코처럼 용감히 수행하라고 촉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 교회의 유대 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 ‘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 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성전은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입니까?>
어학원 다니던 시절, 지나다니던 길에 라테라노 성당이 있어서 자주 들렀습니다.
바티칸보다는 덜 붐비고 한적한 탓에 조용히 기도가 참 좋았습니다.
로마 시내 수많은 성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 지니는 가치와 의미가 상당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00년대 건립된 성당으로, 로마 공식 주교좌 성당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라테라노 대성당의 위용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가톨릭교회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대성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 역시 지상 성전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성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들이 만나는 집, 아버지와 자녀들이 함께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모든 사람들의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은 “개인이 사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준비를 돕기 위해서” 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장사를 허가하면서 ‘장소 사용료’, 또는 ‘세금’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사실은 ‘뇌물’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사제들이 진짜 장사꾼이고, 장사하는 이들은 사제들의 하수인들이었을 뿐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 라고 엄하게 가르치시는데,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그래도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그것은 죄다.”입니다.
반대로, “그래도 된다.”는 “그것은 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같은 일’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 일은 죄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당시 백성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아주 비싼 가격으로 파는 소, 양, 비둘기를 사야만 했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성들 가운데에는 ‘부당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마르 11,18), 아무 생각이 없거나 당연한 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을 더 많이 받으려면 더 많은 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싼 가격으로 제물용 짐승을 사는 것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야 한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그러면 안 된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한다.” 가운데에서 “그러면 안 된다.”만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또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와 신앙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악용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공관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마태 21,13; 마르 11,17; 루카 19,46)
‘강도들’은 회개하도록 깨우쳐 주고, ‘강도들의 소굴’은 허물어 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없애버리라는 뜻은 아니고, 사실은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 4,21ㄴ-24)
여기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특정 장소나 건물이 예배를 독점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은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온다.” 라는 말씀은 “구원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 하느님에게서만 온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유대교라는 종교 자체는 긍정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예배를 개혁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예배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만의
이기심으로 드리는 ‘잘못된 예배’ 라고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에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의 말씀’과(하느님의 말씀과) 동등한 말씀으로 믿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정화 -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성전>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시편 84,5)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라테라노에 대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할 때 함께 세워준 성전으로,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교회가 되었습니다.
1307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 까지 역대 교황의 주거지였으면 이곳에사 대관식, 착좌식을 했고 이곳에 묻혔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총본산으로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은 12세기부터 바로 오늘 11월9일에 지냈고, 후에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인 이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기록한 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서 이날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대성전 축일이면 떠오르는 다음 시편 둘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시편 84,2-3)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녘에 구원하시네.”
(시편 46,5-6)
뒤 시편은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성전입니다.
이런 중심이 없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보이는 가시적 중심인 성전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성전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전을 사랑하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듯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전의 타락과 속화에 열화같은 분노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로 세상을 성화해야할 성전이 부패하고 속화된다면,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상실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어지럽히는 상인들과 환전꾼들을 쫓아내신후 가난한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타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킬 것입니다.”라는 시편 말씀을 연상하며 예수님을 이해하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가시적 성전이 아닌 불가시적 성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뒤에야 깨닫고 믿게 된 제자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몸이 참 성전이 된 것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바로 거기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가 없는 성전이라면 그 보이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할뿐 쓸쓸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잘 드러내는 미사 중 감사송 경문이요 가톨릭 교리서의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니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진짜 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지체들인 우리로 이뤄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정화에 날마다 거행하는 성전 미사전례은총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다음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말씀이 심오하고 참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 있는 돌”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거룩한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교리서 1179)
놀라운 것은 성전의 삼중(三重) 차원입니다.
보이는 1. 가시적 성전이요, 2.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요, 3. 각자 개인의 성전입니다.
셋이자 하나인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이 끊임없이 세상을 살리고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바로 에제키엘서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은 그대로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물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서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창세기 아담의 죄로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실낙원에서 복락원을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영적 양식이자 영적 약이 되는 말씀과 성체의 은총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입니다.
묵시록에서 다시 반복되는 우리 궁극의 희망인 천상고향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있어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묵시 22,1-2ㄱ)
우리는 황송하게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다달이가 아닌 날마다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무엇보다 놀랍고 은혜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며 용기백배 힘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 3,16-17)
얼마다 거룩하고 소중한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인지요!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정화는 비단 보이는 성전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뿐만 아니라 내 자신 성전정화도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성전을 돌보듯 내 심신의 성전을 잘 돌보는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은총과 더불어 사랑의 수행을 통해 날로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는 우리 자신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성체성사 미사은총입니다.
날마다 정성껏 온마음과 온정신과 온힘을 다해 정성껏 거행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함으로 주님을 닮아감이 성전정화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미사 때마다 오늘 영성체후 기도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드러납니다.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요한 2,15)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러 온 백성들과, 그들에게서 이득을 취하려는 상인들이 북적이고 있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안에서 통용되는 단위의 화폐로 환전하고 예물로 바칠 동물들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상인들과 종교 기득권층이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선량한 백성들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는 행태와, 본모습을 잃어가는 성전의 분위기에 채찍을 휘두르신 것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치워버리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장사'라는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과 재물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라서, 거룩함마저 재물과 적당히 버무리면 이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이 하느님의 집, 성전에서 이용당하고 착취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기도의 집'(루카 19,46 참조)이니까요.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예물을 주님께 바치고 사랑을 고백하는 가운데 그분에게서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간 져온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쉬며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예수님은 성전이 진정한 본질, 정체성, 역할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이야기합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제 47,12)
에제키엘 예언자가 본 환시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닿는 모든 것을 되살리고 생동감을 일으킵니다.
우글거리며 역동하는 모든 생명의 환성와 환희가 들리는 듯하지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이기도 하고, 또 성전에서 선포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전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존재할 때, 세상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성전에 온갖 물질주의와 탐욕, 형식주의와 편가름이 들어차면 세상에 내어줄 것은 절망과 냉소의 기운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교회와 공동체, 우리는 세상에 선하고 온유하고 진실된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로 불리웠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성전 본연의 정수를 되찾아 꼬옥 간직하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이처럼 크게 뒤흔들어 주십니다.
영성생활 안에서 주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도 악의 각축장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생각과 기억과 상상과 감정이 우리를 들쑤셔 주님을 정향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주님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분산시키지요.
그럴 땐 마치 마음이 소란스럽고 분노 가득한, 어둡고 음습한 악의 소굴이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두를 쫓아내시고 쏟아 버리시고 뒤엎어 버려 주시기를 청합시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의 거룩하고 정결한 성전이니 그 본모습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예수님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영적 여정에서 성령의 현존을 청하고 다가오신 말씀에 반복해서 깊이 머무르는 기도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 고통 가득한 세상을 되살리고 생명을 주는 '생명의 물'이 되어 봅시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우리다울 때 가능합니다.
주님을 품고 그분과 맞닿은 채 살아가는 모든 이는 이미 생명이기에, 그에게서 성령이, 말씀이 전해집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이 되려 애쓰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제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전주의 한옥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중앙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봉천동성당에 다녔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첫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당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 이해할 것입니다.
성당의 기능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예배의 가장 큰 형태는 ‘성체성사’로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밖에 다양한 전례를 통해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혼배, 장례미사가 있고, 성모의 밤과 같은 전례가 있습니다.
학생 때 성당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당에서 예술제가 있었고, 성당에서 교리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먼저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당은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론’을 배우면서 성당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성당은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매일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위로하는 미사가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람들은 삭막한 광야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묵상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위령의 날에 교구는 용산 성직자 묘지와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주일미사 참례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걱정합니다.
교우들이 다시금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배와 친교의 장소인 성당도 필요합니다.
경건함과 엄숙함이 드러나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많은 예술 작품이 영적인 충만함을 드러내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제도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독선과 교만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십자가와 나눔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흥청대는 술 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 아오스딩 성인은 그의 책,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선명한 빛이 자신에게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십니다.
저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는 말씀에 크게 감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악이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말씀이라면서 세상 것만을 추구하고 세상 것만을 입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다의 높은 염도로 인해 물 위로 잘 뜰 수 있었고 그래서 신나게 수영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너무 신나게 놀았을까요?
갑자기 다리에 쥐가 올라왔습니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청난 물을 마셨지만 겨우 해안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구명조끼의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수영 잘하니까 답답한 구명조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꼭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입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너무 많은 악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주님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기가 어렵고 힘들다면서 그냥 세상을 입겠다고 합니다.
구원의 열쇠는 주님께만 있는데, 세상 것만을 따르겠다는 ‘어리석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즉, 하느님을 입고 세상의 악을 막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집인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환전하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입을 수 없고, 세상 것만을 입게 됩니다.
그런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와 멸망을 예고하시지요.
참된 성전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성령으로 충만하신 그분의 인격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입지 않고, 세상 것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입게 되는 특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성전도 세상 것이 가득하게 되면 그 거룩함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입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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