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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역설
신외숙
전동차가 개봉동 전철역사에 닿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곧바로 마을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보도블록을 사이로 차로와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화장품 체인점과 다이소 매장 옆으로 채소와 과일 등 먹거리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과일 박스 옆으로 계란더미가 보였다.
한 판에 2500원.
눈물 나는 가격이었다. 농민들의 아픔에 눈물이 났다. 한 판에 2500원이라니? 사료 값도 안 나오겠다.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실제 산지 가격은 더할 것이다. 운송비 빼고 나면 1000원이나 될까? 계란 30개에 고작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다니. 요즘은 닭고기 값마저 추락 시세에 있어 농민들의 고충이 극심하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프라이드 치킨 값은 계속 오른다니 어불성설이다. 농민들을 더 슬프게 하는 건 닭고기를 브라질에서 수입해 와 전혀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계란은 중국에서 들여오고 5월이면 수요가 급증하는 카네이션 꽃도 중국산에 밀려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는 것이다. 문민정부가 내세웠던 세계화의 물결로 농민들만 피박살 난 것이다. 이젠 쌀마저 전면 개방하게 되었다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얼마 전 동네 도서관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에 쌀 이외는 전부 수입산이었다. 김치는 당연히 중국산이었는데 맛과 질이 형편없었다. 물컹하니 식감도 떨어질 뿐 아니라 빨강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색깔이 너무 진한 것도 불안했다. 소고기는 물론 돼지고기 생선류도 거의 다 수입산이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조리사를 한명만 두어서인지 맛이나 위생 면에 있어 질이 많이 떨어졌다.
음식값이 오르는 건 식자재의 원가 상승도 있지만 치솟는 인건비가 더 문제라고 한다. 요새는 웬만하면 힘든 일을 꺼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가 강화되는 것 같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면서 신종어까지 탄생하는 거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 하는 말이 있다.
팔자와 운명.
그러나 마지막 수순이 있다. 그것은 낮아질 대로 낮아지는 것이다. 모든 스펙을 내려놓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이다. 나이 50대가 넘어서면 모든 일자리가 평준화 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젊은 세대에서 밀린 은퇴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저임금의 막일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마저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있으니 괜찮다.
언젠가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인생의 최대 기쁨은 일하면서 돈을 번다는 그 자체에 있다.
태수는 작년에 운영하던 출판사를 접고 나서 완전 백수가 되었다.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마포 근처에서 아동용 도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주 거래처인 서점이 망해면서 함께 문을 닫고 말았다. 그의 거래처인 서점은 지방에서 꽤 큰 규모로 30년 넘게 이어온 비교적 튼실한 서점이었다.
주변에 있던 서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학생들을 상대로 한 참고서류는 꾸준히 팔리고 있었기에 매상고는 그런대로 높은 편이었다. 마진율이 10 프로 안팎이라 순 이익은 적었지만. 예전에는 처세술과 요리책 종류도 팔렸지만 스마트폰이 급증하면서 판매율이 뚝 떨어졌다.
문학서적이나 잡지 류는 이미 바닥 친 지 오래였다. 예전에 잘 팔리던 베스트셀러 소설도 서고에서 푹푹 썩어나고 있었다. 반품을 하려고 해도 출판사가 망해 그마저 할 수가 없었다. 한달이면 폐지 수집상인 고물상으로 쫓겨가는 책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작가가 눈물겹게 쓴 책이 폐지로 변하다니 당사자들이 알면 통탄할 일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천원씩 팔아도 사가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책을 안 읽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서점은 판매대금을 입금하라는 독촉에도 차일피일 미루더니 드디어 빼째란 식으로 나왔다. 창고 속의 책을 모두 빼가라며 돈은 언제줄지 모른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 서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서점의 도산은 출판사의 도산으로 이어진다. 마치 도미노식이다. 거금을 들여 찍어놓은 책이 창고에서 잠을 자더니 드디어 썩기 시작했다. 옷 같으면 땡 처리라도 하지 책은 그럴 수도 없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라도 회사를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출판사는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15년 세월을 견뎌왔다. 원래는 친구 녀석이 운영하던 것을 그가 인수 받았는데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친구는 출판사를 부탁한다며 자기는 미국에 가서 못다 꾼 꿈을 꾸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뭐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겠다나?
그런데 그 헛된 꿈을 태수도 꾼 것이다. 그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동심의 세계를 아름다운 글과 색상으로 표현해 보겠노라고 그래서 반드시 베스트셀러를 치겠노라고 큰소리쳤던 것이다. 글 그림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동화도 그가 직접 썼고 그림은 그래픽 디자인으로 역시 그가 직접 그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색감이 뛰어나 사생대회 나가면 언제나 입상을 차지했다. 글짓기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시 산문 모두 장원은 그가 휩쓸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사이에 삶의 모토(母土)가 되었다. 태수는 친구의 제의를 운명처럼 받아들였고 세월을 잊고 꿈꾸기에 돌입했다. 얼마 동안은 꿈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때는 그가 출판한 책이 교보에서 베스트셀러 안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아동문학물 외에 교육동화도 만들었다. 주 거래처가 생기면서 안정궤도에 접어드는가 싶더니 어느날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날인가부터 책은 베스트는커녕 반품되기 일쑤였다. 대형 출판사의 마켓팅 전략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거금 들여 책을 만들었는데 서점에 나가자마자 반품되는가 하면 책이 팔려도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기현상이 인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서점가의 유통망에도 구조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나라 출판사정은 시대를 막론하고 불황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70-80년대에는 소설이 주류로 자리매김 하면서 많은 베스트셀러 기록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이제 먼 옛날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출판사는 빚만 겨우 갚은 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에겐 거두어야 할 식솔이 없었다.
한때 아내가 될 뻔한 여자는 그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떠나버린 지 벌써 십 수 년이 되었다.
백수가 된 그는 매일 집을 나와 배회했다. 그가 사는 집은 출판사가 있던 마포 근거리에 있었다. 4차선 도로를 사이로 고층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전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은 길을 지나면 누구나 알 정도다. 동네 어느 길목을 지나도 마포나룻길이란 이정표가 곳곳에 눈에 띄인다.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스며 있는 마포나루는 예부터 수상교통의 유지였는데 항상 상선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그보다 더 유명했던 것은 60년대 가수 은방울 자매가 불렀던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히트치고 나서이다. 전철역에서 2분쯤 걸으면 어린이 공원이 나오는데 마포종점이란 행선지를 달고서 서 있는 전차가 보인다. 광화문 역사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전차 모양과 똑같다.
처음에는 무슨 사무실인가 했는데 화장실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는 청동으로 만든 동상과 함께 도화동 복사골에 얽힌 이야기가 써져있다. 도화동을 옛날에는 복사골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복숭아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된다. 봄만 되면 온 동리에 복숭아꽃이 피는데 그 광경이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고 한다.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옛날 복사골에 마음씨 고운 김씨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도화낭자라는 무남독녀의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도화낭자는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씨 또한 착해서 효녀로 소문이 났는데 마침내 저 하늘나라인 천궁에도 알려져서 옥황상제께서는 이 도화낭자를 며느리로 삼겠다고 선관(仙官)을 내려 보냈다.
김노인은 딸이 천궁으로 시집간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애지중지 키워온 외동딸을 천궁으로 보내게 되면 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몹시도 마음이 아팠다. 이러한 김노인의 마음을 애처롭게 생각한 천궁의 선관은 천상의 선도(仙桃)를 한 개 주고 갔다. 선관이 주고 간 선도 복숭아는, 먹으면 천 년을 산다는 복숭아였지만 김노인은 딸 생각에먹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과일은 썩고 씨만 남았는데 그 씨를 땅에 심었다. 이듬해 씨에서 싹이 트고 가지가 자라나 김노인은 정성껏 나무를
키웠다. 나무가 자라서 꽃이 피니 김노인은 천궁으로 시집간 딸 도화낭자를 보는 듯했다.
김노인이 죽은 다음에도 이 복숭아나무는 번성하여 온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이 김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하며 복숭아 열매를 계속 심어 마을 전체가 복숭아꽃밭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전설과 함께 이 일대를 복사골로 부르게 되었다.
근처에서 15년 넘게 살면서 이제야 이 글을 읽게 되다니.
진즉 읽었더라면 동화로 펴내 반포했을 것을. 뒤늦은 후회를 하며 태수는 공원을 산책하였다. 공원에는 간단한 운동기구와 함께 벤치에 앉아 담소하는 노인들이 꼭 보였다. 공원 주변으로 상가가 형성돼 있었는데 대부분이 음식점 아니면 커피숍이었다. 공원 앞을 지나면 슈퍼마켓이 나오는데 맞은편에 꽃을 파는 화원이 있었다.
그 화원 유리창 가에는 둥그런 바구니에 항상 고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뒷다리에 하얀 점이 있는 것 빼고는 온통 검은색 고양이다. 몸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허구헌날 잠을 자는데 이름이 꽃비다. 꽃집 고양이를 줄여서 꽃비라 부르는 것 같다. 이 아이는 깨어 있을 틈이 없이 온종일 잠만 잔다.
사람들이 다가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꽃비야”하고 불러도 일체 반응이 없다. 꽃비는 비만 고양이다. 몸을 둥그렇게 하고 누워 잠을 자는데 등치가 여느 고양이의 두 배 정도 된다. 못 나가도 육킬로는 나가지 싶다. 큰 등치로 얼굴을 제 몸속에 파묻은 채 잠을 자는데 아무리 유리창을 두드려도 마냥 무시하고 잠만 잔다.
어쩌다 한번 눈을 뜨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고는 도로 누워 잠을 잔다. 한번은 안 보여 꽃집 안을 살피는데 출입문 쪽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반가워 “꽃비야 꽃비야” 부르자 저도 반가운지 야옹! 야옹! 하고 처음으로 대꾸를 해주었다.
이때다 싶어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연거푸 찍어댔다. 그것도 잠시, 날씨가 추워지자 꽃비의 모습은 유리창 가에서 사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꽃비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데 일주일 가까이 되도록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이다. 어디가 아픈가? 날씨가 너무 추워 주인집으로 잠시 피신했나. 왜 안 보이지?
너무 궁금해 꽃집 문이 열리자마자 주인에게 “꽃비 어디 있어요?” 묻자 온열기가 있는 뒤쪽을 가리키며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그 거리에서 꽃비는 유명묘(有名貓)가 되었다. 꽃집을 지나 언덕배기를 지나면 원효로 전자타운이 나온다. 넘어가는 길은 은행나무와 함께 온통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끔씩 장날 풍경이 펼쳐지는데 생산농가와 직거래인만큼 믿음은 가지만 가격대는 결코 낮지 않다.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마포와 용산지대와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문 드문 지나는 차량은 한강 풍경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담아내고 밤이면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연출해 낸다. 거기에다 비만 왔다 영화 촬영하기에 딱 알맞은 조건으로 변한다.
태수는 매일 집을 나와 동네 길을 산책하다 커피숍에 들어가 글을 끼적거렸다. 골목길을 지나다 보니 동종의 출판사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구릉진 언덕 위에는 작은 텃밭도 보였고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림 같은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연 압권은 한강변이었다. 지하도를 뚫어 곧바로 한강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 물결이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가을이면 각종 색상을 나타냈다. 진노랑 샛빨강 갈색 이파리로 멋진 단풍 풍경을 연출해 내는데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태수는 날마다 집을 나와 동네 길을 산책하다 어느날 마포대교로 들어섰다. 자살율 1위로 꼽히는 마포대교는 거대한 하늘을 구름과 바람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차량이 전속력으로 지나면서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시퍼런 강물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순간 한기가 느껴지면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마포대교를 죽음의 장소로 택했을까? 의문과 함께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혼들이 이 한강변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난간을 붙잡고 서니 글귀가 보였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 우리가 붙들어 줄게.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단다.
다시 한번 가족과 삶을 붙들어 보라는 격려 문구도 보였다.
바람이 온몸을 집어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이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았다. 강 끝에 십자가가 달린 대형교회 모습이 보였다. 둥그런 지붕의 국회의사당 건물도 보였다. 태수는 문득 눈물이 났다. 인터넷 기사 중에 가장 많이 떠도는 것 중의 하나가 자살 사건이다.
자살은 계층을 망라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일 년에 자살하는 인구가 만 사천 명이라고 한다. 하루에도 40명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OECD 국가 중 자살이 일위라니 그것도 10년 연속이다. 몇 년 전에는 수재들만 모인다는 KAIST에서 대학생들이 연속 자살해 사회에 경종을 울린 적이 있었다.
엘리트 계층의 자살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단순한 스트레스나 압박감 탓으로 해석하기엔 그들의 죽음은 국가적인 손실이 너무 컸다. 정부 고위층이나 지도자급 계층이 비리사건으로 자살한 건 그래도 이해가 간다. 쌓아온 명예가 붕괴 될까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니까. 하긴 전직 대통령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그런 신성모독적인 자살을 독려하고 방법까지 가르쳐 주는 자살사이트의 존속이다. 그들은 자살을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유혹해 고통 없이 죽으라고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니 천인공로 할 노릇이다.
연예인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빚 도산으로 인한 자살도 남은 자들에게 고통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죽으면서 물귀신 작전을 편 기업체 총수도 있다. 그는 돈만 실컷 받아먹고 위기 때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정치권 명단을 언론에 흘리고는 계획적으로 자살했다. 죽음으로 원수를 갚아 보겠다는 그러나 그건 잠시 수면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포문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억은 또다른 사건으로 묻히고 말 테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살의 장소로 마포대교를 찾는 걸까? 자살의 장소로 오명을 뒤집어 쓴 마포대교는 난간마다 죽음을 만류하는 글귀로 도배를 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마포대교에서 자살이 잇따르자 난간의 높이를 3미터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쉽게 떨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론 그게 최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비도 엄청나게 드는 데다 그 실효성도 장담 못하기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검정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난간을 붙잡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대 중반쯤 됐을까.
앳된 모습이 직장인이나 여대생으로 보였다. 그녀가 난간을 붙잡는가 싶더니 위로 올라서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살 포즈였다.
안 돼, 안 돼욧.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그녀가 고개를 홱 제키더니 놀란 눈빛으로 쳐다봤다. 순간 그녀와 태수 사이로 엄청난 바람물결이 가르고 지나갔다. 그녀에게 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데 바로 옆으로 생명의 전화가 보였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전화보다 그녀를 말리는 게 더 급선무였다. 여자는 왼쪽 발을 난간 위에 얹더니 오른쪽 다리를 들어 또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바람에 신발이 벗겨져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경적이 울렸다. 여자를 발견한 운전자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클랙슨 소리였다.
그들은 태수에게 손짓을 하면서 여자도 동시에 가리켰다. 어서 가서 말리라는 표시였다. 갑자기 마포대교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변한 것 같았다. 여자의 죽음을 결코 방치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무언의 시위였다. 어디선가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고 강 건너편에 있던 수상구조대도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태수는 있는 힘을 다해 여자를 끌어내렸다. 여자는 내려오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어쩔 수 없이 바닥으로 끌려 내려왔다. 바닥에 그녀가 놔 둔 듯한 스마트폰이 보였다. 폰에서 계속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찾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경찰이 여자와 스마트폰을 들더니 경찰호송차로 끌고 갔다.
그제야 정차해 있던 차량들은 일제히 소리를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여자를 자동차에 태우기 전 태수를 향해 힐문하듯 물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아뇨.”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놈의 마포대교에 무슨 자살귀신이 씌웠나. 웬 사람이 그리도 빠져 죽노.”
경찰의 넋두리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바람이 삼킬 듯이 전신을 덮쳐왔다. 태수는 전 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의도의 거대한 하늘이 초록물결과 함께 고층빌딩을 감싸고 있었다. 여의도 공원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수영장이 보였고 풀밭 위로 편의점과 커피전문점이 보였다.
그때 거대한 빌딩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태수의 가슴에 잠시 머물다 지나갔다. 태수는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 샛길로 들어섰다. CCMM 빌딩이 눈 가까이 들어왔다. 조금 더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니 거대한 쇼핑타운이 나타났고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니 대규모의 밀집된 금융가가 나타났다.
KDB 산업은행. 수출입 은행.
맞은편으로 대형교회 십자가 탑도 보였다. 주소명을 보니 복음로였다.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종교단지였다. 태수는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어떤 기대 섞인 상상력이 그곳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그는 그때 자기 안에 흐르는 안정감을 느꼈다. 이젠 됐다는 어떤 안도감으로 그는 한숨을 내리 쉬었다.
호텔이 보이는 길가에서 한떼의 여자들이 전단지를 나눠 주는 모습이 보였다. 30-4O대쯤 됐을까. 그중의 한명이 인상이 매우 낯익었다. 둥근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르는 그러나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
이물질을 떨치려는 듯 그는 황급히 돌아섰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을까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달라붙는 미진한 느낌과 상상력은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운영하던 출판사를 망해먹고 백수가 되어 떠도는 자신의 모습이 꼭 패잔병처럼 보였다.
갈수록 미래가 두렵고 무력감에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직장을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말로만 듣던 무력감 공황장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정말이지 이런 내 모습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는 십자가 탑 앞에서 혼자 말했다. 갑자기 십 수 년 전 떠나버린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태수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로 이별의 말을 대신했었다. 그건 곧 태수의 경제능력에 의문부호를 단 것과 같았다. 허망한 꿈만 꾸는 남자를 믿고 살기에 그녀는 순수하지도 착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태수의 지금 모습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때 떠나보내길 잘한 거야.
만일 처자까지 달렸다면 훨씬 더 비참했을지도 몰라.
그는 스스로 위안하며 호텔 쪽을 향해 힘없이 걸어갔다. 여당과 야당 당사를 지나 9호선 전철역에 이를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태수씨 태수씨.”
몸이 저절로 뒤로 홱 젖혀졌다. 손에 전단지를 들고 뛰어오는 여자는 분명 그녀였다.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게 얼마만이야? 경혜 맞지?”
“네.”
아!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교회 앞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던 그 일행이 틀림없었다. 좀 전의 그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들어맞으면서 그는 난감했다. 햇수를 헤아려 보니 15년 만이다. 그들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지켜봤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뭘하고 지내지?”
“저야 뭐, 그러는 태수씨는요?”
순간 그는 부아가 나려고 했다. 패잔병의 그림자 모습을 그녀가 간파한 것일까? 아니 자격지심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여유로운 모습에 스스로 주눅 들어서.
“아까 교회 앞을 지날 때 혹시나 했는데 역시 경혜였군, 거기서 뭐한 거야? 뭔가 한참 나누어 주던 것 같던데.”
“네 전도지요.”
“그럼 그 교회 신자였어?”
“아뇨.”
사람들이 지나가다 말고 그녀와 태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은 태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속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혜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커피숍이 있는데 그리로 가서 이야기해요.”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옛날과 똑같았다. 잘록한 허리 치렁한 머릿결. 태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아우르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흔한 드라마 대사처럼 아이가 몇이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울분이 속에서 솟았다. 불길 같은 질투? 그런 건지도 몰랐다.
난 여적 싱글인데……….
그는 마치 자신이 싱글인 이유가 그녀에게 있기라도 한 듯 피해의식과 분한 감정이 일었다. 근처의 유명하다는 커피숍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느닷없이 물었다.
“하시는 사업은 잘 되세요?”
그녀가 뜬금없이 사업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당장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출판사를 인수한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스마트폰 때문에 출판시장이 어렵다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태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이 심하게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속에서 분노와 열패감이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그런데 이쪽엔 웬일이야? 저 교회 교인도 아니라면서?” “저 교회 나가는 건 아니고 남편이 지방에서 목회하는데 오늘 일이 있어 왔다가 전도행렬에 참가하게 된 거예요.”
“남편이 목회한다면 목사?”
그렇다면 저 여자의 신분은 목사의 부인? 그 말로만 듣던 사모(師母)란 말인가. 상상이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다. 너무 안 어울리는 호칭이다.
“저 사실은 제가 저 건물에 있는 목회대학원에 다녀요.”
엉!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누가 경혜가?”
그는 너무도 못 미더워 재차 묻고 또 물었다.
“경혜가? 다른 사람도 아닌 경혜가?”
“네, 저도 작년에 신학교 졸업하고 신대원으로 진학했어요.”
“전혀 안 어울리는군.”
그는 기어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누구보다 이해타산에 밝고 죽어도 손해 볼 줄 모르는 그녀가 목회자라니 말도 안 될 소리였다. 적어도 태수가 보는 견해는 그러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 구원론과 신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 이렇게 만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닌 신의 섭리가 틀림없다며 흡사 길 잃은 어린 양 취급을 하며 구원론에 대해 계속 강조했다.
아마도 그녀는 태수의 표정과 차림새에서 그의 파산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영적 힘과 위로를 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태수는 순간 무너지는 자존심의 추락과 함께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의 아직도 과거의 두려움 속에 헤매고 있는데 그녀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몽롱한 환상에 빠졌다. 세상에 아무리 천지가 개벽을 하고 개과천선을 해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닌 경혜가 저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전혀 손해 볼 줄 모르고 배려라고는 먼지만큼도 없던 여자가 어떻게 인류의 최대 사랑인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역설(力說)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역설(逆說)이다.
그는 잠시 역설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마트폰을 열어 역설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표현 구조상으로나 상식적으로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말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상징적 표현법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종종 역설을 통해 중요한 진리를 깨우치셨는데 마태복음 5:39- 42. 요한복음 11;25- 26 등에 나와 있다」
“경혜, 지금 나한테 전도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구원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다 말고 당황한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를 전도 대상자로 알고 그러는 건가고?”
“태수씨, 오늘 저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닌 섭리라고 생각해요, 지금 태수씨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능력이 무한하시고 피난처 되신 주님을 만나세요, 사람들은 우리를 다 외면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좋으신 분이랍니다.”
그렇다면 아까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여자는? 그 여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출한 것도 신의 섭리? 하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 아니던가?
“그래. 니 말대로 그렇게 전지전능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면 왜 악의 번성에는 침묵하고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고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지?”
그는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바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그를 주목했다. 순간 태수는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질문이었다. 그는 평소에 품고 있던 신의 섭리에 대해 비난조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에게 책임이라도 있는 것처럼.
“얼마 전 경혜도 인터넷에서 봤을 거야. 시리아 난민촌이었던가. 그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태가 일어나 거에 대해서.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지? 뿐인가 중동 어느 국가에서는 어린 아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일들도 발생하고 있어. 바로 부모들에 의해서. 어린 자녀를 노동자로 팔아먹는가 하면 심지어 어린 딸을 사창가로 팔아넘기는 부모도 있어. 그것이 그 나라의 풍습이라는군, 왜 그런 천인공로 할 사태에 대해서는 신의 간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지? 예나 지금이나 약자는 언제나 피해당사자고 힘 있는 자는 언제나 강성해, 이것도 신의 섭리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요. 악이 잠시 강성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 가서는 심판의 대상이 되어 파멸하잖아요, 모든 걸 다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셨어요, 천사도 악마도 자유의지는 없어요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것은 곧 책임이에요”
“책임이라구?”
“의지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건 자유에요,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죠, 이 생에서 뿐만 아니라 내세에까지 이어져요. 세상은 점점 악으로 치닫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악의 종말은 있어요,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죠. 옛날 중세 때 스파르타는 얼마나 강성한 국가였나요? 그들은 온 국민을 군주의 야욕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어요, 한 마디로 국민은 군주의 명령에 따라 희생되는 인간 병기였어요. 남자들은 7살 때부터 군사훈련에 투입 되면서 오직 인간병기가 되어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어 갔어요. 여자들은 건강한 남아를 생산하기 위해 용맹한 군인과 강제결혼을 해야 했고 비상시에는 그들도 인간병기가 되어 싸우다 죽어야 했어요. 가장 기가 막힌 건 생명경시 사상이 극에 달한 거예요.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생사가 결정 됐어요, 아이를 갖다 버리라고 하면 아이는 울다 죽어갔어요, 먹을 것을 주라고 하면 그땐 사는 거예요. 그러다 7살 때부터 살인적인 군사훈련을 받다가 전장에 투입되면 무조건 승리해야 해요. 전쟁에 패한 장군은 고국으로 돌아와 공개처형 됐어요, 그렇게 용맹한 장군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결국 스파르타는 멸망당하고 말았어요, 악의 종말을 스스로 초래하고 만 것이죠. 인생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져요. 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과도 다르게 나타나는 거죠.”
태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에게 저런 면이 있다니? 전혀 다른 여자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냉혹하리만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던 여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여자의 눈가에 작은 이슬방울 같은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건 연민도 애정도 아닌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말했다.
“옛날에 저 때문에 상처 많이 받으셨죠? 본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순간 그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15년도 더 지난 일을 가지고서. 아직까지 미련이라도 남았단 말인가.
“참회하는 심정으로 살았어요, 내가 참 독했었구나.”
태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남편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그때가 언젠데.”
그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났다. 그녀가 핸드폰을 들자마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았어요, 빨리 갈게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요.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 태수의 마음이 엄청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 그녀는 이미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그것이 태수의 마음을 더 상하게 했다. 찻값을 여자에게 치르게 하다니. 커피숍을 나서자 작렬하는 태양빛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친친 동여매듯이 내리쪼였다.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의 채근이 두려웠던지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는지 아님 만남 자체가 껄끄러웠는지 모르겠다. 태수는 여당 당사 앞을 지나 공원 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산업은행 앞에 회화나무가 큰 그늘막이 되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횡단보도를 건너니 곧바로 여의도 공원이었다.
꽃 향기가 진동을 했다. 각종 나무와 꽃이 화려한 색상으로 어우러져 낙원을 연상케 했다. 양귀비와 작약이 연못 주변으로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수세미와 화초 호박과 박이 주렁주렁 행인들의 손길을 유혹하는 모습도 보였다. 살구나무와 매실, 모과나무와 감나무도 푸른빛을 띠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화려한 색상과 문양으로 버드나무와 함께 색깔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었다. 공원은 하나의 작은 생태계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토끼가 놀란 눈빛으로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가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꼼짝도 않고 화석처럼 앉아 있었다. 진초록과 새하양 노랑과 빨강 주홍 보라색이 향기와 색상을 퍼트리고 있었다.
자연의 기운이 상한 마음을 힐링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굳은 마음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자연의 향취를 그냥 지나치기 싫었던 걸까.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열어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층층 구름이 대형 쇼핑타운 건물 위로 유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이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포에서 느끼던 것과는 색다른 느낌이 여유있게 마음을 리드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CCMM 빌딩이 보였다. 어디선가 꿕꿕 하며 오리 소리가 났다. 진한 갈색 물가에서 유영하는 오리 소리였다. 흰색 오리 두 마리와 갈색 오리 한 마리가 연못을 헤엄치며 계속 소리 지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리들이 쉬는 그물망 같은 곳에 비둘기가 앉으려 하자 내쫓는 소리였다. 한마디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오리들이 갑질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비둘기는 잠시 그물망에 앉았다가 오리들이 다가와 행패를 부리자 금세 날아갔다. 팔뚝만한 잉어가 연못 안을 휘저으면서 잠시 포문이 일었다.
한쪽에서 왁자하니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컵라면에 나무 젓가락을 끼어 놓은 채 소줏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얼핏 봐도 노숙자가 틀림없었다. 그들은 30도가 넘는 초여름 날씨에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소주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다 지나는 여자를 보고는 주먹을 쳐들어 보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야이! 씨펄 것들아
그 뒤에 나오는 욕설은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들이었다. 세상을 향한 원한 섞인 분노는 그들의 영혼을 갈취하고 지옥 끝을 달리고 있었다. 분노는 항상 자신과 세상을 향해 곤두서 있다. 일촉즉발의 위험성을 항상 내포한 채.
노숙자들은 마시던 소주병을 보도 위로 집어 던졌다. 공교롭게도 소주병은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의 발 앞에 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파편이 튀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누군가 그 광경을 보더니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채 2분도 안 됐는데 경비원들이 달려왔다.
경비원들은 다짜고짜로 노숙자들을 끌어냈다.
“공원 내에서 음주가무 고성방가는 금지라는 걸 모르십니까?”
노숙자들은 의외로 순순히 끌려갔다. 여유 있게 손까지 흔들며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바퀴 달린 끌차를 끌면서 여자 노숙인도 따라 갔다. 검은 비닐 봉지를 잔뜩 매단 끌차를 끌면서 여자는 허공을 향해 계속 씨부렁거렸다. 그녀는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었는데 털이 잔뜩 달린 외투로 온몸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태수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다.
마음이 추운 탓이겠지.
노숙자들은 걸어가면서 뭔가 계속 이야기하며 낄낄거렸다.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 뒤를 따라가며 극심한 혼미에 빠졌다. 여자는 뒤뚱뒤뚱 걸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히죽이죽 웃었다.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채로. 보도블록을 걷던 그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십자가 탑이 나타났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자가 검은 비닐봉지를 뒤지더니 신문지를 꺼내 바닥에 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른 비닐 안에서 먹다 만 떡 뭉치와 과자 부스러기를 내놓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여러 손이 들려들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컵라면으로는 배가 안 찼던 모양이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어떤 젊은 여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들에게 호일로 싼 김밥을 건넸다. 모두 네 개였다. 그러자 갑자기 노숙자들의 태도가 정중해졌다.
“감사합니다. 혹시 저희들 때문에 식사 못하시는 거 아닌가요?”
여자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계단을 뛰어 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숙자들은 젓가락도 없이 맨손으로 김밥을 집어먹더니 모두 바닥에 벌렁 누웠다. 십자가를 가리키며 뭔가 한참 이야기하더니 그대로 코를 골며 잠에 빠져 들었다. 태양은 이제 그들 뒤로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여자 노숙인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고통에 찬 신음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얼굴과 다리 부근에 시퍼런 멍자국이 가득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처참한 지경이었다. 그것을 보는 태수의 마음도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수돗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손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씻고 있었다. 손톱 밑과 손목은 물론 팔뚝까지 싹싹 비비고 닦더니 또다시 비누를 묻히고는 계속 닦았다. 주위에 비누거품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지나던 행인들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벌써 한시간째 저러고 있어요, 한강물 오염의 주범이라니까요, 매일 수돗가에서 저래요.”
자세히 보니 여자의 손등은 뻘겋게 부어올라 나무 등걸 같았다. 여자의 손씻기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비누가 다 없어져야만 끝날 모양이었다. 이윽고 비누가 거의 다 닳아 없어질 무렵 여자의 손씻기가 끝났다.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는데 가운데 손가락 마디에서 피가 흘렀다.
그것을 보는 순간 태수의 마음속에도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여자의 인상을 확인하는 순간 철렁 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로 마포대교에서 자살시도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문득 신발을 보니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하긴 좀 전에 한강 속으로 신발을 빠뜨렸으니.
여자는 아마도 경찰에 붙들려 가는 척하다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손을 씻는 걸까? 그것도 손에 피가 나도록. 여자는 핸드폰을 바지 속에 구겨 넣더니 호텔이 보이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경쾌하면서도 마음속에 안정감이 흐르는 음률은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태수는 음악이 들리는 쪽으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갔다. 발걸음이 지하도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다시 계단을 올라섰고 빛줄기가 쏟아지는 광장 같은 곳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곳에는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 외에 많은 음성들이 있었다.
조금 전에 듣던 음률과 함께 물소리 같기도 하고 천둥 소리 같기도 한 신의 음성이었다. 아! 그건 바로 마음의 소원과 함께 신비한 힘과 평안이었다. 사람이 줄 수 없는 평안, 그건 바로 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방금 전에 경혜가 힘주어 말했던 신의 역설(逆說) 바로 그것이었다.
신(神)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경혜가 주장하는 구원론이자 신앙적 원리 역설(逆說)이었다. 인생의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변치 않는 사랑의 힘을 공급해 주는 신적 능력, 그 신적 능력이 따스한 음률과 함께 마음속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나서는 순간 그건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그땐 딴 세상 속에 있다 나온 것 같았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뭔가 잔뜩 속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태수는 온몸이 탈진된 상태로 마포대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수많은 빛을 보았고 경혜의 얼굴도 잠시 보이다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습관처럼 마포 일대를 배회하다 또다시 마포대교를 건넜다. 그 옛날 세우젓 장사가 배를 대던 모습을 상상하며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바람이 갈기처럼 그의 온몸과 마음을 휘감았다. 거대한 폭풍에 당장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는 자살한 원혼들의 신음 같았다.
다리를 건너자 공원이 나타났고 거대한 쇼핑타운과 함께 산책로가 보였다. 차량과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계속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발길 닿는 데로 공원길을 산책하다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십자가 탑 앞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수많은 빛이 물결처럼 밀려 들어왔다.
빛은 마치 썰물과 밀물 같았다. 마음속에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 나가는…….
그것이 되풀이 되면서 태수의 마음은 힘겨루기 장(場)이 되었다. 빛과 어둠, 약함과 강함이 동시에 마음속을 휘몰아치면서 갈등은 극대화 되었다. 그러더니 어느날인가부터 의지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경혜가 그토록 강조하던 바로 그 신적 의지였다. 악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 위로부터 내리는 강력한 능력 두나미스였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그의 마음속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고 싶은 생각이 솟구치면서 상상력이 영감력이 컴퓨터 자판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색감도 덩달아 살아나 그림도 잘 됐다. 글을 마치면 마포대교를 건너 노숙자들이 가던 십자가 탑 앞으로 갔다. 그때마다 그의 손에는 동화책과 먹거리가 들려져 있었다. 그는 노숙자들이 잘 가는 곳을 골라 책과 먹거리를 놓아두고는 돌아섰다.
책과 먹거리는 순식간에 없어졌고 그는 안위를 느꼈다. 평안은 어느새 그의 마음의 기초가 되었다. 평안은 신에 의해 창조되기도 하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마음을 추스르고 의지를 신적의지에 접속시켜야 한다. 그건 탈출구이자 피난처이자 요새이자 버팀목인 마지막 수단이었다.
노숙자들의 양태도 날마다 달라졌다.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악화 일로를 걷다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거리를 찾아 정상궤도로 접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극소수였다. 무관심과 외면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핸드폰은 꼭 손에 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태수의 눈에는 누군가의 관심을 간절히 바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십자가 탑이 보이는 건물 안에는 와이파이가 설치돼 있었는데 태수도 꼭 그곳을 이용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순간이 있었다.
그에게 출판사를 인계하고 떠났던 친구가 강남에서 큰 출판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당장 카톡을 날렸다. 생각 같아서는 친구에게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 사실 친구 탓도 아니었지만. 아! 아직도 그의 의식 속에는 피해망상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너 지금 뭐하고 지내냐?
친구는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사업 이야기 대신 당장 안부부터 물은 것이다.
백수로 그냥 저냥 지낸다 왜?
그는 카톡을 날리며 속으로 웃었다. 망할 자식. 내 처지를 알고 있으면서 뭘하냐니? 누구놀리냐?
그렇다면 우리 출판사에 와서 일해라. 마침 편집장 자리가 비었다.
그는 당장 카톡을 날렸다.
싫다.
왜?
이제 출판사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아동도서 만드는 일이야. 니가 그 방면에 적임자라고 소문났던데.
그는 순간 마음에 힘이 났다.
누가?
그럼 너는 내가 알아보지도 않고 편집장 자리를 제의할 줄 알았냐? 나도 오너야 알겠냐?
그래? 그럼 한번 생각해 보지 뭐.
시간 없다. 배짱 튀기지 말고 빨리 결정해 다른 사람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마지막 멘트에 그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친구를 오너로 모시는 것도 껄끄러운데 채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근래에 찾아가기로 약속을 정하고는 카톡을 끝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여의도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공원 산책은 그에게 중요한 일과처럼 변해 있었다.
취업을 생각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로 다가오니 약간 얼떨떨 했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만큼 백수로 지냈던 시간은 어둠 그 자체였다. 언젠가 노숙인들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났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라고.
그 말을 노숙인들로부터 듣다니 아이러니였다.
그는 취업이 결정 되면서 거처를 개봉동으로 옮겼다. 마침 그곳에 전셋집이 싼 가격대가 있어서였다. 1호선 국철을 타고 개봉동을 갈 때면 창밖 풍경이 보기 좋았다. 땅속으로만 다니는 지하철보다 싱그러운 자연을 사시사철 볼 수 있고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인공의 색채와 공해덩어리인 강남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웠다.
동화작가의 본연으로 돌아가 업무에 전념하면서 그는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오너인 친구는 주로 영업과 마켓팅 쪽에 신경 쓰느라 그에게는 무관심하다시피 했다. 친구는 명문대 출신인 자신의 이력을 이용해 영업에는 천부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그토록 외치던 동화는 태수에게 모두 일임한 채로.
태수는 일에 의욕을 느끼다가도 때때로 매너리즘에 빠져들곤 했다. 창조적인 일이면서 생산적인 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뜬 구름 잡는 기분으로 강남의 분위기 속에 무르익을 무렵 그는 출근 길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국내 최고 굴지의 재벌 그룹에 근무하다 직업병으로 사망한 젊은 영혼들의 사진이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그들은 모두 20-40대 안팎으로 모두 인물도 반듯하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 영혼들이었다. 사인(死因)은 혈액암과 뇌졸중 기타 암이었다. 작업 도중 방사선과 비소에 노출된 채 암에 그대로 방치된 것이었다. 그들의 눈물의 호소가 강남역 부근에 흐르고 있었다.
젊은 영혼들의 절규가 소리없이 가슴을 울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앞을 지나 출근 길과 과 퇴근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갔다. 태수는 퇴근 길에 길거리를 지나다 몇 년 전엔가 불길같이 번졌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었다.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가사에 그도 얼마나 환호했던가.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잔에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나는 사나이
오빤 강남스타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노래 가사를 따라하며 몸을 흔들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었다. 자유의지가 실종되면서 마음속에 어둠과 빛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술집 유리창에 써진 글귀가 보였다.
'오늘 밤 당신의 일탈을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식당 앞을 지나는데 창 너머로 시(詩)가 보였다. 콩나물이란 시였다.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콩나물이 그렇다.
대개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키가
크는 것과 달리 발이 뻗으며 키가 큰다.
하늘을 넘보지 않고 할일을 다 하는 셈이다.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법을 깨친 수도승처럼
담담하고 단호하게 발을 뻗는다.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무슨 의미일까?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했다.
세상은 언제나 명암이 엇갈리는 중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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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이 뻗으며 키가 큰다
겸손한 콩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