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LvhjQv2Wno
<예레미야애가 4:19-26>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교육 TV인 EBS에서 ‘극한직업’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제 기억으로 몇 년 전에 인도, 파키스탄의 험준한 고산지대와 남미 안데스 산맥을 운행하는 트럭 운전사들에 대해 방영했었지요. 차 한 대가 간신히 운행될 수 있는 좁은 산길 완전 비포장 도로에서 핸들을 조금만 잘못 돌려도 수백미터 낭떠러지로 추락해 버리고, 비오는 날이나 봄철에 언 땅이 녹아서 땅이 질퍽거릴 때에는 눈길보다도 더 미끄럽고, 특히 바퀴가 진흙에 빠지면 고립된 지역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 지역의 트럭운전사들은 매일 목숨을 내놓고 운행하는 셈인 거죠.
지금도 기억나는 인터뷰가 있는데 그 사람은 도시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그 위험지역에서 트럭을 운전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무섭고 진이 빠져서 당장 그만두고 싶었는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맛볼 수 없었던 중독성이 있는 기쁨과 보람이 있다는 겁니다. 운전할 때에는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과 공포가 있지만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다가오는 안도감과,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극복했다는 뿌듯함과, 그리고 무엇보다 고립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소중한 물건을 전해 주는 보람이 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하더군요. 다른 일을 했을 때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몸만 피곤했고, 그날 벌어드린 수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지만 지금은 몸은 더 피곤해도, 그리고 수입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큰 보람과 긍지와 뿌듯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험하고 힘든 산길 운전을 계속하겠다고 하더군요. 여러 성도님들은 이 트럭 운전사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십니까? 아니면 뭐하러 세상을 저렇게 힘들고 위험하게 사나 하면서 어리석게 느껴지십니까?
빌립보서 2:6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시고, 그래서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이셨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처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 영화로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비천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태어나실 때에 짐승들의 처소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생애를 화려한 대도시가 아니라 갈릴리라는 변방 지역에서 주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현실의 삶에 찌들어 있는 자들과 함께 지내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얼마든지 편하고 실속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여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마치 극한직업 같은 길을 택하셨던 거죠.
왜 이런 극한직업 같은 길을 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힘겹고 무섭고 위험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살아내어야 할 의미있고 소중하고 보람되고 뿌듯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즉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 덕분에 세상을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하고, 내 뜻대로 쉽게 살려는 신앙이기보다는 어떤 상황이 주어졌든, 비록 불행하게도 힘겹고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이더라도, 그 때문에 이번 생애는 망했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우리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내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삶을 끝까지 성실히 살아가려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애가라는 성경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그의 조국인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망해 버렸지요. 예루살렘 성이 초토화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적 신앙적인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면서 온 사방이 폐허가 되어 버렸고, 그 폐허가 되어버린 현실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절망과 아픔 속에서 부른 슬픔의 노래, 눈물의 노래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19절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현실을 말하고 있지요.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자신의 현실을 고초와 재난이라고 말하는데 얼마나 힘겹고 쓰디쓴 현실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쑥과 담즙이라고 비유합니다. 이런 쑥과 담즙 같은 고초와 재난 앞에서 예레미야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20절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되오나’ 쑥과 담즙 같은 고초와 재난이 닥치면 당연히 처음에는 낙심이 될 수 밖에 없지요. 아무리 믿음이 좋고 훌륭해도 시련과 재난 앞에서는 낙심이 먼저 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이 낙심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지요. 극복하지 못해서 낙심이 나를 지배해 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러다가 삶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기까지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낙심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독한 술을 곤드레만드레 되도록 퍼마시면 낙심이 극복될까요? 온갖 소리를 다 질러대면서 집안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다 때려부수면 낙심이 사라지고 속이 시원해 질까요? 물론 사소한 작은 낙심들은 마음을 수련하든, 잠시 일상을 떠나 작은 일탈을 해보면서 스스로 극복하겠지만, 살다보면 이번 생애는 망했다는 절망감이 지배할 정도로 도저히 내 힘과 능력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낙심의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초토화 되도록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성과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 앞에서 이런 낙심을 겪고 있지요.
지금 이 시대에도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백성들은 멈추지 않는 전쟁의 포화로 인해 대부분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굶주림과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이 시대의 최악의 낙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걸 투자했던 사업이 망하고, 평생 직장에서 쫓겨나고,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중병에 걸렸거나, 정상회복이 불가능한 사고나 재해를 만나 내 몸도 마음도 무너졌거나, 누군가에게 심한 폭행과 배신과 성폭력과 모욕과 너무나 모순된 억울한 일들이 내게 한꺼번에 몰아닥칠 때 우리는 심한 낙심을 경험할 수 밖에 없지요. 무엇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현실 앞에 실제로 섰을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낙심과 두려움에 빠질 겁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도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뭔가 다르지요. 바로 다음 절인 21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지금 초토화 되어서 낙심하게 된 현실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거죠.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것은 지금의 이 초토화된 현실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 초토화 된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유산으로 받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걸 다 망해먹고 돼지우리에서 사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 아들은 자기의 망한 현실을 마음에 담았지요.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겠구나.’ 자기의 절망적인 현실을 인식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렀다면 그 상황을 헤어나올 수 없지요. 그는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아버지를 떠올렸고 그 아버지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갈 의지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거죠.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탕자가 몸으로는 떠나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기억과 흔적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그 최악의 낙심과 좌절의 상황에서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었던 거죠.
예레미야도 낙심했지만 그 초토화 된 현실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마음에 담고 생각해보니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당연히 아무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이제 예레미야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믿고 의지해 왔고 순종해 왔던 하나님 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21절 후반부에 보면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그리고 23절 후반부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특히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초토화 된 현실을 극복할 소망과 희망을 보게 되었던 거죠.
탕자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아버지를 통한 소생의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초토화 되어 버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고 언제나 성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24절 후반부에서는 ‘내가 그를, 즉 여호와를 바라리라.’ 25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26절에서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에서만 그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의 손길,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진실하게 바라며 기다리면서 내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길을 성실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현실적인 구원인 거죠. 번영과 성공과 형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반대로 힘겹고 낙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인내와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것,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든지 교만하지 않게 하고, 또는 불평하지 않게 하고, 세상이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생명과 삶을 완성해 가시는 구원의 섭리를 펼쳐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