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혹한이 몰아닥친 겨울 아침에 보았다
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가
출입문 앞에 내어놓은 고무함지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미꾸라지들
결빙이 되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죽은 모습을
꼬리지느러미를 흔들고 허리를 구부리며
길게 수염이 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채
기역자로 혹은 이응자로 문자를 이루어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
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
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
시인들을
도요새
옥구염전에 눈 내린다
수차가 함부로 버려진 소금밭에
눈발이 빗금을 치고 지나가다가
무너진 소금창고 지붕 위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나는 일제히 편대비행을 하며
허공 높이 무수히 발자국을 찍어대다가
외로이 소금밭에 앉아 울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내 눈물로 소금을 만들지 않는다
염부들은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가
화투나 치고 소주나 마시고
길가의 칠면초만 저 혼자 붉다
만조 때 갯벌 가득 일몰이 차 오르면
쫑쫑 찡찡 쉿 소리치며
일제히 염전으로 날아오르던 나의 사랑은
언제 다시 소금으로 빛날 것인가
나는 다시 허공에 무수히 발자국을 찍는다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가물거린다
칠산 앞바다도 수평선이 사라졌다
염전에 물을 대던 경운기도 녹슨 잠이 들고
옥구염전에 눈은 그치지 않는데
나는 몇마리 장다리물떼새와 함께
외로운 소금밭을 서성거린다
나의 발자국이 소금이 될 때따지
나의 눈물이 소금이 될 때까지
유실
누가 나를 여기에다 버려놓았나
폭탄주를 마시고 친구들과 망년회를 끝내고
흐린 그믐달을 쳐다보며
집에 곧 간다고 전화를 하고
지하철을 탓을 뿐인데
누가 나를 낡은 쇼핑백처럼
지하철 유실물 센터 구석에다 던져놓았나
가끔 가방 속에 꾸깃꾸깃 나를 집어넣고
출근할 때가 있었으나
가방 속에서 몇장의 출판설정계약서와 대출거래약정서와
한권의 시집과 함께
뒤적이며 잠을 자다가
내려야 할 수서역을 영원히 지나칠 때가 있었으나
오늘은 누가 나를 늙은 가죽가방처럼
지하철 유실물센터 구석에다 내던져놓았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잃어버렸다고 신고하지 않는다
유실물 안내게시판에 담당여직원이
휴대폰과 전자수첩과 노트북과
운전면허증이 든 손지갑과
김치가 든 비닐봉지와 함께
나를 보관중이라고 몇번이나 안내를 해도
제기랄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
밤은 깊어가고 배는 고픈데
망년회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지옥은 여기에서 먼가
가시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어린 낙타
사막에서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지 말고
어딘가에 고여 있는
작은 우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야
사막을 움직일 수 있다고
모래도 한때는 별이었다고
사랑하면 더 많은 별이 보인다고
살아가노라면 그래도
착한 끝은 있다고
러시아제 낡은 지프차를 타고
고비사막의 길 없는 길을 달릴 때
먼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등에 지고
홀로 걸어가던
어린 낙타 한마리
연꽃 구경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12월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각장애인이
종각역에 내려
흰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분 곁에 서서
팥죽 한그릇을 얻어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음에 집이 없으면
저승도 가지 못하지
저승에 간 사람들은 다들
마음에 집이 있었던 사람들이야
마음에 집이 없으면
사랑하는 애인도 데려다 재울 수 없지
잠잘 데 없어 떠도는 사람
잠 한번 재워주지 못한 죄
그 대죄를 결코 면할 수 없지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당도 없고 꽃밭도 없지
꽃밭이 없으니 마음속에
그 언제 무슨 꽃이 피었겠니
마음에 집이 없으면
풍경소리도 들을 수 없지
마음에 세운 절 하나 없어
아무도 모시지도 못하고
아무도 찾아와 쉬지도 못하고
마음에 집이 없으면
결국 집에 가지 못하지
집에 못 가면
저승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도
뵙지 못하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참회
나 이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 한그루 심은 적 없으니
죽어 새가 되어도
나뭇가지에 앉아 쉴 수 없으리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에 물 한번 준 적 없으니
죽어 흙이 되어도
나무 뿌리에 가닿아 잠들지 못하리
나 어쩌면
나무 한그루 심지 않고 늙은 죄가 너무 커
죽어도 죽지 못하리
산수유 붉은 열매 하나 쪼아먹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초승달에 한번 앉아보지 못하고
발 없는 새가 되어
이 세상 그 어디든 앉지 못하리
사랑에게
나의 눈물에는 왜 독이 들어 있는가
봄이 오면 봄비가 고여 있고
겨울이 오면 눈 녹은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줄 알았더니
왜 나의 눈물에는 푸른 독이 들어 있는가
마음에 품는 것 것마다
다 독이 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사랑이여
나는 이제 나의 눈물에 독이 없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의 눈물이
당신의 눈물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독극물이 든 검은 가방을 들고
가로등 불빛에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더이상 당신 집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만 가덕 독을 버리는 일
버리고 나서 또 버리는 일
눈물을 흘리며
해독의 시간을 맞이하는 일
물 위를 걸으며
물 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한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무릎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무릎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ㅡ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첫댓글 감성의 물결이 넘실대는
시어들...
송년회를 마치고가는 이시간에는
유실이라는 싯구에 슬그머니
연약한 내모습을 기대어 위로를
받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행복하세요^^
시인의 수 많은 시들 어느하난들 다가 오지 않는게 없습니다.
연꽃의 계절은 다가오는데 편히 가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