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선도국가였던 필리핀(Philippines)
필리핀(Philippines)은 적도의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필리핀해(海), 셀레베스해, 남중국해의 경계를 이루며 타이완(臺灣)섬과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국명(國名)은 16세기 중엽 파견된 에스파냐 탐험가 빌라로보스(Villalobos)가 당시의 에스파냐 황태자인 필립의 이름을 따서 'Las Islas Filipinas'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필리핀은 수 많은 섬들로 이루어 진 도서국가이다.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섬의 대부분이 암초이거나 산호초이고, 사람이 정착하고 있는 섬은 880개 정도이다. 이중에 루손섬(島)과 민다나오섬(島)이 가장 크고, 그 밖에 양대 섬 사이에 있는 비사얀 제도의 7개 섬(사마르, 파나이, 레이테, 세부, 보홀, 마스바테, 네그로스) 및 민도로, 팔라완 섬이 비교적 크다. 이들 9개 섬을 합하면 국토 면적의 95%를 차지한다.
다수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역간에 교류가 원할히게 이루어 지지 않아 지역간에 언어, 문화 등의 차이가 크다.
필리핀은 화산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환태평양조산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각의 불안정하여 화산과 지진이 잦다. 필리핀의 최고봉인 아포산(2,954m)을 비롯하여 마욘, 탈 등 여러 개의 화산을 지니고 있다. 필리핀 해구(海溝)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연(海淵)의 하나인 케이프존슨과 엠덴 해연이 있다.
지도상에 파랑색 선이 판(plate)의 경계선
지도상에 빨강색 점은 화산, 녹회색 점은 지진 발생지점이다.
미욘화산
피나투보화산
http://blog.daum.net/petercskim/7870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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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열대기후의 나라이다. 북위 4∼21도의 열대권에 위치하여 연평균기온이 27℃이고, 기온의 교차가 적다. 연평균강수량은 2,500mm 이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다.
또 태풍의 피해가 크다. 태풍은 동쪽의 서태평양상에서 주로 7-11월에 발생하여 남동에서 서북방향으로 진행되는데 대체로 중북부에 해당되는 루존섬의 카가얀(Cagayan)평야와 그 북쪽지역에 풍수해를 입힌다. 그러나 남쪽의 비샤얀제도나 민다나오섬은 태풍의 통과권에서 제외되어 있다. 대체로 루손섬을 중심으로 북부지역은 열대몬순기후에 속하고, 민다나오섬을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열대우림기후에 속한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3/11/10/0601060100AKR20131110036900084.HTML
필리핀은 역사적으로 오랜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 온 나라로 식민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나라의 역사의 시작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만한 기록은 없으나, 스페인을 비롯한 대외세력이 필리핀에 침투하기 이전의 역사는 흔히 ‘고대문명’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본적 통치 형태는 ‘바랑가이(barangay)'라는 족장 지배 체제였다. 바랑가이는 대개 30~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닐라(Manila), 세부(Cebu) 등과 같은 지역에서는 2,000명 이상이 포함된 바랑가이도 존재했다고 한다. 바랑가이에는 독자적 지배자인 다투(datu)가 존재했다. 다투는 최고의 행정권자이자 입법가, 재판관, 군사지배자로서 대부분의 권한을 독식했으나 마을의 중대사를 결정할 일이 발생하면 마을 원로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고대시기 필리핀에는 무역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참파(Champa)와 교류하였으며 송(宋)과 명(明)의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정화(鄭和)의 원정당시 명나라는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3차례에 걸쳐 필리핀을 정벌하기도 했다. 남부 민다나오(Mindanao) 지역은 14세기부터 이슬람 왕국이 성립되어 이 지역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필리핀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1521년 필리핀을 발견했다. 마젤란은 세부 지역의 막딴(Mactan) 촌장인 라푸라푸(Lapu-Lapu)와 벌인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마젤란 사후 스페인은 필리핀이 무역 기지로서 최적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로 300년 이상 지배하에 있었다.
19세기에 들어 필리핀의 결집된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을 외부로 표출하였는데 이는 스페인의 대 식민지 정책이 유화적으로 변화한 틈을 탄 것이었다.
1898년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였다. 새로운 식민지배 하 필리핀의 정치 및 행정체계는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전국에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세웠다. 이는 스페인이 종교를 통해 꾀하려했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교육을 장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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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일본군은 예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몇 시간 후 필리핀 곳곳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1월 일본군이 마닐라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1945년까지 필리핀은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워 백인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해야한다는 명분으로 필리핀 통치를 정당화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 7월 4일 필리핀은 4세기 간에 걸친 외세의 시달림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 오랜 식민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미국과 스페인 양국의 영향이 남아 있고, 정치, 군사, 경제적인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필리핀은 과거에 경제적으로 아시아의 선진국이었으나 빈국으로 전락한 나라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국가로 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노동인구의 4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며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업이 성행한다. 대표적인 작물로는 쌀, 옥수수, 바나나, 설탕과 사탕수수, 카사바 등이 있으며 마(麻) 생산은 세계 1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계층이 부(富)를 독식하는 사회 구조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빈곤과 채무에 시달리고 있다. 독립이후
필리핀은 1970년대까지 아시아의 경제를 이끄는 경제 선도국가이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창설한 주도한 국가였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하에서 정경유착이 심화되면서 경제구조가 왜곡화 되었고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이 수립되어 1970년대부터 경제가 황폐화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아키노 대통령이 국영 및 정부 통제 기업을 사유화하는 경제 자유화 정책 실시, 시장 논리에 입각한 세제 개편과 무역과 투자제도를 자율화하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빈곤을 퇴치하고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개혁 등을 단행했으나 계속되는 외채증가와 기업 분야의 부채로 정부의 재정적자
심화, 개혁에 반대하는 7차례의 군부 쿠데타, 1990년대에 극심한 가뭄과 화산폭발 등 자연재해로 인해 경제가 불안해
졌다. 1990년대에
라모스 대통령이 경제개발 6개년 계획(1993~1998)을 시행하였으나 태국의 재정 위기, 산업 전반에 걸친 국내 불경기, 엘니뇨
현상, 인도네시아 연무, 가뭄 등 각종 자연재해로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려운
국내경제로 인해 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이 해외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 이민 근로자의 주요 출신국으로, 세계 190개국에 필리핀 국민들이
진출하여 이들이 본국으로 송금한 액수가 엄청나다.
플랜테이션 농장
필리핀은 민족과 종교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기층 문화에 에스파냐와 미국 문화가 혼합된 복합사회를 이룬다.
필리핀 국민을 일컷는 '필리피노(Fhilippino)'는 말레이 인종에 속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결과 약간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필리피노는 전 국민의 80%를 차지하며 그외 중국계 10%, 인도계 5%, 유럽계 5% 등이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다시 분파되어 현재 43개 종족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16세기부터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통치로 혼혈인종이 많다.
종교는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카톨릭이, 미국의 통치시대에 개신교가 보급되어 가톨릭교(83%)가 주를 이루고 개신교(9%), 이슬람교(5%) 기타 종교(1%) 등을 신봉하고 있다. 대체로 농촌에는 주로 카톨릭을 신봉하고 도시에는 개신교를 신봉한다.
장기간 고립된 정착 생활이 계속된 결과 여러 부족 사이에 100여 개의 언어와 방언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언어는 타갈로그, 일로코, 팜팡고, 비콜, 세부아노, 일리가이논(일롱고), 와라이와라이(사마르-레이테), 마긴다나오, 팡가시난 등 말라야-폴리네시아어파(語派)의 9자매어(姉妹語)이다. 1946년 독립 이후 타갈로그어(語)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語)가 국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필리핀의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복합사회적 특성이 민족, 종교간에 갈등을 유발하여 오랜동안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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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문화복합. 문화적으로 스페인, 미국, 중국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필리핀 여행시기는 고온습윤하고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여름을 피하는 것이 좋다.
천혜의 좋은 휴양지가 많고, 오랜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온 결과 그역사적 흔적도 좋은 관광자원이 된다.
열대기후지역이기 때문에 열대성 각종 질병 감염에 유의해야하고, 화산, 지진, 태풍 등의 자연재해에도 주위를 요한다. 더구나 내전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국가이기 때문에 여행할 때 많은 주의가 필수적이다. 특히 최근 현금을 많이 소지한다는 소문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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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Manila)는 루손섬의 최대의 도시이며 ‘동양의 진주’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도시이다. 마닐라만의 삼각주에 위치한 무역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이며, 현재 동남아시아의 교통의 중심지이다.
1571년 에스파냐 총독 레가스피가 점령한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 지배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 후 19세기 중엽까지 마닐라는 에스파냐의 대(對)아시아무역 거점이 되고 극동에서의 가톨릭 권력의 중추가 되기도 하였다. 당초에는 파시그강 하구 남안(南岸)에 건설된 성곽도시 인트라무로스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필리핀인 ·중국인이 취락을 형성했던 비교적 작은 도시로, 성벽 안에 총독부·가톨릭 각파 교단본부·교회·상관(商館) 등이 있고, 에스파냐인은 대개 그 안에 거주하였다.
1834년 마닐라항이 개항된 뒤 점차 국제무역이 성해지고, 시가지도 확장되어 19세기 말에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결과 미국령이 된 뒤,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의 거점으로서 항만시설의 근대화, 도시계획의 실시, 전기·가스·수도 등의 시설이 이루어져, 식민지 특유의 단일 거대도시로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되어 시가지의 80%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복구되었다.
필리핀이 독립한 뒤 1948년 북쪽에 인접한 케손시티로 수도가 옮겨졌으나, 1975년 11월 마닐라·케손 등 수도권 4개 시와 인접지역을 통합한 거대도시 마닐라(Metropolitan Manila)가 발족하여 다시 수도가 되었다.
마닐라는 필리핀제도 각지의 수출용 농작물, 즉 코코넛, 마닐라삼, 사탕수수, 잎담배 등을 정제, 가공한 뒤 수출하는 가공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코코야자유 제조, 제당, 정미(精米) 등을 비롯하여 면직물, 양조, 고무, 레더, 담배, 페인트 등 제조공업이 성하여 필리핀 공업생산의 53%를 차지한다. 근래 공업화 추진정책에 따라 동부 교외에 새로운 공업지대가 건설되고 있다.
마닐라대성당(Manila Cathedral). 마닐라의 인트라무노스(성벽도시) 내 로마광장에 있는 대주교좌성당이다. 가톨릭 포교의 중심지로서 에스파냐 식민지배시대인 1581년에 처음 건축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처음에는 니파(nipa) 야자나무와 대나무로 지었는데 태풍과 화재로 부서져, 1592년 석재로 다시 지었으나 1600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세번째 건물은 1614년에 완공한 것으로 3개의 본당과 7개의 예배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645년 마닐라를 휩쓴 지진으로 무너졌다. 이후에도 지진, 전쟁 등으로 파괴된 것을 연이어 재건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공격으로 완전히 부서진 것을 1945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58년에 완성한 것이다. 필리핀 건축가 페르난도 오캄포(Fernando Ocampo)가 로마네스크-비잔틴양식으로 설계하였고, 바티칸의 원조를 받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특히 필리핀의 종교적 상징주의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대성당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청동문이 유명하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소 바실리카(minor basillica)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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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Cebu)는 필리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로 세부시티(Cebu City)라고도 한다. 스페인시대 초기의 수도로, 필리핀의 여러 도시 중 가장 역사적인 곳이다.
1521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젤란이 처음 도착했을 때 이미 중심 취락을 이루고 있었다. 1565년 레가스피가 이곳을 기지로 필리핀의 식민지화를
진척시키면서 마닐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필리핀 전체를 지배하였다. 중부,
남부 필리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필리핀 제3의 도시이다. 비사얀(Visayan)제도의
중심적인 무역항으로서 코푸라의 수출이 많고 시멘트 공업도 발달되어 있다. 또 상하(常夏)의 해수욕장으로 필리핀 최대의
관광지이다.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항구 바로 옆에 세워진 산 페드로 요새는 1783년에 만들어졌다. 스페인 통치 시절에 건립되어 스페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스페인 통치 말기에는 세부의 독립 운동의 거점이었으며 미국 식민지 시대에는 군막사로,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포로수용소로 쓰여 험난했던 필리핀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석조로 개축되어 규모는 작아졌지만 필리핀의 과거를 모두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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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보앙가(Zamboanga)는 민다나오섬의 서남단 필리핀 잠보앙가 반도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온화한
기후를 띄며 열대 저기압과 태풍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다. 마닐라
다음으로 큰 도시로 코푸라와 마닐라삼의 수출항구로 알려져 있다. 다바오(Dabao)는 민다나오만의 동남단에 위치한 천연의 양항이며 이 섬의
중심도시로서 아바카 농장과 아바카 가공업의 중심지이고 코푸라의 수출이 성하다. 그러나
필리핀의 주변지역이기 때문에 무장세력들의 준동이 자주 있었다. 최근에는 한국인의 피살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으로 주의를 요하는
지역이다. http://blog.daum.net/si21c/1786239 http://blog.daum.net/yoon-yk/15638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