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장사와 넝마주이의 우정
“몇 년 후에 그 사람이 턱 양복을 입고 부인과 함께 나를 찾아와 나한테 넙죽 큰 절을 하는 거야."
엄상익(변호사)
추석 성묫길에 묘지를 관리하는 팔십대 중반의 영감을 만났다. 오십 년 전 내가 고등학교시절 그는 삼십대 청년이었다. 그는 서울 외곽에 임야 오천 평을 사서 묘지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그의 묘지를 산 초창기의 손님이 아니었을까. 산꼭대기의 할아버지 묘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바닷가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봉분들이 산자락을 점령했다.
그곳에 덩그라니 한 채 집을 짓고 살면서 묘지 사업을 하는 그의 집은 죽은 사람들 동네 안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는 일생을 무덤을 파고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에 풀이 나면 그걸 깎아주기도 했다. 죽음 저쪽으로 간 사람들 집을 관리해 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묘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이상한 게 있어 그에게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묘의 관이 있는 자리가 싱크홀 같이 약간 함몰된 것 같아요” “아마 지난번 큰 비에 오십 년을 버티던 관이 이제 썩어서 주저앉아서 그럴 거에요. 제가 제대로 해 놓을게요. 좋은 관을 쓰셨으니까 그게 오십 년이 넘게 버틴 거죠.” 그 시절 삼십대 싱싱하던 청년이 어느새 기 빠진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저씨도 이제 연세가 드셨네요”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요. 이제 내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뒤에 내 묘자리를 잡아 놨어요. 화장을 해서 뼈가 되어 들어가려고 해요. 엄 변호사도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로 오지 그래요?” 그는 죽음을 마치 이웃집으로 가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평생 죽은 사람을 위해 일하셨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 하신 건 없어요?” 내가 지나치는 말투로 물었다. “하나 있어요. 제가 오십여년 전 이 묘지 장사를 하기 전에는 청량리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했어요. 그때 박스를 얻으려고 매일 우리 가게에 왔던 내 또래의 넝마주이가 있었어요. 그 사람 특이한 건 항상 손에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는 거야. 그때는 아무리 일해도 밥 먹기가 힘들 때였어요.
내가 시장 안 국밥집에 말해서 그 사람 이년 정도 밥을 먹여줬지. 그런데 그 후에 그가 말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식이 끊겼지.” “그래서요?”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넝마주이도 특이했다. 또 그에게 이년간 밥을 먹여준 과일가게를 하던 그도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몇 년 후에 그 사람이 턱 양복을 입고 부인과 함께 나를 찾아왔더라구.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북부 검찰청 검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러면서 부인과 함께 나한테 넙죽 큰 절을 하는 거야. 비슷한 나이인데 말이야. 그렇게 찾아와 준 것만 해도 나는 정말 고마웠지.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현찰 오백만 원을 주는 거야. 그때는 그게 작은 돈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걸 받을 수 있나? 오히려 내 돈을 보태서 그가 근무하는 검찰청 관내에 싼 집을 한 채 사줬지. 그 후 다시 소식이 끊겼는데 내가 전해 듣기로는 검사를 그만두고 마산에 내려가서 변호사를 하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넝마주이 청년이 검사가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마부’라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를 도와 마차를 끌던 가난한 집 아들과 아버지가 흰 눈이 하얗게 날리던 날 중앙청 벽에 붙은 고시합격자 명단을 보고 활짝 웃던 모습이었다.
우리 시절은 더러 그런 반전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을 하면서 공부하던 시절 돼지국밥을 공짜로 준 아줌마 얘기도 들었다. 나는 그 넝마주이 청년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구백팔십년 무렵 나는 마산법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옆에 개천이 흐르는 법원 앞 골목에 허름한 개인 법률사무소가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약간 머리가 벗겨진 변호사가 그 사무실의 주인이었다. 소박한 느낌을 주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역 변호사중 최고 수입을 올리는 두 명의 변호사 중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었다. 그의 과거를 사십 년이 지난 후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에게서 들을 줄 몰랐다. 계산을 해 보니까 그 변호사는 팔십대 중반쯤 될 것 같았다. 나이상으로 법률사무소를 폐업하고 집에 있거나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무실 직원에게 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했다. 바로 이런 답이 카톡으로 왔다. ‘경남 창원에 사무실이 검색되고 부고가 올라온 적이 없는 걸로 보아 생존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젊은 과일 장사와 넝마주이 청년의 아름다운 얘기였다. 그러나 노인이 된 변호사는 젊은 시절 책을 들고 다니면서 넝마를 줍고 밥을 얻어먹었다는 건 숨기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 맑고 향기로운 얘기를 들은 날은 마치 강가에 낚시를 들고 나가 큰 물고기를 잡은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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