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인협회 창립회원이신 고 유병근 선생님의 유고 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작가마을)가 발간되었습니다.
◉출판사 서평
한국 수필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수필을 쓰셨던 유병근(2021년 4월 21일 타계) 선생의 유고 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작가마을)가 발간됐다. 이번 유고 수필집은 유병근 선생의 제자들의 글모임인 <드레문학동인회>(회장 김복혜)에서 출판사와 협력하여 선생님의 평소 작품들을 추려 확인을 거쳐 빛을 보게 된 것. 유병근 수필가는 “모든 수필에 상상력이 결여되면 일기잡문이지 수필이 아니다. 한 편의 수필 속에 저자의 사유와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수필이라 할 수 없다.”는 평소의 소신 속에 작품활동을 해오셨다. 그래서 유병근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잘 직조된 한편의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시와 수필은 동격이다.”고 설파하신 것처럼 선생은 시와 수필을 동일 선상의 문학작품으로 여기고 또 그렇게 창작해 오셨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문단에서 수필문학의 비중을 시와 소설 등 타 장르에 뒤처지지 않게 문학적 위상을 한층 높여 놓은 대표적 수필가로 알려져 있다. 또 유병근 선생은 고석규, 조영서, 김규태 시인 등 한국의 내노라하는 시인들과 1950년대 <신작품> 동인으로 활동을 해온 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창의적인 수필작품으로 인해 시단보다는 수필 문단에 그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유병근 선생은 또 중앙(문단 정치)을 멀리하고 진솔한 작품 위주의 활동을 또 온몸으로 실천해온 분이시다. 문학작품은 작품으로 독자에게 보이면 되는 것을 중앙문단에 줄서기 하여 이름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외면했다. 작품 이외에 다른 요소가 끼어드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던 것.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시와 수필을 공부하는 문학친구(유병근 선생님은 제자가 아닌 문학 친구들이라고 표현)들에게도 언제나 작품 위주의 활동을 주지시켜왔다. 선생의 제자인 신서영 수필가는 “구순을 바라보는 스승님 앞에서는 백발이 된 제자도 문학소녀였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시와 수필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나와 조우하면서 문학 외적인 삶과 인생사도 학습했던 것이다.”라고 문학과 인생을 배웠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이번 유고 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는 유병근 수필가의 문학작품만을 담은 것이 아니다. 선생께서 평생 쌓아온 문학인의 올바른 자세를 같이 담아주셨다. 제자들이 스승의 뒷자리를 살뜰히 챙긴다는 것부터가 우리 문단에서 요즘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모두 다 개개인화가 극심한 문단이고 예술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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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약력
유병근 시인이자 수필가는 1932년 8월 5일 경남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187번지에서 출생했다. 1954년 고석규 조영서 손경하 하연승 시인 등과 「신작품」 동인으로 시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0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절차를 마쳤다. 수필집으로는 『협주곡』, 『허명놀이』, 『목재수필』, 『연등기행』, 『춤과 피리』, 『덫을 찾아서』, 『술래의 꿈』, 『유병근 수필기행』, 『꽃이 멀다』, 『아이스댄싱』, 『아으 동동』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沿岸集』, 『遺作展』, 『西神캠프』, 『지난 겨울』, 『사일구 유사』, 『설사당꽃이 떠나고 있다』, 『금정산』, 『돌 속에 꽃이 핀다』, 『곰팡이를 뜯었다』, 『엔지세상』, 『소낙눈』, 『까치똥』, 『통영벅수』, 『어쩌면 한갓지다』, 『어깨에 쌓인 무게는 털지 않는다』, 『꽃도 물빛을 낯가림한다』가 있다. 수상으로는 현대수필문학상, 우봉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최계락문학상, 부산예술상, 부산시 문화상, 부산시인협회상, 올해의 수필가상, 부산원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유병근 선생은 평생 중앙문단의 눈치보기를 외면하고 오로지 문학작품성에만 몰두해온 올곧은 작가이다. 특히 수필을 ‘붓끝의 글’에서 시처럼 상상력의 작품으로 승화시켜 수필문학의 위상을 한국문단에서 공고히 재정립시켰으며 그러한 고집과 선비적 사유의 문학인생을 거닐다 2021년 4월23일(금) 새벽 향년 90세로 영원한 문학의 숲에서 상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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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간사
유고집에 붙이다
신서영(수필가)
둥치 큰 벚나무들이 빚어내는 그늘이 깊다. 그악스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숨을 고른다. 사람들의 발길마저 뜸하다. 눈에 익은 시인들의 시가 적힌 팻말이 드문드문 꽂혀있는 골목에선 발걸음도 레가토다. 문득 호젓한 이 길을 수없이 오갔던 스승님이 간절하게 그립다.
우거진 나무들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길이 느닷없이 아득하다. 불을 환하게 밝힌 빈빈의 통유리창이 눈에 들어온다. 뜰을 차지한 감나무가 창문 가득 농담을 조절하며 수묵화를 그린다. 사방 벽면엔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어 서점 같다. 큰 탁자를 마주하고 스승님은 정갈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숱한 세월이 지났어도 한결같았던 그 시간이 오늘따라 더 그립고 애틋하다. 구순을 바라보는 스승님 앞에서는 백발이 된 제자도 문학소녀였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시와 수필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나와 조우하면서 문학 외적인 삶과 인생사도 학습했던 것이다.
스승님 가신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올여름은 더위가 맹위를 떨친다. 장작불 앞에 앉은 것처럼 열기가 뜨겁다. 피서는 생각지도 못할 때는 방콕이 정답이다. 집안에 쌓여있는 책을 정리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스승의 시집과 수필집을 꺼내 본다. 『싸리꽃 풍경』과 『꽃이 멀다』를 펼치니 행간에서 빙그레 웃고 계신 그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스승님의 문하에 들어가 처음으로 받은 수필집이다. 한두 번 내리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던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소나무의 껍질은 소나무의 공책이다. 바람이 오면 바람을 받아 적고 눈비 몰아치면 눈비를 받아 적었다. 바람에 꼿꼿하게 버티고 선 등줄기, 그 속의 심지를 줄줄이 받아 적었다.”
“잠자리 두 마리 장대 끝에 앉아 있다. 가위바위보처럼 눈을 두리번거린다. 하나는 왼쪽으로 눈 굴린다. 잠자리는 어느새 널따란 보를 가위질하고 있다.”
“통영이란 말속에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있다. 통영이란 말속에는 그림엽서 같은 바다 풍경이 깔려있다.”
언젠가 문학기행 때 분재와 수석을 수집한 곳을 들렸다. 주인장은 나무와 돌의 얼굴을 찾아주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했다. 나무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수석도 형체가 다양해 그 신비로움을 극찬하며 감탄사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그때 스승님은 아무런 문양도 없고, 어느 한쪽 기운데도 없는 그냥 매끈하고 두루뭉술한 큰 돌을 좋은 수석이라 하셨다. 사람이 보살핀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수록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산수경석이나 물형과 문양을 품은 돌은 겉모양만으로도 이목을 끌지만,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읽히는 것이 좋은 돌이라고 나름의 안목을 피력하셨다.
아! 그렇구나. 시시때때로 표정이 변하지 않고 침묵하는 돌이라면 자연 그대로에 있는 것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 바위가 험준한 계곡을 굴러 내려오는 동안 모진 풍상을 다 겪었으리라. 깨지고 마모되어 뭉툭한 돌덩이가 내 앞에 있음에야. 고난과 역경 속에서 무슨 아름다운 문양을 욕심내겠는가. 나도 모르게 선생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렇듯 사물 하나에도 사색과 철학으로 이끌어주셨다. 그래선지 집필하신 저서에는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깃들어있다. 또한 시적인 언어로 조탁한 문체는 기발하고 참신하다. 이러한 교수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함께 한 시간이 두고두고 아쉽고 그리울 뿐이다.
불교에서는 사제 간이 되려면 일만 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십여 년을 매주 스승과 제자로서 마주하고 글공부를 했으니 귀하고 특별한 인연이다. 수업 시간 틈틈이 글을 쓰는 것보다 가정에 충실하고, 문학상에 연연하기보다 누구나 감동하는 글 한 편 남기라고 당부하셨다. 사람의 됨됨이는 물론 자연현상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을 가르치셨다. 말수가 적어 제자들의 수다에도 내색 없이 그냥 통영 벅수 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인생 숙제가 대충 끝난 인생 2막에 이렇게 고졸한 인품을 가진 스승을 만났으니 내 삶도 성공한 삶이 아니던가. 때로는 인생까지 되어주신 우리 스승님!
우리 제자들은 스승님이 만들어주신 큰 그늘에서 모두 작가로 등단했고, 2010년에 (드레문학회)를 결성했다. 벚꽃 흩날리는 하동의 봄, 순천만의 갈대밭, 전국 유명한 곳곳에 문학기행을 다녔다.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마부니 언덕’에 있는 화살표를 꼭 봐야 한다며 청년처럼 앞장서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15년에는 동인지(에스프리 드레)를 창간했으며 올해 9호 동인지가 발간된다.
생전에 책 한 권 분량의 수필을 작가마을 출판사에 보관해두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놀랍고 반가웠다.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유고집을 펴내기로 했다. 어려운 시기에도 선뜻 비용을 찬조해주신 동인들의 깊은 정에 감동할 따름이다. 동인이 아닌데도 스승님과 인연이 닿아 동참해주신 수필가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스승님의 작품을 보관하고 출판해 주신 작가마을 배재경 사장님에게도 감사드린다.
얼마 지나면 골목길의 벚나무도 단풍이 들고, 빈빈의 감나무도 열매가 탐스럽게 익을 것이다. 스승님은 발갛게 익은 감을 감나무의 심장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이 유고집이 스승께서 이 세상에 남기신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머나먼 곳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오신 듯 유고집 행간에서 생생한 언어로 스승님을 다시 뵙게 될 그날이 기다려진다.
붉디붉은 가을이 저만치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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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 인사말
책과 메모지를 끼고 사셨던 아버지
유종훈(고인의 3남, 소방공무원)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어느새 2년이 지났습니다. 저희 가족들에게는 아버님의 존재가 너무나 커 어떤 말로도 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그 빈자리가 늘 허전하고 가슴을 아립니다. 아직까지 집안 곳곳이 아버님의 흔적이기에 그 황망함이 더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희 어머님이 더 하실 테지요. 그래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잘 계시는 어머님이 자식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레문학회>에서 저희 아버님을 기억하고 또 수필작품들을 모아 유고수필집을 펴내신다니 반가움에 앞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만의 아버지가 아님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또 늦었지만 장례식장에서 마음을 다해주신 선생님들께, 특히 <드레문학회> 선생님들께 이 지면에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문학 인생을 늘 곁에서 봐 온 터인지라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아버님이 하시는 일이겠거니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년이 되고 세상을 살면서 문학의 길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아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버님이 지닌 문학의 깊이를 저는 가늠할 수도 없지만 마음으론 ‘우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시다’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집에서도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가족끼리 어딜 가더라도 항상 틈틈이 메모지에 무얼 쓰곤 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중 아버님의 시와 수필로 탄생 되었음을 짐작만 합니다.
저도 한때는 아버지처럼 글을 써볼까? 한 적도 있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아버님을 볼 때 스스로의 엄격함이 대단한 분이셔서 문학을 하려면 먼저 아버님 같은 자세가 되어야 하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말씀 하나, 행동 하나에도 늘 진중하고 바르셔서 저희들은 아버님 앞에서는 언제나 모범생이 되었습니다. 저절로 그리되었습니다. 이리 하라! 저리 하라!가 아닌 생활 속에서 가정교육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하셨기에 아버님의 자세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더욱 힘겨운 일임을 자각했습니다. 막연한 동경과 실제 창작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느끼곤 글쓰기를 포기했습니다. 언제인가 제게도 아버님의 문학 기운이 차오르는 날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이번에 펴내는 아버님의 유고 수필집이 매주 얼굴을 마주하여 함께 문학이야기를 하셨던 <드레문학회> 선생님들의 애정으로 발간된다는 사실을 아버님은 저세상에서나마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버님의 기뻐하시는 잔잔한 미소가 벌써 떠오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모쪼록 저희 아버님을 기억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한 문학의 샘물들이 가득 채워지시기를 빌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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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유병근 유고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
발간사 | 유고집에 붙이다-신서영
유족 인사말 | 책과 메모지를 끼고 사셨던 아버지-유종훈
제1부
돌담에 등을 기대고
개골개골
산길
하얀 천장
그때 나는
왠지 자꾸
불안에 관한 연구
O my ear!
건물을 보고 있다
먼 것이 가까이 보인다
그리움이 사라지고
하늘천 따지
제2부
굴렁쇠 같은
그래서 쓴다
속 쓰린 날
지각한 비
횡포가 나를 키운다
부스럭거림에 대하여
일억 사천만 년 전
무엇이 떠오르는 듯
제3부
까마귀
모른다는 쪽지
저울
오목한 호수
쓰라린 밥
그렇게 사는 거다
시간의 변두리에서
빈집 골목
에 또
떡볶이 꼬치
제4부
낡은 신발
포켓몬
구미호의 탈
소리, 알맞은
쭉쭈우!
나무 나무 나무
잠투정
물때가 온다
무설당
제5부
비를 생각한다
프로와 아마
legato와 staccato
농사꾼 이야기
가파른 푸새
벽 이벤트
어쩐지 좀 어지러웠다
산그늘에 묻힌 달력
서툴게 살며
어쩔 것인가, 더위야
너덜거리는 벽지
별표
월미도
전자파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