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년(세조 9) 확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애련지, 의두합, 연경당 등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창덕궁은 정치의 공간과 더불어 휴식과 생활의 공간이 조화를 이루었다.
창덕궁은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돈화문(敦化門)
돈화문(敦化門) 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처음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지었는데, 규모는 2층 누각형 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보통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창덕궁회화나무
돈화무 앞마당 양쪽에 있는 회화나무는 여덟 그루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이 회화나무들의 나이는 약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이 회화나무군은 1830년 무렵의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지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사무를 보는 관정이 있는 공간인데,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상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를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심어서 학자 나무라고도 한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궐내각사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부른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 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규장각은 조선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유교 등을 관리 보관하던 곳이다.
검서청은 규장각 검서관들의 사무실, 당직실이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사관을 도와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필사하는 일을 하던 관리였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조 이하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의 어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새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하여 제사 기능을 옮기면서 선원전은 빈 곳이 되었고, 부속건물들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재실인 양지당은 선원전 앞 쪽에 설치해 제사 의례에 사용하였다.
금천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으로 창덕궁의 돈화문과 중문인 진선문 사이에 위치하며, 궁궐에 남아 있는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진선문은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문이다.
진선문 안쪽으로 어도를 놓았으며 진선문에서 숙정문을 바라보면 왼쪽엔 인정문과 인정전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긴 회랑이 펼쳐 진다. 이 회랑 자리에는 호위청과 상서원이 있다.
인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건물.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처음 창건된 것은 1405년(태종 5)으로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졌다.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차양을 걸었던 고리가 남아 있다.
인정전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조선임금의 상징인 일월오봉병을 봉황도 병풍이다. 창문에는 경복궁과는 다르게 유리를 달고 서양식 커튼도 설치되어 있으며 천정에도 등을 달았다. 내부의 마루와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은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천장에는 왕의 공간임을 상징하는 봉활 한 싸이 조각되어 있는데, 창문을 닫아 놓아 올려다 보아도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숙장문은 궁궐의 외조 권역에서 내전을 볼 수 없게 만든 문으로, 숙장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6년) 8월에 당시 예문관 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선정전 회랑이다.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시던 편전이었으나 옆에 있는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순조가 정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왕가의 새로운 전통이 되어 헌종과 철종의 혼전으로도 쓰이면서 선정전은 다시는 치조 공간으로서의 지위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
선정전(宣政殿)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조정 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선정전은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옮겨 지었는데,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熙政堂)은 원래는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침전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기능이 바뀐 건물이다. 1917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입구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의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희정당은 본래 임금의 서재로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순조가 선정전을 정조의 혼전으로 사용하면서 희정당을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창덕궁의 핵심 건물로 부상해 규모가 크게 늘었고, 순종황제 때는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쓰이면서 더욱 높게 위상을 갖게 되었다.
대조전 내밀한 곳으로 입구에는 별도의 대문이 있다.
대조전(大造殿)는 창덕궁의 정식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전각 중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희정당처럼 내부를 마루와 유리창 등 서양식으로 꾸몄다. 대조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조전 내부에는 장식이 거창한 서구식 침대와 대리석 화장대 등 화려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대조전은 궁궐 한가운데 있는 지밀한 곳이기 때문에 겹겹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영현문은 어진 이를 맞이하는 문이란 뜻인데, 서연에 참석하는 학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왕세자의 서연은 임금의 경연과 같은 것이다.
성정각은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으며, 단층의 몸체에 중층의 날개체가 직각으로 붙은 독특한 모습이다.
관물헌은 '사물울 살핀다.'는 뜻으로 세자의 책과 문방구가 보곤되어 있었다고 한다. 관물헌은 영조 때 지어진 건물로 그 유래가 아주 깊다.
마루 위 석가래 아래에는 '집회'라는 작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시경>에서나 나 온 말로 '임금의 밝은 덕이 계속 빛난다'는 의미다. 이 현판의 글씨는 13세였던 고종이 쓴 것으로 추정한다.
동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육각누각인 삼사와, 그 옆의 긴 월랑은 칠분서, 그리고 승화루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대 창덕궁 창건 당시 조성되었으며, 창덕궁뿐만 아니라 창경궁의 후원이기도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령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어졌다. 또한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넓고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담한 정자들을 세워 인위적인 손질을 최소화 하면서도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후원을 향하는 길 양옆으로 기와지붕의 사과석 담장이 길게 펼쳐져 궁중의 내전임을 알려주고 담장 너머 키가 큰 나무들이 곧게 뻗어 나무 터널은 만들고 있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소박한 의두합이 보이는데 단청을 하지 않은 데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높직한 축대 위에 산자락 가까이 바짝 붙어 나란히 있는 소박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단청을 하지 않은북향 건물로 효명세자가 18세에 순조에게 이 작고 소박한 집을 수리해 독서처로 삼겠다고 하고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마루 위에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지만 처음에는 석거서실 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이름을 위두합이라고 고쳤다. 기오헌은 의두합 누마루에 별도로 붙인 이름이다.
불로문(不老門)은 규모는 작지만 넓적한 화강암 통판을 과감하게 디귿 자로 오려 세운 문으로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문 앞에 불로지가 있었고 문안에 어수당이 있었다고 한다.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불로문은 늙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으로 임금의 불로장생을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불로문 안으로 들어서면 석축으로 반듯하게 두른 네모난 연못인 애련지는 창덕궁 후원의 두 번째 정원이다. 그 건너편에 보이는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한 단칸의 애련정은 1692년 숙종이 연못 한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어 애련(愛蓮)이라고 이름을 붙여 애련정이라 불렀고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애련정은 작지만 울창한 숲을 등지고 돌기둥이 연못에 깊이 내려진 모습으로 단청은 화려하고, 네 개의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어 단조롭지 않다.
천연기념물 뽕나무
부용지를 처음 만든 이는 세조다. 부용지는 동서 35미터 남북 30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연못으로 사방에 화강암을 장대석을 쌓아 마감했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작고 동그란 섬 하나가 또 있다. 이렇게 네모지고 가운데 섬 하나를 둔 것은 천원지방의 동양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다채로운 구조의 부용정은 한옥으로 지을 수 있는 화려한 최대치가 구사된 정자다. 평면은 열십(+)자 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4면 모두 팔작지붕으로 날개를 펴고 있다. 또한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툇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곱게 둘렀으며, 안쪽으로는 세살문과 아(亞) 자살문의 분합문을 달고 다시 그 안쪽에 불발기창을 달아 복도와 방을 구별하였다.
멀리 산자락에 바짝 붙여 있는 보호각 안에는 숙종이 쓴 사정지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사정비는 숙종의 문화유산 보존 의지가 절절히 드러나 있는 비문이다.
2008년 부용지 주변 관람로 정비공사 도중 연못 북서쪽 모서리에서 우물 하나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났다. 우물은 가마솥을 엎어 놓은 형상이었지만 이흠을 새긴 돌은 발견되지 않아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부용지의 연륜을 말해주는 첫번째 유적이다.
사각기둥 위에 화려하게 조각되고 단청된 가구(架構)를 올려 지은 겹처마 우진각지붕건물로 주합루(宙合樓)의 정문이다. 이 문 양옆에는 문 위를 무지개꼴로 만들고 특이한 형태의 곡선형 지붕을 얹은 작은 문이 하나씩 세워져 있어서, 어수문과 함께 3문형식을 이루고 있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물과 물고기, 즉 왕과 신하의 관계를 뜻하며 지은 이름이다. 주합루로 들어가기 위해 왕은 어수문으로 출입하지만, 신하들은 어수문 옆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주합루(宙合樓)는 부용지 북쪽에 1776년(정조 즉위)에 지은 건물로, 주합루는 2층 규모로 지어졌는데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주합루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 팔작지붕인 규장각 주합루는 5단의 화계로 이루어진 높직한 곳 위에 올라앉아 궁궐 건축의 품위와 권위가 느껴진다.
영화당은 장대석으로 쌓은 높직한 석축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아주 번듯하소 품위있게 잘생긴 건물이다. 북쪽으로는 방을 들이고 사면에 퇴를 둘렀다. 대청의 3면에는 문짝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을 설치하여 문을 올리면 언제든 삼면에서 비쳐드는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로 현판 글씨는 획이 아름답고 글자의 구성이 반듯하면서도 멋스럽다.
지금은 춘당지와 영화당은 담장으로 막혀 있어 영화당 대청마루에 앉아 춘당대쪽을 바라보면 춘당지가 보이지 않는다. 동궐이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나뉘기 전에는 창경궁 춘당지는 창덕궁 영화당과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춘당지에서 영화당에 이르는 평평한 마당을 춘당대라 불렀다. 춘당대에서는 활쏘기, 말달리기, 과거시험 등이 치러졌고 이금은 영화당에서 활쏘기를 관람하고 과거 급제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존덕정 영역은 후원의 세번째 골짜기이다. 이 연못의 형태가 한반도를 닮았다고 해서 한때는 반도지라 불리기도 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개념이 들어 있어 반도지를 관함지라 바꿔 부르고 있다.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인 만큼 기둥도 4개가 아니라 6개의 가늘고 긴 기둥이 부채꼴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기둥마다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지붕에는 용두로 장식된 용마루 끝을 꼭짓점으로 각각 세 줄의 추녀마루가 뻗어내렸다. 바닥에는 장마루를 깔고 난간엔 투각무늬를 돌렸는데 관람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다.
존덕정 앞에서 바라 본 관람지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골까기 안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한가운데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존덕정(尊德亭) 은 존덕정 일원에 있는 정자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존덕정은 본채 처마에 잇대어 눈썹지부을 씌우고 튓간을 한 겹 돌려서 2층 지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단층 정자다. 지붕 꼭대기에는 탑의 상륜부에는 절병통이 얹혀 있다. 또한 존덕정은 뒤에서 보면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모습이다.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정조가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되었다. 재위 22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 때 쓴 이 글은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내용의 요체가 궁금하다면, 유홍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9편 p299~303 참조
'펌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친다'는 뜻이니 이곳에서 쉬면서도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을 담아 붙인 이름으로, 맞배지붕의 아담한 집이다. 펌우사는 외벌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홑처마 정면 3칸, 측면 1칸에 2칸이 온돌방이고 나머지 1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을 지닌 승재정은 언덕 위에 있는 사방 한 칸짜리 겹처마 사모지붕 정자로 승재정 앞에서 관람지를 내려다 보면 풍경이 정말 예쁘다. 승재정은 기둥 사이에 4면에 완자무늬 사분합문을 달아 화사하게 꾸몄으며, 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깔고 아(亞)자 난간을 돌렸으나 계단이 연결되는 앞과 뒤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
높직한 솟을대문인 연경당 대문인 장락문.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장락문 왼쪽의 행랑채
장락문 오른쪽으로 있는 말을 묵어 놓았던 마굿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본채로 들어가기 위한 전실인 외행각이 길게 뻗어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수인문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인 장양문과 달리 평대문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변 2칸에 왼편 마지막 칸에서 누마루 한 칸이 돌출되어 덧붙은 기역 자 집으로 오른쪽 장지문을 열면 사랑채와 안채가 일직선으로 통하는 구조다. 솟을대문인 장양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인 연경당이다.
밖에서 보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장이 있어 분리된 듯하지만 양반 가옥의 특징 그대로 내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인 연경당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순조 27년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연회를 위해 지은 집이다. 현재의 연경당은 고종 때 다시 지은 것으로 효명세자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사랑채 연경당에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널찍하다.
사랑채 오른쪽으로는 선향재가 자리하고 있다. 선향재는 서재 겸 응접실로 쓰이던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서향이라 오후에 빛이 들어오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집의 길이만큼 긴 차양이 덧대어져 있다.
선향재 뒷뜰 언덕 위로는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한 농수정이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 '농수'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뜻이다. 겹처마 네모지붕으로 꼭대기에 절병통이 꽃혀 있다. 농수정 사면을 모두 완자무늬 사분합으로 했고 기둥 밖으로는 사면을 돌아가며 쪽마루를 깔고 아(亞)자 난간을 돌렸다. 돌난간 아래에는 화계를 꾸미고 그 사이에 돌계단을 놓아 오르내리도록 했다.
후원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 시작할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914호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출처: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9편. 창덕궁 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