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없이 갈 데까지 가면 예술이 되지만, 제약을 두고 갈 데까지 가면 정답이 된다’
누구의 명언도 아닙니다. 그냥 제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오늘 등장할 세 대의 일본 경차를 보면서 떠올랐지요. 조금만 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일단 사진부터 보시죠.
일본에서 가장 많은 경차를 파는 다이하츠와 스즈키 그리고 혼다의 주력차종입니다. 똑 같은 차 복사해서 갖다 붙인 게 아니고요. 왼쪽부터 다이하츠 탄토, 스즈키 스페이시아, 혼다 N박스라고 하죠. 똑같이 생겼다고요? 오늘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일정한 규격 안에서 파고들고 또 파고들다 보니 다 똑같아졌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제약조건 안에서 더 이상의 개선이 나오기 힘든 지경에까지 다다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글 제목이 ‘갈 데까지 간 일본경차’ 아니겠습니까.
일본 경차라고 해도 2인승 컨버터블부터 SUV까지 다양하게 있지만 오늘 살펴볼 차들은 모두 가장 많이 팔리는 카테고리의 모델들이에요. 즉, 사람들의 요구를 가장 많이 반영하고 끝까지 추구한 차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죠. 갈 데까지 파고들다 보니 모두가 비슷해졌는데, 또 매우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약간씩 다른 점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들의 똑같음과 함께, 아주 약간 다른 점들도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같은 점부터.
이거 무슨 도플갱어도 아니고. 왼쪽부터 탄토, 스페이시아, N박스입니다. 아마도
우선 생김새가 똑같습니다. 디자인의 구성요소가 매우 비슷하죠. 예컨대 전폭대비 한계까지 높인 차고와 극도로 짧은 보닛, 최대한 키운 창문. 제한된 크기의 차체 안에서 최대한의 실내공간과 개방감을 추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습니다. 비슷한 건 바깥 디자인뿐만이 아닙니다.
이거 무슨 도플갱어도 아니고(2). 왼쪽부터 탄토, 스페이시아, N박스입니다. 아마도
대시보드 디자인도 거의 비슷. 탄토의 계기반이 대시보드 중앙 상단에 위치한 걸 빼면 세 대의 디자인이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송풍구와 모니터의 관계, 변속레버의 자리, 심지어 컵홀더 위치까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어트림은 모두 최대한 평평하게 다듬었고 세 대 모두 벤치시트(굴곡 없이 좌우가 평평하게 연결된 시트)를 사용한다는 점. 실내가 비슷한 이유도 바깥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우선순위는 최대한의 공간활용성과 개방감이기 때문에 뭔가를 꾸미거나 장난치는 등 디자인 할 여력이 없었을 겁니다. 가장 필요한 요소를 가장 필요한 곳에 배치하다 보니 세 대가 모두 똑같아졌죠. 반대로 말하면 실외나 실내나 현재 조건 안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는 뜻입니다.
크기도 같습니다. 전고는 차들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전장과 전폭은 완전히 똑같아요. 세 대 모두
전장 3,395mm
전폭 1,475mm
라는 수치를 가지고 있죠. 일본 경차규격이 전장 3,400mm / 전폭 1,480mm이기 때문이에요. 규격보다 5mm씩 작은 이유는 제작과정에서 5mm정도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어서 여분을 둔 겁니다.
사실 요즘 차들은 오차가 거의 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 기준으로 5mm정도의 오차는 흔한 일이었거든요. 같은 차라도 모델마다 조금씩 전장이 다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5mm 여유를 두는 게 경차를 만들 때의 암묵적 규칙으로 일본 회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일본인들 성격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같은 점은 각 차의 최고출력모델 마력. 모두 자연흡기 엔진과 터보엔진(탄토는 커스텀 모델에만)을 마련했는데 최고급 터보엔진의 경우 세 대가 똑같이 64마력입니다. 이것도 일본 경차규격 때문. 아이들링 스톱 기능도 유행에 따라 세 대 모두에 들어있습니다. 안팎의 디자인도, 쓰임새도, 출력도, 기능도 거의 다 비슷하니 그럼 대체 어떤 점으로 이 차들을 고르는가? 차이는 브랜드뿐인가? 궁금하시죠?
그럼 다음으로 아주 약간씩 다른 세 대의 차이점을 보시겠습니다.
현미경이 필요할 것 같은 사소한 차이지만 차근차근 훑어보겠습니다. 먼저 탄토부터 보시죠.
다이하츠 3세대 탄토.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톨보이 박스형 경차가 레이 뿐이지만 일본에선 경차의 주력모양입니다. 이런 차종을 확산시킨 건 2003년도에 나온 다이하츠 탄토였죠. 그 이후 두 번의 모델체인지를 거쳐 최근 나온 탄토는 3세대에 이릅니다.
기본적으로는 다 비슷비슷하지만, 굳이 탄토의 특징을 뽑자면 조수석 면의 B필러가 없다는 겁니다. 슬라이딩 도어 안에 B필러를 내장해 앞/뒤 문을 열면 거대한 출입구가 나타나죠. 새롭지는 않습니다. 레이도 그러니까요. 그러나 레이와 다른 점이 있어요. 운전석 면의 뒷문도 슬라이딩도어라는 것.
뒷문이 양쪽 모두 슬라이딩 도어인데, 조수석 쪽에는 B필러가 없는 것. 이 점이 일본의 다른 라이벌모델과 차별되는 탄토만의 특징입니다. 이왕이면 양쪽 필러가 모두 없으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그러고도 차체강성을 유지할 만큼의 기술력은 없나 봅니다. 다음은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는 혼다 N박스입니다.
혼다 N박스. 2011년
혼다는 예로부터 패키징의 강자였어요. 자동차 개발에서 패키징이란 주어진 공간 안에 각종 부품부터 사람까지 배치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이 일의 완성도에 따라 차의 무게배분과 실내의 크기, 공간 활용성 등이 달라지지요. 작은 경차에서는 그만큼 패키징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럼 혼다가 N박스에서 부린 패키징 재주는 뭘까요?
바로 연료통의 배치입니다. 보통은 뒷좌석 아래에 있는 연료통을 앞좌석 아래에 배치해 공간 활용성을 높였죠. 사진에서 운전석과 조수석 아랫부분이 연료통 위치에요. 연료통을 뒤 시트 아래에서 앞 시트 아래로 옮겼을 뿐인데 왜 공간활용성이 높아지는지는 다음 사진에서 나타납니다.
트렁크 밑면이 낮아서 짐칸이 커질 뿐 아니라 뒤 시트를 접으면 실내 바닥이 굴곡 없이 평평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N박스에는 아예 소형 바이크나 휠체어 등을 손쉽게 실을 수 있는 이런 옵션을 마련해 두었어요. 200kg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 알루미늄슬로프를 순정으로 장착할 수 있습니다.
혼다는 현재 N자로 시작하는 세 대의 경차(N ONE, N박스, N WGN)를 판매 중인데요 세 대 모두 같은 플랫폼으로 이런 구조를 공유합니다. 다음으로는 가장 최신모델인 스즈키 스페이시아를 보시겠습니다.
스즈키 스페이시아. 2013년
스즈키에는 다이하츠 탄토에 대응하기 위한 팔레트라는 차가 있었어요. 그러나 판매량에서 탄토에 완전히 밀려버렸죠. 스페이시아는 사실상 2세대 팔레트에 해당하는데, 1세대의 설움을 만회하고자, 탄토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한 흔적이 보입니다.
보닛 길이를 더욱 줄였고, 뒷문을 슬라이딩도어로 바꾸었으며 각 창문의 경사를 없애 최대한 직각에 가깝게 세웠습니다. 더더욱 박스형태가 되었고, 또한 탄토나 N박스와 비슷해졌다는 뜻이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눈에 띄는 스페이지아만의 특징은 찾아보기 힘듭니다만, 수치상 장점은 있습니다. 다른 두 모델 대비 차체중량이 20kg에서 100kg까지 가볍다는 것. 그만큼 연비나 동력성능에서 우수하다는 이야기죠.
물론 일본 공인연비를 곧이곧대로 믿는 건 금물. 최근 개선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나라보다 공인연비가 잘 나오는 과장된 측정법
스페이시아는 감속시 에너지를 회수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회생에너지 시스템을 달았어요. 같은 장비가 탄토에도 달려 있긴 합니다만, 가장 가벼운 차체와 이 시스템을 통해 세 모델 중 으뜸인 리터당 29km라는 연비를 보여줍니다. 스페이시아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참고로 탄토는 28km/L, N박스는 24.2km/L입니다. 또한 스즈키는 다른 것으로도 승부를 걸었지요.
사진은 스페이시아의 파생모델, 스페이시아 커스텀
적외선 레이더를 사용한 충돌회피시스템(시속 5~30km에서 작동)을 경차인 스페이시아에 적용해 버린 겁니다. 물론 낮은 가격으로 말이죠. ABS와 TCS등을 합한 미끄럼방지장치와 함께 묶음으로 불과 4만2천 엔(약 42만 원)에 장착할 수 있습니다. 탄토에도 같은 기능이 있지만 5만 엔(50만 원)이거든요. 몇 밀리미터의 실내공간, 몇 천 엔의 가격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일본 경차시장에서 최첨단 장비의 적용과 그 가격차이가 약 8만 원이나 난다는 것은 커다란 차별점이 됩니다.
이렇게 차이점을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헷갈립니다. 너무 다 비슷비슷해요. 그래서 각 메이커들은 또 하나의 차별점을 두고 있지요.
스타일링을 획기적으로 바꾼 특별 모델을 별도로 마련한 겁니다. 심심한 기본형이 싫을 경우의 대안이기도 하고, 기본형을 너무 여성스럽게 느끼는 남성들을 위한 터프한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다이하츠 탄토와 스즈키 스페이시아, 그리고 혼다 N박스의 파생모델입니다. 각각 탄토 커스텀, 스페이시아 커스텀, N박스 커스텀이라는 이름이죠. 이름까지 똑같네요. 어쩌구 커스텀. 각각 더 터프한 얼굴과
혼다 N박스 커스텀 대시보드
좀더 남성적인 인테리어 컬러를 두르고 있어요. 그런데 이름에서부터 그렇듯, 얘네들도 또 얘네들끼리 뭔가 비슷합니다. 아이고 여전히 두루뭉술하네요.
자, 오늘은 이렇게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일본의 경차들을 보셨습니다. 이제 ‘제약 없이 갈 데까지 가면 예술이 되지만, 제약을 두고 갈 데까지 가면 정답이 된다’ 라는 말이 와 닿으시나요?
세 대의 경차를 보니 저 규격 안에서의 정답에 한없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참 재미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가 하나의 정답을 이야기 하니까요. 물론 이렇게 따분함을 느끼시는 분들은 (꼭 경차여야 한다면)저 차들 이외에도 널리고 널린 다른 종류의 경차를 구입하면 되겠지요.
아무쪼록 종류도 다양하고 깊이도 있는 경차시장을 가진 점은 우리도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제공
- 날라리 카디자이너출신 글쟁이 김준선 erin@topgearkorea.com
- 영국 BBC 〈Top Gear〉 한국판 에디터. 일본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했고, 자동차 파워블로그 〈모터블로그〉에 Erin이란 필명으로 활동했었다.
첫댓글 우리레이는 첨부터 갈때까지 갔네 칭구따라강남가듯이
울나라 차는 컨트롤c 컨트롤v
우리에겐 레이따위가 있죠...
저렇게 경쟁을 해야 발전하고 서비스도 좋아지며, 가격도 내려가는 건데.. 우리나라는 경쟁이 없으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