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시장에 얽힌 어릴 때 추억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시장을 끼고 인생 서사(敍事)가 이루어지는 일은 흔히 있다. 봉덕시장이 있는 대구 남구 봉덕동은 내 삶의 마디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이다. 신혼을 이곳에서 잠시 보냈다. 주말마다 장을 보러 온 곳이다. 나이들어 봉덕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시장 건너에 대동강 식당이 있다. 1965년 개업한 북한음식전문식당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온 기억이 생생하다. 평안남도 대동군이 고향인 실향민 아버지의 허기를 달래주던 식당이다. 이 식당은 아직도 이 자리에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 때 북한에 가서 두고 온 식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후 2년이 채 못되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다. 가끔 이 식당을 지날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절실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절실해지는 것 같다.
요즘은 격일로 이 시장에 온다. 대구 남구청 부속 기관인 남구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노인일자리사업에 지난해에 이어 참여하고 있다. 올해는 봉덕 1동에 사는 주민 중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사는 사람 몇 분 집을 방문해 안부를 묻고 때론 상담에도 응하는 일을 하고 있다. 봉덕시장이 일터인 셈이다.
이 시장 부근에 나의 오랜 기억을 소환하는 극장 두 개가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가 민망하지만, 공소시효가 끝난 일이라 이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지금은 대동강식당 주차장이 된 현대극장으로 당시 5원에 두 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했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남궁원과 당시 육체파 여배우 김혜정 주연 1965년 개봉작 〈어떤 情事〉란 영화를 본 기억이 또렷하다. 아마 그 당시 ‘정사’(情事)란 말뜻을 제대로 알고 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정사를 ‘남녀 사이에 벌이는 육체적 사랑의 행위’라 정의한다. 중학교 들어갈 무렵이거나 중학생 때 본 것으로 추론된다. 미성년자입장불가 영화를 혼자 어떻게 들어가 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보고픈 의지가 강했던 모양이다. 당시는 성인영화 이외 성적 호기심을 충족할 별다른 매체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영화 줄거리를 보니 단순 불륜 영화가 아니다. 부부에게 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나름 유의미한 영화인 거 같다.
다른 하나는 지금은 도서 도매상으로 변한 남도극장이다. 극장 옆 긴 골목 막다른 곳에 고등학교 친구 집이 있었다. 친구 부모님이 대구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셔서 항상 집이 비어 있다. 농땡이 몇 놈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 아지트로 모인다. 야전(야외전축)을 틀어 놓고 춤도 추고, 몇 놈은 연초를 입에 물기도 했다. 우리의 춤 선생이었던 영권이는 당뇨로 고생하다 작년에 세상을 떠났고, ROTC 출신인 마음씨 착한 춘열이와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커튼 장사로 돈을 잘 벌었던 재홍이도 떠난 지 오래다. 모두 대구 경대사대부중고 6년을 같이 다닌 친구들이다.
당시 이 극장에서 쇼를 가끔 했다. 쇼가 있는 날은 연예인을 보는 날이다. 〈불나비〉를 부른 김상국, 제임스 브라운의 〈I Feel Good〉을 멋들어지게 불렀던 체리보이 그리고 당시 나보다 두 살 연하였던 하춘화를 이 극장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 쇼하는 날 재수 좋으면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극장 뒷문이 친구 집 대문과 마주 본다. 그래서 가끔 잠시 쉬고 있는 가수에게 찬물 한 잔씩 대접하면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당시 고등학생이 기지 바지를 입는 게 만만치 않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장 바지인 셈이다. 맞춤 집에 가 가봉하고 며칠 후 찾아가야 입을 수 있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은 기지 바지를 벗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바지 몇 벌을 전당포에 잡혀서 그 돈으로 시장 안에 있는 안방술집에 단체로 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 바지 하나당 700원씩 잡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 시장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실존의 터인 셈이다. 이 시장에 올 때마다 지나온 삶의 매듭들이 하나하나 소환된다. 지나고 보면 그 매듭 하나하나가 다 삶의 아름다운 고리들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시장을 떠나지 못한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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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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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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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강렬한 추억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