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40년 이 집에 다닌다. 대구 경상감영공원 옆에 있는 마산설렁탕이다. 가게 앞에는 70년대 후반 대구 상권의 중심이었던 대보와 무궁화백화점 건물이 있다. 지금은 상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그때만 해도 럭셔리한 공간이었었다. 이 건물 내 중앙사우나는 대구 사우나 문화를 정착시킨 공간이었다. 지금은 시니어들의 휴식공간인 댄스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향촌동 대보백화점 2층에 신성일, 엄앵란 부부가 운영하던 나드리예 뷔페가 있었다. 앞에 있었던 아시아 극장이 지금은 주차장이다. 내 기억엔 그리 오래 장사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신성일은 국회의원 꿈을 꾸고 있었다. 고향 대구에서 뿌리를 내리고 3년 후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그 꿈이 잠시 미루어졌다. 그런 후 2000년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이 두 백화점은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지금도 서 있다.
이 설렁탕 집은 5,000원 할 때부터 12,000원인 지금까지 다닌다. 젊은 시절 강의에 시달려 잘 챙겨 먹지 못해 허할 때마다 찾아와 허기를 달랬던 곳이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점심도 이 식당에서 해결했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이 집 사장님의 해병대 사랑을 듬뿍 느낀다. 식당 입구 ‘해병’이란 큰 붉은 글자에 압도당한다. 항상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8순의 사장님 뒤에 걸려 있는 낡은 액자에는 ‘百折不屈’이란 한자가 해병대 팔각모 풍으로 강하게 새겨져 있다. 사장님은 묵언 수행자처럼 말씀이 별로 없다.
주방을 지키시는 안주인 역시 연세가 많다. 내가 가면 ‘교수님 오신다’고 큰소리로 알린다. 나에겐 소의 양(羘)을 듬뿍 넣어 주시는 것 같다. 오래전 비가 살짝 내리는 날, 비를 맞고 가시길래 우산을 같이 쓰고 가게까지 왔다. 물론 이 집 안 사장님인 줄은 몰랐다. 그게 그리 고마웠던지 가게에 들어서면 언제나 이렇게 환영해주신다. 그 환영의 메시지는 아직도 카랑카랑하다.
깍두기가 일품이다. 성큼성큼 여유있게 썬 모양이 해병대 팔각모를 닮았다. 난 채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집 겉절이는 예외다. 달큼상큼하다. 사리로 소면을 주문만 그냥 준다. 고추 찍어 먹는 된장 맛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 집 된장은 어떻게 조미를 했는지 내 입맛에 맞다.
사실 주머니가 빈약한 대학 시절, 설렁탕 한 그릇 먹는 건 사치다. 당시 대학원을 대구에서 다녔다.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에 월세로 방을 얻어 이틀 자고 대구로 내려오곤 했다. 김형석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기억만 남는다. 1977년이니까 교수님 연세가 60전이었다. 내 기억엔 의자에 앉아 한 손에 든 낡은 강의 노트를 열심히 읽어주시던 모습이 선하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104세의 젊음을 여전히 누리시고 계신다.
끼니는 주로 학교 학생 식당에서 해결했다. 순두부 백반이 400원이었다. 다른 음식에 비해 비쌌다.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400원이라니. 주머니 사정이 좋은 날 영양 보충을 할 마음으로 한 번씩 찾은 곳이 학교 부근 신촌 설렁탕 집이었다. 원래 설렁탕은 서울 깍쟁이의 음식이다. 넥타이를 맨 셀러리맨들이 선호한 클래스 높은 음식이었다. 이젠 저잣거리 음식이지만 그 당시는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뼈를 고아 만든 국물이 눈처럼 뽀얗고 농후하다고 해 설롱탕(雪濃湯)이라 한 것이 그 유래다. 얼마나 고아야 흰눈이 될까? 누군가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기까지 진액을 다 쏟아낸 소뼈다.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이라 한 안도현의 〈연탄 한 장〉이 떠오르는 게 우연일까? 오늘 설렁탕 하나 놓고도 나를 성찰할 수 있었다.
첫댓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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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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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설렁탕~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