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주기] 10년의 슬픔, 여전한 눈물 버튼
배소라
'4.16 10주기' 혹은 '세월호 10주기'. 자체로 이미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말들. 이 시간이 언제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당도했다. 많은 사실이 규명되었지만, 그것들을 다 그러모아 하나의 진실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은 아직 사고와 참사 사이에서 배회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 우리 국가가 4.16과 세월호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을 일깨워줬다. 4.16/세월호를 다시 기억하기 위해 굳이 외부의 누군가에게 원고를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은 솜씨나 식견,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니까. 메디치 식구들 몇에게 원고를 부탁했지만, 아직 쓸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직 쓸 수 없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슬픔을 이만큼 잘 드러내는 답이 있을까. 그래도 누군가는 쓰고 말한다. 배소라 실장은 울면서 이 글을 썼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슬픔이 펄럭이는, 오늘은 10년째의 그날이다. [편집자 주]
그날은 4월 중순임에도 냉랭한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만큼 추운 날씨였다. 하늘도 금방 비가 올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 오전 반차를 내고 딸아이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딸아이가 알러지 검사를 받는 동안 병원 대기실에서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TV 화면에 속보가 떴다. ‘진도 앞바다 471명 탄 여객선 침몰 중’이라는 충격적인 자막과 함께 거대한 뱃머리가 기울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그 배는 수학여행을 가는 고등학생 325명을 태우고 있단다. ‘어쩌면 좋아. 빨리 구조작업을 해야 할 텐데.’
검사를 마치고 나온 딸아이도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잠시 후 뉴스를 검색하는데 ‘전원 구조’라는 기사가 떴다.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구조되었으리라 여겼기에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고 딸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2시가 다 되어 회사에 복귀했는데 팀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팀장님, 사고 소식 들으셨죠?” “봤어요. 전원 구조되지 않았어요?” 내 대답에 디자이너는 거의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아니래요. 사망자도 있고 생사불명인 사람이 107명이 넘는데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인터넷 뉴스를 검색했더니 중대본에서 탑승객 477명 중 구조 368명, 사망 2명, 실종 및 생사불명 107명이라는 발표가 나온다.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소름이 돋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1시간 만에 다시 뉴스 사이트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중대본에서 수정발표를 한다. 구조 180명, 사망 2명, 실종 290여 명이란다. 다들 나처럼 뉴스를 보고 있었는지 사무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시간 이후로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화면 한쪽에 뉴스창을 열어놓고 수시로 뉴스를 살폈다. 퇴근길에도 내내 뉴스를 보다가 집에 가서 TV화면을 틀었다. 모든 방송사에서는 앞다투어 침몰 사고를 보도하고 있었지만 내가 기대하는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4월 16일 오후 당일 배를 이용한 수학여행을 금지한 정부는 며칠이 지나자 아예 전국 초·중·고의 수학여행을 전면 중단시켰다. 그 다음 주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다고 들떠 있던 아들아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왜 우리는 배로 가는 것도 아닌데 못 가게 하냐고?” 불만에 찬 아이의 불평을 들으면서 나는 생사도 모른 채 아이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가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그 이후로 세월호 뉴스는 내 눈물 버튼이 되었다. 당시 집과 회사의 거리가 멀어서 왕복 3시간이 소요되었는데,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뉴스를 보기 시작하면 5분이 채 못 되어 눈물이 쏟아졌다. 그냥 눈물이 흘러내린 정도가 아니라 ‘흑흑’ 소리를 낼 정도로 운 적도 많았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2001년 60이 채 못 된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신 후 10년이 넘도록 눈물을 흘린 적이 거의 없었다. 상을 치르며 울고 난 이후로는 아무리 슬픈 영화를 보거나 슬픈 일을 떠올려도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가 매달린 듯 답답하기만 할 뿐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눈물 꼭지를 잠가버린 것처럼… 그런데 세월호 뉴스를 보며 터져버린 내 눈물샘은 10년 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었다.
2014년 5월, 안산 화랑공원의 합동 분향소를 찾았다. 세월호 분향소는 전국에 여러 곳이 있었고, 서울에서 이미 다녀왔지만 안산에 한 번은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 사진=배소라
그 무렵 나는 남편과 안산 분향소에 들렀다. 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꼭 들르고 싶었다. 그 수많은 아이들의 영정 앞에서 묵념을 하고 나오며 나는 또 한참을 울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구조 상황을 책임지고 지휘하고 국민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정부가 없었다. 국민들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했고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용혜인 씨가 젊은이들을 이끌고 침묵행진과 시위를 이어갔고, 딸아이는 그에 동조하며 주말마다 시위를 따라다니는 열성을 보였다. 유가족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으나 박근혜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길고 지루한 농성과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다.
유가족들이 자리한 광화문광장의 천막이 농성과 단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천막은 낮의 더위와 밤의 냉기가 오가는 악조건의 공간이 되었으나 단식은 멈추지 않았다. 유민 아빠(김영오 씨)의 단식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단식이 지속되면서 주변에서 그를 말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정치인들과 종교인들도 그와 동조해서 단식을 하기 시작했다.
단식이 한 달 가까이 이어졌을 때 나는 너무 걱정이 되어 광화문광장의 천막을 찾아갔다. 유민 아빠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때 옆에서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으며 단식을 하던 문재인 대통령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단식할 테니 이제 단식을 그만두라고 김영오 씨를 말렸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함께 단식을 하고 있었다. 단식 중에도 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하게 책을 읽고 있던 문재인 의원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영오씨의 단식은 둘째 딸의 간곡한 청으로 46일 만에 중단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사람이 46일 동안 단식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절절한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2014년 8월,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에서 단식 중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당시는 민주당 의원)을 만났다. / 사진=배소라
추모의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유가족 후원을 위해 추모 리본이 달린 시계, 온갖 추모 장식을 사고 몸에 지닌 채 100일 추모집회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으로, 광화문광장 천막농성장으로 쫓아다니며 10년치 눈물을 쏟아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10주년을 맞고 있다. 세월호 눈물 버튼은 여전해서 글을 쓰는 지금도 울컥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당시 나를 감쌌던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세월호는 전 국민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집단 우울증을 안겨 주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세월호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악몽 같았던 그날의 장면들과 가슴아파하며 눈물 흘렸던 그 감정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해마다 4월 16일이 되면 페이스북 커버사진을 교체한다. 푸른 바다 위에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고, Remember 2014. 4.16이 쓰여 있는 사진으로. 약 3일 동안 그걸 대문에 거는 것이 나만의 추모방식이다. 앞으로도 10년은 더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다.
2014년 6월, 경기 고양시 화정역에서 피켓을 들고 특별법제정을 위한 거리 서명을 받을 때의 모습. / 사진 제공=배소라
출처 : 피렌체의 식탁(http://www.firenzed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