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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7,2ㄴ-14
나 다니엘이
2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3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4 첫 번째 것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것은 날개가 뽑히더니 땅에서 들어 올려져 사람처럼 두 발로 일으켜 세워진 다음, 그것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
5 그리고 다른 두 번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다.
한쪽으로만 일으켜져 있던 이 짐승은 입속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 고기를 많이 먹어라.”
6 그 뒤에 내가 다시 보니 표범처럼 생긴 또 다른 짐승이 나왔다.
그 짐승은 등에 새의 날개가 네 개 달려 있고 머리도 네 개였는데, 그것에게 통치권이 주어졌다.
7 그 뒤에 내가 계속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이 나왔다.
커다란 쇠 이빨을 가진 그 짐승은 먹이를 먹고 으스러뜨리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그것은 또 앞의 모든 짐승과 다르게 생겼으며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다.
8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자그마한 뿔이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나온 뿔 가운데에서 세 개가 그것 앞에서 뽑혀 나갔다.
그 자그마한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1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12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29-3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루카 21,30),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혹은 안 올지, 추울지 혹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표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진정 깨닫는다면, 세상을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나 혹은 이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오신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발견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맛보기 시작한 그 무엇을 청할 수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신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주님!
제 영혼이 당신의 자리이오니, 말씀을 이루소서.
당신께 승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활기차게 하소서.
저에게 뿌리신 말씀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저에게서 사라지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라지실 때가 나타나실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라는 것을 알라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신앙인 가운데서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무엇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의 경우,
- 자기가 능력이 없거나 자기가 잘못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 자기에게 탓을 돌리기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거나
-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라면 운이 없어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것이 하느님 뜻이거나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그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그때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그리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고,
지금 이 세상이 사라지더라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지 하느님이 사라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는 이 세상이 있을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있을 곳이고, 하느님도 나와 함께 계시지 나 없는 이 세상엔 계시지 않습니다.
그만큼 나 없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나 없는 세상에는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에게서 사라질 때가 도리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실 때임을 오히려 알아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보면 혼돈의 연속입니다.
기득권 유지만을 원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 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들 또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신분을 떠나서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새기고 살며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은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늘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바로 지금’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항상 자신만만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태로 주님 앞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그리고 지금 당당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벅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가 찾아오는 공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멸망하게 될 무서운 징조들을 다 말씀하신 다음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는 자연에서 계절이 변화되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도 마치 수학 공식처럼 그대로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공식처럼 내 주위에 믿고 희망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각자에게도 오시기 때문에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왕으로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께 완전히 순종할 때만 이뤄집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우리가 기대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 자기 힘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내 힘으로는 단 1%도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나의 믿음과 희망이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임하십니다.
저도 신학교 입학했을 때 행복할 줄 알았지만, 행복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단식하며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배고프니까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행복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직 그분을 그때처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저 자신과 세상을 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내가 믿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그만큼 완전히 죽일 자신이 없어서 나를 종말로 몰아붙이지 못하기에 하늘 나라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나의 완전한 종말 뒤에 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식입니다.
작년 『역행자』란 책을 쓴 ‘자청’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이미 130명의 직원을 두고 한 달에 몇 억씩 벌며 작년 책 판매 수입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아마 50억 가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못생겼고, 공부도 못했고, 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자신은 한 달에 150만 원도 벌지 못하며 결혼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여자는 쫓아다니면 도망쳤고 돈을 벌기 위해 영화관에서 일하기도 하였지만,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에겐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영화관에서 함께 일하던 어떤 누나가 그를 불쌍히 여겨 책을 좀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게임에만 빠져있던 그였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대화법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말하기보단 들어주고 상대의 말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 책대로 했더니 서서히 한 명씩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깨닫습니다.
‘아, 모든 것에는 공식이 있구나!’
그래서 학교도 집어치우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습니다.
거기서 얻은 지식으로 무일푼으로 사업도 시작하고 지금의 자청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처럼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의 시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의 나락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시며 더 슬퍼하시는 그분을 만나고는 다시는 얼굴에 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감사’만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 만큼 겸손해진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라도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항상 희망을 품고 종말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만큼 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모두는 주님 정원 속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입니다>
수녀원에 도착했을 무렵, 무성했던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나무들은 그야말로 나목(裸木)으로 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목, 다시 말해서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서글퍼하거나 우울해합니다.
'아, 이렇게 또 다시 계절이 가는구나.' '이렇게 내 인생도 저물어가고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 정원 안에 머무는 한, 나는 영원한 청춘이라는 진리, 주님께서 내 안에 굳건히 자리하시는 한,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 같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특징은 다른 스승들과는 차별화가 되었는데, 다른 무엇에 앞서 쉬웠습니다.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하면, 백성들이 살아가는 환경이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자연 현상들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던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올 때, 병고나 사건 앞에, 왜 이런 일이 내게 다가오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나, 따지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또 다른 하나의 부르심이라 여기고,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의 날을 보다 잘 준비하라는 신호로 여겨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것이지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무화과나무의 교훈>
당시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되면 누구든지 그날이 되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라는 말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정도로 명확하고 생생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러한 일들’은 좁은 뜻으로는 이 말씀 앞에 있는 ‘우주적인 표징들’과 ‘예수님의 재림’을(루카 21,25-27)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종말 전의 재난들’을(루카 21,8-24)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종말의 날이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들, 또는 재난들을 ‘언제’ 보게 될까? 그런 일은 ‘언제’ 일어날까?
이미 일어났고, 이미 보았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인류는 수없이 많은 재난들을 겪었고, 오늘날에도 겪고 있습니다.
표징들도 마찬가지인데, ‘회개하라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는 표징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여름’은, 즉 ‘종말의 날’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말씀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늦기 전에 당장 회개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것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요한 4,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25)
사도 요한도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라고 말합니다(1요한 2,18).
‘종말이 완성되는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이 아니고, ‘이제 곧 닥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이천 년이나 지났다는 이유로, 종말이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늘 듣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씀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지나간 날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남아 있는 날들이 짧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2베드 3,8).
이 말은 시편 90편 4절을 인용해서 한 말인데, 시편 90편은 ‘종말과 심판’을 묵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시편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시편 90,3-5)
이 찬미가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먼지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 년, 이천 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여기서 ‘먼지, 아침잠, 풀’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먼지나 아침잠이나 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즉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고 호소하시는 ‘사랑의 말씀들’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방법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그 당시의 세대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를 가리킵니다.
‘모든 일’은 종말과 심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곧 닥친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1베드 1,23-25)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종말과 심판의 날에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겠지만, 믿고 회개한 사람들은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종말, 재림, 심판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여정 -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감동적인 실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난 주일 저녁기도부터 내일 토요일 아침까지 수도원 형제들은 연피정중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녜스 자매님은 매일 13시간 주방봉사를 합니다.
오전 새벽4시-12:30분까지, 그리고 쉬었다 오후 3-7:30분까지 무려 도합 13시간 봉사하는데, 전례기도에 꼭 참석하면서 기쁘게 웃으며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이 또한 저에겐 자발적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생생한 하늘나라의 표지입니다.
오늘은 12월 1일 첫날입니다.
어제의 11월 30일 끝은 오늘의 12월 새로운 시작임을 알립니다.
제대 앞에 준비된 대림초 장식이 주님이 오시기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참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즐비합니다.
이 또한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표지들입니다.
불교계의 전 총무원장이었던 자승 스님이 분신 공양에, 일세를 풍미했던 미국의 키신저가 100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입니다.
“겨우 0.1도 남았다, 파리 약속까지” 두바이서 어제부터 12.2일까지 전세계 198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COP28(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열리고 있으며, 총회가 열린 이날 유엔 상임기구는 “올해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4도 상승해, 2015년 파리협정에서 설정한 목표치 겨우 0.1도만 남겨놓았다.”는 전망을 발표했습니다.
이래저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회개의 시대요,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표지들의 연속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시간에 교황님은 “사도적 열정은 결코 구태(舊態)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복음이 오늘 여기서 살아 있도록 하는 증거임”을, “교회는 발코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소리치기보다는 세상의 거리 한복판에 나가 만남과 일치를 촉진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작은 형제회 규칙 반포 800주년을 맞이하여 보낸 축하서신에서 엊그제 교황님은 프란치스코회 형제자매들에게 “세상밖으로 나가 가난의 축복을 나누는 데 주저하지 말고 복음(Gospel)이 참으로 인간에게 기쁜소식(good news)임”을 알리라고 촉구했습니다. 수도자 성직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복음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더불어 교황님은 “참으로 믿는 이들은 비관주의에 물든 사회를 복음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Christians truely must fill pessimistic societies Gospel joy)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과 꿈이 사라진 어둠의 비관주의 사회를 밝힐 수 있는 것은 복음의 희망과 기쁨 뿐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적 삶을 펼치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촉구입니다.
새삼 복음만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21 현대판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세계 그 누구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예언적 사명 수행을 능가할 자는 없어 보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표지들입니다.
마치 대림초 장식이 주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표지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박함에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날에도 현실성을 띠는 예언적 말씀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이 흡사 종말의 때를 알리듯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 말씀 역시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회개의 표지이자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됩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두가 지나는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첫 번째 사자같은데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는 짐승은 바빌론 제국을, 둘째 곰처럼 생긴 짐승은 메디아 제국을, 셋째 표범처럼 생긴 짐승은 페르시아 제국을, 넷째 쇠 이빨을 지닌 짐승은 그리스제국을 상징합니다.
이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말그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원한 희망, 영원한 구원의 표지인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바로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그분을 이미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요, 내일부터는 그분의 도래를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의 대림시기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꿈과 희망, 비전이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그분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야흐로 다음 고백 그대로 하느님 나라를 살 때입니다. .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요즘 날마다의 체험이 저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수도원 숙소 “자비의 집” 문을, 또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마다 늘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초겨울 푸른하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잠시 황홀하게 합니다.
지상의 아름다움이 이럴진 대 천국의 하늘문이 열렸을 때 그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이 행복에 산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밤마다, 잠깨어
임생각나, 임그리워, 임보고 싶어
눈들어
바라보는 하늘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흰구름,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임
보고싶은 임, 바로 당신입니다
이 행복에 삽니다
나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늘 깨어 회개의 여정을, 하느님 나라의 여정을, 주님의 말씀과 하나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에 와서 피정을 2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2020년 1월 뉴멕시코 갤럽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개인 피정을 하였습니다.
미국 생활을 잘 하고 싶었고, 저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소개해 주셨고,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의욕적으로 신문사를 운영하려고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팬데믹이 생겼고, 계획한 것들을 뒤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두 번째 피정은 2023년 11월 뉴저지 라크랜드에 있는 돈보스코 피정의 집에서 ‘요한복음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피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피정이 개인 자유 피정이었다면 두 번째 피정은 강사 신부님을 모시고 단체로 피정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을 주제로 신학적인, 영적인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영적인 갈망이 있었던 65명의 피정 참가자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피정은 신앙생활에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줍니다.
하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계속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다면 다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에너지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기름을 채워야 달릴 수 있고, 스마트폰도 충전해야 사용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도 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야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여인은 ‘성모님’입니다.
영화도 처음 시작이 재미있어야 끝까지 보고, 책도 처음 부분이 재미있어야 끝까지 읽게 됩니다.
복음서를 쓴 요한도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여인을 ‘성모님’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모님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었던 성모님은 ‘승천’했다는 신심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만난 장소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축제의 자리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일꾼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웠고, 그것을 과방장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결합과 일치’였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완전성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현재 이 상황이 구원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메시아의 오심이 요구되는 상태입니다.
성모님은 신약의 새로운 하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실천하여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공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꾼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이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나의 잣대로 믿음을 정하곤 합니다.
나의 입맛대로 믿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나의 잣대와 입맛에 맞지 않으면 믿음까지도 버리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뜻대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표징에서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
이것을 실천하면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존재가 변하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표징에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영광은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존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일치되는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날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좋습니다.
성모님은 이 신비를 드러내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일꾼들의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했는지요?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감동하려고 합니다.
기쁨과 재미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자선’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심판의 기준도 ‘자선’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존재가 변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 “그분이 말씀하는 것을 실천하여라.”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복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들음은 가슴에 남아서 나를 행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들음입니다.
들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완전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습관을 지녀봅니다.
기억하고 가슴에 담으려고 하면 그 말씀이 살아납니다.
실천하게 되면 기쁨이 쌓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해 주는 첫 번째 표징의 의미입니다.
사실 저는 첫 번째 표징을 좋아했습니다.
술을 좋아했기에 바이런의 시도 좋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
그런데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그렇게 해서 유혹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당 아이들을 보며 저를 많이 반성합니다.
아이들은 작은 것도 소홀히 보지 않습니다.
저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 아이가 “왜 신부님은 흰머리가 많아요?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고 말합니다.
매일 보는 ‘저의 얼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으니 흰 머리카락이 나는 것이고, 스스로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씻다가 아이의 말이 생각나서 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습니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늙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모든 것을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하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도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그러려니 합니다.
어린이를 보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배웁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일화가 떠올려집니다.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교황님께서는 교황님이 되신 후에 운동을 할 수 없어서 너무 힘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몰래 비서 몬시뇰님과 함께 스키장에 간 것입니다.
스키 고글이 있기에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글 안에 습기가 차서 교황님께서는 잠시 벗었습니다.
바로 그때 교황님의 얼굴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순간 한 아이가 보고서, “아~ 교황님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부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 닮은 사람이겠지. 교황님께서 여기 계실 리가 없잖아?”
어린이가 진리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 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대홍수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작은 것도 소홀히 보지 않는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큰 기쁨을 안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 말씀에 더욱 충실하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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