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북조선의 "조선력사"의 공식표기는 여순봉기도, 여순항쟁도, 여순반란도 아닌 "여순병란"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발제글에 대한 회원들의 답변도 "역사적인 증언"자료로 매우 유효하다 여겨 그대로 올립니다..
본래 한장 한장의 사진 날짜와 장소, 상황 설명을 곁들이려 했는데, 너무 방대한 사설이 붙어 다 지우고 회원 여러분들의 분석 및 판단에 맡기겠습니다..양해부탁드려요..
(너무 끔찍한 사진자료는 제외하고 강도약한(?) 사진만 게재합니다)
10.19 여수순천사건(일명 14연대 반란사건) 약사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간단히 여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장교20여명을 즉결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 진압군경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좌익들이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민주주주의 노선을 한층 강화하였다.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입대 시 신원조회를 다양한 방법으로 하는 현재의 한국군과는 달리 입대 시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었다. 여기에다 당시 군과 경찰 사이에는 국가주도권을 놓고 가끔 무장충돌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관계가 안좋았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공무원등의 인사들과 경찰관을 살상하여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0여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을 포함하여 우파 인사와 그 가족, 양민등 700여 명이 살해되었다
10월 19일 : 여수를 점령한 14연대 군인 2천명은 그대로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오후에는 순천시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면서 1700여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과 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진압군의 출동으로 사건 발생 8일만에 진압되었다.
10월 21일 : 여순 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다음날인 10월 21일에는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10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을 명령하였다.
10월 22일 오후 3시 : 진압군의 순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미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으며, 읍내는 무장한 학생들과 좌익세력이 남아있었다.
10월 23일 오전 : 순천은 진압군의 손에 들어갔다. 진압군은 그대로 갈라져 광양 일대의 반군 주력을 섬멸하며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 2단계로 들어갔다.
반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서 매복, 정규군을 습격하여 사령관 송호성 준장(후에 월북)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사이 반군의 주력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여수는 일부 선동 세력과 지방 좌익 세력 및 학생 1천여 명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10월 25일: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으로 시작된 시가전은 이틀동안 계속되었다.
10월 27일: 여순사건이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협조자 색출이 시작되어, 좌익분자들에 즉결처분이 단행되어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이 사건의 발발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민주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즉, 군부내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숙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며 국가보안법을 제정, 학생들을 준군사집단으로 만드는 학도호국단 결성 등의 정책이 강화되어 후일 6.25남침시 군부내 좌익세력의 준동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점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숫자인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 시내 진입과 반란군의 방화 학살당한 경찰관과 의용대원들 - 치마가 올라간 앞 사진은 유명한 여순경 모씨 부상자를 치료하는 반란 진압군 여수순천반란 진압과 좌익숙군의 핵심인물들 - 백선엽 장군 이후락 김창룡등 무공훈장을 수여받는 함준호 대령(6.25개전 3일후 전사)과 한웅진 소령 14연대 반란 주동 육사3기 김지회의 처 - 제주출신 간호사 일명 빨간스웨터 조경순 1949년 9월 처형(좌측 옆이 호남지구토벌대 사령관 원용덕 철모쓴 이가 함준호 대령) 두아들을 살해한 좌익분자를 살려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6.25때 학살) 가족 - 가운데가 여순반란시 좌익학생리더 초기 여순반란 진압사령부원들 - 앉은이가 송호성(월북 배신자) 앞이 토벌경찰대 사령관 그 우측철모쓴 이가 백인엽 여수순천반란 진압당시의 한장면 가장 많이 알려진 여수순천 반란진압날의 사진 가장 많이 알려진 여수순천 학살군경시신과 남편 찾는 부인 반란학살자 색출은 피할 수 없는것 - 부역자 심사 반석리 김지회-홍순석 부대 토벌 루트 반석리 전적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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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 반복 않기를 빕니다.
수촌
비극 입니다
대산
민족의 비극,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 가볍게 다루어져서야....
東江얼굴 본지 오래 되오2015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