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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대림시기는 자신의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이들은 갈망을 품고, 타인들의 손에 이끌려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발치에 놓여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 속에 당신의 음성을 불어넣으십니다.
또 다가와 면전에 나와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군중이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에게는 빵과 물고기가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복음사가는 그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인 순례자입니다.
'참된 빵'인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그가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베네딕도의 수도규칙 58,7)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엽구나.”
(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산 위에서>
어쩌자고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다가 자리를 잡으셨을까요?
많은 사람이 당신께 오게 하려면 특히 장애인들도 당신께 오게 하려면 평지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 이 세상까지 오신 주님다운 사랑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창세기 2장에 의하면, 반대로 하느님은 굳이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당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구원도 저 높은 하늘에서 말씀 한마디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시지만,
굳이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하셨는데, 이것이 육화의 구원이고 육화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까지 내려오신 분이 어찌 오늘은 사람들이 오기 힘든 산 위에다 자리를 잡으시고 치유하시는 겁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에, 뜻이 없다거나 사랑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하신 것에, 주님의 뜻이 있고 사랑의 의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이고, 사랑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라면 산이란 하느님의 산을 말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니 산에 자리 잡으신 것은 하느님 계신 곳에 초대하려 하심이고, 이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는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을 통과하고,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본래 열망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평지나 걸으려는 것은 열망이 없는 것이고, 어려움이 클수록 그리고 큰 어려움을 무릅쓸수록 열망이 큽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고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최고란 가장 높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최고로 높으신 하느님께 가려면, 최고로 높은 산에 계신 하느님께 가려면 최고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옛날 유럽의 많은 성당은 언덕배기에 세워졌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데,
걸어 올라가도 힘든 그 계단을 신심이 큰 사람은 무릎으로 기어 올라갑니다.
아무튼 마태오복음은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루카 복음과 달리 산 위에서 ‘행복 선언’과 소위 산상수훈이란 것을 하셨다 하고, 오늘 병자를 치유하시고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곳도 굳이 산 위에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왜 호숫가로 가셨다가 굳이 산에 오르십니까?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가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일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이른 아침에 잠을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더 나눌 수 있는 사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주변에 음식쓰레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도 여전히 넘쳐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가끔 우리 식당의 음식 분배를 살펴봅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가져가면 좋은데 잔뜩 가져가서는 버리게 됩니다.
다 큰 성인인데도 절제를 못하고 아무 생각 없는 이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게 되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 덩어리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용서하시며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왜 자비로우실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시고 빵 일곱 개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십니다.
여기에 함께 등장하는 예수님의 특성은 자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과 자비가 무슨 관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더는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 정리라고 합니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통해 오빠는 동생의 서열을 확실히 정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인은 오빠 때문에 밥을 못 먹는 동생 개에게 몰래 밥을 줍니다.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밥을 같이 얻어먹어야 하는 개들 사이에서는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먼저 오빠 개에게서 뼈들을 빼앗아 없앱니다.
그리고 동생을 괴롭힐 때마다 자극적인 소리로 주의를 줍니다.
서열 1위는 인간임을 알려주고 본인들은 같은 수준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주인이 밥을 줄 테니 빼앗아먹을 필요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더는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KBS 생생정보통(2013.11.14)에서 유튜브에 보면 퀵보드를 타는 곰이 나옵니다.
아기곰은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아기곰은 곰보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네 발로 걷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육사는 그에게 퀵보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제작진은 곰돌이 새콤이와 인간 여자 꼬마 아이와 퀵보드 시합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하루 종일 퀵보드를 타는 새콤이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꼬마 여자아이는 웁니다.
‘동물에게 지다니.’
아이에겐 곰돌이가 경쟁 상대입니다.
그래서 곰돌이에게 자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곰돌이를 이길 수 있는 어른이 탔다면 어땠을까요?
곰돌이에게 지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곰돌이보다 능력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도 탈 수 있고 자동차도 몰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곰돌이에게 퀵보드 시합에 진다고 해서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 ‘300’에 보면 페르시아 장군이 항상 “나는 관대하다!”라고 말합니다.
관대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은 관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이겨서 나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이 있다면 자비로울 수밖에 없음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관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능력자라고 말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비롭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지 않으실까요?
그래서 신이 있다면 가장 자비로운 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다면 동시에 전능하실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자는 자비롭고, 자비로운 자는 능력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자비를 잃었습니다.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죄를 씻을 능력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능력이 없는 자는 상대를 이용하여 그 부족한 능력을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능력과 자비는 동의어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결핍과 고통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불러옵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게 다가오는 아주 작은 변화가 한가지 있습니다.
이웃, 동료, 형제들을 향한 시선의 작은 변화입니다.
전에는 경쟁의 대상이요, 시기 질투의 대상이요, 미움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깊은 바닥 체험도 하면서,
형제들을 향한 시선이 이제는 연민의 시선, 안타까움의 시선,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앞모습만 바라보지 않고 뒷모습을 예의주시합니다.
모순투성이요 결핍투성이인 그의 모습도 바라보지만,
다양한 한계와 부족함 속에 부대끼며 고생하는 가련한 모습도 눈여겨봅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기적도 체험합니다.
관계 안에서 언제나 티격태격하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는데,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지니게 되니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그러려니 너그럽게 봐주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이 불러오는 기적이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끼니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한 백성을 향해 지니셨던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엄청난 빵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하느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시고 잔잔한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시는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쌓아온 선행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마음에 딱 드는 예쁜 행동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 계명에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우리의 눈물, 우리의 고통... 이런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가 결국 구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결핍은 곧 있을 하느님 축복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모든 불행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변화될 하느님 위로의 손길이라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최악이라면, 머지않아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 있다면, 올라갈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눈물 흘리고 있다면,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면,
사랑의 하느님께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심이 확실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15,30-3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인데, 앞의 11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2-6)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병든 이들과 굶주리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은 예수님의 활동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입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의 입장에서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이 구원을 받은 일과 같겠지만, 그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일부 사이비 종파나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종파에서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는 신앙은 ‘자동응답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고쳐 줄지 말지는 주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결정하시는 일이고, 우리 쪽에서는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일으키는 어떤 불치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주님께 치유를 간청했지만, 주님께서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주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도였지만,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병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만심에 빠져서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체험할 수도 있고, ‘병’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꼭 병이 나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병’ 자체가 은총은 아닌데, 투병하는 과정이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체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5,32.35-37ㄱ)
이 이야기에서 ‘군중’은 사흘 동안이나 굶은 사람들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굶게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라 배고픔을 겪을 것이 예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지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는데,
이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에는 먹을 것이 모두 떨어져서 없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한 끼 식사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일이 아니라,
그들이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주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 라는 ‘영원한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하늘 나라 잔치, 꿈의 실현 - 성체성사>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서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시편 23,1-3ㄱ)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에 감격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엊그제 인용했던 교황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에, 어린이들의 꿈에 민감합시다!"
(May we be senstive to the hopes of the young and the dreams of children!)
비단 젊은이와 어린이뿐 아니라, 사람 누구에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희망이자 꿈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을, 꿈을 찾습니다.
희망이, 꿈이 없으면 죽습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꿈을 잃어 영혼이, 정신이, 마음이 죄악의 유혹에 빠져 피폐해지고 영육의 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을 때, 사람은, 영혼은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희망 중의 희망이, 꿈 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이자 하늘 나라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하늘 나라의 희망이 꿈이 생생할 때 참 기쁨에 참 행복입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이 바로 예수님이요 끊임없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거행되는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예전에 불암산을 배경으로 동녘 하늘 황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써놓은 <임께서도 아침마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임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시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祭臺)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시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모시고
태양 성체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16년 전 늦가을 써놨던 위 시와 더불어, 그즈음 가을 김장 무와 배추밭을 지나며 써놨던 다음 시가 재미있게 떠올라 나눕니다.
이 시를 읽으시고 "프란치스코 신부, 야해!" 빙그레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던 고(故)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 모습이 그립게 떠오릅니다.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잘 가꿔진 가을 채소밭
나란히 도열한 무 사나이들
옆으로 늘어진 무잎들 다 벗어버리고
저마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무 사나이들
근육질 알통의 팔뚝같기도 하고 쭉벋은 종아리같기도 하다
옆에서 넋놓고 바라보는 배추 처자들
얼마동안은 계속될 육체미대회
아침 산책때마다 봐야겠다.”
하늘 나라 잔치 꿈의 현실화처럼 생각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상상할뿐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여 살라 있는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바로 하늘나라 잔치의 꿈의 원형입니다.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지 가슴 설레게 하는 장면을 다시 나눕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모두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모두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무지의 너울을, 탐욕의 덮개를, 온갖 수치를 치워 주십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앞당겨 살아야 할 그날입니다.
얼마나 눈물나게 고맙고 아름다운 하늘나라 구원의 잔치인지요!
바로 이 장면이 하늘나라 미사잔치의 원형입니다.
우리 모두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인 하늘나라 잔치의 장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바야흐로 하늘나라의 꿈이 실현됩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은 미사 장면의 압축 같습니다.
주님은 모든 이들을 치유해주심으로 온전한 구원을 선사하시고 이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모두가 본래의 건강을 회복하니 말 그대로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1.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2.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3.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4.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분명히 주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치유도 이뤄졌을 것이니 바로 군중의 찬양과 감사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찬양과 감사를 통해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의 선물입니다.
영육의 치유와 더불어 배불리 먹이시니 성체성사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바야흐로 하늘나라 잔치의 풍요로운 꿈이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복음 장면입니다.
주님은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살리시니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입니다.
한마디로 고치시고 먹이시고 살리시는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나라 잔치 꿈의 실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은총의 대림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잔치를 통해 우리를 고치시고 먹이시고 살리심으로 당신의 하늘나라 잔치의 꿈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苦海)인생이 아닌 축제(祝祭)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주님, 저는 오래오래, 당신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니고 계신 연민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니고 계신 연민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들을 배불리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잔치를 예언합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익은 술로 ...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사 25,6)
주님은 우리의 굶주림을 잘 아십니다.
육신의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적 굶주림, 심리적 굶주림, 관계적 굶주림까지 인간 실존이 떠안고 살아가는 모든 허기와 결핍을 아시지요.
그분은 마치 어머니처럼 손수 푸짐한 상을 차려 자녀들을 먹이고 싶어하십니다.
무릇 어머니란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 존재니까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이사 25,8)
주님은 배만 채워주시는 게 아니라 마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저마다 겪는 한계로 고통스런 이들에게 더 캐묻지 않으시고 그저 위로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이사 25,9-10)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을 가장 큰 위안은 바로 그분의 현존입니다.
고쳐 주고 먹여 주는 일회성 행위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현존입니다.
무언가를 꼭 해주지 않으셔도 그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자체만으로 우리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없어도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이지요.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마태 15,29)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변방인 이방인의 고을로 가시어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 틈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에 사람들이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데리고 몰려 오지요.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다."(복음환호송 참조)는 말씀처럼 놀라운 축복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태 15,32)
예수님께서 연민의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불쌍한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불쌍한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상대가 어떤 처지에 있든 그에게서 연민을 느끼는 이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잘난 자식도 어머니에게는 안쓰럽고 염려되는 것처럼 예수님께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자녀의 배고픔은 어머니에게 형벌 이상의 고통입니다.
자식이 실컷 먹고 배가 불러 흡족해하는 걸 보는 것만큼 어머니에게 흐뭇한 일은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치유도 해 주셨고 말씀도 나눠주셨지만, 거기에 더해서 그들의 텅 빈 속까지 채워주고 싶으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뿜어 나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5,37)
제자들이 지닌 적은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감사 기도와 나눔으로 사천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일곱 바구니나 남게 되지요.
과연 구약에 예언되었듯, 주님께서 '이 산에서 잔치를 베푸시는' 현장입니다.
"배불리 먹었다."
그 흡족함을 관상합니다.
사람들도 만족스러웠지만 누구보다 예수님이 가장 흡족하셨겠지요.
자녀들의 만족스런 표정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예수님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충만하셨을 겁니다.
우리는 육신의 배부름을 넘어 영혼의 배부름으로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채워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아무리 부자에, 학자에, 권력가에, 영성가여도 주님께서 채워주고 싶으신 빈 구석이 없는 이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애틋한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 앞에서 공연히 힘쓰지 말고, 자존심과 교만과 아집을 내려놓읍시다.
그분께서 먹이고 치유하고 살리시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세상 어머니처럼 우리가 뜨는 밥 한 술이 그분께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일 터이니, 그분의 연민의 사랑이 원하시는 대로 머무릅시다.
주님께서 퍼부어 주시는 은총을 배불리 받아 먹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LA 신문 홍보 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세도나’에 다녀왔습니다.
세도나는 ‘기(氣)’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공항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부부는 2009년부터 세도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부부는 그동안 10,000명이 넘는 여행객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제로는 제가 105번째라고 합니다.
공항에서 세도나로 가는 중에 형제님은 세도나의 ‘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기운 때문에 무릎이 아팠던 분이 잘 걷게 되었고, 허리가 아팠던 분이 허리를 펴게 되었고, 눈이 나빴던 아이가 안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팡이를 가져야만 걸을 수 있었던 분이 지팡이 없이 걸었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들은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표징’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떴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그때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저는 세도나의 ‘기’를 느끼기 전에 부부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기운(靈)’을 먼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말에서, 그분들의 눈빛에서 진실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미사 때, 생활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가수들이 자매님의 친구였다고 합니다.
자매님도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맨하턴에서 살던 부부는 맨하턴에서의 생활도 모두 접고, 세도나에서 여행객들에게 지구의 기운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찬양 사도로 생활성가를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날 때면 요양원, 양로원엘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드렸고, 성당에서 초청이 있으면 음악피정을 해 드린다고 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우리는 부부가 마련해 준, 작은 공연을 보았습니다.
자매님이 예전에 불렀다는 ‘칵테일 사랑’을 들었고, 김민기의 ‘가을 편지’를 들었고, 생활성가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의 피아노 연주와 형제님의 색소폰 연주는 세도나의 땅에서 느껴지는 기운보다 훨씬 강한 하느님 사랑의 기운으로 느껴졌습니다.
형제님이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오늘 먹는 식사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면 무엇을 먹고 싶으신지요?’
형제님은 어머니가 해 주시던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매님도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게 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같이 간 형제님은 얼큰한 육개장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만두’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시고 싶다는 지극히 사제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드시고 싶으신지요?
세도나에는 분명 엄청난 지구의 ‘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도나에는 ‘기’ 이외에 다른 것들도 많았습니다.
100개가 넘는 전시관들이 있어서 그것만 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광산에 예술인들이 마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것만 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자연의 기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기, 예술의 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인호’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미사 때,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어떤 기운이 부러울 수 있을까요?
세상 어떤 기운이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 사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기운이 하느님께 전해졌고, 오천 명이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종합병원에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의사 선생님 3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얼굴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세 명의 의사가 협력해서 수술해야 하는 중환자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의 안 좋은 관계가 이어져서 수술 중에 대화도 나누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중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불일치와 불화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인 그람시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난 20세기 동안 큰 노력을 해 왔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우리 공산주의자들 역시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는 교회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면 교회가 무너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신앙인들 탓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을 가져오려는 악의 세력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력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 짓지 말고, 나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 됨의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장점을 바라볼 때는 돋보기를 보듯이 크게 보고, 단점을 바라볼 때는 망원경을 거꾸로 보듯이 작게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야 호숫가에 가셨을 때, 많은 군중이 모여왔습니다.
이 군중의 수는 남자만도 사천 명으로 나옵니다(마태 15,38).
그렇게 많은 사람이 며칠 동안 있었을까요?
자그마치 사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외딴 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들은 그곳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없었을까요?
또 불평불만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자기 뜻과 다른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되었으니까요.
일치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뜻을 따르면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만 늘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 이런 일치 안에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빵의 기적처럼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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