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처마를 나란히 하고 늘어선 집들로부터는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
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맞대고 길을 걸어갔다.
약간 쌀쌀한 밤이다.
망토는 타림 저택에 두고 왔기에 우선은 예비로 가지고 온 다른 것을 걸쳤다. 밋밋한 어깨
를 지닌 나로서는 망토만으로는 폼이 나지 않아서 어제... 가 아닌가? 오늘 아침 숙소로 돌
아오는 도중에 가죽으로 만든 어깨 보호대를 사서 지금은 그걸 착용하고 있다.
'검을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하지만 그 큰 거북이 등딱지를 깎아서 만든 어깨 보호대, 꽤 비싼 값에 구입한 건데 이번
일이 해결되면 찾아와야지.
길을 가파른 언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두운 길에는 단 한 사람, 검은 망토의 마도사가 가로등의 빛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가나, 두 사람?"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끈적끈적한 목소리다. 나와 가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가까이에 있
는 사람은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빛'을 밝히는 마도사 뿐.
그의 은색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끼며 등을 찰싹 하고 때렸다.
가로등으로 뻗어올린 팔이 유난히 길다.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릴 못 가게 잡는 건가? 기오 가이아 씨."
"아니."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녹색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했다.
"붙잡는 게 아니라 처치하려는 거다."
출렁출렁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발걸음으로 그는 길 한가운데로 나왔다.
몹시 낡아 보이는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가우리. 그거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준비해 둬."
나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거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빛의 검'이다. 기오나 세이그람같은 순마족에게는 물리적인
공격은 일체 통하지 않는다. 마법 공격도 효과가 적고, 마술에 따라서는 전혀 효과가 없는
것도 있다.
이 빛의 검, 물질적인 파괴력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의 정신 그 자체를 잘라 버리는 성질도
겸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존재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검이라 하겠다. 그런 연유로 마족에 대
해서는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뭐, 상대의 무기가 지나치게 거대한 경우는 별도의 얘기지만...
기오와 세이그람 정도라면 충분히 통용되는 무기이다.
"그 일은 네게는 무리지."
나는 조용히 내뱉었다.
"백가면과 함께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백가면? '얼굴 없는 세이그람' 씨 말인가?"
'얼굴 없는 세이그람? 그렇다면 그 가면 밑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단 말야?'
"그 분은 다른 일로 바쁘시다. 너희들을 쓰러트리는 데 나로서 역부족일지 어떨지 시험해
봐야겠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기오가 다가왔다.
"그만두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텐데."
나는 오른손을 조용히 들어올려 손바닥을 기오를 향해 활짝 펼쳤다.
주문을 외우는 나를 기오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그 웨이브!"
요마의 발 아래 지면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물론 이것으로 기오에게 치명타를 줄 수는 없다. 단지 눈속임에 불과하다.
'빛의 검'을 뽑아든 가우리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동시에 위로 뛰어오른 쌍가면. 가우리가 자욱한 먼지 속에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에르메키아 란스!"
연이어 주문을 날렸다. 기오의 착지점을 예측하고 발사한 정신을 쇄약시키는 마법창을 기오
는 공중에 뜬 채로 통과시켰다.
"이 꼬마 계집!"
그렇게 외치며 오른손을 크게 내리쳤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나는 옆으로 펄쩍 뛰었다.
윙!
벌레의 날개짓 소리와도 비슷한 낮은 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몇 올인가 잘리고 망토 끝이 입을 벌린 듯 뻥 뚫려 있었다.
묘한 불쾌감이 남았다.
독기의 충격파?
위험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정통으로 맞으면 비록 거인이라 해도 잠시도 버티지 못
할 것이다. 만일 손이나 발에라도 맞으면 독기는 상처를 통해 체내로 퍼져 이윽고는 희생자
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이 자는 결코 방심할 상대는 아니었다.
싸움을 오래 끌게 되면 그만큼 이쪽이 불리하게 된다.
"댐 브라스!"
나는 기술을 연속해서 발사하였다.
작은 빛이 부딪힌 곳은 고진동이 가해지며 자폭, 목표물을 분쇄, 파괴시켜 대지가 도처에서
쩍쩍 갈라지며 성대한 모래 연막이 피어올랐다.
그것이 서로의 모습을 덮어버렸다.
물론 이쪽에서는 기오가 있는 곳을 포착할 수 없었다.
마족에게는 사람의 악의와 적의를 민감하게 느껴 내는 능력이 있지만 지금은 나도 가우리도
기척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저쪽에서도 우리들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상대가 독기
의 충격파를 마구 날려 보내는 술수를 생각해 내기 전에는...
"거기냐!"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발 아래에 주문을 한 발 던진 후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나 몸을 움츠렸
다.
충격파가 연기를 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내가 있던 공간을 정확히 가르고 있었다.
"우왓!"
정확히 빗맞은 일격에 일부러 나는 비명을 질렀다. 마족을 속이려면 정말로 아픈 것처럼 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로 박진감 넘치는 연기!
"하! 싱겁기 짝이 없군!"
쉽사리 내 계략에 걸려들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기오 가이아. 한낱 전사에게 당할 리가
없지 하는 발걸음이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우리에 대해서는 이미 안중에 없는 것 같았
다.
요마는 '빛의 검'의 존재를 몰랐다.
그것이 내가 노리는 바였다.
조금 전에 혼자서 비명을 지른 것은 단순히 기오를 불러내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
가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보이질 않는군..."
주위를 둘러보는 쌍가면에게 기합소리조차 없이 흰 칼날이 한번 번뜩였다.
"으아아악!"
기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가우리의 일격은 요마의 기이하게 긴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것이 안타깝게도 기오의 목숨을 부지시켰던 것이
다.
"이∼ 노옴!"
뛰어내리며 왼손을 휘젓는 쌍가면.
충격파가 가우리를 덮쳤다. 아무리 그라도 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하앗!"
가우리가 기를 토해냈다.
나와 기오는 눈을 크게 떴다.
요마가 던진 충격파는 가우리가 받아 낸 '빛의 검' 몸 체에서 간단히 부숴져 인체에 무해한,
단지 서늘한 바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말도 안돼! '빛의 검'이라고?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경직된 채 기오가 외쳤다.
그야 그렇지. 이쪽에 이런 비밀 병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는 나
와 가우리, 그리고 할시폼 평의장 정도이다. 모르는게 당연하다.
덧붙여 말하면 기오가 모른 넋이 또 하나 있다.
즉 나는 훌륭한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을 겸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멍청히 서 있는 마족이 쇼크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에르메키아 란스!"
내 주문은 이번에야말로 요마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악!"
다시 아우성치는 기오 가이아.
상대의 정신을 쇄약시키는 이 기술은 인간을 상대로 사용하면 극도의 피로감에 휩싸여 한동
안 쇄약 상태가 계속되지만, 거의 정신 생명에 가까운 마족에게 있어서는 인간에 비하자면
실로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라고 할 만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가우리!"
"에잇!"
달리는 가우리를 쌍가면이 뛰어올랐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빛의 검은 아쉽게도 미치지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죽여 주마!"
그렇게 내뱉은 후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기오. 인간이 쫓아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쳇!"
'빛의 검'을 칼집에 넣고 가우리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흙먼지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만큼 요란한 대소동이 있었던 것이다. 근처의 주민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 일에 관
련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한 사람도 밖에는 나오질 않았다.
'현명 현명, 이쪽도 그게 좋아.'
아니, 언덕 위쪽에 조용히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가로등의 어슴푸레한 빛이 사내의 머리를 붉게 비추고 있었다.
"란츠?"
가우리가 말을 걸었다.
란츠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너... 너희들 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얼굴이 이상해, 너."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스윽 하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너희들... 디미아의 저택에 갔었지?"
"어?"
나와 가우리는 마주보았다.
잠깐 할시폼 평의장측에 붙은 게 탄로난 걸까 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태도가 이상했
다.
"무슨 일이야?"
"갔었냐고 묻고 있잖아?"
내 물음에 란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공포를 숨기기 위한 외침이었다.
"응. 갔었어. 하지만..."
"그럼."
다시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럼 그 짓을 저지른 것도 너희들이야?"
'그 짓?'
'그 짓'이 할시폼 씨를 구출한 일을 뜻하는가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저토록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짓이라니 뭐 말야? 대체 디미아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지? 분명 디미아 집에 가긴 했
지만 우린 아무짓도 안하고 바로 나왔어. 다른 사정이 있어서 여기 있긴 하지만..."
나는 우선 거짓말로 둘러댔다.
여기서 사실을 말해봐야 이야기가 복잡해질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납득시켜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무 짓도... 안했어...?"
귀신에 홀렸던 사람이 제 정신을 찾은 듯 태도가 급변하더니 어리벙벙한 어투로 그는 말했
다.
"그래, 맹세해. 아무 짓도 안했어. 진짜야. 내 눈을 봐."
나는 지긋이 똑바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였다.
여기서 갑자기 눈을 딴 데로 돌린다는 등 그런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에 휘말렸지만 아무래
도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유혹을 뿌리쳤다.
"부탁이야, 얘기해 줘. 디미아 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시선을 마주한 채 나는 물었다.
란츠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그 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난 모르겠지만... 어쨌든 따라와 봐."
나와 가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동시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달빛을 등지고 디미아 저택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기와 비슷한 긴장감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보기에는 어젯밤과 전혀 변함이 없었으나... 어젯밤 우리들이 방문했을 때와 지금과는 집을
휩싸고 있는 요기의 수준이 달랐다.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난 걸까.
"굉장한 분위기..."
무심코 가우리가 툭 내뱉었다.
그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음을 나는 보았다.
"자, 가보자. 내키진 않지만."
나는 일행을 재촉했다.
꿀꺽!
옆에서 란츠의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활짝 열려진 문을 통과했다. 무겁고 축축한 찬 공기가 내 몸에 휘감겼다.
4. 사건을 조종하는 사람은 누구? (2)
앞길과 문 안쪽은 공기도 틀렸다.
숨이 콱콱 막히는 적의, 슬픔, 절망감. 그것들이 절묘하게 뒤섞인 젖은 분위기.
즉-독기.
우리들은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데 익숙해 있었다.
현관문에 열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크."
문을 열자 왈칵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에 나는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날고기 냄새 같았다.
"이 냄새는 뭐지? 피비린내라면 알겠지만..."
가우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이쪽이야."
내키지 않는 얼굴로 란츠는 우리들을 저택 안으로 데려갔다. 이상한 냄새는 점점 더 심하게
다가왔다.
"어젯밤 갑자기 너희들이 모습을 감췄잖아."
'아마도 내심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중얼거리는 거겠지.'
"그럭저럭 그 괴물들을 해치우고 한숨 돌리고 보니 너희 두 사람이 없어진 거야. 놈들에게
당한 거라면 시체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밤에 돌아보긴 어려우니까 날이 밝는 대로
-오늘 아침에 나와 롯드 씨가 분담해서 너희들을 찾아보기로 한 거야. 어찌되었든 일단 낮
에는 타림 씨 댁에 돌아와서 서로 상황을 알려 주기로 했어. 그런데 약속한 낮이 되었는데
이번엔 롯드 씨가 돌아오질 않는 거야."
"롯드가?"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우리들은 물론 그런 사정이 있어서 돌아가지 못했지만 롯드까지 모습을 감추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가 없었어. 우선 나는 계속해서 이번엔 세 사람을
찾기 시작했는데.... 혹시나 하고 이 곳에 와 본 것이 저녁 무렵이었지. 즉 어젯밤 너희들은
어떤 이유로 디미아의 집에 찾아왔다. 그래서 붙잡혔던가 당했던가 어떤 마찰이 있었다. 롯
드 씨는 그 가능성을 눈치애고 역시 이 곳에 왔다가 같은 사건에 휩쓸렸다. 그런 일이 있었
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와 보니 인기척은 없는 대신에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벌벌 떨면서 들어와 봤더니 이 지경이었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젯밤 우리가 지나간 기이한 복도였다. 곳곳 좌우에 붙어있는 문중에는 활짝 제껴져 있는
것도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중의 하나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우아아아아. 이 게 뭐야."
바닥은 기묘한 색의 액체로 질펀하게 잠겨 있었다.
떨어져 깨진 무수한 크리스탈 병의 파편.
그 속에서 지금도 계속 꿈틀거리는 몇 개의괴물.
눈도 없고 털도 없는 고양이 같이 생긴 생물은 바닥에 옆으로 쓰러진 채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기이하게 짧은 수족을 버둥대고 있었다.
새하얀 색을 띈 박쥐 같은 것은 내장을 주위에 쏟은 채 혈관이 비쳐보이는 하얀 날개를 바
들바들 경련으로 떨고 있었다.
그 밖에도 뱀 눈과 비늘을 가진 새끼 강아지, 배에 생긴 십여 개에 가까운 촉수를 힘에 겨
워하는 새 등.
"뭐... 뭐야! 이게."
귓전에 들려오는 고함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가우리였다.
"디미아가 만든 합성체들이야!"
나는 무심코 같은 고함으로 답변해 주었다.
방 구석에 있는 한 책상 위를 빽빽이 메운 수상스러운 도구들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어느 나라의 마도사 협회 건물 안에서였다.
그 곳에서는 분명 애완 겸 호신용의 작은 용을 만들고 있었는데 지금 이 방에서 뒹굴고 있
는 생물들은...
"가자. 목적지는 이 곳이 아니야."
란츠는 두 사람을 재촉하였다.
물론 우리들에게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날 때마다 밥맛이 떨어지는 광경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취미는 없다.
열려 있는 문 안쪽의 광경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내가 봐도 뭔지 잘 모르겠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다양한 갑주와 무기를 몸에 박아넣은 점액같은 무언가...
무장한 채 미이라화 되어 있는 용병같은 사내들의 시체가 빽빽한 방도 있었다.
"저 소리는 뭐지?"
나는 멈춰섰다.
"소리?"
가우리가 물었다.
어디에서인지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 소리 말이지?"
란츠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들었어?"
그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거야... 내가 본 게."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 거..."
"뭔데? 대체 그 게...?"
내 물음에 란츠는 대답을 피했다.
그 곳은 우리들이 어젯밤 찾아왔던 바로 그 큰 문 앞이었다. 거대한 공간을 이용하여 강력
한 룸 브레이커가 쳐져 있는 그 방문이었다.
오늘 아침도 우리들은 이 문을 빠져 나왔었다.
낯익은 웃음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이 문 저쪽으로 청색의 디미아, 그 소리의 주인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웃음을 흘리는 놈이었지만 이번엔 한층 더 과장된 소리가 심상
치 않았다.
"여기야?"
내 물음에 란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다."
가우리가 우리들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문을 밀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 틈으로 미친 듯한 웃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실내에 한 발 들여놓고 휙 주위를 둘러본 가우리는 시선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고정되었
다. 내 위치에서는 그곳은 문의 사각지대여서 보이지 않았다.
"뭐지, 저 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나는 흘끗 란츠를 보았다.
그는 축 쳐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여기 있을게. 저런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가우리의 옆을 빠져나와 그의 시선이 고정된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서 그것은 뒹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전신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것은 한 개의 거대한 살덩어리였다.
드러낸 내장을 뭉개서 만들어 낸 것 같은 표면은 끊임없이 맥박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윽!
그것의 일부가 솟아오르더니 살점으로 만들어진 작은 뱀을 만들어냈다.
추악한 살덩어리에서 생산되니 뱀은 몸이 절반 정도가 완성된 시점에서 아치를 그리며 살덩
어리의 일부에 달라붙어 그것을 물어뜯으면서 살덩어리 속으로 다시 사라져갔다.
그런 일이 그 살덩어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뱀이 살을 물어뜯을 때 디미아의 커다란 살덩어리 중심에 붙어 있는 디미아의 얼굴이 내뱉
는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시육주법."
나는 중얼거렸다.
땀방울이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예전에 들렀던 한 왕궁에서 그 이름과 소문을 들었다.
'영단왕'으로서 유명했던 디루스 왕국의 디루스 2세-디루스 롱 가이리아가 이 세계의 무질
서의 원천이라 불리는 '북의 마왕'을 5천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떠난 것은 지금으
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와 병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북의 마왕'에 의해 도리어 화를 당했을 것
이라는 게 떠도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디루스 왕은 돌아왔다. 혼자서만 말이다.
날이 밝아 보초병들이 알현실에 들어왔을 때 그가 어느 새 도착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왕좌에 뒹구는 커다란 살덩어리가.
그것은 스스로 낳은 뱀에게 먹히면서 디루스 왕의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했
다고 한다.
인간으로는 취급할 수 없는 어둠의 주법으로 변형된 '영단왕'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한 병사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에 그들의 왕이었던 자에게 고통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구할 수도 편히 잠재울 수도 없어 중신과 병사들은 이 일에 대해 일체 입을 다물고 그것을
어딘가에 유폐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가이리아 성에서는 밤이 되면 '죽여 줘'라고 애원하는 디루스 왕의 목소리가 통풍구
를 빠져나온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가 있다고 한다.
이 주법에 걸린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것은 마법을 건 마도사가 죽을 때 뿐이다.
디미아도 같은 주법에 걸린 것이다.
나는 꾸역꾸역 밀려오는 토기를 필사적으로 참았다.
인간이라는 그릇 속에 있는 이상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주법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을 디
미아에게 사용한 것은 백가면 세이그람.
바깥의 공기가 얼마나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들은 디미아의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밤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그런데 설명해 주지 않겠어?"
잠시 후 란츠가 말했다.
"그 표정을 보니 그 게 뭐였는지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럭저럭."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가우리와 란츠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보이는 것은 달빛 탓만은 아니리라.
"저것은 '청색의 디미아'였어. 마족밖에 사용할 수 없는 주법으로 딴판으로 변해 버린 모습
이지만..."
"저 게 사람이었다고?"
란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들이 상대하려고 했던 자가 인간을 저런 모습으로 바꿔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마족이란 말야?"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자... 잠깐 기다려! 설마하니 너희들 마족을 상대로 일을 꾸미려는 생각이야?"
아무래도 이제야 그는 자신이 상대하려고 했던 자의 정체를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설마가 맞아. 애초에 우리들이 이 사건에 발을 내민 것도 두 마리 마족이 이 일에 간섭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어."
"두... 두 마리?"
눈을 부릅뜨는 란츠.
"농담 마! 그런 자를 상대하는 날에는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하다구! 너희들 제정신이야?"
"물론."
가볍게 말하는 나를 보며 가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란츠가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희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물론 평범한 용병과 마도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 말이 맞는데... 뭐, 평범한지 어떤지는 별개로 하고.
입을 열려는 나를 란츠가 허겁지겁 가로막았다.
"아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 어쨌든 나는 이 산에서 내려갈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아니! 아무 말 하지 마! 안해도 된다구!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상관없어! 그
렇지만 그만둬! 나쁜 애라고 욕하지 마! 죽어버리면 그뿐이잖아! 알겠어? 그만둬! 나는 손
뗐다구!"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도중에 단 한번 멈춰 서서 뒤돌아보며
"알겠어? 그만둬!"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더니 그대로 저녁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와 가우리는 말없이 그를 전송했다.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기 보다 그 자리에서 '나도 싸우겠어'라고 말하는 편이 실은 더
난처한 일이다.
그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는 마족이었다. 그도 가우리도 마법을 쓸 수 없고 '
빛의 검'은 하나밖에 없다.
결국은 아무리 그의 실력이 좋아도 앞으로 우리들이 일전을 벌이려는 상대에 대해서는 전혀
전력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리나."
란츠가 사라진 어둠 속을 주시하며 가우리가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그 마족들은 이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응?"
나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어머!"
무심코 큰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마족들을 움직이는 자는 분명 디미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라색의 타림!'
나는 란츠가 모습을 감춘 쪽에 눈길을 주었다.
타림 저택의 방향으로.
"쫓아가자! 란츠를!"
"뭐?"
가우리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가 위험해!"
그렇게 말하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4. 사건을 조종하는 사람은 누구? (3)
"리나,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이 위험하다니?"
나를 따라 뛰면서 가우리가 물었다.
"이도저도 아냐! 이번 사건의 흑막은 다름아닌 그 '보라색의 타림'이라구."
"뭐라구?"
가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순간 멈칫하다가 허겁지겁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게 무슨 말이야?"
"즉 그는 디미아를 이용해서 할시폼 씨를 가둬놓긴 했지만 정작 간단하게 처치할 생각이었
던 디미아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겨운 상대였던 거야. 그가 룸 브레이커 결계 곁에 있
는 이상, 두 마리 요마를 보내도 쓰러뜨릴 확신은 별로 없었지. 그래서 타림은 인간 용병을
이용하여 그를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뛰면서 설명하자니 다소 힘이 들었지만 우선 지금 설명을 해두지 않으면 가우리는 사정도
모른 채 적과 칼부림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칼솜씨에도 허점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내 뒤를 달리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생각으론.
"롯드를 고용해서 우리들을 찾아냈지. 하지만 우리들은 일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래
서 그는 마족을 이용해여 우리들을 도발시킨 거야. 만일 마족에게 항복하고 그래서 얌전히
물러설 상대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감쪽같이 속았다는 거야?"
"그렇지."
나는 내심 이를 갈았다.
"자기가 어디선가 슬그머니 만든 인조 인간과 합성 괴물들에게 집을 습격하게 해서 우리들
의 실력을 시험해 본 거지. 그리고 쌍가면 기오가 '얼굴 없는'이라고 부른 그 백가면 세이그
람을 이용해서 우리들을 디미아 집으로 끌어들인 거야. 마치 모든 일을 꾸민 자가 디미아인
것처럼 보이게 해서... 그래서 우리들이 디미아를 쓰러뜨리는게 그가 짠 계획이었겠지만."
"우리들은 너무 쉽게 함정속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지."
"그렇지. 그 점이 그가 사전에 계산하지 못한 점이었어. 우리들은 거기서 평의장과 만났고
그를 꺼내 주었지. 어떻게 해서 그걸 알게 된 타림은 일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여 증인인
우리들과 룸 브레이커를 부숴뜨린 디미아를 한번에 '처분'하기로 한 거지."
"그럼 할시폼 씨도 위험하지 않을까?"
"아니, 그를 죽이지 않고 가둬두기만 했던 데는 반드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렇다면 사태는 바뀌었다고 해도 바로 생명의 위험이 닥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보다는
란츠가 문제야."
나는 말했다.
아직까지도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들보다는 이 마을 지리에 훤한 그였다. 지름
길, 뒷길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타림이 흑막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 만일 그런 상태로 그 자에게 태연히
돌아가서 정중하게 지금까지의 경황을 얘기라도 해봐. 타림에게 있어 그는 이제 더 이상 쓸
모가 없거든. 게다가 사정을 약간이라도 알고 있잖아. 그러니 그 자리에서 처단될 우려는 충
분히 있어."
"하지만."
"뭔데?"
"참 잘도 변한다. 너의 그 '날카로운 추리'란 건."
뜨끔!
당황한 나머지 발이 꼬여 나는 큰 대자로 벌렁 엎어지고 말았다.
꽈당!
"으그그그!"
'사람을 밟고 가면 어떡해, 가우리.'
얼굴을 들자 그는 조금 앞쪽에서 뛰어가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여어, 미안. 힘이 넘쳐서 멈출 수가 없었어! 내 뜻이 아냐."
'네 뜻이 아니라고? 그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일어서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면 당연히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도 바뀌게 되는 거라구. 게다가 이건 '추리'가
아니라 아직 '추론' 단계니까."
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우리.
"어떻게 틀린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일은 타림 가에 가서부터란 말이지?"
"그래, 서두르자."
가슴 속에 묘하게 불길한 생각을 품은 채 나는 어둠에 가라앉은 길을 달려갔다.
아틀라스 시티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어."
우리는 그 자리에 말을 잃은 채 굳어지고 말았다.
현관 문을 연 그 안쪽, 타림 가는 이미 묘지로 변해 있었다.
숨이 콱콱 막히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실로 '피바다'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피웅덩
이 속에 쓰러진 용병들.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느라 나는 입을 막았다. 아수라장은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이 강렬
한 피비린내만은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하긴 이 냄새를 '좋은 향기' 라고 느끼게 된다면 꽤나 위험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타림이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그 중간에 드문드문 언젠가 밤에 습격해왔던 인조 인간인 거
구의 사내들이 쓰러져 있었다.
'설마 일이 다 끝나서... 학살...?'
"란츠는?"
가우리의 물음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안으로 가 보자."
그렇게 말하며 발길을 옮겼다. 복도를 돌아 활짝 제껴진 로비의 문을 들어서자... 나뒹구는
가구와 용병들의 시체 속에서 그가 쓰러져 있었다.
아직 숨이 멈추진 않은 듯 배를 누르고 나지막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자는... 롯드였다. 피에 물든 검을 내려뜨린 채 그는 음흉한 시선을
우리 쪽으로 향했다.
"이제야 겨우 싸울 수 있겠군."
알고 있다. 그는 가우리에게 말한 것이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같은 한패인 채로는 너와 싸울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피묻은 칼을 한번 흔들어 달라붙었던 핏방울을 떨쳐냈다. 벽에 걸린 촛
대의 불빛에 반사되어 엷은 보라색으로 빛나는 칼의 몸체가 드러났다.
"과연, 그래서?"
가우리가 말했다. 그 말 속에는 흥분을 참으면서도 노기의 감정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타림을 떠나 할시폼에게 붙었다."
뭣!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렇다면 이렇게 만든 자는... 하지만, 그렇다면...
왜?
"과연, 멋진 삶인데. 검도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거로군."
스윽 내 앞으로 나오는 가우리. 아직 손을 검에 가져가지는 않았다.
롯드의 시선이 조용히 내쪽으로 옮겨졌다.
"이유가 부족하다면 그 여자애도 베줄까?"
"그럴 필요는 없다."
가우리가 대답했다. 나는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가우리가 처음 내뱉은 '기'에 압도되어서였다.
"리나. 란츠에게 회복 주문을 걸어줘. 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잘못되어도 끼어들지 않을게."
나는 그 말을 하고 란츠 옆으로 다가갔다. 느닷없이 한 칼에 쓰윽 하고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그의 눈에 비치는 사람은 가우리 단 한 사람.
란츠의 상처가 꽤 깊었으나 아직은 괜찮았다. 나는 그의 상처에 가볍게 손을 얹어 '리커버
리'의 주문을 외웠다.
"여기서 할 건가?"
"장소는 가리지 않는다."
롯드가 대답했다.
가우리의 손이 검 손잡이로 뻗었다.
일순 자욱한 피비린내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긴장이 로비에 퍼졌다.
꿀꺽.
나는 조용히 침을 삼키며 어느 사이엔가 중단된 주문을 다시 읊조렸다.
가우리가 뽑았다.
롯드가 달려갔다.
두 개의 은빛이 교차하였다.
롯드의 공격을 받아넘기자마자 살짝 피하면서 가우리의 칼이 상대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들
어갔다. 롯드는 몸을 피해 빗나간 검을 뒤집었다. 롯드의 검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허겁지겁 검을 끌어당겨 일격을 받아내더니 돌연 방향을 바꾸었다. 가우리는 다리를 아래서
위로 찌르려는 공격을 자신의 검으로 누르듯 막아냈다.
그대로 롯드의 칼을 따라 미끄러뜨리듯 검을 들어올렸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 롯드는 가볍게 몸을 당겨 상체를 뒤집으며 이것을 피했다.
두 사람이 서로 떨어졌고 내 눈은 간신히 두 사람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었다.
조금 전에 가우리에게 '끼어들지 않겠다' 고 했지만 이해서야 끼어들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어설픈 참견을 했다간 오히려 가우리의 발을 잡아끌기 십상이었다.
다시 두 사람이 달렸다.
롯드의 머리 위로 날린 일격을 받아 내는 가우리. 롯드는 재빨리 찌르기로 바꾸었다.
가우리는 다시 받아냈다.
연속해서 덮쳐오는 롯드의 공격을 어떻게든 받아넘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조해진 쪽은 롯드였다.
오로지 방어 태세로만 맞서면서도 가우리의 '기'는 점점 더 팽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시도할 생각인 듯했다.
롯드도 그 걸 알고 있기에 공격을 늦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핫!"
가우리가 기를 토해냈다.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빈틈이 생겼다. 그 걸 놓칠 롯드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노리고 있던 기회였을 것이다.
아래로부터 쳐올라오는 가우리의 칼과 농후한 살기와 함께 롯드의 검이 용솟음쳤다.
쌍방이 서로의 검을 피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저러다 서로 찌르겠어!'
그러나
쨍!
맑은 금속음과 함께 롯드의 검은 도중에 진로를 바꾸고 가우리는 재빨리 왼쪽으로 뛰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대치하였다.
롯드이 검이 짧아져 있었다. 칼이 반 가까이 꺾여, 아니 끊어진 것이다.
가우리가 노린 것은 롯드가 가진 검이었던 것이다.
롯드 자신을 노리면 그는 서로 찌를 각오로 덤벼들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그러나 롯드도 또한 자신의 검이 잘려 날아간 것을 깨달은 순간,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가
기술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 잘린 끝이 재빠르게 뛰어오르던 가우리를 가볍게 스쳤다.
검을 잡은 가우리의 오른팔 소매 부근에 핏물이 번져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약간 불리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가우리는 겁 없는 웃음을 지었다.
"처음이다. 진정으로 맞설 만한 상대와 만난 것은."
롯드도 또한 웃음을 띄었다.
처음으로 그가 보여 준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도무지 지금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흡족해 하는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간다."
가우리는 양손으로 검을 꽉 쥐고 검도 자세를 취했다.
롯드는 말없이 몸을 낮춰 외날검을 오른쪽 어깨에 짊어지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가우리가 달렸다.
롯드의 몸이 뻗어올랐다.
칼과 칼, 기와 기가 거칠게 부딪히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 튀어오르듯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가우리의 태세가 무너졌다!
오른손에 타격을 입은 만큼 힘에 밀렸는지 혹은 착지시에 피웅덩이에 발을 빠뜨렸는지...
롯드가 뛰었다.
받아내기에도 도망치기에도 태세는 불충분했다.
가우리는 바닥을 차면서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머리부터 롯드를 향해 돌진하는 형태로.
재빨리 검을 내려치는 롯드.
검이 본래의 길이었다면 그 잘린 끝이 가우리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능숙하게 반사적으로 세게 내지른 검은 금속제 어깨 보호대를 가볍게 그을 뿐이었다.
빗나갈 듯한 가우리의 일격이 롯드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너 제법 강한데..."
롯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운 채 자신을 벤 전사를 동경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
었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선 채 검을 쥔 손이 축 처졌다.
"언제고 다시 한번 너와 싸워보고 싶다."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그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
려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은 사양하겠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는 가우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래? 유감이군."
휘익 하고 그의 몸에서 기가 빠져나갔다.
그대로 휘청 무릎을 꿇었다.
꺾여진 자신의 장검에 몸을 기댄 채 흑전사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첫댓글 사실 내가 조종해뜸. 흑전사가 죽엇대
흑전사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