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시인>>
<<윤성택 시인의 양력>>
*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 2001년 “문학사상”에 시 “수배전단을 보고”외 두편으로 등단.
* 2015년 올해의 젊은 시인상, 2019년 제9회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시집 : 『리트머스』『감(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시인의 대표 시>>
감感에 관한 사람들/윤성택
바람의 궤와 함께 이어지는 색감에서
사위를 움켜줜 채 회전하는 윤곽,
신화의 조난 같은 새벽이 다가오는 사이
빛은 여러 개의 가설을 파먹는다
가지마다 행성을 밝히는 액정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접속자들
후둑 떨어지는 홍시의 여정을 귀에 들려주면
불면의 시공간이 채집된다
녹슨 자전거 바퀴 속을 항해하는 먼지들은
이제 외계의 답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득히 계통에 없는 유기물로 스며든 후
나선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을 때
감나무에서 붉어지는 봉분이 있다
핏빛 중력이 서서히 끌어당기던 언 땅 밑 항로를 가다보면
나직이 어느 불행과 조우할 수 있을까
새벽녘 얼굴만 비추는 액정에는
파리한 안색이 걸려 있거나 주술처럼 손톱이 부딪쳐온다
별들이 지독한 건 제 빛을 보내
그 눈빛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붉은 탯줄에 매달려 양육되고
고인은 외장 하드에 검은 시신경을 연결한다
희뿌연 배경 붉은 화소의 감나무는
광속의 주파수를 따라
운명은 다만 서로 돌아다보는 거라고
나뭇가지 갈레로 뻗어가고 있다
감과 감의 경계는 응시이다
기억 저편/윤성택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아틀란티스/윤성택
바닷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구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땅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차갑게 수장된 심해의 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웅크린다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운로드/윤성택
어느 먼 생각이 깊어져
봄꽃들이 핀다고
그렇게 믿은 적이 있다
잎잎의 주파수를 열어놓고
가혹한 지구의 들판에서
뿌리가 흙 속을 가만히 더듬을 때
화성에는 탐사로봇 스피릿이 있다
다 닳은 드릴이 바닥에서 헛돌고
무섭게 휘몰아치는 돌풍이 불어와도
교신을 끊지 않는다
카메라 속 황량한 표면,
암석의 촉감이 데이터로 읽혀온다
길을 걷다 문득
까닭 없이 꽃을 만져보고 싶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고 다만 멍하니 멈춰
나는, 송수신이 두절된 탐사로봇처럼
결함을 복구하느라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하는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꽃의 향기에 취해 아뜩한 내가 들여다보는
나의 마음은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햇볕이 내리 도달하는 이 봄날,
다운로드 되듯 옮겨온 생각이
혼연일체의 새순에 돋는다
안개/윤성택
밤이 그치고 숲의 깊은 곳까지 서걱거리는 안개가 불빛을 들어마신다
구부정한 가로등이 알약 속으로 들어가
어둡고 투명한 병을 만나면
고통도 잠시 별이 될 수 있을까
아침은 불면不眠 밖이 만져져 까칠하다
메말라갈수록 잎 하나에 더 집착하는 화분 앞에 섰을 때
모든 길은 내가 가보지 않은 날들에 가서 시든다
책장 안에서도 맨홀 안에서도
어느 바람 속에서도
이대로 끝나간다는 불안이 말라가는 동안
나에게만 전하기 위해
그때 그 잎이 창문을 떼어낸다
터널 같은 안개 속에서 무시로 미등이 다가와
충혈을 불리며 무게 없이 둥둥 떠다닐 때
죽은 우듬지 촉수에서 정전기가 이는 상상
잊혀진 폐가에서도 새벽엔 사람이 모인다
아직 사라지지 않는 안개에 묻혀 있는 낙엽들이
나무를 향해서 수액을 밀어보냈을 뿐
그 살아 있는 순간을 위해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한다
알약 속에 켜져 있는 안개
창틀에서 뻗어 온 가장 시든 잎이 숨을 몰아쉰다
슬픔 감별사/윤성택
우울 무렵 전망대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본다
사각 케이지 속에서 각기 빛나는 불빛,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 같다
슬픔에도 암수가 있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 슬픔이 암컷,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슬픔이 수컷이다
암컷은 세상의 산란용이고
수컷은 내 안의 폐기용이다
둥근달이 전깃불처럼 켜졌으므로
감별대에 올려진 것처럼 아뜩해졌다
슬픔은 내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믹서기로 갈 듯 분쇄시켜야 할지
슬픔을 낳고 낳아 기쁨의 유통을 도와야 할지
감별의 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쳐 비비고
달빛이 정수리의 돌기를 들여다본다
검은 상자 너머
부숭부숭한 노랑이
유리창마다 연약하게 번지고 있다
붐비는 공중/윤성택
밀봉된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판을 누른다
스위치 윤곽이 희미하다 비석처럼
얼마나 많은 습관이 새겨진 것인지
닳아가는 과거 같은 어떤 기판에선
생이 오래 기념되기도 하지만,
먹구름 구르릉거리는 수직통로를 따라
전 주인의 고지서처럼 낯선 누군가도
얼마간 지문을 남겼을 것이다
지붕 없이 창문만 내 것인 볕은 방향이 바뀌고
벽지에도 서서히 금이 생기는
이 아파트에서는 시간도 비틀려 휜다
먼 생의 손끝이 부르는 시공간이 층층이 열린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의 심폐가 계단을 깊게 들이마시는 저녁,
한 평 공간 속에서 몸이 솟구치는 동안
거울 안에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
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이 겹친다
밤마다 가방은 택배처럼 귀가하고
TV는 통속이 머금은 얼굴에 빛을 뿜는다
소음 번지는 콘크리트를 올려다보며
어떤 이들은 박힌 못처럼 잠들지 못하고
가만히 허공에 떠 살다 갈 이력들,
사람을 길어 올려 조금 더 밝아지는 창문처럼
사십 미터 높이 불빛이 붐비는 무덤이 있다
응시/윤성택
여행의 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기차의 속도로 풍경에서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은 그림자에 호기심을 입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삐져나온 것들은 종종, 당신이 조절할 수 없는 나의 조도이거나
공중을 열어 빛을 쏟아지게 한 인상의 절벽
눈目 속에는 깃을 떼어낸 갈매기가 파닥인다
타인이 초면 너머에서 짙은 안경을 벗는 동안
나는 기호가 없어진 이정표를 보며
가을로 가는 이명을 앓는다
기다리는 편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편지이기 때문이다
계절에 착시를 달아준 저녁놀
가뭇없이 스러지는 어둠은, 응시가 편견이다
녹슨 달이 저 깊은 바다로 사슬을 내리는 곳
두꺼운 점자책 무늬처럼 촉觸으로 산란하는 눈目
당신이 새겨놓은 먼지에 대한 위로이다
낯선 포구 폐선 근처 빈병 속에는
떠밀려온 빛이 들어있다
가령 영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윤성택
지금 날씨는 어느 냉장고 속입니다
한 여름날 영하를 떠올리듯
이 저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이
플러그를 꽂고 있는 걸까요
왠지 모를 그리움이 설핏 껴오는 게
이 추위의 겉봉입니다
밤에 편지로 어두워본 적 있는 사람은
당신의 배후를 동봉한다는 것입니다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새로 꺼내
한 줄마다 심장의 피를 흘려보낸 적 있습니다
몇 줄 지나고 나니 사연에 혈색이 돌고
나는 점점 새벽으로 창백해져갑니다
나는 당신에게로 생각이 입혀지다가
당신 안으로 나를 들여놓습니다
북향의 자취방 작은 창으로 깃든 빛줄기를
여기에 적습니다, 가령 영하는 그날의 체온입니다
필체를 나눠가진 주말은 갔고
그날은 푸른빛으로 인화되는 소인입니다
날마다 나는 영하처럼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해후/윤성택
꼭 한번은 누구도 모르게 자신의 일생을 만나고 간
사람들에게 타인을 입힌다, 다시 만난 듯
인상이 호감을 조금씩 떼어내며 서로의 구면이 된다
폭우처럼 밀려오는 말[言]의 기압골에 표류하는 소리 소리들
금을 새기듯 번쩍번쩍 의미가 얼굴을 바꾸는 중이다
이때 가장 빠르게 눈동자로 옮긴 둥긂에서 빛이 스러진다
기억의 뒷면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여행 온 사람이 지금 태연하게 웃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안은 그대로 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눈을 부릅뜨는 것보다 때론
그 사람의 눈에서 처음 보는 나를 쓸쓸하게
떠나보내주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저녁의 질감/윤성택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수첩 속에는 휘청거리는 문장들이 닻을 내리고
저녁의 심지 같은 쓸쓸한 몽상만이 끝없이 흔들린다
가까이 만지기 위해 손 내미는 회색 테트라포드,
삐죽빼죽한 새벽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나는
내 빈틈으로 드나들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등대는 하얀 기둥을 열었다 닫으며
물결에 열주를 드리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조난신호처럼 불빛을 축조하는 밤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 피아노를 생각한다
검은건반의 음은 더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썰물이 휩쓸고 간 해변에 장갑이 떠밀려가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가 운명처럼
나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안개가 꿈꾸는 부두 너머 길이 있고
가보지 못한 날이 열려 있는 가방이 있다
모든 길이 사라진 저편, 맹렬하게 소멸해가고 있는
한 점은 다시 누군가의 눈目이 될 것이다
신파/윤성택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들어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기억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 난다
데자뷰/윤성택
나에게 스미면서 쇄도하는 새벽
빛은 운명을 가볍게 액세스하며 전원 속
비밀의 순간들을 인증한다
진실은 소멸의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
모니터의 검은 점을 통과해 쏟아지는 이메일의 활자들, 점멸하는 입자의 배열이 공중으로 흩날린다 문을 열면 아주 먼 곳일지라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우리의 시간은 종종 다른 곳에 있다
마음은 생각이 광속도로 지나가는 경치이다
나를 데리고 가요 그리고 벌판에 세워두는 거죠 돌 더미 위 색색의 깃발처럼 흩날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거예요 깊은 숨을 쉬며 당신과 나는 초당 스물네 번의 깜박임으로 알아볼까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이 되어 촤르르 지나고 있어요
무거운 잠수종을 뒤집어쓴 바닥의 수심은 깊다 지상에서 내려온 고무호스로 피가 흐르는 소리, 푸른 기포가 열렸다 닫히면 수면으로 떠오르는 물방울이 씨앗처럼 발아한다 눈동자의 실핏줄이 압력에 불거지며 뿌리로 옮아가는 동안 세계는 점점 사라지는 것일까
눈물이 밀려드는 예감에는 방향이 있다
마지막 지점을 관통하는 실루엣
주위는 나를 읽어들인다 직진하는 빛처럼
기억이 막을 뚫고 소리를 끌어모은다
휘감기는 허공에서 차츰차츰 이뤄지는 형체,
나는 이제 그곳에 있다
떠도는 차창/윤성택
조금씩 말라가는 것은 금 간 화분 같은 상점,
휘감던 뿌리들이 틈틈마다 창문을 틔운다
누구나 타인을 데려간 시간 속에서
그리운 이름이 자신을 데리고 나올 때가 있다
창문은 산화된 필름처럼 하나의 색으로
한 장면만 비춰온다, 빛에 갇힌 거리를 바라보지만
가깝거나 먼 네온에 잠시 물들 뿐
기억에게 이 도시는 부재의 현기증이다
몇몇이 버튼을 누르듯 과거에서 내리고
종점까지 밀려가는 버스를 탄 사람은
머지않아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는 밤
당신은 눌러줄 때에만 붉은빛이 스미는
심장이거나 기다림, 벽이었다고 어느 손이
나를 불러들인다 몇 년 전 바람에도
잠시 잠깐 먼 거리에 붉은빛이 돈다
모든 길은 무심하고 쓸쓸한데
어느 따뜻한 멀미가 길을 멈추게 할까
아직 지나치지 못한 정류장을 위해
불 꺼진 창문처럼 과묵한 나무들이
구부정하게 줄 서 있는,
막차/윤성택
밤이 길을 보낸다
속도와 속도의 빗줄기는
텅 빈 시간 속에서 쉴 새 없이
먼지로 흩어진다
길의 끝에는 내가 기억하려 한
저녁이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생은 위태로우나
그저 쓸쓸한 점멸로
길 위를 추억할 뿐이다
나는 멀리서 이 밤을,
이제 막 당신을,
통과하는 것이다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윤성택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해 간다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다
어느 민박집에 두고 온 칫솔이 잊혀지지 않는다
칫솔모가 눌린 채 닦아내고 있을 한때의 적요
과속 방지턱이 다가올 때마다 글자는 삐걱거리지만
물결 소인消印처럼 수첩은 어디론가 페이지를 열어 둔다
오래된 소읍에서는 바람이 묵어간 뒤뜰에도 수취인이 있다
떠나지 못한 날들 속에서 문장은 위독해지고
카메라는 나의 한쪽 눈을 목록으로 만들 것이다
차창 커튼을 스치는 소리는 여행의 첫 줄
누군가 뒤척인다
다가오는 나무들은 저를 흔드는 바람에
빛을 털어내다 뒤편으로 사라져간다 요약하면
어떤 간이역에서는 그늘과 슬픔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
내 눈으로 바라본 희붐한 새벽을 편지라 명명할 때
그 주소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시간의 오지다
화가/윤성택
말이 사라진 날부터 표정에 물감을 들인다
조용히 지나온 길이 비치는 날에는
내막을 알지 못하는 배경만 환해진다
너무 선명한 느낌이 진득해서 생각이 곳곳에 개어 있다
저녁은 방금 켜진 가로등의 입자를 만져본다
편지는 밤마다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포교하는 것이어서
글자에 스며 나온 수만 번 심장의 깜박임이 색으로 수신된다
기다림의 명도는 예감보다 강렬하다
첫 문장을 따라 섞이는 활자들의 질감처럼
운명의 바깥에서 습기와 바람을 넣어주면 그 운명은 표구된다
문득 자기 시선을 깨닫는 어느 날의 지점,
그때는 눈을 열고 다가가 붓으로 그려낼 수 있다
빨려오듯 빛을 기워 넣는 터치를
경계의 근처까지 온 색은 그렇다
아주 어둡고 말이 없는 제 안의 추상
은하/윤성택
그녀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 밤
이름이 몸의 외피에 잠시 깃들다 간다는 걸
자백하듯 서로가 알게 되지만,
다만 어느 시간에서
어느 장소에서
분포된 확률과 마주한다 문득
수천억 개 빗방울과 같은 부호들,
파문은 기억을 비추는 별점(占)이다
귓속 진동을 가로질러 이동한 당신의 범람
희미하게 번지는 암흑이 은하에 이르러 보인다
처음 걷던 길 우리는 우산 촉을 벽에 대고
촉촉한 약시의 거리를 녹음했다
그 곳에 핀 문장에 나무가 자라면
은하는 아직 발음되지 않는 과거로 뿌리내린다
혀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새가
내 몸 안을 움켜와 행간에도 천체가 떠간다
별들이 모여 사는 운세처럼
잊는다는 건 우연에게 순전하기 때문이다
궤도를 따라 이 밤,
그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생각이 태어나고 죽는 그 느낌
은하
빗소리/윤성택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건 그 때 내가
오늘 내리는 이 빗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
우산 없이 걸었던 수많은 장면이
환등기 안처럼 환해지고
그 빗소리에 음音이 흐른다
그곳이 있어서 생은 비릿하다
기억에 빗소리를 오버랩시킨다는 것은
빗속 너머 시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거기로 나를 지나게 하는 것이다 빗소리는
빗방울의 부서짐이라기보다는
흩어지면서 이루는 하나의 공명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
그 인에는 반복되는 리듬이 들어있다
빗소리가 음유에까지 읽히면, 비는
기온과 풍경에 따라 톤을 달리하면서
제 자리를 찾아 시간을 열어간다
떠올리는 사물, 그때의 습기까지 조용히 복원해낸다
생각이 생각 위에 떨어져
마음에 왕관 같은 문양이 이는 것이다
구름의 전원을 사용하여 누군가의 순간을 재생한다
거기에는 조용히 머리를 기대고 있는
창문과, 문득 잠에서 깬 의식이 수록되어 있다
비망록/윤성택
시간을 겹겹 접으니 견고하게 뚫립니다
생생한 과거를 이제 펼칠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에 이르는 속성은
당신에 의한 것이니 내 청춘은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 불안하고 어리숙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모한 기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한때의 결의도 사랑도
헌책에서 뜯겨져나간 속지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의 공기에게 예감은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기억이란
운명을 은유하면서 일생을 떠돌게 마련이니까요
태연한 그 여백을 오늘이라고 적겠습니다
정류장/윤성택
이 눈부신 햇빛의 제목
잎잎은 승차권 같은 바코드를 잎맥에 입혀 환승중이다
실눈이 좁게 우회하는 길 밖으로 꽃들을 부빈다
서로에게 흔들리면서 목걸이처럼 찰랑이는 오후
정류장은 종일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전 빗방울 습기 한 점이 나였던 적이 있다
나는 그곳을 다녀간 내 수많은 성향이다
햇빛은 습기를 공중에 적는다 기억할수록
점점 타인이 많아진다
버스에 올라 정류장 푯말을 바라볼 때
텅 빈 시간의 기압에서 느껴지는 비의 냄새,
어느 길에서는 먹빛 구름이 차창이다
사랑에 대해 점괘를 확신하고 있으면
정류장에서 그날은 비가 내린다
비에게 쓰다/윤성택
버스는 아가미를 열고 우산 몇을 띄워놓네
다음 정차역까지 단숨에 가려는 듯
바퀴마다 지느러미 같은 물길이 돋네
수초처럼 흔들리는 이정표는
번들거리며 흘러가네 밤은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푸르다가 붉다가
점멸하는 자음만으로 도시를 읽네
건너편 창을 훑고 내려오는 자동차 불빛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네
물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막막한 밤이면 그립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쓸쓸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는 것
흐르는 생각 끝에 맨홀이 역류하네
무위기/윤성택
일일달력은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한 여름이었다. 소주 사러 갔다가 난데없이 만난 소나기, 젖은 흙발로 방안까지 따라왔다. 가로수가 있는 교차로에서 벼룩시장을 지나 온 것이다. 라이터가 젖었는지 담배에 불이 붙질 않았다. 부싯돌처럼 번개와 천둥이 유리창에 금을 그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가며 잡히지 않는 희망을 생각했다. 지리멸렬한 잡음 속으로 빗방울이 튀고 있었다. 양철지붕에서 모스부호처럼 타전되는 것은 막바지 手淫 같은 거였다. 내 청춘은 잘못 옮겨 적은 전화번호였다. 처마 밑 파문은 구인란 볼펜의 동그라미로 번지고 또 번졌다. 흥건하게 젖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샤워꼭지 잡고 기도를 했다. 더위는 신앙처럼 깊어 갔다.
경운기를 따라가다/윤성택
모퉁이 돌아 나온 소리,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했었네
결 굵은 앞바퀴가 땅 움켜쥐고 지나간 길, 언제나
멀미처럼 먼지 자욱한 비포장 도로였네
그 짐칸 올라타기도 했던 날들 어쩌면
덜컹덜컹 떨어질까 손에 땀나는 세월이었고
여태 그 진동 끝나지 않았네 막막한 시대가
계속될수록 나를 흔드는 이 울림, 느껴지네
밀짚모자와 걷어올린 종아리, 흙 묻은 고무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길
양손 벌려 손잡이 잡고 몸 수그린 채
항상 삶에 전투적이었던 운전법,
아버지!
그만 돌아오세요 이젠 어두워졌어요
나는 보네
울퉁불퉁한 것은 이제 바닥이 아닌 바퀴이어서
일방통행길 높은 음역으로
더듬거리듯 가고 있을 때
숨죽이며 따라가는
한때 속도가 전부였던 자동차 붉은 꼬리의 생각들,
나는 아직껏 아버지를 추월할 수 없네
기별/윤성택
나무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이 불러주는
사연을 받아 적는 것은
잎새들의 오랜 관습이다
여름 지나 빛 바랜 가을이 오면
엽서 한 장
그대에게 받을 수 있을까
잎새를 우표처럼 떼어내
책갈피에 꽂는 날이면,
걷는 이 길 끝
그대가 서 있을 것만 같아
나무들은 온통
붉은 우체통을 꿈꾸는데
공터공화국/윤성택
빌딩 자리만큼 철조망 두른 공터가 있었다
부도난 바람만 국적 없이 넘나들던 곳
그 공터가 어느 날부터인가 정치를 시작했다
원로의 냉장고가 풀숲으로 단독 영입되자
냉동칸 싱싱한 곰팡이로 담화를 피워냈다
빈 우유 곽은 귀퉁이에 빗물을 귀담아놓았고
다리 없는 의자는 밤늦게 고양이를 초빙했다
사람들은 출근길 철망 앞을 바삐 걸으며
공터를 어떻게 지지할 것인지 떠올렸다
부서진 싱크대, 헌 구두 한 짝, 폐자재들까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랜 지지세력이었다
공터가 담배꽁초를 받아 사태를 파악하는 것도
취한 사내 지퍼 속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철조망 바깥
풀들조차 유세에 동참해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한번쯤 버림 받았던 것들이
공터에 와서야 가장 편한 세상을 깨달았다
사방의 철조망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조그만 발길질에도 쉽게 타협해주었다
주민회의가 있던 밤, 공터에도 회의가 있었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만장일치로 이슬을 맞았다 주민회의 대표는
다음날 ‘외인출입금지’라는 공화국을 인정했다
그 후로 풀들은 조금 더 무성하게 자랐고,
밤마다 국경을 넘어오는 일은 취사선택이었다
찢어진 우산이 국기처럼 펄럭이는 공터공화국,
들끓는 여름정권을 지나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서/윤성택
고속도로 갓길의 바큇자국 볼 때마다
방음벽 앞에서 사라진 자동차의 행방이 궁금하다
차원 이동이라도 했던 것일까
돌아올 시간도 정하지 않은 채
인적 없는 속도의 장벽을
한순간 꿰뚫고 지나간 것만 같다
어쩌면 퉁겨져 나갈 듯
급브레이크 밟았을 때
시간 저편 눈부신 불빛이
서둘러 거둬갔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교통사고 사망지점' 푯말은
나도 언젠가는 이 거점에서
저편 세상으로 관통할 수 있다는
일종의 표시인 셈,
얼마전 집 근처 폐차장 경비가 은밀한 귀엣말로
아직 살아 있는 차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차가 다시 거래되고 싶다는 것을 직감했다
시동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
아직 관통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끊임없이 쿵쾅대는 심장으로
한번도 시동 꺼뜨리지 않고
많은 이정표를 빠르게 지나왔다
그때 위험하게 바큇자국을 새겼던 기억들,
그것들은 어디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단 한 번 죽음을 꿰뚫고
시간의 저편으로 가기 위해
예외없이 탄력을 받는 중인 나는.
갈대/윤성택
강가 갈대밭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강물은 음파처럼 밀려와
촘촘히 조각을 덧붙이고 있었다
뿌리에게 소리를 보내기 위해 갈대는
몸 끝에 마이크를 매달았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놓지 않으려는 듯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나는 강가를 무작정 걸었다
놀란 새들이 음표처럼 날아올라
수평선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들려주는 연주곡은
코끝이 시렸다, 이별은
떠나온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것이라고
노랫말을 붙이고 싶었다 조금 더
은은해지는 강은 시린 저녁놀을
강 끝으로 옮겨놓았다 내 사랑은
물결처럼 부질없이 어디론가 밀려갔다
어느덧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목도 알 수 없고 구절만 떠오르는
쓸쓸한 노래였다 갈대밭 속,
갈대들이 녹음한 소리가
공기방울로 들어차 얼음 밑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눈물이라 믿었다
봄/윤성택
나무는 가지마다
망울 귀를 열고
햇살을 엿듣는 중이다
도처에 소문이 파다하다
대학병원 지하주차장/윤성택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느라
형광등 불빛은 가늘게 떨고 있다
그 경계를 잘라내는 환풍기는
울음이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이 곳을 깨우기 위해 사이렌은
입구에서 검은 침묵을 매만진다
누구나 지상과 멀어지고 싶지 않듯
지하로 지하로 차를 몰고 내려온 이는
잘못 든 길처럼 숙명적이다
그가 홀연 빠져나와 차문을 힘껏 닫을 때
지하층 전체에 일순 울리는 소리,
누군가 들뜬 페인트처럼 후들거리며
벽면에 기댄다 어쩌면 통곡은
지루한 절차일지 모른다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고 우회와 우회를 거듭하며
나선 방향으로 낙하한 하역의 공간,
지하로 내려갈수록 生의 나사가
조여 오는 것일까 그가 못질하듯
구두소리로 걸어나간다 깊은 밤처럼
고요한 지하주차장,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주차선이 문득,
영정 사진에 가 있다 또 누군가
차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사월 초파일, 전봇대/윤성택
한때 나는 건너왔다가 건너가는
이별의 것들만 가슴에 세웠다
그 떨림,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땅 깊은 곳으로 뿌리내렸다
내 둥근 여백의 벽보 숫자들
나로 인해 기억되는 일이 있다면
편지함 같은 변압기로
골목마다 환한 사연을 전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푸른 신호가 들 때까지
청년의 한쪽 어깨를 받아주다가
같이 길을 가고 싶어
웅웅 소리내었던 것인데
왜 청년은 고개 숙여 흐느꼈던 것일까
그때 나도 한번쯤은 별빛을 따라
스스로 빛을 내며 걸어가고 싶었다
그 꿈이 어디로 전송되어진 것일까
밑줄 같은 전선줄에 괄호처럼 새들이 앉았을 때
어제는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등을 매다는 것이었다
그 저녁부터였다, 그때부터 나도,
등불이 되고 연등이 되어
내 안 뜨거운 전류를 타고
온 마을을
걸어갔던 것이었다.
아파트나무/윤성택
인부들이 몰려와 땅을 파고 아파트를 심은 것은
고교입학 때였다 맨 먼저 커다란 파일이 내려가
지하 깊은 곳에 붉은 뿌리를 박았다
모세혈관 같은 철근들이 묶이고
제법 단단한 각질이 덧대어지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음과 분진을 광합성하며
자고나면 조금씩 높아지는 아파트,
그 위를 크레인이 내려다보며 키를 재곤 했다
건물 층층마다 유리가 끼워지자 가끔씩
저녁 해가 모서리에서 붉게 터졌다
어느 날부터는 커다란 광고가 이파리처럼 매달렸다
분양사무실 칠판은 곧 수확할 열매를 위해
씨방의 규모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이웃 학교 녀석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공사 중인 아파트로 도망쳐 숨은 적이 있었다
미로 같은 곳을 겨우 빠져나와 돌아보니
아직 꽃피지 않은 아파트는 외로워 보였다
너무 큰 꽃은 그늘이 깊다고 하는 것 같았다
주먹의 상처가 가려워질 무렵
아파트 외벽에 밝은 색이 입혀졌다
고층 사다리차가 올라가 해바라기 씨 같은 짐들을
들여놓았고, 그날부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펌프질되기 시작했다 그런 밤마다
밝고 노란 열매들이 매달렸다
단지 둘레는 낙과처럼 가로등이 즐비했다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이삿짐트럭을 몰고 꽃피러 떠났다
가을/ 윤성택
예전에는 나무가 가을에
벌겋게 취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가을나무입니다
손바닥을 활짝 펴면
손금으로 사라지는 가지들,
생명선 줄기 따라
알알이 보이는 붉은 피들이
낙엽입니다
무엇이든 취해 돌아보면
가을입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윤성택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있었던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 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술잔의 지문/윤성택
소주잔 속 지문의 소용돌이가 인다
살갗은 타원은하처럼 유리와 밀착되어 있다
그 중심에서 잔은 자전해 오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익히며
조금씩 얼굴이 붉어져갔다
포장마차가 있는 골목은
불시착한 행성의 길,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력 때문인가
문득 어지럽다
가로등은 혜성처럼 꼬리가 길고
숨 밖으로 알코올이 푹푹 증발한다
몇 개 기억이 지워진 채 나는 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며칠 후
택시에 두고 내린 지갑에서
주민등록증만 우편함으로 되돌아왔다
뒷면의 지문을 들여다보았다
수없이 떠났으나
되돌아올 수밖에 없던 고향이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 은하였다
탈수 오 분간/윤성택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헤져 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스트로/윤성택
오렌지 주스에 발대를 꽂네. 소용돌이가 일며 주스가 올라오고 북상한 비구름 한가운데 장대비가 꽂히네. 성급한 맨홀이 벌컥벌컥 빗물을 마실 때 저녁을 들이마신 가로등도 힘껏 붉어지네. 끝이 뾰쪽한 빨대로 유리잔 바닥을 더듬네. 모든 결핍은 밑바닥에서 소리나는 법이라고, 튀어 오른 빗방울 왕관처럼 소리를 거느리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는 지상을 향해 빨대를 꽂는 것이네. 빗줄기 꽂히면 꽂힐수록 지상의 것들이 구름을 삼키는 것이네. 기울인 유리잔 바닥에서 빗소리 자꾸만 들려, 나 사레 들 듯 운 적이 있었네. 누군가 내 안바닥까지 헤집은 것 같은 하루 종일, 빨대를 물 듯 비가 내리네.
담장과 나무의 관계/윤성택
담장 틈에서 나뭇가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주 천천히 금이 자라도 좋았다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담장의 천형이었다 견딘다는 것은
상처를 제 안에 새기는 것이다
담장 곳곳 나무의 실뿌리가 번졌다
그 틈으로 수액처럼 물이 올랐고
바람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나무는 말라가고 있었다
날이 풀리자 담장은 기어이
금 밖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무가 활짝 몸을 열었다
검은 금들이 가지로 뻗어 올랐다
너를 기억하다/윤성택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종료된 과거에
전구하나 켜 놓고
그 밝아오는 영역만큼
시간의 내력을 읽는 것
가느다란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기억이 환해질 때까지
마음을 보내보는 것이다
외출/윤성택
햇볕이 유리창에 착 붙어
온기가 전해지는 아침,
노인은 무릎에 파스를 붙이며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고무줄로 묶인 파스다발이
약상자에서 솔솔 냄새를 낸다
우표 한 장의 힘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월의 내력이 적혀진 몸에
겉봉 같은 외투를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제 몸에
우표를 붙였는지 모른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고
대일파스 후끈후끈하게
붙은 봄날, 환한 골목에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다
밤기차/윤성택
나,
밤기차를 탔었다
검은 산을 하나씩 돌려 세워 보낼 때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별빛은 조금씩
하늘을 나눠가졌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 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이었다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
기차표를 들여다보았다
가는 곳이 낯설어 지고 있었다
주유소/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