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부활 제 4주간 성소주일
요한 10,1-10
+찬미예수님
오늘은 부활 제 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라는 것은 거룩한 부르심,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강론을 시작하며 저의 사제성소를 떠올려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는 제가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셨고
저 역시 그에 동의해 자연스럽게 사제의 길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의 첫 위기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삭막한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의 유일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이전까지 몰랐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제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습니다.
또한 그 시절 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는데, ‘소설가’라는 꿈이었습니다.
평소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저는 각종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게 됐고
그 덕에 소설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과 사소하긴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무언가에 대한 재능.
장래 희망이 바뀌는 것은 이 둘 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채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제가 미처 상상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딜을 하셨는데,
예비 신학교에 나가기만 하면 오천원의 용돈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오천원은 꽤나 큰 돈이었고 저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나가게 된 예비 신학교.
그곳에서 만난 저의 담당 신학생은 문예창작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진학한 분이었습니다.
유난히 문학에 목말라있던 저와 그 신학생은 많은 대화가 통했고 결국 저는 그에게 푹 빠져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갖게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학하게 된 신학교. 평온하게 사제가 될 꿈을 꾸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 길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꿈이 저의 마음을 현혹했고,
나는 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신학교의 공부도 기도도 의미 없게 느껴졌고
사제의 삶은 외롭고 힘들어만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 타인을 돕는 삶은 굳이 사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신학교에서 탈출해야 하나,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제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성소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몰랐던 시간들. 당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저를 끝까지 붙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사제가 되던 날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성소 주일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는 오늘, 저의 성소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사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은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결혼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혼인 성소를 받았고
어떤 이는 독신의 삶으로 천상의 삶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길이며,
전적으로 다른 이를 돕기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학창시절 저의 삶이 그러했듯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하느님의 부르심보다 더욱 더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들 뿐 아니라 미움, 원망, 시기, 질투와 같은 많은 감정의 유혹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저는 종종 이 말씀을 기억하며 제 삶의 의미를 되찾곤 합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피상적이고 덧없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숭고한 목적과 근본적인 선택을 하려는 갈망.
곧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과 아낌없는 투신의 길,
힘들지만 용기가 필요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길에서 여러분은 섬김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택받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성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매우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선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대하시는 자를 당신의 협조자로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성소 주일을 맞이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요청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여러 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지나치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길, 희생의 길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스럽길 바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가 성소를 지키며 나아갈 수 있음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을 행했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이 있다면 그마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이
매번 부족한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음성에
기쁘게 응답하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