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秋夕] 소재의 시 모음 * 우리에게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해라’는 속담이 있다. 늘 추석 때처럼 잘 먹고 잘 입고 놀고만 살았으면 하는 것을 원하는 말이다. 박경리는 소설《토지土地》에서 “추석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들에게도 포식하는 날인가 보다”라고 말한다. 추석은 분명 농본 위주의 우리에게 명절이라기보다는 오곡백과를 수확한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달 모양의 떡을 만들어 월병月餠이라 하고 즐겨 먹었던 풍습만 하더라도 추석의 풍요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중천에 휘황히 밝은 달 속에서 시인들은 시행 속에서 추석을 어떻게 그려놓고 있는 것인가? <추석>을 맞아 살펴보기로 한다. - 카페지기 절 |
<동시>
분갈이
강지인
꽉 막힌 플라스틱 화분 속에서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었니?
이젠 마음 놓고 내 품에 안기렴.
비록 이 빠지고 밑동 깨진
이름뿐인 항아리지만
아직도 난 푸른 숨을 쉬고 있는
우리나라 질항아리란다.
내 몸속엔 그 옛날
시골 새벽을 열던 맑은 이슬이 들어있고
가을 밤 한낮처럼 밝히던
한가위 보름달빛도 출렁인단다.
어서 들어오렴.
꽉 막힌 플라스틱 화분에서 벗어나
내 몸 깊숙이 뿌리를 묻으렴.
잘리고 눌리던 아픔 다 잊고
푸른 숨을 쉴 수 있는 내 품으로
마음 놓고 뿌리를 뻗으렴.
추석날
고 명
구두를 닦는다, 아버지
토방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문지른다
툇마루에 올려놨던 살핏줄 내음
박사 따온 오진 자식 그 애린 볼 부비듯이
'즈이 어미 살았으면 오죽
좋아하랴만' 쓰잘 데 없는 생각
털어 버린다 솔질 한 번 더 한다
"느그들이 온께 사람 사는 집 겉다 잉? 허허"
남의 땅에서 태어난 손주놈 잠자리처럼
마당 휘젓고 다니는 모양, 눈에 꽉 차올라
구두를 닦는다 그저 자식놈 구두만 닦는다
곡식 가마니 져 나르던 휘어진 등허리에
추석날 기우는 햇살 미어지게 실어 나른다
추석 이후
고 은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가을 없이
어찌 내가 있겠습니까
가을날 산과 들 제 모습 드러내고
흐르는 것 졸래졸래
온갖 탐욕 다 내버리고 있습니다
어디에 이만한 종교가 있겠습니까
이만한 사상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감사합니다
훨훨 나는 철새들에게도
다 내 고향인 이 가을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듬모듬 마을마다 붉은 고추 널고
그것을 일러 태양초라 합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곡식 널어
어디 그 길로
함부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미자 익고
풋콩 청국장 띄워
저녁 냉갈 자욱이 끼어오를 때
여기에 아들이고자 딸이고자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꾸 사라져가는 마을
여기에 한사코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여
들밥 인심 항상 넉넉하고
집집마다 싸운 뒤로도
서로 술과 국수 나눠먹는 정
정이 법보다 높은 곳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나라의 가을 없이
어찌 내가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있겠습니까
효자
고영민
추석 전날,
환갑이 지난 맏형이 어머니께 드린다고 선물을 꺼낸다.
난데없는 바바리맨 인형, 잔뜩 옷깃을 세우고
검은 안경을 낀 바바리맨이 식구들 앞에 나타났다.
순간, 야! 하고 형님이 소리치니 으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바바리맨이 앞자락을 열어젖힌 채 심벌을 아래위로 흔들어댄다.
심벌은 거대하고 사실적이라, 며느리들은 민망하여 고개를 돌리고
팔순의 어머니는 눈물까지 닦으시며 웃으신다.
인형은 소리를 치면 반응을 하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바바리맨을 향해 영민아, 하고 소리를 친다.
으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바바리 자락을 열어젖히고
심벌을 어머니 앞에 흔들어댄다.
방 안은 온통 으하하하! 이어 여섯 아들들이 한명씩 차례대로 불려나와
어머니 앞에서 자랑스레 심벌을 흔들어댄다.
어머니는 과수원을 하다 사고로 죽은 넷째 형도 불러세우고
그 죽은 아들 역시 어머니 앞에서 으하하하! 거대한 심벌을 흔들어댄다.
바바리맨은 시골집 안방 텔레비전 위에 깃을 여민 채 오늘도 대기중이다.
고단한 저녁, 어머니는 가끔씩 아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그때마다 바바리맨은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은 알몸으로 으하하하!
가장 크고 자랑스러운 자지를 흔들어드린다.
설움에 대하여
- 어머니 1
고재종
적으나 많으나
한솥밥 먹던 자식들
혹은 제 잘난 생각 따라
혹은 제 양 적어 싸우는 나날이 싫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 한솥밥 삶던 검은 가마솥
시방은 새암가에 나앉아
말간 뜨물이나 받고 빗물이나 받고
밤이면 그 위에 별빛이나 띄우는
그 녹슨 가마솥을 보고
먼산으로 고개 드는 늙은 여인을 보았다
지붕 위에 박꽃이 하얗게 벙근
추석이 가까워지는 지난 밤.
몰라
고증식
왜 다 헐리고 없는지 몰라
고향집 지척에 두고
그렇게 발걸음 한 번 하기 어렵더니
무슨 날만 되면 지병처럼 쿡쿡
꿈속을 달려와 찔러대기도 하더니
맘 먹고 찾아온 추석날 아침
왜 묵은 콩밭으로 변해 버렸는지 몰라
낡아가는 지붕 아래
늙은 홀아비 혼자 산다고도 하고
홀어미 한숨으로
손주놈 하나 붙들고 산다는 풍문만
잡초처럼 무성하더니
어릴 적 놀던 마룻장 떨어지고
왜 기왓장 쪼가리만 뒹구는지 몰라
몰라 정말 몰라
그리운 것들 왜 빨리 무너져 내리고
나는 늘 한 발짝 늦는 것인지
<동시>
한가위
공재동
미루나무 가지 끝에
초승달 하나
걸어 놓고
열사흘
시름시름
밤을 앓던
기다림을
올올이
풀어 내리어
등을 켜는 보름달.
우이도 편지
곽재구
어무니 가을이 왔는디요
뒤란 치자꽃초롱 흔드는 바람 실할텐디요
바다에는 젖새우들 찔룩찔룩 뛰놀기 시작했구면요
낼 모레면 추석인디요
그물코에 수북한 달빛 환장하게 고와서요
헛심 쪼깨 못 쓰고 고만 바다에 빠졌구만요
허리 구부러진 젖새우들 동무 삼아
여섯 물 달빛 속 개구락지헤엄 치는디
오메 이렇게 좋은 세상 있다는 거 첨 알았구만요
어무니 시방도 면소 순사 자전거 앞에 서면
고금쟁이 걸음처럼 가슴이 폴짝 뛰는가요
출장 나온 수협 아재 붙들고
아직도 공판장 벽보판에 내 사진
붙었냐고 해으름까지 우는가요
어무니 추석이 낼 모렌디요
숯막골 다랑치논 산두빛 익어 고울텐디요
호박잎 싼 뜨신 밥 한 그릇 차마 그리운디요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일뿐으로
가막소에 가고 지명수배를 받던 세상
부끄러워 할 날 올 것이구만요
어무니 낼 모레면 추석인디요
반월과 구로동 나간 동생들 다 돌아올텐디요
봉당 흙마루 걸터앉아 송편도 빚고 옛이야기 빚노라면
달빛은 하마 어무니 무릎 위에 수북수북 쌓일텐디요.
한가위
구 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추석달
구재기
작은 꽃으로
한 가슴을 다스리며
하늘의 열매를 맺어왔구나
둥그런 소망 하나 길러 왔구나
솔숲 동산에 올라
솔바람 한줄기를 맞으며
내일을 비는 소년아, 소녀야
기다리며 사는 법을 익혀 왔구나
구름 벗어난 하늘 아래
네들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고
뜨거운 입술의 땅, 그 품에 안기어
아무런 근심 없이 헤이는 이 가을의 정수(精髓)
꽃잎 지는 뜨락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심장으로
내일을 그리는 소년아, 소녀야
소중한 꿈은 땀과 눈물로 지켜야 한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정성된 마음을 모으고 모아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을 열고
숨결 같은 노래 하나 엮어 왔구나
한가위 전날 밤
구재기
토방밑에 달빛 모지락스레 쏟아지기 바쁜데 부엌에서는 그제서야 엿을 고기 시작한다. 시집온지 달포나 될까하는 막내 사촌 형수는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러이 달걀전을 부치는가 하면 제육이며 수육꽂이에 한창이고, 무쇠솥 위 떡시루는 헉헉헉헉 숨차게도 뿌연 김을 뿜어 올린다.
부엌문 앞을 얼씬거리던 누렁이가 괜스리 몸을 추스리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머엉머어엉멍 짖어대다가 그만 부지깽이를 맞고 깨갱거리고, 담장 밑 남새밭가 대추나무의 대추알이 익어 가는지 집안 가득 단내가 풍기면서 박덩이 같이 여물어 가던 열 나흘 날 저녁달이 대추나무에 걸려 움쩍도 못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에선 듯 숨결에선 듯 어머니는 갑작스레 시집간 딸아이의 해산 소식이 궁금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조무래기들이 발가를 벗고 히히히히 한 물통 속에서 몸을 씻어대는 한가위 전날 밤.
애기똥풀꽃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 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한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혼자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조용해, 저기 사람이 왔어
살다보면 삼라만상의 복잡한 일 중
더러운 일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처럼
참으로 어려운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이 노란 애기똥풀꽃이 웃었다
추석
권선희
아고야, 무신 달이 저래 떴노
금마 맨키로 훤하이 쪼매 글네
야야, 지금은 어데 가가 산다 카드노
마눌 자슥 다 내뿔고 갔으이
고향 들바다 볼 낯빤디기나 있겠노 말이다
가가 말이다
본디 인간으로는 참말로 좋았다
막말로 소가지 빈 천사였다 아이가
그라믄 뭐 하겄노
그 노무 다방 가스나 하나 잘못 만나가 신세 조지 삐고
인자 돌아 올 길 마캐 일카삣다 아이가
우찌 사는지럴
대구빠리 눕힐 바닥은 있는지럴
내사 마 달이 저래 둥그스름 떠오르믄
희안하재, 금마가 아슴아슴 하데이
우짜든동 처묵고는 사이 소식 는 기갰재?
글재?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5월의 하늘에 띄우는 노래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시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시던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 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
그렇게 어머니는 영원히 가셨다
먼 곳 이승에다
아들 딸 모두 흩어두고 가셨다
버들고리짝에
하얀 은비녀든 무명주머니도 그냥 두시고
기워서 접어두신 버선도 신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훌훌 가셨다
어머니 가실 때
은하수 강물은 얼지 않았을까
차가워서 어떻게
어머니는 강물을 건너셨을까
어머니 가신 거기엔 눈이 내리지 않는 걸까
찬바람도 씽씽 불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앞산 가득 뒷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어머니 사시는 집은 초가집일까
흙담으로 지은 삼간 짜리 초가집일까
봄이면 추녀 끝에 제비가 집 지을까
봉당엔 삽살이도 앉았을까
둥우리에 암탉이 병아리도 깔까
어머니는 누구랑 살까
이승에 있을 때
먼 나라로 먼저 갔다고
언제고 언제고 눈물지으시던
둘째 아들 목생이 형이랑 같이 살까
아침이면 무슨 밥 잡수실까
거기에는 보리밥에 산나물 잡수실까
거기서도 밥이 모자라
어머니는 아주 조금밖에 못 잡수실까
어머니네 집 앞으로 골목길도 있을까
대추나무 섰는 우물이 있을까
바가지로 만든 새끼끈 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기르실까
물동이도 고만큼 예쁜 것으로 기르실까
왕골껍질로 만든 또아리를 받치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팔이 여위셨을까
물동이 내리실 때 부들부들 떨지 않으실까
디딜방아는 누구랑 찧으실까
목생이 형이 찧고
어머니는 확 앞에 앉아서 쓸어 넣으실까
수수가루 빻아
오늘 저녁엔 수수팥단지 만드실까
이남박에 꼭꼭 떡 담으시고
모락모락 김나는 수수떡 담아놓으시고
저 아래 먼 먼 이승에 두고 온 일준이랑
또분이랑 생각하실까
수수팥단지 잡수시다 목이 메어 우실까
호롱불빛을 비껴나
어머니는 돌아앉아 눈물 닦으실까
참나무 떡갈나무 잎이 피면
꾀꼬리가 자랑자랑 숲속에서 울까
어머니는 꾀꼬리 소리 들으며
산나물 뜯으실까
칫동아리 뜯으시고
바디취 나물 뜯으시고
뚝갈이, 미역취 뜯으시고
거기서도 어머니가 타령을 부르실까
꾀꼬리 우는 소리보다 더 구슬픈
타령을 길게 길게 부르실까
어머니 사시는 거기엔
전쟁이 없을까
무서운 포탄이 없을까
총칼을 든 군대들이 없을까
모든 걸 빼앗기만 하는 임금도 없을까
무서워서 하루도 한 시도
마음 못 놓는 날이 정말 없는 것일까
정말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여름 뙤약볕이 쬐면
고추밭에 고추가 빨갛게 익을까
어머니는 목화밭 김도 매고
서속밭 김도 매며 바쁘실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쉬지 않고 일만 하실까
어머니 얼굴은 거기서도 까맣게 그을렀셨을까
주름살이 깊게 깊게 패이셨을까
어머니는 열무랑 나박배추 가꾸실까
고추 따서 다래끼에 담고
열무랑 나박배추 솎아 담고
어머니는 언덕길로 걸어서 집으로 가실까
고무신 아끼시느라 벗어들고 걸어가실까
다래끼 무거우면 한 번 추슬렀다가
-후유우 하시며 잠깐 섰다가 또 걸으실까
소낙비 내린 다음 날
말똥버섯 돋아나면 따다가 잡수실까
쪽으로 짜개시고 끓는 물에 데쳐
국을 끓여 잡수실까
말똥버섯 국 끓여 놓고 앉아
-일준아…
-또분아…
그렇게 또 생각하실까
밤이면 달도 뜰까
둥글게 훤하게 달도 뜰까
앞마당에 귀리짚으로 엮은 거적을 깔아놓고
어머니는 삼바람 이으시며 밤을 지샐까
누구랑 앉아서 삼 삼으실까
거기 어머니 사시는 나라에도
진갑이네 어머니 같은 착한 이웃이 있을까
감자떡 잡수시며 걱정들을 나누며
함께 앉아 삼 삼으시며 밤을 지샐까
하얀 달빛에 실바람이 일고
초가지붕 위엔 박꽃도 필까
누나 얼굴 같은 하얀 박꽃이 필까
조롱조롱 애기박이 열리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오는 걸까
바가지가 동글동글 굵어지는 가을이 오는 걸까
어머니는 사기요강에 오줌 받아
박넝쿨 구덩이에 부어 넣으실까
바가지 딴딴하게 영글라고
오줌 받아 부으실까
바가지 타서 말리시며
어머니는 시집간 귀분이 생각하실까
친정나들이 오면 제일 이쁜 것 주고 싶어
거기서도 어머니는 딸 생각하실까
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설날이 있을까
어머니는 추석에도 외로우시겠지
어머니는 설날도 외로우시겠지
아직도 아들 딸 이승에 두고 가셔
어머니는 문구멍에 귀 기울이시며
눈물지으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바람머리 앓으실까
이앓이도 하실까
머리에 수건 둘르시고
아픈 것도 애써 참으실까
겨울밤 어머니 방엔 군불 많이 지피실까
솜이불 두꺼운 걸로 덮고 주무실까
방바닥엔 삭자리 깔았을까
짚자리 가즈런히 깔았을까
윗목에 물레 실 자으시다가
어머니는 밤늦게 잠자리 드시는 걸까
어머니 사시는 나라에도
그리움이 있을까
애타함이 있을까
개똥벌레 날아가는 밤
귀뚜라미 우는 밤도 있을까
정지 부뚜막에 생쥐가 찍찍 울며 다닐까
뒷산에 부엉이가 와서 울까
장날이면 장보러 가실까
말린 고추 팔러 가실까
울양대 차좁쌀도 고만큼씩
올망졸망 가지고 가실까
동구 밖까지 삽살이가 따라오면
어머닌 주먹을 들어 을르시고
발로 탕탕 굴르시고
그래도 안되면
-삽살아, 집에 가 있거라
-집 잘 보고 있으면 착하지
삽살이는 알아듣고 못이긴 척
서운하게 돌아서 텁썩텁썩 갈까
장에는 어떤 장수들이 있을까
개구리참외도 팔까
콧등에 하얀 테 두른
알룩고무신도 팔까
타래엿도 팔고 갱엿도 팔까
소금장수도 저린 고등어 장수도 있을까
때깔이 예쁜 주발장수도
항아리랑 단지랑 놓고 파는
옹기장수 할아버지도 있을까
어머니는 뚝배기 하나 사고
소금 조금 사고
개구리참외도 사실까
참외는 몇 개나 사실까
참외 사시면서도
이승에 두고 온
아들 딸 생각 또 하실까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도 내릴까
소낙비 내리면 무지개도 뜰까
청산 위에 색동 빛 예쁜 무지개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도
청산처럼 아름다운 산이 있고
중들강물처럼 맑은 강물이 흐를까
거기 그렇게 예쁜 무지개 뜨면
어머니도 어린애처럼 즐거우실까
소낙비 맞고 옷이 젖어도
어머니는 무지개 쳐다보며 또 쳐다보며
비탈길을 동동걸음 걸어 오실까
개구리참외는
목생이 형이랑 둘이서만 먹을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찔름 들어간
못생긴 참외를 잡수시고
예쁘고 맛난 건 아들 주실까
참외꼭지만 남기고 알뜰히 잡수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하늘 보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달 쳐다 보실까
거기엔 정말 전쟁이 없었으면
빼앗아만 가는 임금도 없었으면
전쟁에 쫓겨가지 않았으면
모두가 자유롭고 사랑이었으면
톳제비나 물레귀신 말고는
무서운 것들이 없었으면
거기에도 봄이면 진달래꽃이 폈으면
창포 꽃이 피고
그네 뛰는 단오날이 있었으면
응숙이네 머슴 장수아저씨랑
군마 할아버지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살았으면
송아지도 있고 망아지도 있었으면
실개울엔 가재도 살고 우렁이도 살고
버들가지 흔들리고 물총새가 날고
흰구름 동동 뜨고 제비가 날고
뻐꾸기가 자꾸자꾸 울었으면
아아, 거기엔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고달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을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보리밥 먹어도 맛이 있고
나물 반찬 먹어도 배가 부르고
어머니는 거기서 많이 쉬셨으면
주름살도 펴지시고
어지러워 쓰러지지 말았으면
손목에 살이 좀 오르시고
허리도 안 아프셨으면
그리고 이담에 함께 만나
함께 만나 오래 오래 살았으면
어머니랑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 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추석 전날 밤
김남극
달은 꽃사과에 내려앉아 그 빛으로 발을 씻겠다
달은 마가목 열매에 대롱대롱 걸려 바람결에 쓰닥이겠다
달은 비닐하우스에 내려앉다 밀커덩 궁둥이가 까지며 미끄러지겠다
달은 달아빠진 떡함지 귀퉁이에 앉았다가 들기름 빛에 흩어지겠다
흩어져 지시랑물 얕은 고랑에서 밤새 이슬과 섞이겠다
늦게 불 꺼진 방안 어둠 속으로 얼굴을 쑥 들이민다
달도 진 어두운 개울을 건너다 자주 물소리에 울음을 버린 어른과
도랑가에서 놀다 앞산을 넘어온 달을 따 도랑물에 헹구어 꼬쟁이에 꿰어 들고 들어온 아이들과
말라가는 줄콩잎 만하게 몸을 웅크리고 마당가에 오줌을 누며 오줌발에 번뜩이는 달빛을 내려다보는 내가
곤히 잠들었다
이끼 낀 마당도 오늘은 넓고 환하다
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추석은
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시조>
새벽까치가 울던 날
김숙선
반가운 손님 올까 앞뜰에 서성이고
온종일 기다림에 대문 밖 쓸고 쓸어
버선발 반기고 싶어 풍선처럼 부풀었네.
할부지 손자들과 뒹굴며 훌쩍 자라
짝지어 찾아오는 천륜의 아름다움
고귀한 한반도의 풍습 이맘때의 풍성함.
오늘도 보고 싶어 까치울음 귀 기울여
행여나 기다림에 나그네 불러보곤
보름 전 만났다 헤어진 한가위의 아쉬움.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돌아간다, 돌아온다
김영림
계절이 돌아온다
사람이 돌아온다
일하러 나갔던 가장이 저녁이면 집으로 들어오고
학교로 일터로 나갔던 아이들 밤이면 어김없이 들어온다
돌아간다,
아버지 고향에 묻히시고
추석에 찾고, 봄이 돌아와 기일에 찾은 무덤가
제비꽃, 조개나물, 구슬봉이 봄맞이꽃
앙증맞게 지상 위로 돌아와 자식보다 먼저 앉아 있다
아버지는 먼저 가신 큰 아버지 곁, 작은 아버지 곁,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계시니
세상 살다 가는 것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겠다
모두 돌아가고 돌아오는 길가에 우리가 있으니
산으로 물로 하늘로 돌아가는 것
오늘 또 어느 산자락에 무슨 꽃은
이 계절을 찾아와 피어 웃고 있을까
돌아가는 길, 돌아오는 길가에
그저 한 송이 꽃과 눈 맞추고 싶은 봄날
한 생각 위로 구름이 소리없이 제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구꾹, 꾸꾹 산에서 들리던 새 소리는 또
어느 숲 휘어진 길을 따라가고 있을까
추석 전야, 어머니
김영재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밤기차가 지나간다
섬진강, 그 가난한 마을 속으로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다
내 설움,
여기쯤에서 그만둘 걸 그랬다
<시조>
추석 무렵
김의현
먼데서 온 사람이 쪽창문 사이로
서늘한 달빛 한 줌 쥐었다가 놓을 때
붉은 숨 가볍게 토하며 떨어지는 나뭇잎
부산 갈매기
김점용
일부러 잊은 건 아닌데
작정하고 잊은 것처럼
이번 추석엔 다음 기일엔 가야지 간다고 말하면서도
가서 다 털어놔야지 다짐하면서도
서울역에서도 울고 인천공항에서도 운다는데
십팔번 그 울음소리 듣지 못하네 들리지 않네
<시조>
추석
김지명
유아는 색동옷에 가자고 졸라댄다
노부모 선물 챙겨 고향길 찾아가네
온 종일 도로 위에서 뒹굴면서 간다네
고속도 벗어났어. 지방도 달려보니
황금들 시골 향기 어릴 적 생각나네
논둑에 참새 떼 쫓던 그 시절이 그립다
아버지 인사하니 손자들 안아주네
어머니 정지에서 새우등 보이면서
송편을 만들었다고 며느리를 챙기네
시어머니 성의 먹고 정지일 마다하며
시부모 기분 맞춰 인사받고 떠날 때
시골서 생산된 오곡 무겁도록 챙긴다.
<동시>
추석
김환영
어미 고양이 어디 가서
북어대가리도 물어 오고
날고기도 물어 오고
부침개도 털레털레 물어 오고,
양지녘 새끼 고양이들
고깃점 하나씩 입에 붙이고
씹었다 뱉었다 쥐잡이 시늉하며
빈집 마당에서 와릉와릉 논다.
추석 지나 저녁때
나태주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날 저물 때까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때는 내가 바라보는
흰 구름은 눈부셨는데
풀잎에 부서지는 바람은
속살이 파랗게
떨리기도 했는데
사람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달 떠 올 때까지.
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찹쌀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슬퍼할 권리
노혜경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삼아
남의 눈들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시조>
가을비
류상덕
가을비를 맞으면서 걸어봐라, 그 속에는
저녁 연기에 실려오는 군용열차의 기적소리가
동촌 역 플랫홈에 서서 헐덕거리는 거 보일 거다.
벌레 먹은 능금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부산으로 팔러가야 추석을 쉰다면서
오르던 엄마 적삼 밑의 맨살 냄새도 맡을 거다.
열세살의 회한(悔恨)은 회갑, 진갑 다 지내고
신천 둑 포장집의 빈잔을 바라보지만
그날의 가을비에 늘 젖어 사는 것이란다.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추석 달을 보며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 달은
백동전 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크레딧
박 강
넣을 수 있으나
뺄 수도 없는 거래소 앞에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은 종일 텐트를 쳤다
창구 직원은 고장 난 지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의 긴 그림자가 저축형 펀드의 원금만큼 사라져간 동안
죽기보다 싫은 건 글쓰기 수업이었어
계산기를 두드리던 창구 뒤의 선배가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한 잔 할까?
실거래가만큼 뻥 튀겨진 보름달이야
선배는 추석 귀향길의 선물이 귀찮아졌고
몇십 년 만에 올 거라는 개기월식이 나는 두려웠다
걱정 마, 달은 절대 붕괴하지 않아
꼭꼭 숨은 달의 둘레는
밤하늘의 거대한 금반지로 변하는 법이지
암스트롱은 달에 투자한 최초의 위대한 인물
치솟는 금값과 달리
우리의 취기는 약보합세로 계속되었다
밤새 폭탄주를 돌리는 사람들의 입에선 버블 버블 버블버블버블
거품 냄새가 났다
거품처럼 늘어나는 학자금 이자를 생각하며
무디스 취업은 한때의 꿈이었다고
일어나니 신불자처럼 자꾸 머리가 아팠다
내게도 달의 크레딧을 슬슬 가려주는 지구처럼 거대한 보증인이 있을까
타인의 신용보다 아이의 점수를 관리하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것은 다행인 계절
골드만 삭스를 골드만 섹스로 발음하며
킬킬대는 아이에게
닥치고 감자칩이나 먹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블루칩은 뭐예요? 얘야 그건
네가 막 먹다 버린 꼬깔콘의 변종적 DNA
돌아오는 가을은 언제나 너의 세 번째 방학이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秋 夕
박남수
고향(故鄕)을 떠나서
바라보는 중추(仲秋)의 달은
그리움의 거울.
이북(以北)에 계신 할머니를 그리며
미주(美州)에 간 아내를 그리며
내가 지금 귀뚜라미처럼
추운 몸을 떨고 있다.
어디를 향해
빈 뜰이 있어 달빛은 푸르지만
이번 추석(秋夕)에는
단란한 가정(家庭)에 모일 사람은
많이 비어 있다.
가까운 친구가 찾아와도
차(茶) 한 잔이 고작이니
집이 있어도 비어 있는 가정(家庭)이
거리의 다방(茶房)보다도 못하구나.
세월이여, 지금은
내 가슴 속에도 낙엽(落葉)이 진다.
한가위의 오늘 밤
박목월
달을 보며 생각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들.
한라산 기슭에도
태백산 골짜기 두메 산골에도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이마
달빛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를 생각할까.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내게로
따뜻한 마음의 손을 내밀까.
그야 모르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모든 어린이들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언제 만날지
어떻게 사귀게 될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는 따뜻한 마음의 손을
서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추석秋夕
박민철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고
아늑한 풀벌레소리 꿈속으로 이어지면
한적한 오솔길 저녁 따라간다
귀뚜라미 모여사는 그리운 초가
책 보따리 동여매고 동구밖 어귀 서성이면
십리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
석양길 때때옷을 입혔다
고대 때부터 내려왔던 달의 신앙은
아버지의 손등을 붙잡고
만월이라는 축제의 자리로 초대되어
팔월의 가부새 바람으로 슬슬거린다
매달리었던 만큼 매달려 왔던 한가위의 포근함
탕숫국 국물이 퇴주 그릇에 빠지지 않도록
조상의 풍요로운 은덕 시접을 가지런히 놓았다
성묘를 끝낸 신곡주의 송편이
뒷 집의 순이를 불렀다
도시인, 고향, 텔레비전
박서진
모두들 그와 똑같았다
그의 생활반경에서 같이 뛰어다녔다
(‘속았던 것이다’라고 나중에 그는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가
이 거대한 구조물 구석구석을 제 집 안방처럼 누볐다
(‘토박이인 척 하다니’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추석 연휴가 되자 그는 혼자 남겨졌다
그들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 속에서 짜증난 얼굴로 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도로를 차가 메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차 색깔이 좀더 다양해야 이쁘겠어. 색동띠처럼’
그러다가 갑자기 결심했다,
귀향을
(‘조금은 부럽기도 했거든’ 머쓱하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고 그 안을 고향으로 꾸몄다
영수야 어쩌고 하던 탤런트의 외침도 걸어놓고
고향의 맛이라고 선전하는 된장, 고추장도 배치했다
기쁨 두 배 축협의 소도 붙잡아 매어놓았다
그는 고향을 만족스럽게 만든 후에 텔레비전을 껐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1995년 문화일보 당선시
추석을 앞두고
― 영등포 쪽방촌 16
박현덕
1
여름부터 고물상은
손님들로 분주하다
몇 푼의 돈을 모아
추석 전 성묘 간다고
발바닥
물집 터지도록
도시를 휘젓는다
2
컴컴한 관에 누워
물고기로 파닥이면
나는 벌써 달밤을
좋아하는 노파가 된다
어판장
경매 소리가
귀 후비고 달아난다
3
주일 아침 쪽방촌
확성기가 우렁차다
풋잠 털고 일어나
비틀비틀 걸어가니
팍팍팍
사진을 찍고
라면 한 박스 안겨 준다
중랑천 달빛
박형준
나 보러 오는 스무살 엄마가 막배에서 내려
섬길 걸을 때
손에 뭐 들었나 기웃거리던 달빛이
오늘은 추석을 하루 앞두고
중랑천 여울물에 기대었습니다
추석에 일 나가면 만원 더 받아
밥집 일 나간 아내 기다리며
중랑천을 걸으면
이곳도 누군가의 고향
총총걸음 걷는 엄마 달빛들이 예쁩니다
물에 뛰어들기 전에
신발 벗듯
무거운 간과 쓸개 다 꺼내어, 연휴 끝나면 돈만 벌어야겠다 결심하고
달빛 끌고 온 마음 아는지
딸이 킁킁 술 냄새를 맡아봅니다
딱 한잔만으로도 가득한 달빛에
벌써 나는 중천에 떠올랐습니다
미아리 묘지墓地
박희진
오늘은 추석이라
일년 단 한번 이 묘지가 꽃밭이 되는 날
죽음을 감추고 부풀어 오른
여인의 유방처럼
술과,
하늘과,
눈물에 취해서
한껏 어지러운
슬픈 사람들.........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서정주
추석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종일 울었네
저 달빛에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장진주사將進酒辭
성찬경
살구꽃 피면 한 잔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옆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 잔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하고 진다고 한 잔하고 삼백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하고 남도(南道)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 들면 한 잔하고 봄 다 간다고 한 잔하고 여름 온다 한 잔하고 초복 다름 한다고 한 잔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하고 개천(開天)은 개벽(開闢)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잔하고 입동(立冬) 소설(小雪)에 첫눈 온다고 한 잔하고 아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詩)를 읽으며 한 잔하고 신명(神明) 대접한다고 한 잔하고 나이 한살 더 먹었다고 한 잔하고 또 한 잔하고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갓집에서나 만나야 쓰겠냐고
선배님께 꾸중 들으며 한 잔하고
아직도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니 웃음 난다고
반 너며 기울어진 절름발이 하현달.
<시조>
가을밤
성 호
어느 날 잃어버린
전설 같은 고향 마을
한가위 웃는 달은
옛정 찾아 더듬는데
반겨 줄 임자가 없어
그림자만 찍겠다.
다정한 나의 형제
전란으로 등진 사연
북녘 땅 어디선가
땅줄은 걸렸는지
반세기 절절한 애화
가을밤이 아리라.
일억 원
송시월
일곱 살짜리 윤서가‘선생님 선물이요’하며
연필로‘1억 원’이라고 쓴 껌종이만한 노오란 종이를 내 손에다 쥐어 준다
어머나 추석선물 고맙다
짐짓‘일’을 지우고‘3’이나‘5’를 넣을까 말까 하다가
윤서야 우리 인출기에다 넣어볼까
일억을 넣자
기업은행 인출기가 삐삐삐…
밀어낸다
북쪽의 위조지페를 밀어내고 달의 망가진 최장과 아린 내 사랑니를 밀어내고 미친 소 떼와 촛불을 밀어내고《시향》제작비 걱정, 내 두통을 밀어낸다
열사흘 달이 눈 크게 뜨고 싱긋 웃으며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달을 먹은 윤서의 배가 볼록하다
무위진인無爲眞人
송준영
나는 늦가을 아침이라 썼다가 지우고 화탕지옥이라 썼다가 이내 지운다 절대현재 참사람이라 썼다가 지우고 하늘이라 썼다가 다시 지운다 임제라고 썼다가 지우고 서옹이라 썼다가 만악을 다시 지운다 무슨 똥막대기라 덧말 써본다
그저 아무렇게나 쓴다 두터운 톳바 내어 말려 놓았다가 올 겨울에 입어야지 갑자기 간 밤 꿈에서 목마르다 배 따 오너라 하던 소리도 같이 쓴다 사실, 올 추석 미운 제자 몇몇이 싫은 선생에게 배를 보내왔다 타고 오라고
모른다 모르겠다 여기 몇 상자 저기 몇 상자 배 따오너라 톳바 말려야지 하다가 누런 판치 다시 끼우듯 파초 주장자 앗아 휘저으시더니 오늘도 화탕지옥 하얗게 하얗게 꽃 피우시네 가을, 우담바라 꽃 한 송이 내 주머니에 꽂으시던 이 가을 햇살!
추석 만월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찍으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어느 하오
신동집
아이들이 갖고 놀다 버린 풍선(風船)이
떴다는 말다
시름없이 방안에 딩굴고 있다.
아이들엔 이미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추석(秋夕)의 뒷날,
아이들은 어딘지 밖으로 나가
메우지 못한 제마다의 꿈을 찾고 있는지
마당귀엔 망가진 잠자리채도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남아 있으면
상념(想念)은 유동(遊動)하는 미립자(微粒子)와도 같이
흔들리는 풍선(風船)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오(下午) 한나절 해 그늘은 여물고
한동안을 잠기는 라디오의 바로크.
뜰에 핀 너댓 그루 장미는
조만간 찬 바람에 시들고 말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를 더 피어서
내 눈을 적시게 해 줄 것을 바랄 뿐이다.
바람 차면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투명(透明)한 玉(옥)빛 정밀(靜謐)이
헐벗은 나에게도 남아 줄 것을.
예지(叡智)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일러 준 스승이여
응시(凝視)마저도 지금은 하나의 잠인가.
<시조>
추석 무렵
신순말
무덥던 여름 지나 기승스레 오른 풀
다들 다녀가는데 왜 여태 아니 오나?
곁, 곁의 이웃집들은 벌써 마당 환하다
언저리 날아들어 여름내 친구가 된
코스모스 저도 안타까운지 목이 길고
달月마저 걸음이 바쁜 음력 팔월 이라한다
조붓조붓 절을 한다, 사각사각 풀을 벤다
아들 손자, 며느리 술 한 잔 부어놓은
봉분封墳엔 막 씻은 듯이 싱그러운 비누냄새
만삭滿朔
신은숙
파란 밤, 이라고 쓴다 달빛을 뜯어 파란 소리가 나는 비파를 만들고 싶었지 작년에 나는 뜨락에서 한가위 달을 보았어 잎사귀 사이로 떠오르는 달, 검은 늑대가 우우 쉰 목을 풀었지 차고 더부룩한 밤들이 묵직하게 가라앉을 때마다 환약처럼 달을 꺼내 삼켰어 목 안에 차츰 잎사귀가 돋기 시작하는 거야 목젖을 뚫고 올라오는 줄기들 그런 날은 더 파래, 파랗게 질리는 밤 질식을 뚫고 달이 튀어나왔어 텅 빈 밤이었지 하늘을 쳐다 보았어 나는 저 달을 다시 채집할 거야 눈 감으면 하얀 산모롱이, 먼저 간 아기의 얼굴이 점점 부풀어 오르지 간절하면 안 돼, 어둠이 길을 먹고 있어 달무리들이 쫓아오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해
연휴
심성옥
빨간 얼굴의 날짜와 요일이
나란히 앉아
자꾸 메시지를 보내온다
나는 공들여 생각한다
두 번씩 세 번씩
시장엘 다녀온다
그제는 해종일 준비한
어적 육적이
어동육서 두동미서를 훈수든다
어제는 노란 빛깔에 핏줄까지 물들어
산의 부모님께 진수(珍羞) 올리고
내일은 제자리에 돌아갈 일
오늘은 다른 일이 일어났다
반갑지 않은 감기가
'사랑하자'고 복병처럼 숨어들었다
나는 추석을 빌려 시를 쓰고 싶다
단 두 행이라도
오늘은 나를 그냥 넘어갔다.
조문弔文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주던
이 동네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 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추석 무렵
안정환
고향 선산 계신
조부님 이발은
시골 당숙이 해 드리고
대전 국립묘지 계신
아버님 이발은
나라에서 해드린다
내 머리는 늘
동네 목욕탕에서
이발사 조씨가 깎아주고
막내녀석 이발료는
고지서로 날아왔다
망월동 묘지관리소에서.
추석
오상순
추석이 임박해 오나이다
어머니!
그윽한 저----
비밀의 나라에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고운 발자국소리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듯 하오이다.
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만월滿月
원무현
작은 추석날
사람들 말에는 모난 구석이 없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둥글둥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둥글둥글 빚은 송편을
둥그런 쟁반에 담는 동안
자식이 아니라 웬수라던 넷째를 기다리던 당숙께서
밭은기침을 담 너머로 던지면
먼 산 능선 위로 보고픈 얼굴처럼 솟은 달이
궁글궁글 굴러 와서는
느릅나무울타리도 탱자나무울타리도 와락와락 껴안아
길이란 길엔 온통 달빛이 출렁
보시는가
가시 돋친 말이 사라진 밤
*이 둥글고 환한 세상
*고재종의 어느 시에서
달의 몰락
유 하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 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쓰게 한다
그러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랭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나를 악착같이 포용해내려는 집 밖에는 보름달이 떠있다
온 우주의 문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유목민인 달의 얼굴에 난 내 운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만
달은 그저 냉행한 매혹만을 보여줄 뿐이다
난 일탈의 고독으로, 달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대부분은 달을 노래하는데 바쳐질 것이다
달이 몰락한다 난 이미, 달이 몰락한 그못에서
둥근 달을 바라본 자이다
달이 몰락한다, 그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내 노래도 달과 더불어 몰락해갈 것이다
추석
유용주
빈집 뒤 대밭 못미처
봐주는 사람 없는 채마밭 가
감나무 몇 그루 찢어지게 열렸다
숨막히게 매달리고 싶었던 여름과
악착같이 꽃피우고 싶었던 지난 봄날들이
대나무 받침대 세울 정도로 열매 맺었다
뺨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으며
괴로워했던 흥보의 마음,
너무 많은 열매는 가지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거적때기 밤이슬 맞으며
틈나는 대로 아내는 꽃을 피우고 싶어했다
소슬한 바람에도 그만 거둬 먹이지 못해
객지로 내보낸 자식들을 생각하면
이까짓 뺨 서너 대쯤이야
밥풀이나 더 붙어 있었으면
중 제 머리 못 깎아
쑥대궁 잡풀 듬성한 무덤 주위로
고추잠자리 한세상 걸머지고 넘나드는데
저기, 자식들 돌아온다
낡은 봉고차 기우뚱기우뚱
비누 참치 선물세트 주렁주렁 들고서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들깻잎을 묶으며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
맞다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 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 묶는, 이 얼마만의 기쁨
봉덕이 할머니의 추석
윤장규
돌아가셨네
봉덕이 할머니, 행여나
상여 메고 나갈 사람 없을까봐
추석 전날 돌아가셨네
충북 충주시 엄정면 가춘리 주동 술햇골 양짓말
상일꾼들 다 나가버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만 사는 동네
장가간 남정네 다 모아도
상여꾼도 안 되는 동네
내일은 추석
동네 떠나 살던 살붙이 피붙이들 환하게 돌아오네
하얀 얼굴도 있고 까만 얼굴도 있네
매끄러운 손과 꺼칠한 손이 서로 잡고 흔드네
온 동네 종일 돌아오고 마중 가는 사람들로 붐비네
살랑살랑 바람결에 어둠이 내려오면
집집마다 젖빛 저녁연기가 올라
온 마을을 감싸 안으며 젖을 물리네
두 번 세 번 덧붙인 창호지마다 불빛이 노랗고
갈비뼈 켜 켜마다 묻어두었던 웃음 새어 나오네
부르르 문풍지가 떨 때마다 가슴은 또 울렁거려
아아, 누가 오는 걸까
기다리는 마음들 발갛게 달아 보름달로 뜨네
동네에 돌아온 사람들 모여
제일 먼저 봉덕이 할머니 조문하러 가네
온 동네 소식통이었던 봉덕이 할머니
온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모으네
내일은 추석
상여꾼은 다 모였네
흥겨운 추석이네
<시조>
추석
이경자
하늘이 닿은 청산
새털구름 피어나고
팔차선 고속도로
주차장 방불해도
고향의 부모님 찾는
그 효심이 애틋구려.
때때옷 차려 입고
선물 든 고사리 손
싸리문 밖 할미 품에
덥석 안긴 천륜인데
참사랑 따사론 정이
집안 가득 채운 웃음.
추석
이병초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를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넣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9인제 배구
이문재
다들 모였구나 깜상 미친년 째보 똥싸개
추석 전날 동창들이 모여 9인제 배구를 한다
잡초가 듬성듬성 손바닥만한 폐교 운동장
교단 옆에는 가마솥 교단 위에는 노래방 기계
교단 앞에서 9인제 배구를 한다
깜상은 포클레인 째보는 덤프 트럭 똥싸개는 부동산
주정뱅이 홀아비 월급쟁이 공무원 절뚝발이 배불뚝이
대머리 안경잽이 쌍둥이 엄마 이혼녀 보험아줌마
그리고 옛날부터 늙어 있던 선생님이 배구공을 따라다닌다
밤무대 뛴다는 무당집 딸이 마이크를 쥐고 있다
텅 빈 산골 속으로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가 울려퍼지고
분교 된 지 10년 만에 폐교
벌써 세상 뜬 친구들이 대여섯
과수원 하던 고슴도치는 도망간 연변 색시 잡겠다고
트럭 운전수가 되었다 한다
누구 아들인가 불알 떨어져 나간 학교 종을 친다
우리는 오래된 폐교 출신
몇 년 만에 모여 9인제 배구를 한다
당귀
이민화
당귀가 끓은 물에 뒤척거린다
우려내는 물은 낙타의 그윽한 눈
아가, 추석에는 꼭 강원도에 오너라, 너 주려고
심은 당귀가 내 팔뚝만 하구나
두 줄의 안부를 묻고는 추석 지나 이레 만에 아버님은
뒷밭의 실한 당귀가 되셨다
우려내면 낼수록 짙어지는 향기,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황소개구리를 내쫓는다
개발지역이 아니라고 빨간 띠 두르고 진종일 외치던
팔순 노인을 위로한다
스르륵 목젖을 넘어가는 당귀차에
아버님 말씀이 졸졸졸 흐른다
국위 선양이 뭐 따로 있나, 이 당귀 먹고
아들딸 잘 키우며 남편 내조 잘하는 것이 국위 선양이지
나는 여태껏 정치권에 서지 못했어도
뿌리의 속성만을 터득하며 살아왔다
마실 때는 고약하게 쓴 것 같아도 마시다 보면
자연히 다루는 법도 알게 되지
아가, 당귀가 바로 세상이여,
부글부글 끓는 말씀 속, 노란 기포들이 폭발한다
사방으로 찢어진 뒷밭이 솟아오르고
비리 섞인 산판이 솟아오르고
내 그렁그렁한 눈물이 솟아오르고
추석
이병초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를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넣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달려라 도둑
이상국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 글세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라고 거드는 피아노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추석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 파브로 네루다, [시]
이성복
오래 시를 쓰지 못했다. 그리고 추석이 왔다. 추석에는 어머니 사시는 고덕동에서 대치동 형님 집까지 올림픽대로를 타고 갔다. 영동대교를 지날 때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가 생각나, 그 노래를 부를까 하다가 아내가 한 소리 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러나 막 영동대교 다리 밑을 지나자마자, 그 노래의 다음 구절인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가 입 속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노래는 흐르고 있었다.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노래는 내가 영동대교 다리 밑을 지나가기를, 지나갈 때는 좀더 유치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어릴 땐 추석이
이수인
나 어릴 땐 추석이
둥근 보름달로 알았지
쟁반같이 둥근달 동구 밖에 떠오르면
동네 꼬마 모두모여 때때옷 곱게 입고
서로 서로 손잡고 달마중 강강수월래 불렀지
나 어릴 땐 추석이
무지개 시루떡인줄 알았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색깔
고운 꿈이 정지에서 솔솔 익어 나왔거든
나 어릴 땐 추석이
송편 이름인줄 알았지
온 가족이 모이면 쟁반 가득 웃고 있는 송편
아빠 송편 너털웃음
엄마 송편 함박웃음
동생 송편 조물조물
아기 송편 옹알옹알
내 송편은 초승달
할머니는 배부르다 웃고만 계셨네
<동시>
강아지풀 1
이승민
봄날 바위 곁으로
작은 강아지 한 마리 다가와
한쪽 다릴 들고 쉬야 한자리에
연초록 풀잎이 볕 맞으며
올라왔습니다
다음날 다음날도
강아지가 쉬야를 하고 꼬리로
풀잎 간질이고 다녀가면
어김없이 풀잎은 조금씩 자라며
자기도 강아지가 될 꿈을
키워갔습니다
여름, 어느 날
풀잎은 드디어 기다란 대 위로
복실, 복실한 강아지 꼬리를
쑥 하고 밀러 올리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추석이 되어
바위로 놀러온 아이들이
쑥쑥 뽑아 강아지 몸에 꽂으며
강아지풀! 강아지풀!
노래를 합니다.
자갈치통신 2
이유경
한가위대목이 휩쓸고 간 시장바닥에
오늘 진창이 시커멓게
퍼질러 앉았고
마른 구름에서 웬? 빗방울이 서넛
후두둑!
길 건너뛰는 나를 치고 사라짐
갯냄새 마구 피어오르는 한낮을 향해
횟집들이 문을 열어놓고
빈 길가서 애타게 호객하고 있음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
주인 잃은 어선들 불평하듯 삐걱대고
낚시꾼 몇
바람 불어오는 바다를 노리고 섰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잡어 새끼 한 마리 구경 못했음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 부산 자갈치 시장입구에 세워진 선전문구
추석
이윤학
바깥마루에 털퍼덕 앉아서는 물가에 선 미루나무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미루나무는 수심을 닮아서 하늘을 자신의 키 높이로 끌어내려 황혼의 취기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올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오지 않았기에 나는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쯤 억새가 피기 시작했을까요.
내 늙은 시절이 떠오릅니다. 내 애인은 나와는 육십 살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나는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거의가 단명했습니다. 나를 업고 각시낭골 돌팔이 의사에게 뛰어가던 어머니. 나는 노루의 등에라도 탄 듯 뜨겁게 안겨오는 피의 온기에 맘껏 젖어 시들었다 피는 꽃이곤 했습니다. 내 몸은 십대 초반이었고 내 마음은 칠십이 조금 넘었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십대 초반이고 내 몸은 칠십이 넘었습니다. 나는 누구를 업고 뛴다는 걸 상상조차 못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가에 선 미루나무는 그만한 쇠꼬챙이로 내 쓰라린 슬픔의 한나절을 후비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단명했고 불에 구워지는 미루나무 쇠꼬챙이 물가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황혼녘, 나는 알싸하게 취해 뒤로 짚은 힘없는 두 팔에 몸을 바치고 저 세상인 듯 물가 미루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동전을 두 손안에 모으고 흔드는 것처럼 경운기가 지나가고 번쩍거리는 차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바퀴로 해괴한 비명을 연주할 것입니다. 돈사(豚舍) 지붕 앞으로 뻗어 나온 밤나무 가지에선 밤송이들이 입안에 세 알 두 알 한 알씩 밤알을 물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런 말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한가위
이재무
밤송이에 살 박히며
굴뚝보다 두어 뼘은 더 솟은
살진 달
장광 뒤
십오 촉 전구알 같은 감들이
얼굴 붉혔다
십 년 전 친정 오라비 따라
먼 소풍 나갔다
저승 풍광에 넋이 팔려서
이승 막차 영 놓치어버린
스무 살 누이
그간 잘 지냈느냐고
빙긋, 코스모스로 피어
웃고 있었다
<시조>
한가위 明月曲
이전안
한가윗날 은방석
파르스레한 너울 쓰고
진주 옷 차려 입고
한가롭게 노는 명월
내가 든 연엽(蓮葉) 주발에도 떠
달도 함께 마시네.
푸른 달 지향없이
낙동강을 건너면서
우리릐 쌓인 시름
등에 업고 떠간 명월
창천에 두렷이 놀다
떠간 것을 나는 봤네.
극채색에 어둠 헐려
아이처럼 노는 밤
풀벌레 어슬어슬
적막 속에 놀라 숨고
취영청 밝아 온 천지
우리 함께 즐기네.
엄니의 화법
이정록
추석 맞아
장발에 파마하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너는 농사도 안 짓는 애가
왜 검불은 이고 댕기냐? 하신다
글도 안 되고
이리저리 마음 시려서 몇 달 만에
머리 깎고 다시 찾았더니,
나라 경제가 어렵다 하드만, 그새
농사채 다 팔아먹었냐? 하신다
넉 달 전 말씀
어찌 기억하고 바깥쪽 댓구를 단다
배냇짓부터 가르쳐준 엄니와 말싸움 해봐야 뭐하냐?
선산 쪽에다 혼잣말 던진다
엄니가 내 땅 훑어갔구먼
머리칼에 불두화 수북한 거 보니께
뽑지도 않은 배추밭에 함박눈 내린다
하느님도 농사채 다 팔아잡쉈나?
그득그득 내려앉는 하늘 검불들
끈
이종암
밤하늘 둥싯 떠오른 한가위 보름달
고향집 뒷산의 아버지 무덤이다
길게 늘어진 텔레비전 속 귀성행렬
자기 뒤를 찾아가는 질기고도 질긴
끈이다 뜨겁고 고마운 저 끈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상 보아
지극 정성 조상 찾아가는 저 긴 끈
보름달 기울어 끝내 모습 안 보여도
달은 달, 아버지의 무덤 지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니다
저기서 걸어왔고 끝내 우리 가야 하는
붉은 끈, 저기에 있다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어머니의 추석
이효녕
돌아가는 세월의 일몰 앞에
금방이라도 웃음 내밀려는 한가위 달
가을의 들은 빈들이 아니라서
아주 완전하게 둥글게 만들어
한가위 날까지 채우는 동안
귀향 열차의 흩날리는 기적소리
송편 빗던 어머니는 손길 멈추고
기다림을 더하신다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깊이 패인 주름진 얼굴로
며칠동안 들판에 나가셔서
동부알 햇볕에 고루 말려
푹 고아 놓으시고
고향 뒷동산 밤나무에서
아람 밤 주워 속을 만들어
솔향 가득한 송편 쪄내시며
자식을 기다리시는 어머니
달디단 사랑의 불씨로
둥그런 보름달을 만드시는가
어쩔 수없이 흘러간
외로운 삶의 변방에서 돌아와
고향의 마루에 걸터앉아
넉넉한 마음으로 보름달 바라보며
어머니 가슴속에 진하게 밀려오는
지난 이야기 도란도란 나누면
사랑은 탐스럽게 익어
애달픈 열매로 맺히고
어머니 손을 살며시 잡으면
가슴에서 익어가는 어머니 사랑
불 담은 넓은 은총으로
징처럼 찌잉 가슴 울리는가
<시조>
쑥꽃
이희숙
지천명 이르도록 무심히 지나쳤던
추석 무렵 길섶에 무리로 피어나는
촘촘히 달린 꽃망울 싸아한 향이 짙다
곁에 있어 몰랐던 미더운 사이처럼
그 가지 똑똑 꺾어 꽂을 줄 몰랐네
화려한 빛깔에 가려 눈에 띄지 않았기에
끝물
임재춘
더덕 꽃은
울타리에 종소리로 매달려있다
백일홍은 씨방을 키우고
기다란 대궁에 늦옥수수 수염이 말라간다
나팔꽃줄기 매달린 전봇대 밑에
소리로 여물어가는 끝물,
해 오르기 전
축축한 참깻단을 베 온 아낙
톨톨한 가을볕을 만나야
뽀얗게 고스란히 빠질 것이다
입 다문 씨로 머문다는 것은
한 생의 제 소리를 마감하는 것,
지상에 매달려있는 울음이다
처마 위에 켜있는
한가위 달은
가장 큰 지구의 가로등,
꺼졌다 켜지는데 일 년이 걸린다
그림자가 내 몸을 끌고
달 속으로 환하게 들어간다
한가위 날에
장덕천
내 마음의
보름달
하늘에 걸자
달은 수직으로 나를 내려본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시조>
가을 햇살 모차르트
전병희
그때는 우리 엄마 젊어서 증말 참말 이뻤을 때
나팔꽃 팍! 폭! 터지던 여름철 다 지나고 추석날 훨씬 훌쩍 지난 햇살 고인 장독대 땟국물 반지르르 씰데없이 실실 웃는 터진 입가 피식식 행복한 송편 조각 귀에지 간질거리는 더러는 짭짜름한 다글다글 볶고 있는 자글자글 지지고 있는 무당벌레 등짝 같은 물방개 헤엄 같은…
그때는 아직 어려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몰랐을 때.
추석
정 양
아들딸들이 아들딸들 데리고 와서
홍동백서 과채탕육 조율이시
뒤죽박죽 차례 모시고 성묘하고
찻길 막힌다며 아들딸 다 몰고
서둘러 떠나버린 추석날 저녁
서둘러 떠났어도 하릴없이
길 막히는 길 막히는 아들딸들이
국도로 지방도로 사잇길로 뿔뿔이
서로 전화 때려가며 길 찾는 동안
고향 길 잃어버린 혼백들에게
한세상 오도가도 못하는 길도 좀 물어보라고
걸핏하면 목이 잠기던 어머니 목소리로
산 너머 구름 감기며 추석달 뜬다
그 때 그 용성가는 막차
정경자
해 막 넘어가는 시골 추석 대목장 안내양이 손님, 장보따리 구별 없이 채곡채곡 채우고 문에 매달려 울룩불룩 구겨지고 칠 벗겨진 버스를 한쪽 손으로 쾅, 쾅 채찍질해도 버스가 영 내키지 않는지 시커먼 연기와 헛발통 헉헉거리다가 자갈돌 퉁퉁 팅기며 시동을 걸었다. 늘 그랬듯 급히 너무 많이 삼켜 늘어 날대로 늘어난 위장이 구불구불 용트림하다가 뒤뚱거리며 좀 달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펑하며 한쪽으로 기울어 연안못* 속으로 뛰어 들었다.
창문 밖으로 서로 밀치고 뛰어 나오는 사람들 고함소리에 만원 버스 안으로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물이, 닥나무껍질 불려 한지 만들 때 쓸려는 양잿물 박스째 녹여 풀어 버렸다. 잿물 먹은 버스 그 속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해 끽끽거리며 토해 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뱀은 제 독을 풀어 먹이를 소화 시킨다는데, 재물 마시고 죽은 그 원혼 달래는 오구굿도 했다는데, 그래서 몇 십년 지난 그 연못, 해마다 죽은 그 얼굴들이 고운 꽃으로 피어나 연밥으로 익었는가……
* 경산 자인에서 용성, 남산 갈래 길 사이 연못
추석 고향집
정군수
고향집 우물가 놋대야에는
그 옛날의 보름달이 뜨고 있으리
흰 고무신 백설 같이 닦아내던 누이
손끝 고운 그리움도 남아 있으리
눈엔 듯 보이는 듯 뒤안길 서성이면
장독대에는 달빛 푸르던 새금파리
어머니의 눈에 비친 안쓰러움도
오늘 밤엔 기다림으로 남아있으리
굴렁쇠 안에 뜨는 둥근 보름달
고샅길 이슬 맞고 달려 오며는
달빛 받아 피어나던 할아버지 수염
박꽃 같은 웃음도 남아있으리
추석 차례 보내기
정대구
추석 땐 산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우리나라 산소들이 술렁거립니다
공동묘지에서 가족묘지에서
물과 물 사이 작은 섬에서
넓은 들녘 끝, 깊은 산 속
외로이 묻힌 외딴 무덤 속에서
오랜 잠에서 흙을 털고 일어나
뼈만 남은 할아버지, 할머니
뼈도 불분명한 증조, 고조, 오대조까지
여기저기서 서둘러 일어나
줄줄이 줄줄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산길 들길 동구밖길
마을 안길을 찾아서
집집마다 가득합니다
실핏줄같이 엉긴 피붙이들
둘째네, 세째네, 네째네
큰손주, 작은손주 새끼들 그러나
올봄에 시집간 막내딸 내외는
아직 보이지 않는군
길이 무척이나 막혔나 봅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땅 속에서, 바다 위에서
우리나라 길들이란 길들은
모두 몸살입니다
비행기 타고, 무궁화호 타고, 고속버스 타고
승용차 타고,봉고차 타고, 배 타고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
산길 들길, 동구밖길, 마을 안길이
차들과 귀신들로 북적댑니다
길 아닌 길까지 북적댑니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추석일기
정진명
해바라기 그리움은 늘 곁에 누워 흐르고
저무는 들녘을 질러 모두들 돌아왔다
꼬부랑 할미같던 초가지붕들이
스레트 용마루로 바뀌었을 뿐
쥐불 놓던 논들밭들은 예스러워
한낮 내내 뛰어놀던 아이들 잠들면
달빛 부서지는 무서리를 밟으며
우리는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쌀막걸리 몰래 팔던 옥경이네 토방
아쉬움에 돌리는 막걸리 대접 사이로
깜장 고무신들이 책보 매고 내달리고
하학길 햇살 잠긴 개울에 너도나도 손을 넣어
돌틈에 숨은 붕어나 가재같은
싱싱한 기억들을 꺼내들고 웃었지만
가난은 어디서나 피어올랐다
달 짖는 멍멍이며 소 방울소리에
밤은 새록새록 깊어가는데
터지는 하품 애써 닫으며
흐려진 추억을 닦다보면
어느 새 다들 어른이 되었는지
가난의 잣대로 잰
한 끼니의 보람을 이야기한다
말썽 꾸러기던 달영이 자식 부르튼 손등에
새로 두 시 괘종 소리가 흘러내리고
사회 생활은 처음이 아니냐는
그 느리디 느린 사투리를 다 들어주지 못한 채
소피나 마려운 듯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한풀 가득 냉기 머금은 섬돌에 서서
괜한 코를 풀고 쳐다본 하늘
한 아름 별빛만이 무더기져 내렸다
추석달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추석엔
조용순
갈바람 살랑이며 가슴으로 불어와
황금 물결 일렁이는 곳으로 불러가면
그곳엔 잊지 못할 유년의 그림들이
물결치며 오라 하네
그리움 목에 차서 불러보는 이름들이
동구 밖으로 마중 나오고
고향 지기들과 혈육의 정이
갈꽃 한 다발 목에 걸어주면
한가위 달빛은 함빡 웃음으로 포옹해주었지
흐르고 또 흐른 많은 세월이
변하고 또 변하게 한 얘기들도 많지만
내 안에 고운 정으로 남아 있는
추석의 그림은 바래지 않고
오늘도 아름답게 남아 있어
그리운 이들과 맑은 달빛 아래
손에 손잡고 둥근 정이 돌고 돌며
풍요로운 춤을 추네
과수원집
조정인
붉은 사과 씨방 쪽으로 칼끝을 숙여 천천히 칼날을 앉힌다 과육 깊숙이 묻힌 칼날 같은 당신에 관한 날 선 기억이 물기 많은 과육에 얼굴을 묻는다 씨앗의 검정 방문 앞에 잠시 두근거린다 (저며진 사과의 배열마저 당신이 구심이라니!)
사과꽃 필 무렵 사과에 사무쳐오는 칼날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찾아 왔었다
바람 세찬 날 나무가 혼절할 것처럼 꽃을 비웠다 깜박깜박 잔별들이 져 내렸다
꽃 진 자리에 연둣빛 풋사과가 돋아났다 그리고 붉은 낙과의 하혈을 견뎠다 나무는 만선이었다
어두운 조수가 방문턱을 넘곤 했다 오른 손이 왼 손을 더듬으며 괜찮니? 물어왔다 괜찮아… 슬픔은 슬픔으로만 어루만져졌다 하늘 복판에 온몸이 우물인 둥근 窓이 떠올랐다 모차르트가 출렁이는 창 하나 생긴 후 창문을 천 번도 넘게 여닫는 사이 시절이 저물었다
한가위 전야, 그믐으로 이울어가는 나무의 늑골로 펄펄 달빛이 지고 있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당신의 어깨 위로 달빛 흩뿌리던 그 날처럼
추석 무렵
조창환
그 뱀, 죽어 좋은 곳으로 갔을까?
오십 년 전 영등포, 영남초등학교 앞 골목
삼십 년 된 적산가옥 묻은 집 팔린 날
누렇고 검은 큰 뱀 한 마리 대문 옆 창고 안에
또아리 틀고 앉았었다. 뱀은 너무 점잖아서
떡 한 시루 갖다 놓아도 아주 조금밖에 떼어 먹지 않았다
― 업구렁이 잘 모셔야 한다
어머니는 두 손바닥 뜨거워지게 빌었지만
두렵고 섬뜩하고 징그럽던 저녁 무렵
아랫방에 세 살던 창수네, 동네사람들 이끌고 와서
―저거 나가면 이 집 망할 걸
업구렁이 구경하며 수군거렸다
대동아 전쟁 때도, 팔일오 해방 때도, 육이오 사변 때도
삼십 년 넘은 적산가옥 지키던 구렁이가
계약서에 도장 찍은 초가을 늦은 밤
식구들 모여 앉아 이 집 버리고 멀리 떠나기로
작정하고 손가락에 침 묻혀 계약금 세던 걸
어찌 알았을까, 의젓하고 늠름하고 점잖던
그 뱀! 집지킴이 늙은 구렁이
다음날 우리 식구 외출하자 동네 땅군 찾아와
섬돌 밑의 암컷까지 잡아 자루에 담아 갔는데
왜 추석 무렵 그 뱀 그리워질까?
뱀은 다만 한 세상 잘 살고 떠나갔을 뿐인데
어둠 속에서 집 지키며 주인과 함께 숨 쉬던
그 뱀! 배신한 주인식구들 미워 자살했을까?
참았던 시간 너무 지루해
비 내린 뒤끝의 무지개나 구경하고
죽어주기로 작정했을까?
그 뱀 삶아 먹은 폐병쟁이는 몇 해나 더 살다
저 세상에서 구렁이 혼령 만났을까?
구렁이 혼령과 폐병쟁이 혼령이
멋쩍게 웃으며 악수하는 추석 무렵
닝닝한 적막이 달빛을 가리운다
함양 군내버스
조향미
함양 백전 녹색대학 가는 버스는 오십분 간격이다
버스가 떠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일찍 차에 오르니 할머니만 다섯 먼저 타고 계시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노친네들은 서로 거리낌 없다
할매는 올해 나이가 몇이오
나는 아직 얼마 안 돼요 칠십서이
아직 젊구마 한참 농사 짓것네
그래도 오만데가 아푸고 쑤시오 할매는 얼마요
나는 칠십아홉 저 할매하고 동갑이오
칠십 셋은 아직 괜찮소 여섯 넘기면 영 힘에 부치요
손수레와 도리깨를 옆에 둔 할머니가 칠십, 제일 젊다
중년 아낙들이 상자 보따리를 들고 새로 탔다
저기 뭣이꼬 삼이까
삼은 아닌 거 같은데 더 무거버 뵈는데
젊은 할머니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새댁이 그기 멋이요
친정 엄마가 싸주는 거라요
아이고, 추석도 하마 지냈는데 친정어마씨가 꼭꼭 챙기놨구마
자식들한테 저래 싸주마 맘이 시원하제
하모요, 오목조목 싸주면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좋고
싸갖고 가먼 어매가 주는 거니께 묵으면서 좋고 안 그러요
할매는 콩도리깨를 샀구마 올해는 콩이 질어서 타작 좀 하겄네
콩이 잘 되야제 팥 없이는 살아도 콩 없이는 못 사니께
할머니는 도리깨로 마당 가득 콩타작을 하여
둥글둥글 메주 띄워 간장 된장 청국장 단지 단지 담아
전국 각지 오남매에게 또 오목조목 싸 부칠 것이다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시원하제
한가위 날이 온다
천상병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하시겠지요.
한가위
최광림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치마폭에서 달이 뜨는 날입니다
아스라한 황톳길을 돌아
대 바람에 실려온 길 잃은 별들도
툇마루에 부서지는 그런 날입니다
밀랍처럼 곱기만 한 햇살과
저렇듯 해산달이 부푼 것도
당신이 살점 떼어 내건 등불인 까닭입니다
새벽이슬 따 담은
정안수 한 사발로도
차례 상은 그저 경건한 풍요로움입니다
돌탑을 쌓듯
깊게 패인 이랑마다
일흔 해 서리꽃 피워내신 신앙 같은 어머니,
다만 살아온 날 만큼
당신의 고운 치마폭에
두 무릎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비친 웃음 한 소절
입김으로 펄펄 날리며
모두가 오래도록 그랬음 정말 좋겠습니다.
파 할머니와 성경책
최동호
추석 대목 지나 발걸음
한산한
돈암동 시장 골목길
느른한 정적이 감도는 하오,
검은 가죽 표지
성경책 바로 옆에 펼쳐 놓고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대문짝 활자가
돋보기안경에 넘칠 만큼 가득해,
앙상한 팔다리 웅크린
할머니, 하늘의 품에
안겨, 기도하다 잠든 아기처럼 포근하다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최영미
시골집 툇마루 요강에 걸터앉아 추석 앞두고 부푼
달을 쳐다보며 생각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지금 내 모습이 닮지 않았나?
또 생각해본다 시를 써서
밥을 먹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도 연애를 하면,
시를 빙자해 괜찮은 남자 하나 추수할 수 있다면
파렴치 하게 저 달, 저 달처럼 부풀 수 있다면.
항상 너무 넘치거나 모자랐지,
놋쇠바닥에 물줄기 듣는 소리가 똑 똑 시처럼 들리고
어둑어둑한 게 아쉽게도 깊은 밤.
사실은 그게 더 아쉬운데도 일부러 힘을 줘 짜내지 않고
다만 로댕처럼 무릎에 팔을 괴고 생각해본다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시가 미쳐 사랑이 될 때까지.
여기는 포로 수용소
최영자
람보 영화를 본다 적이 빌딩 속에 있다 그 적을 잡기 위해 빌딩 속으로 잠입한다 무기 주렁주렁 달고 내 속에도 적이 있다 건망증, 독촉하는 전세금,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늘 긴장을 해도 나,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혼하자고 합의한 날이 하필이면 추석 전날이다 사랑도 없이 스무해 남짓 살다보니 의식에 기력이 없다 청소를 하다가도 멍하니 서 있곤 한다 결국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나, 무릎 꿇고 말았다
여기는 포로 수용소 독방, 생각의 적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오시려는지,
한영옥
몽글한 아지랑이 다 풀리는
4월이 한참 지나도록
깜깜하던 대추나무에도
겨우 들썩하던 밤나무에도
한가위 둥그러지는 날엔
어느덧, 토실토실
여태껏 어룽대지 않는
설산(雪山)너머 차가운 사람도
대추알로 오려는지
밤톨로 오려는지
토실토실, 몰록 오시려는지.
유리 추석
한우진
이맘때는 물푸레나무도 정신 번쩍 든다
초사楚辭를 읽는 물소리가 차다
간당간당 고혈압단풍 서리채비라도 해야 쓰겄다
돌이 야위는 개울, 물고기는 살찐다
벌레 지글대면 지상의 병은 두드러기처럼 돋는다
나 구름만 오래 쳐다봤으므로 생의 온도는 내려갔다
더 늦기 전에 저기 윤유리나무에게 종신보험이나 들어야겄다
마음 뜯어지면 꿰매주는 물소리보험이라도 들어야겄다
추석 무렵
함순례
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려댄다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대추나무 이파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 내비추지도 못한 채
꾸중 듣고 서 있는 아이처럼
엉거주춤 차렷 자세
빗물은 홈통을 타고 세차게 흘러내린다
연일 비 소식,
비도 어딘가 바삐 달려가는 것만 같다
비의 고향에도 양철지붕과 돌담이 많을까
아니 회색 기와가 고즈넉한 그런 마을인가
발걸음 타다닥 세우고 달려가는
비의 행방을 쫓아가면 처마 끝 빗소리 들으며
라디오 끼고 깔깔거렸던 풍경에 닿을 수 있을까
폭우에 잠긴 벼 포기와 씨름하던
아버지의 불콰한 얼굴과 만날 수 있을까
어스름 저녁인 듯 적막이 내려앉는
이른 아침
어지러운 머릿속을 달려가는
말이 있다 그립다, 그립다
까치와 과수원
- 母心 ―
현상언
하늘을 치어다보니 가을이 높아졌어요
새 천년 들어 까치가 부쩍 늘어 났네요
환경이 보호됐다는 건 참 고무적인 일이지만요
주렁주렁 노란 배마다 까치가 구멍을 뚫었어요
올해도 작년보다 부채는 더 끈적이겠죠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에 눈물 넘치네요
기울어진 가계를 세우려고 공기총 영치 시킨 채
도시로 공장으로 고향 떠난 자식들,
올 추석 연락도 아니 오네요 …… 잘 있겠거니 …… 그렇지요
추석 날 아침에
황금찬
고향의 인정이
밤나무의 추억처럼
익어갑니다
어머님은
송편을 빚고
가을을 그릇에 담아
이웃과 동네에
꽃잎으로 돌리셨지
대추보다 붉은
감나무잎이
어머니의
추억처럼
허공에
지고 있다
○●○●○●○●○●○
*2012.09.29(토) 작성, 2013.09.11(수)보충 작성
이수인 작곡 / 김재호 작시
Ten 엄정행
*[고향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