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40주년 40년사 게재 원고
지난 나의 한림 시절!
경주중학교 교감 강대춘
1983년 초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리 취업해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 두고 경주 월성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별 생각 없이 근무하던 중 어느 날 야간 숙직 때에, 같은 교내에 있던 경주상업고등학교 교실 몇 칸이 야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는 한번 둘러보았다. 야간에 학생 같지 않은 청소년들이 허름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알아보니 한림야간학교 수업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한림야간학교 창설에 관여한 분이 내가 경주고교 시절에 잠깐 뵈었던 셔볼 독서회를 지도하시던 김윤근 선생님이고 당시 교장선생님이 우리 경주고교 출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이종룡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대학시절에 도서벽촌에서 교사를 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꿈을 한때 가졌었는데 그와 결부된 감상이었는지 한림학교에 교무를 맡고 있는 분에게 나도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종룡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현재 영어교과에 교사가 모자라니 해 줄 수 있냐고 말씀하셨다. 엄청난 스승님한테서 연락이 왔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꾸준히 하는 성격이라 그때부터 꼭 20년을 한림교사로 지냈다. 2003년 우리 집 막내가 불치병에 걸려 늘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어 한림을 휴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한림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밖에서 한림 얘기를 하는 적이 별로 없다. 한림에 근무할 때도 그랬다. 봉사한다는 것은 남에게 말하기가 참 곤란하다. 잘못 얘기를 꺼내면 제 자랑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봉사를 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은 이미 봉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無住相布施를 알고 있다. ‘어떤 상에 머무르지 말고 베풀어라’ 하는 말이다. 내가 베풀고 나서 남에게 베풀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베푼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고 중요한 것은 나는 한림 교사로 활동하는 것을 봉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어느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초창기 한림학교 시절은 낭만이 넘쳤다. 교사들끼리의 만남이 빈번했는데 야학하는 분들이 늘 그런 것처럼 우리도 술 생각이 나면 슈퍼 앞에 펼쳐진 간이용 파라솔 밑이나 마루에 걸터앉아 새우깡으로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한림교사라면 가질 법한 다소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생각들과 세상살이 이야기들을 해 댔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겠지만 야학한다는 자부심도 다들 조금씩은 가지고 있었고 나름 관계 맺고 있던 제자들에 대한 애정과 에피소드들은 늘 즐기던 화제거리였다.
한림야간학교도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학사일정을 가지고 있던 작은 규모의 학교였는데 계절에 따른 소풍도 있고 시험도 있고 일반학교 입시와 같은 검정고시라는 큰 규모의 입시도 있었다. 당시 학력을 인정받으려면 통과해야 했던 검정고시는, 다시 말하면 그 시험 합격이 졸업장과 같은 것이었는데, 한림학교로서는 년중 큰 행사였다. 주로 대구에서 시험을 치루었는데 교통사정이 좋지 못했던 당시에는 그 전날 버스를 빌려 시험장으로 갔다. 여관을 잡아 학교들 숙박시켜 방마다 모기장 쳐 주고 밤에 공부하게 하고 교사들은 밤새 여관 마당에서 술을 마시면서 학교들 시험 공부하는 것을 순시하며 훈수를 두곤 했다.
평소 엄격하시고 한 치 빈틈이 없으셨던 이종룡 교장선생님은 한번씩 “한잔하자!”를 외치시면서 교사들과 함께 주점에 자리를 잡으시면, 자세 한 치 흔들림 없이 밤새도록 술잔을 드시면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들,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얘기들을 교사들과 주고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옆에서 보고 들으며 배운 것도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뿐인들 그러지 않았으랴? 그 바쁜 중에 야학에 나온다는 것은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간 때우는 나같은 사람 빼고는 모두 나름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이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부끄러운 점도 많다.
초창기에 한동안 학교 재정에 어려움을 겪던 한림학교는 경주상고 김성하 교장의 배려로 경주상고에 교실 몇 개를 무료로 빌림으로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 뒤 수년 뒤에 오랫동안 경주상고에 신세를 지던 한림학교는 당시 경주청년회의소 이 달 회장의 열렬한 배려로 경주청년회의소 지하 전체를 제공 받아 본격적인 학교 시설을 갖추게 된다. 어려웠던 재정도 지방의 몇몇 유지들의 성금으로 많이 회복되었으며 소문이 나자 너도 나도 각지에서 성금이 왔고 드디어 경주시청에서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한림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육의 질은 높아졌고 초창기 열혈남아들이었던 대학생들도 차츰 현직교사들로 바뀌며 변모해 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성금을 내는 것도 이종룡 선생님의 제자들이 주류였고, 교사들도 이종룡 선생님의 제자들과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주였던 것 같다.
한림학교는 그 이후 거의 모든 학생들이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꿈에도 그리던 졸업장을 따 내는 기쁨을 학생들에게 선사했으며 그 모든 것이 쾌거였다. 당시 한림학교는 중학교 1,2년, 고등학교 1,2년 모두 4개 반으로 이루어졌고 그 전의 한림학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많이 변했다. 불우청소년들이 교육의 주 대상이었던 한림에는 이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더 많이 차지하는 상황으로 달라졌다.
지금이야 한림에 가 보면 옛날에 공부와 인연을 맺지 못했던 나이 드신 분들이 태반을 이루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공부할 때를 놓친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다니다가 폭력사고로 교도소에 갔다 나온 아이, 부모에게 버려져 학업을 그만 두어야 했던 아이, 너무나 가난해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을 나가던 아이, 한 순간의 방황으로 학교를 떠났던 아이들이 한림학교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한참 뒤에 세월이 지나 그런 불우한 청소년들이 한림에서 사라지고 제법 형편이 괜찮은 성인들이 나올 때에 나는, “내가 한림학교를 떠날 때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나는 한림학교 활동을 교육활동보다는 불우청소년들의 복지활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우여곡절이 많은데 나도 한림 20년을 근무하면서 생활에 부침이 심했다. 그래서 어려울 때는 자연히 한림활동도 위축되었고 잘 풀릴 때는 한림할동도 열심히 했다. 내가 한림 근무를 시작했을 때 있던 교사들은 타지로 이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내가 근무하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사들은 한림에 많이들 참여했었고 지금도 많이 근무하고 계신다. 경주고 교사들은 허교구 선생님과 내가 빠질 때 대거 빠졌지만 대신 경주중 교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한림 제자들은 지금도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적이 있다. 보면 반가워하는 제자도 있고 자기를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냥 지나치는 제자도 있다. 또 시집간 제자 중에는 한림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제자도 있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게를 하면서 늘 인사하는 제자도 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형편대로 그대로 배려하면서 그들과 같은 지역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한 번씩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분들이 길거리에서 인사를 하는데 누구냐고 물으면 한림에서 배웠다는 분들이 계신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럴 때가 한림에서의 나의 존재가 느껴지는 때이다.
한림이라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다. 풍류객이었던 손병희 선생님, 박재동, 허교구, 서정태, 안영두, 손광락, 손채익, 이석상, 이연성, 곽동도, 오세철, 장문환, 한광현, 백학선 선생님 또 조관제, 김두만, 구자록, 양신태, 조성래 씨 등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수많은 분들이 계신다. 나는 지역사회에서 그 분들을 더러더러 만날 때가 있지만 한림가족들은 아마 내 생각보다는 훨씬 더 큰 네트워킹을 조성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한림 교사로 근무한지 20년을 넘겼을 때 즈음 내가 한림 근무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할 때, 내 가정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발생했다. 늦게 본 막내 아들이 4살 때에 불치병인 자폐아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자폐라는 지적장애는 조금이라도 발달시키려면 24시간 붙어다니며 교육을 시켜야 되는 결함이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아들 교육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조기교육은 물론 장애인복지운동에도 뛰어 들었고 공부도 많이 했다. 그때 내가 하던 일들을 그만 둔 것들이 많았는데 음악활동, 산악활동, 모든 모임, 한림학교 등 모두를 일단 중지했다. 한림학교는 당시 이기락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휴직하겠다고 하고 한림을 떠났다. 휴직하겠다는 것은 언젠가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세월이 지나 모든 것이 조용해 졌다. 집안도 형편이 다시 회복되었고 막내아들도 반 포기지만 나름 같이 지내는 데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언제 한번 한림학교 복직을 생각해 봤지만 나의 열정으로 보아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어쩌면 더 열정적인 젊은이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도 그렇지만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한림학교에서 휴직 중이며 여전히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다.
첫댓글 선배님 글을 보면서 지금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우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늦었지만 편입하여 현재 환경보건학과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선배님 글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늘 건강하세요.
찡해집니다. 제가 좋은 선배님, 좋은 은사님을 두었다는 기쁨이 울립니다. ^^
그랬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열정, 그래요.
그럴 날도 머잖아 보이십니다. 언제나 파이팅하세요.^.^